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죄와 벌 2부 4
조시모프는 키가 큰 지방질 사내였는데, 좀 부은 듯한 윤기 없는 창백한 얼굴에는 말쑥이 면도질이 돼 있었다. 매끈하고 부드러운 아마 빛 머리칼에 안경을 쓰고, 지방으로 살쪄 보이는 손가락에는 커다란 금반지를 끼고 있었다. 나이는 스물일곱쯤 되어 보였다. 그는 느긋하고 멋진 엷은 외투와 연한 빛깔의 여름 바지를 입고 있었다. 대체로 그의 몸에 지닌 것은 모두가 느긋하고 멋지며, 갓 만든 것뿐이었다. 속옷도 더할 수 없이 좋은 것이고, 시곗줄도 묵직했다. 거동도 여유가 있어 좀 느려 보였지만, 동시에 일부러 거드름을 피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오만한 성품은 애써 감추려고 하는데도 끊임없이 나타나곤 했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를 까다롭다고들 말하지만, 자기 일에는 밝다는 평판이었다.
"난 말이야, 자네 집에 두 번이나 들렀었네...자, 보게 겨우 정신이 들었어!"라주미힌은 큰 소리로 말했다.
"알겠네, 알겠어. 그래, 기분은 어떠시오?"
조시모프는 유심히 상대방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그리고 병자의 발치 쪽 소파에 앉은 다음 되도록 자세를 편하게 잡으면서 라스콜니코프에게 물었다.
"자꾸 참울해서 탈이야"하고 라주미힌은 말을 이었다. "지금 막 셔츠를 갈아입혔는데, 글쎄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니까."
"그럴 테지, 본인이 싫다면 셔츠 같은 건 나중에 입혀도 괜찮은 건데...맥은 정상이군, 머리는 아직 좀 아픕니까, 네?"
"나는 건강해, 난 완전히 건강하단 말이야!" 라스콜니코프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눈알을 번뜩이며 완고하게 발작적으로 내뱉었으나, 다시 곧 베개 위에 쓰러져 벽 쪽으로 돌아눕고 말았다.
"네, 썩 좋습니다....모든 것이 순조로워요."
그는 힘없이 말했다. "뭘 좀 들었나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가고, 무엇을 주어야 좋은지 의논들을 했다.
"이젠 뭣이든 줘도 좋아...수프도 좋고, 차도 좋고....물론 버섯이나 오이 같은 건 아직 안 되지만, 그리고 쇠고기도 역시 안 먹는 게 좋겠군. 이젠 조금도 근심할 필요 없어!" 그는 라주미힌을 뒤돌아보았다. "물약도 필요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럼 내일 또 오겠네.....오늘 다시 와도 좋지만....글쎄......."
"내일 저녁에 이 친구를 데리고 산책을 나갈 참이야!" 라주미힌은 제멋대로 정해버렸다. "유스포프 공원으로, 그리고 수정궁에도 들를 생각이야."
"내일은 병자를 움직이지 않는 편이 좋겠지만, 그러나 약간 정도는....어쨌든 좀 더 두고 보세."
"그거 유감인걸. 오늘은 마침 이사 축하가 있단 말일세. 엎어지면 코 닿을 데야. 이 친구도 왔으면 했는데, 와서 소파에 누워만 있어도 좋겠는데 말이야! 자넨 물론 오겠지?" 라주미힌은 갑자기 조시모프를 보고 말했다. "잊으면 안 되네, 알겠나, 약속했으니까."
"그렇게 하지. 좀 늦을지도 모르지만. 그래 뭘 준비했다?"
"아니, 뭐 별로. 차, 보드카, 청어, 고기만두 정도지. 우리끼리만 모이는 거야."
"그럼 누구누구야?"
"모두 이곳 사람이니까 대개는 처음 보는 사람들뿐이지, 하긴 늙은 백부님만은 예외지만. 아니, 그분도 역시 새 얼굴이겠군. 바로 어제 페테르부르크에 오셨으니까. 5년에 한 번쯤 뵌다네."
"뭘 하시는 분인데?"
"평생토록 시골 우체국장을 지내고...쥐꼬리만 한 연금을 ㅂ다고 있는 예순다섯 살 늙은이야. 별로 말할 인물은 못 돼...그렇지만 난 좋아하지. 그리고 포르피리 페트로비치도 올 거야. 이곳 예심판사이고....법률가인. 아마 자네도 알걸."
