1991년 프랑스의 레오 까락스 감독이 5년간의 사투 끝에 만들어 낸 "뽕네프의 연인들" 이란 영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어디서 왔는지 조차 알 수 없는 20살의 떠돌이 곡예사인 알렉스와 대령의 딸로 6개월전 쥴리앙을 찾아 가출한 눈이 멀어가고 있는 24살의 미쉘 스타인이 프랑스 퐁네프 다리에서의 우연한 만남과 과 헤어짐 그리고 또 다시 만남으로 이어진다.
이 세가지의 사건으로 촉발된 두 사람 사이의 결렬한 감정이 이 영화에서의 창조적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 내며 또한 그 세계안에서 빛어진 사건들이 이 영화의 윤곽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일반적인 미국의 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에서 처럼 관객과 주인공이 쉽게 동일화가 이루워 질 수 없음은 감정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서로가 흡수 하지 못하기 때문이거나 어렵기 때문일 것이라 본다.
단지 우리가 기억할수 있는 것은 주인공 알렉스의 불춤 장면과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 폭죽이 날아와 터지는 퐁네프 위에서 알렉스와 미쉘이 춤을 추는 장면들이 아름다운 영상으로 길이 기억될 것이다.
또한 성을 향락할 수 있는 서유럽 사회에서 사랑에 대한 갈증을 그리는 카락스는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자폐적인 사랑의 격렬함을 보여 주고 있다.
정상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들만이 사랑할 수 있을거라고 굳게 믿고 있는 우리사회에서 인간 쓰레기와 같이 보이는 그들의 사랑을 이해하기는 너무도 어려을 것이라고 본다.
프랑스의 영화가 그렇듯이 왠만한 인내가 없이는 감상하기가 어렵기도 하지만 특히 이 "뽕네프의 연인들" 역시 난해한 영화이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감상을 해야 되리라고 본다.
참고로 노틀담사원이 있는 시테섬을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하는데, 그다리중 하나가 뽕네프 다리이다.
[영화줄거리]
어둠 속에서 곡예하며 고독하게 입으로 불길을 뿜어대는 알렉스에게서 미쉘은,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한 영혼이 우리에 갇힌 짐승과 같이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몸부림을 보는가? 춤추는 장면에서 신경질이고 자폐적인 분위기를 느끼지는 않았는지 등등 이영화속에 두렵게 펼쳐지는 화려한 영상들은 스스로 갇혀서 상처받고 아파하는 영혼의 파편들로 느껴져 보기에 고통스럽기 까지 하다.
알렉스의 손길을 벗어나 홀로 무대 위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는 미쉘과 끊임없이 미쉘을 뒤쫓아 끝내 함께 춤을 추는 알렉스 그리고 춤을 추다 지쳐서 쓰러진 알렉스와 미쉘이 내는 날카로워 차라리 귀를 찢는 소음과도 같은 웃음소리등등 알렉스와 미쉘에게 한 세계가 닫히고 또 다른 한 세계가 열리는 과정은 목가적이지가 않고 이처럼 거칠기 짝이 없다.
바로 이날, 미쉘은 지하철에서 첼로 소리를 듣고, 첫사랑 쥴리앙을 찾아내어, 눈이 완전히 멀기 전에 그를 화폭에 옮기겠다는 간절한 바람은 이루지 못하고, 그를 살해하게 된 다.
미쉘의 세계는 붕괴된다. 밀폐된 공간 퐁네프에서 알렉스는 미쉘을 만나, 난생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낀다.
미쉘을 사랑하게 되자 알렉스에게 자폐성의 질곡에서 벗어날 단초가 마련된다. 바로는 무언극으로 알렉스는 불춤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미쉘의 첫사랑 쥴리앙의 존재를 알아낸 알렉스의 집념. 그는, 밀림과 같은 지하철에서, 미쉘이 쥴리앙을 만나지 못하도록 집요하게 방해를 했으나 허사였다.
미쉘을 잃었다고 자포자기한 알렉스 앞에 첫사랑의 남자를 죽이고 돌아온 미쉘.,,, 이 영화에서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장면들의 배경에는 알렉스와 미쉘의 이 처절한 심경이 숨어 있는 것이다.
크리스마스 이브, 눈 내리는 퐁네프에서 알렉스와 미쉘의 해후. 그리고 그 뒤에 벌어지는 사건은 3년 전 대혁명 기념일및 그 뒤에 빚어진 사건들을 변주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동일 주제에 대한 이중 구조가 이 영화를 떠받치고 있다. 시력을 회복한 미쉘은 흰빛 반코트를 입고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나타난다.