"그 사람도 자네 친척인가?"
"아주 먼 친척뻘이 돼. 자네 왜 얼굴을 찡그리나? 그 사람과 한 번 다툰 일이 있기 때문인가? 그럼 자넨 오지 않겠군?"
"그까짓 녀석은 조금도 개의치 않아......."
"그거 다행이군. 그리고 그 밖에는 대학 친구들, 교사와 관리가 각각 한 사람, 음악가 한 사람, 장교 한 사람, 그리고 자묘토프....."
"근데 한 가지 묻겠는데 말이야, 자네나 이 사람이나"하고 조시모프는 라스콜니코프를 턱으로 가리켰다. "그 자묘토프 같은 사내하고 무슨 공통점이 있나?"
"정말 까다로운 친구로군! 주의, 원칙만 따지니 말이야....자넨 마치 태엽처럼 원칙으로 감겨 있어서 자기 의지로는 몸 하나 움직이지 못하거든. 내 생각으론 사람만 좋으면 되는 거야, 이게 원칙이지. 그 이상 더 알려고도 하지않고. 자묘토프는 정말 근사한 사내야."
"사복(私腹)만 채우고 있어."
"사복을 채우든 말든 우리가 무슨 상관이야! 도대체 사복을 채우기로서니 그게 어떻단 말인가?"하고 라주미힌은 버럭 소리를 질렀으나, 그 표정은 왜 그런지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들떠 있었다. "그가 사복 채우는 걸 내가 칭찬이라도 했단 말인가? 나는 그저 그가 나름대로 좋은 인간이라고 했을 뿐이야! 바른대로 말해서, 모든 점에서 다 좋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그래서 난 확신하지만, 그런 식으로 본다면 나 따위는 오장육부를 다 내놔도 구운 양파 한 개 값어치가 고작일 거야. 그것도 자네를 덤으로 붙여서 말이야!"
"그건 너무 적군. 나 같으면 자네한테 두 개 값은 쳐주지......"
"그렇지만 자네에겐 하나밖에 안 쳐주겠어! 마음대로 말해보게! 자묘토프는 아직 풋내기니까 난 그자의 머리털을 잡아당기려는 거야. 그런 사내는 배척할 게 아니라 끌어당겨둘 필요가 있어. 인간이란 배척하는 것으로 교정할 수는 없으니까. 특히 풋내기는 더하지. 풋내기엔 곱절의 신중함이 필요해. 자네 같은 진보적인 우둔한 친구들은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남을 존중하지 않고, 더구나 자신을 모욕하고 있거든....정말 듣고 싶다면 말해주겠네만, 실은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공통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네."
"그거 듣고 싶군."
"그건 그 칠장이, 페인트장이 사건인데....우린 반드시 그를 구해낼 거야! 게다가 이젠 장애가 될 만한 건 하나도 없어. 사태는 아주 명백하니까! 우리가 조금만 더 뒤를 밀어주면 되는 거야."
"대체 그 칠장이라는 건 누구야?"
"아니, 자네한테 얘기하지 않았던가? 정말 안 했던가? 그렇지, 지금 처음으로 얘기를 시작했으니까... 왜, 그 관리의 미망인으로 고리대금을 하던 할멈의 살인 사건 말이야...바로 그 사건에 칠장이가 걸려든 거야."
"아, 그 살인 사건이라면 내가 자네보다 먼저 들었네. 게다가 흥미까지 느끼고 있지...대단한 건 아니지만....한 가지 이유로....신문에서도 읽었지! 그래서......."
"글쎄, 리자베타까지 죽였다더군요!"라스콜니코프를 보면서 나스타시야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아까부터 죽 이 방에 남아서 문 옆에 몸을 기대고 얘기를 듣고 있었다.
"리자베타?"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라스콜니코프가 중얼거렸다.
"리자베타 말이에요, 헌 옷 파는, 당신 몰라요? 아래층에도 자주 왔었고, 당신 셔츠도 기워준 일이 있잖아요."
라스콜니코프는 다시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그러고는 흰 꽃무늬가 있는 더러워진 누런 벽지에서 다갈색 선으로 그려진 보기 흉한 흰꽃을 한 송이 골라서, 꽃잎이 몇 개 있으며 꽃잎 생김새는 어떠하고, 꽃잎에는 줄이 몇 개 있는지를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손발이 저려서 아주 마비된 것만 같았으나, 몸을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고 뚫어지게 꽃만 보았다.
"그래, 칠장이가 어쨌다는 건가?" 왜 그런지 몹시 못마땅한 얼굴로 조시모프는 나스타시야의 수다를 가로막았다. 그녀는 한숨을 짓고 입을 다물었다.
"결국 살인범이라는 혐의를 받은 거야!"라주미힌은 열띤 어조로 말을 이었다.
"뭐 증거라도 있나?"
"증거는 무슨 증거야! 하긴 증거가 있다지만, 그 증거란 것이 증거가 못 되거든. 그것을 증명해야 한단 말이야! 그것은 처음에 경찰이 그들을 ....뭐라더라....코흐와 페스타랴코프, 그 두 사람을 체포해서 혐의를 씌운 것과 똑같은 수법이야. 쳇! 정말 어리석은 짓들만 하고 있거든. 남의 일이지만 속이 메스껍단 말이야! 페스트랴코프는 어쩌면 오늘 내게 들를지 몰라. 그건 그렇고, 로쟈, 자네도 이 사건을 알고 있겠지? 앓기 전의 일이니까, 그때 거기서도 그 얘기를 했을걸......"
조시모프는 호기심 어린 눈으로 라스콜니코프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봐, 라주미힌! 그러고 보니 자네도 퍽 남의 일에 참견하길 좋아하는 사내군"하고 조시모프가 꼬집었다.
"그래도 좋아, 아무튼 구해내야 해!" 라주미힌은 주먹으로 탁자를 치면서 외쳤다. "제일 화나는 게 뭔지 아나? 그건 그자들이 거짓말을 한다는 게 아니야. 거짓말쯤은 용서할 수도 있어. 거짓말은 사랑할 만한 거야. 왜냐하면 거짓말은 항상 진실로 이끄니까. 내가 무엇보다 분통이 터지는 것은, 놈들이 거짓말을 하면서 자기네 거짓말을 숭배하고 있다는 점이지. 나도 포르피리는 존경하고 있어. 그러나 ....예를 들어 경찰 놈들을 처음부터 당황하게 만든 것이 대체 뭔지 아나? 처음엔 문이 닫혀 있었다, 두 사람이 문지기를 데리고 오니까 열려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코흐와 페스트랴코프가 죽였다! 바로 이게 그자들의 논리니 말이야."
"뭐, 그렇게 흥분할 건 없어. 그들은 잠시 구류를 당했을 뿐이야. 또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니까...나도 그 코흐라는 사람을 만나봤어. 들어보니 그자는 그 노파한테서 기한이 넘은 저당물을 사들이고 있었더군! 그렇지?"
"그래, 그런 사기꾼 족속이지! 그자는 어음도 사들이고 있어. 보통 장사꾼이 아냐. 하지만 그런 놈은 아무래도 좋아! 대체 내가 무엇에 분개하고 있는지 자네 알겠나? 그 시대에 뒤떨어진, 저속한, 임시변통의 낡은 그들의 수법에 분개하고 있는 거야....이 사건 하나만 하더라도 전혀 새로운 길을 개척할 수 있을 텐데 말이야. 다만 심리적 자료만으로도 어떻게 해서 정확한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가를 증명할 수 있는 거야. '우리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전부가 아니거든 적어도 사건의 반은 사실을 어떻게 처리하는가 하는 그 수완에 달린거야!"
"그럼 자네에겐 사실을 처리할 만한 수완이 있단 말인가?"
"물론이지, 사건 해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느끼면서, 적어도 촉감으로 그걸 느끼면서 잠자코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말이야! 이봐, 자넨 이 사건을 자세히 알고 있나?"
"그러니까 칠장이 얘기를 기다리고 있지 않나?"