교통사고를 당해,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린 채, 이마에 피를 흘리며 길바닥에 너부러진 빡빡 머리의 알렉스를, 그리고 불춤을 추는 알렉스를 그렸던 미쉘은 눈 내리는 퐁네프에서 또다시 알렉스를 그린다.
그리고 그들은 축배를 한다. 3년만에 한번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한다는 남자가 오늘이 바로 그날이라고 즐거워하자 그런 그남자를 보며 아이처럼 해맑은 미쉘이 까르르 웃는다. 그런 그들의 농담 속에서 미쉘의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갈망뿐만 아니라 이들이 바로 3년만에 만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물구나무서기를 하며 농담을 듣는 알렉스의 모습에 3년전 미쉘을 기쁘게 하려고 지하철 안에서 곡예를 하던 알렉스의 모습이 겹쳐지고, 이때 들리는 성당의 종소리는 그 당시 라디오 소리처럼 둘만의 닫힌 공간밖에 또 다른 공간이 있으며, 그곳에 알렉스는 갈 수 없고 미쉘만이 갈 수 있다는 것을 절망적으로 시사한다.
돌아가려는 미쉘을 끌어안고 난간에서 쎈느강으로 떨어지는 알렉스. 이에 미쉘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알렉스의 동물적 본능,,,
모래를 실어 나르는 배에 이들은 구조를 받는다. 그 배에 오르자마자 눈에 띄는 선장 부부의 초상화,,, 한스와 루브르 박물관에서 렘브란트 자화상을 보면서 한스의 삶과 앞으로 자신에게 닥쳐 올 삶을 이해하였던 미쉘이였기에 선장 부부의 초상화는 영원한 사랑의 전설의 표상처럼 보였던 것은 아닌지,,,
아틀란티스로 가는 이 배의 고물에 기댄 미쉘,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알렉스 이들의 앞날을 축복하듯이 즐겁고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이 영화는 끝난다. (펌)
화가였으나 점점 시력을 잃어가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걸인처럼 거리에서 살아가는 미쉘과 곡예사 알렉스가 파리 세느강의 9번째 다리인 퐁네프다리에서 만난다. 마음 속의 상처와 가난으로 더러운 모습을 한 이들은 하루하루 치열한 삶을 살아간다. 다리와 거리에서 함께 지내던 알렉스는 미쉘에게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미쉘은 화가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실명 직전에 사랑했던 줄리앙에 대한 기억만을 가지고 살기 때문에 알렉스가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럴 수록 알렉스는 더욱더 미쉘에게 집착을 하고 불을 지른 알렉스는 감옥에 들어간다. 거리에서 걸인처럼 생활하던 미쉘은 결국 눈 수술을 하기 위해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3년후 크리스마스, 둘은 퐁네프 다리 위에서 재회한다.
소위 "누벨 이마주"의 선두주자로 불리며 80년대 프랑스 영화를 이끌던 레오스 카락스의 세 번째 작품 <퐁네프의 연인들>의 남녀 주연으로는 남자 거지인 알렉스 역에 데니 라방이 여자 거지인 미셀르 역에는 줄리에트 비노세가 맡아 열연하였다.
주요 무대 및 배경은 지난 1989년에서 1991년 사이의 퐁네프와 세느 강 및 주변 여러 곳이다. 수용소를 탈출해 퐁네프에서 노숙하던 알렉스는 어느 날 다리 한 가운데서 잠든 미셀을 만나게 된다. 미셀은 사랑을 잃고 시력까지 서서히 잃어가자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거리를 헤매게 된다. 불을 뿜는 묘기의 스턴트맨 출신인 떠돌이 청년 알렉스와 실연과 실명 위기의 좌절감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포기하기 위해 집을 뛰쳐나온 젊은 여자 화가인 미셀이 퐁네프와 그 아래에 흐르는 세느강을 무대로 만나고, 사랑하고, 싸우고, 이별하는 등의 이야기를 전한다.
아무 희망도 남아 있지 않은 그 두사람은 이 다리 위에서 지독한 사랑에 빠져든다. 그러나 미셀은 화가로서 치명적인 실명 직전에 첫사랑인 줄리앙에 대한 기억만을 간직한 채 거리로 나와 자신의 존재감을 버리고 살아가기 때문에 알렉스가 기대하는 만큼의 사랑의 감정을 느끼진 못한다. 더욱더 알렉스는 미셀을 소유하려하고 기어코 방화로 인하여 알렉스는 감옥으로 가고 미셀은 눈 수술을 위하여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3년후 크리스마스에 둘은 퐁네프에서 재회한다.