"아, 참, 그렇지. 그럼 먼저 사건 경위를 들어보게. 범행이 있은 지 꼭 사흘째 되는 날 아침이었어. 경찰이 코흐와 페스트랴코프를 붙잡고 한참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하긴 두 사람 다 각자의 행동을 증명해서 무죄가 명백해졌을 텐데 말이야, 그때 갑자기 뜻밖의 사실이 드러났어. 다름 아니라 그 건물 맞은편에서 선술집을 내고 있는 농민 출신 두시킨이라는 사내가 경찰에 출두해서 금귀고리가 든 보석함을 내놓고, 마치 한 편의 소설 같은 얘기를 진술했단 말이야. '실은 그저께 저녁에, 아마 8시가 좀 지났을 겁니다.' 그 날짜와 시각, 잘 듣고 있나? '그날도 낮에 한 번 왔던 칠장이 미콜라이가 우리 가게에 금귀고리와 보석이 든 이 함을 가지고 와서, 이것을 담보로 2루블을 빌려 달라는 거예요. 내가 어디서 얻은 거냐고 물었더니, 길가에서 주웠다는 겁니다. 나도 더 캐묻지 않았지요'라고 두시킨은 말했어. '그래서 지폐 한 장을 주었습죠.' 즉 1루블을 주었단 말이지. '내가 안 맡더라도 다른 데로 가지고 가서 어차피 마셔버릴 것이 뻔하니까, 우선 물건은 잡아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만약 이상한 사건이나 소문이 나면 곧 신고하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죠.' 이건 물론 되는대로 지껄여대는 잠꼬대 같은 거짓말이지. 나는 그 두시킨이란 놈을 잘 알고 있네만, 그자도 물건을 잡고 돈놀이를 하고 있어서 장물 같은 걸 받아서 감춰두는 놈이거든. 그 30루블어치 귀금속도 미콜라이를 살살 꾀어 빼앗은 것이지, 절대 신고할 생각은 없었던 거야. 단지 겁이 났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그다음을 들어보게. 두시킨은 계속해서, '나는 그 미콜라이 제멘치예프를 어릴 적부터 잘 알고 있습니다. 같은 현의 자라이스키 군 농민 출신이죠. 그러니까 우리는 다 같은 출신입니다. 미콜라이는 주정뱅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곧잘 마시는 편이죠. 그런데 그놈이 그 집에서 미트레이와 함께 페인트칠을 하는 것은 우리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미트레이도 역시 같은 고향 사람이죠. 놈은 지폐를 받자 곧 그것을 바꿔서 단번에 두 잔을 마시고는 거스름돈을 집어가지고 나가버렸습니다. 그때 미트레이의 모습은 볼 수 없었어요. 그런데 그 이튿날, 알료나 이바노브나와 그 동생 리자베타 이바노브나가 도끼로 맞아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두 사람을 알고 있으므로 곧 그 귀고리가 수상하다고 느꼈어요. 죽은 노파가 물건을 잡고 돈놀이를 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나는 놈들 집으로 가서 슬쩍 눈치채지 않게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먼저 미콜라이가 집에 있느냐고 물었습죠. 그런데 미트레이가 말하기를, 미콜라이는 놀아나기 시작해서 새벽녘에 취해 돌아왔으나 집에는 10분쯤 있었을 뿐 다시 나가버렸고, 그 뒤엔 미트레이도 그를 만날 수가 없어서 자기 혼자 일을 해치웠다는 겁니다. 일이라고 하는 것은, 살인이 난 방과 같은 층계로 통하는 2층 방입니다. 그때만 해도 나는 말만 들었을 뿐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습니다'하고 말하는 거야. '그리고 살인 사건에 관해서는 되도록 자세히 사방에서 듣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만, 여전히 수상쩍은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8시경의 일입니다.' 즉 사흘째 되는 날이지, 알겠나? '글쎄, 미콜라이가 우리 집에 오지 않았겠어요. 술을 안 먹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많이 취한 것도 아니어서 얘기는 할 수 있었습니다. 의자에 앉았으나 잠자코 있더군요. 아침 그때 가게에는 그놈 말고 외부 손님이 한 사람, 그리고 다른 자리엔 또 한 사람 단골손님이 자고 있었고, 그 밖엔 우리 집 애가 둘 있을 뿐이었죠. 그래서 '미트레이를 만났나?'하고 물었더니 '아니, 못 만났어'하는 거예요. '일터에도 가지 않았나?' '가지 않았어, 그저께부터.' 이러는 거예요. '그럼 어디서 잤지?' '페스키의 하물선에서'하더군요. '그런데 그 귀고리는 어디서 났나?'하고 물으니까 '길에서 주웠어'하고 말했는데, 왠지 퍽 어색한 듯이 내 얼굴을 보려고도 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나는 '자넨 그날 밤 그 시각에 그 층계 위의 방에서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나?' 하고 묻자, '아니, 못들었어'하는데, 그 자신은 그 말을 들으면서 눈이 동그래지고 금방 얼굴빛이 백묵처럼 하얘지더군요. 그래서 나는 얘기를 들려주면서 동정을 살피노라니까, 그놈은 모자를 집어 들고는 슬그머니 나가려고 하는 거예요. 나는 그놈을 붙잡아두려는 생각에서 '이봐, 미콜라이, 한 잔 안 하겠나?' 하면서 꼬마 놈들에게 문을 막고 있으라고 눈짓을 해놓고는 계산대에서 나오니까, 놈은 갑자기 가게에서 한길로 뛰쳐나가더니 쏜살같이 골목으로 달아나버렸습니다. 난 그저 그 뒷모습만 보았을 뿐이죠. 그래서 나는 의심이 들어맞았다고 결정한 것입니다. 그놈이 한 짓에 틀림이 없어요....'"
"물론 그럴테지..."하고 조시모프가 말했다.
"잠깐만! 끝까지 듣게! 그래서 물론 온 힘을 다해 미콜라이를 찾기 시작했어. 두시킨은 구류되고 가택수색을 당했지. 미트레이도 마찬가지야. 그리고 하물선의 패거리도 조사를 받았지. 이렇게 해서 그저께 겨우 미콜라이를 체포했어. OO문 근처 여인숙에서 말이야. 놈은 그 집으로 가서 은 십자가를 벗어 내놓고는 그것으로 한 잔 달라고 했다는 거야. 그래서 술을 주었지. 잠시 후 그 집 여편네가 외양간으로 가서 무심코 틈바구니로 들여다보니까, 놈이 옆의 헛간 대들보에 띠를 걸고 올가미를 만들어 거기에 목을 매려고 하더란 말이야. 주인마누라가 소스라치게 놀라 있는 소리를 다해 외쳐대니까 사람들이 모여들었지. '아니, 넌 대체 누구냐!'하고 묻자 '나를 OO경찰에 데려다 주시오, 죄다 고백하겠소'라고 했다는 거야. 그래서 수속을 밟아 경찰에, 즉 이 구역 경찰에 넘기게 되었지. 그다음 판에 박은 신문이 시작된 거야. 이름은, 직업은, 나이는? '수물두 살' 운운. '미트레이하고 일을 할 때 층계에서 본 사람은 없나, 이러이러한 시간에?' '그야 많은 사람이 자나갔겠죠만, 우린 주의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럼 뭔가 이상한 소리는 못 들었나?' '별로 이상한 소리는 못 들었어요.' '그럼 미콜라이, 너는 그날 그 시각에 어느 미망인이 동생과 같이 살해되고 금품을 강탈당했다는 건 들었겠지' '그건 전혀 몰랐습니다. 나는 사흘째 되는 날 아파나시 파블리치(두시킨)네 선술집에서 주인한테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그럼 그 귀고리는 어디서 났지?' '길에서 주웠습니다.' '그다음 날 미트레이와 같이 일하러 가지 않은 이유는 뭐지?' '좀 노느라고 그랬어요.' '어디서 놀았어?' '이러이러한 데서요.' '왜 두시킨네 집에서 도망쳤지?' '그때는 왜 그런지 겁이 나더군요.' '왜 겁이 났어?' '재판소로 끌려갈 것 같아서요.' '자기에게 죄가 없다면 조금도 겂낼건 없잖느냐 말이야?' 알겠나, 조시모프, 믿고 안 믿고는 자네 마음대로지만, 이렇게 질문을 하더라는 거야. 내가 한 것과 똑같은 말투로 말이야. 난 분명히 알고 있어, 정확히 전달을 받았으니까! 어때?"
"그러나 어쨌든 증거가 될 만한 건 있군그래."