"새로운 다리"라는 뜻의 퐁네프는 역설적이게도 세느 강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다리 이름과 역사가 지닌 역설은 사랑의 의미에 대한 역설이기도 했다. 진로와 퇴로를 미리 모색해두는 허다한 사람들 사이에서, "잊는 법을 배우지 못해"라고 말하며 권총으로 손가락을 날리는 알렉스의 낡은 사랑은 우리에게 새로운 사랑이라는 테두리를 보여준다. 오늘 날의 표현으로 "엽기적이야"라고 수근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지을 땐 새로운 다리였지만, 어느새 가장 오래된 다리가 되고만 퐁네프의 운명처럼 새로움을 기약한 그 많은 사람들은 또 얼마나 쉽게 군내 풍기는 사랑이 되고 마는가. 갈증을 호소하는 미셀과 불면증에 괴로워하는 알렉스. 누가 더 슬픈 항해자였을까? 해를 희망이고 잠을 안식이라 할 때, 휴식없이 절망적인 삶을 살아야 했던 둘의 비참함은 다리 위에서도 마침내 사랑의 자리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사랑이란 뭘까? 이별과 재회, 과거와 미래, 혹은 삶과 죽음 사이를 끝없이 오가면서도 종내 강 저쪽으로 건너가지 못하는 자의 고단함. 아무리 행복한 미소를 지어도 미셀과 알렉스의 그림자를 담고 있는 한 퐁네프의 모든 연인들은 슬프다.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무엇보다 우선 황홀한 영상들이다. 폭죽을 그림물감처럼 써서 파리의 밤 하늘에 움직이는 그림을 그리는 것, 그 그림 아래에서 춤을 추고 센 강에서 훔친 모터보트로 수상스키를 타는 것, 지하도의 벽을 덮은 포스터에 불을 붙여 불타는 통로로 만들어버리는 것 등등이 "새로운 영상(nouvelle image)"을 추구하는 감독으로 불리는 레오스 카락스가 우리에게 보여준 꿈의 조각들이다.
그러나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것은 그런 인상적인 장면들보다는 우리 돈으로 약 250억 원이나 들었다는 엄청난 액수의 제작비다. 87년 레오 카락스는 자신의 새로운 영화 <퐁네프의 연인들>을 꼭 퐁네프 다리 위의 실제적인 모습을 배경 삼아 찍겠다고 선언했다. 잠정 제작비는 3600만 프랑이었다. 그러나 파리의 중심가를 횡단하는 퐁네프 다리에서 촬영을 한다는 것은 사실 어려운 일이었다. 파리시 당국에서는 퐁네프 다리위에서의 촬영은 절대 허가할 수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프랑스 예술인들은 카락스로 하여금 퐁네프 다리위에서 촬영을 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연대 서명을 하여 당국에 올렸고, 이 문제는 프랑스인들 최대의 관심사로 떠올랐다. 결국 프랑스의 인기 시장인 쟈크 시락은 88년 여름 3주 동안 카락스에게 퐁네프 다리에서 촬영을 할 수 있다는 허가를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퐁네프 다리 위에서의 촬영은 시작되었고, 한쪽에서는 밤장면의 촬영을 위해 몽페리에 근처에 인공 세트(Decor)를 설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락스는 어렵게 주어진 3주라는 시간 동안 단지 5분 분량 정도만을 촬영하는데 그쳤다. 제작자는 세트를 설치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였고, 카락스는 이 안을 받아들였다. 대신 실제 퐁네프 다리의 크기 및 다리에 사용된 돌의 원료와 똑같은 것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과 다리 주변에 건물을 지어야 한다는 아주 까다로운 원칙으로부터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렇게 퐁네프 다리의 세트는 탄생하게 되었다. 그러나 1988년 12월 처음으로 촬영은 중단되었다. 45분을 찍는데 무려 6000만 프랑이 초과되었던 것이다. 제작자는 파산했고, 더이상 제작비를 댈 수가 없었다. 1989년 7월 스위스의 부호 Van Buren의 제정 지원으로 촬영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 또한 1800만 프랑을 추가 투자하고 6주만에 물러나고 말았다. 무수한 구설수와 루머들이 떠돌았지만 카락스는 이 부분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소문은 더욱 불어났고, 한편에서는 퐁네프의 다리가 완성되지 못한 채 프랑스 영화 역사 속에 그냥 묻혀버리지 않을까 걱정의 소리들이 차츰 일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일년이 흘렀고, 문화성 장관 쟉끄 랑(Jacques Lang)은 세계의 부호들을 불러모아 지금까지 러쉬 필름을 보여주며 제작자를 물색하는 열의를 보여주었다. 드디어 마지막 총제작자 <까미유 끌로델>의 제작자인기도 한 크리스티앙 푸쉬네가 7000만여 프랑을 재투자하여 1990년 8월 재개된 촬영은 7개월 동안 모든 촬영을 끝마칠 수 있었다.
1991년 3월, 제작기간 5년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마침내 모든 작업이 끝났다. 총제작비 1억 9000만 프랑(한화로 25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 투자된 끝에 이 <퐁네프의 연이들>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30여 만평 규모의 퐁네프의 다리를 재현한 세트는, 길이 100여 미터, 폭 15여 미터의 실제 퐁네프 다리를 그대로 재현하였는데, 원료는 모두 대리석이 사용되었으며, 수심의 깊이는 실제 세느강의 깊이와 똑같이 15~20여미터 깊이로 땅을 파 강으로부터 물을 끌어올려 맨땅을 물로 채워 넣었다. 이 세트를 짓기 위해 20,000만여 명의 인원이 동원되었고, 프랑스의 유명한 건축가 크리스티앙 마지 외에 설계사, 조각가, 연극무대 디자이너 등이 함께 참여하여 1년 7개월의 제작 기간과, 1억 9천여만 프랑을 투자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가 놀라는 것이 단순히 제작비의 액수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많은 돈을 들였음에도 그런 스펙터클 영화들과는 전혀 다르다. 우선 줄거리가 서사적인 아니며, 주요 등장인물도 세 명에 불과한데, 그나마 한 명은 중간에 사라져 버린다. 이렇게 보면 <퐁네프의 연인들>은 스펙터클이 아니라 소품에 가깝다. 그런데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놀라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곧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하기 위해 그 많은 돈을 들였단 말인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우리가 스펙터클 영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뜻할 뿐이다. <퐁네프의 연인들>은 그러므로 할리우드 식의 스펙터클이라는 고정관념과 상관없이 감독 자신이 원하는 영상을 만들기 위해 많은 돈을 들였다는 점이 놀라는 것이다. 자본의 힘이 가장 크게 작용하는 예술 분야가 바로 영화이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퐁네프의 연인들>은 볼만한 영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잘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다. 세느 강의 퐁네프에서 잠을 자는 부랑아 알렉스와 애인으로부터 버림받고 거리의 화가로 떠돌다가 퐁네프로 오게 된 미셀의 사랑 이야기인 이 영화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사랑의 기만성과 끔찍한 소유욕이다. 부르주아 출신인 미셀이 거리에서 떠돌게 된 것은 사랑의 상실, 곧 첼리스트인 줄이앙을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미셀의 일기를 훔쳐보고 그녀가 줄리앙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알렉스가 미셀과 줄리앙의 만남을 방해하는 것도 그녀를 자신만의 여자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미셀에 대한 알렉스의 소유욕은 너무나도 지독해서 미셀로 하여금 돈을 강에 빠뜨리게 하고 시치미를 떼거나, 미셀을 찾는 포스터에 불을 지르고, 급기야는 포스터를 붙이는 사람이 불에 타 죽게까지 한다. 줄리앙에 대한 사랑이 증오로 변해 그를 죽이려고 총까지 갖고 다니는 미셀이나, 고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미셀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살인까지 저지르는 알렉스나 광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이렇게 광적인 사람은 또한 기만적인데, 그것은 미셀과 알렉스가 소매치기를 한 돈으로 바닷가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에서 잘 나타난다. 수면제를 먹어야 잠을 자는 알렉스에게 미셀은 사랑을 나누면 수면제가 없어도 잠을 잘 수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바닷가에서 둘이 몸을 섞은 뒤에, 알렉스는 미셀 몰래 수면제를 꺼낸다. 사랑이 불면증의 치료제가 되지 못했음은 물론이려니와, 미셀에게 뿌리 깊게 박인 "사랑은 만병 통치약"이라는 기이한 고정관념으로 인해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실망시켜서는 안된다고 하는 또다른 고정관념 때문에 알렉은 미셀을 속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미셀 또한 알렉스를 기만하는데, 자기를 찾는 방송을 듣고 알렉스에게서 떠날 때 그녀는 알렉스에게 주는 술에 수면제를 탄다.
그러나 미셀의 기만은 사랑에 대한 고정관념 때문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어서 알렉스의 기만과는 다르다. 미셀은 화가에게는 생명 그 자체인 눈의 치료와 부르주아 생활로의 복귀를 위해 알렉스를 속인다. 알렉스가 미셀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했을 때, 그 또한 사랑의 상실로 인해 거리의 생활을 하고 있는 늙은 한스가 알렉스와 미셀은 속한 세계가 다르므로 둘의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말한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반응이었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사랑은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불가능한 것이므로,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알렉스에 대한 미셀의 감정이 거짓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미셀이 다리의 벽에 알렉스를 사랑한 것은 거짓이었다고 써놓고 떠난 것은 또하나의 기만으로 알렉스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알렉스의 상실감은 미셀이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미셀에 대한 알렉스의 광적인 집착은 여기에 기인한다. 그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기에 그의 소유욕은 그만큼 강하다. 그러나 미셀의 집착은 알렉스보다는 덜해서 줄리앙을 죽이고 싶어하면서도 실제로 죽이지는 못한다. 미셀에게 사랑이 열병이었다면 알렉스에게는 생명이었다. 알렉스는 총을 쏘아 자신의 손가락을 자름으로써 마음의 아픔을 몸의 아픔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영화는 여기서 끝났어야만 했다. 알렉스가 살인범으로 체포되고, 눈을 고친 미셀이 알렉스를 면회하고, 알렉스가 출옥한 뒤에 수리가 끝난 퐁네프에서 다시 만나 강에 빠졌다가 지나가는 배에 구조되어 함께 떠난다는 해피엔딩은 불필요한 덧붙임이며, 관객에 대한 기만일 뿐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퐁네프의 연인들>이라는 꿈을 꾸었고, 레오스 카락스는 그 꿈을 통해 사랑이라는 광란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려했지만, 우리가 본 것은 씁쓸한 환상일 뿐이었다. 심하게 과장되기는 했지만 우리가 본 환상이 결국 우리의 초상이기에 더욱 씁쓸한 생각이 뇌리에 남을 뿐이다.
1. 1992년 European Film Awards Best Actress (Juliette Binoche), Best Cinematographer (Jean-Yves Escoffier), Best Editor (Nelly Quettier)를 수상하였다.
2. 국내 상영시 상영 시간이 길다는 이유로 5분여 삭제되었다. 사회 저변계급의 생활을 솔직하게 살리려한 감독의 의도와 상관없이 "혐오스럽다"는 이유로 삭제되었는데 알렉스가 경찰보호소로 이송된 전반부이다.
3. 첫장면에 시작된 흑백화면을 기억하는 분은 얼마 없을 것이다. 사실 5분 가량되는 그 장면은 극장상영시는 잠시 동안만 제시되었고, 행려들의 실상을 담은 처절한 모습은 삭제되었다. 그 일부 장면들이 비디오판에 들어있다. 과도한 해석일지는 모르지만 레오스 카락스가 굳이 그 장면을 영화 시작 에 넣은 것은 뒤에 컬러로 된 장면이 시작되면서 대비적인 것을 통해 무언가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비디오를 볼 수밖에 없다. 흑백의 현실 세계와 컬러의 신화적 세계. 이것은(퐁네프의 연인들)의 원래 의도와 실패한 원인이 무엇인지에 관한 해답을 제공해 줄지도 모르겠다.
첫댓글오래전에 이 영화를 보고나서 기억나는 것은 꾀죄죄한 두 연인의, 사랑하는거 같은데 사랑하지 않는거 같았고. 아름다운 불꽃 축제의 영상속에서 기뻐하며 춤을 추던 모습,,,,그 외에는 별로.......시놉시스를 읽고나니,잊혀졌던 장면이 떠오르네요. 비디오로 다시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도..
첫댓글 오래전에 이 영화를 보고나서 기억나는 것은 꾀죄죄한 두 연인의, 사랑하는거 같은데 사랑하지 않는거 같았고. 아름다운 불꽃 축제의 영상속에서 기뻐하며 춤을 추던 모습,,,,그 외에는 별로.......시놉시스를 읽고나니,잊혀졌던 장면이 떠오르네요. 비디오로 다시 한번 봐야겠다는 생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