"아니, 내가 말하는 건 증거가 아니라 신문에 대해서야. 그들이 사건의 본질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느냐 하는 점이지! 그러나 이런 건 아무래도 좋아!....그들은 미콜라이를 족치고 족쳐 드디어 자백을 얻었어. '실은 길에서 주운 것이 아니라, 미트레이와 둘이서 페인트칠을 하던 그 방에서 얻었습니다.' '어떻게 얻었어?' '예, 그건 이렇게 해서 얻었죠. 미트레이와 둘이서 하루 종일, 저녁 8시까지 일을 하고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미트레이가 갑자기 솔을 붙잡고 내 얼굴에 페인트칠을 했어요. 내 얼굴에 페인트칠을 한 다음 도망쳐버려서 나는 그 뒤를 쫓아갔죠. 뒤쫓아 가며넛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어요. 그런데 층계에서 문으로 나오는 곳에서 문지기와 나리들하고 맞부딪쳤어요, 나리들이 몇 분이나 계셨는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자 문지기가 나를 막 나무랐습니다. 또 다른 문지기도 같이 야단을 쳤습니다. 거기에 또 문지기의 여편네까지 나와서 역시 나를 욕하는 거예요. 그러고 있는데 마나님을 데리고 들어오던 나리가 역시 우리를 나무라시더군요. 나와 미치카(미트레이의 애칭)가 길을 막 뒹굴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미치카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넘어뜨리고 때리자 미치카는 미치카대로 밑에서 내 머리털을 쥐고는 때리는 거예요. 하지만 우리 두 사람은 진짜로 화난 것이 아니라, 사이가 좋기 때문에 장난삼아 한 거죠. 그러다가 미트레이가 나를 뿌리치고는 거리로 도망쳤기 때문에, 나는 또 그 뒤를 쫓아갔지만 붙들지를 못하고 혼자서 되돌아왔습니다. 뒤처리를 해야 했으니까요. 나는 뒷처리를 하면서 미트레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방문 옆 한쪽 구석에서 이 함이 밟혔어요. 보니 종이에 싼 것이 떨어져 있더군요. 종이를 풀고 보니 조그만 열쇠가 있기에 그 열쇠로 열어보니까 함 속에 귀고리가......'"
"문 뒤에? 문 뒤에 있었나? 문 뒤에?" 갑자기 라스콜니코프가 겁을 먹은 멍청한 눈으로 라주미힌을 보면서 외쳤다. 그러고는 한 손을 짚으면서 소파 위에 일어나 앉았다.
"응....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야? 왜 그래? 아니, 왜 그래, 자네?" 라주미힌도 같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아니야......."라스콜니코프는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하고는 다시 베개에 쓰러져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잠시 말이 없었다.
"아마 졸다가 잠꼬대를 한 모양이군." 동의를 구하는 듯한 눈으로 조시모프의 얼굴을 보면서 드디어 라주미힌이 이렇게 말했다. 조시모프는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자, 계속하게"하고 조시모프는 말했다. "그 다음은 어떻게 됐지?"
"그다음은 말하나 마나지. 놈은 귀고리를 보자 방이고 미치카고 다 잊어버리고 모자를 집어 들고 두시킨한테 달려간 거야. 그리고 아까 말한 것처럼 길에서 주웠다고 거짓말을 하고는, 1루블을 받자 즉시 놀러 간 거야. 그런데 살인 사건에 관해서는 전과 똑같은 주장만 하고 있어. '그런 건 전혀 모릅니다. 사흘째 되던 날에야 들었으니까요.' '그럼 왜 지금까지 출두하질 않았어?' '겁이 나서요.' '그럼 왜 목을 매려고 했지?' '생각하기 지쳐서요.' '무슨 생각?' '재판에 끌려나갈 것만 같아서요.' 자, 이것이 자초지종의 전말이야. 그런데 말이야, 그자들이 도대체 어떤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하나?"
"생각할 게 뭐가 있나? 사건의 본질이야 어떻든 간에 증거가 있으니 말이야. 사실은 사실이지. 자네 마음대로 석방할 수는 없을걸?"
"하지만 그들은 그를 완전한 진범으로 취급하고 있단 말이야!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거지......"
"어리석은 말 말아. 자넨 흥분하고 있어. 그럼 귀고리는 어떻게 된 거란 말인가? 자네도 동의하겠지,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노파의 트렁크 속 귀고리가 미콜라이 손에 들어갔다는 것을.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든지 손에 넣을 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느냐 그 말이야, 그렇잖아? 그건 사건 심리에서 소홀히 다룰 만한 게 결코 아니야."
"어떻게 손에 넣었느냐고! 어떻게 손에 넣었느냐고?" 하고 라주미힌은 외쳤다. "이봐, 의사 선생, 자네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을 연구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지 않느냐 말이야. 그런 자네가 이만한 재료를 갖고도 미콜라이가 어떤 성격의 인간인지 모르겠나? 그의 진술이 언뜻 봐도 더없이 신성한 진실이란 걸 모르겠나? 그건 그가 말한 대로 손에 들어온 거야. 상자가 발에 밟혀 주워 올린 것뿐이라고!"
"더없이 신성한 진실이라고! 그러나 그 친구도 처음에는 거짓말을 했다고 자백하잖았나!"
"내 말을 잘 들어보게, 잘 들어봐. 문지기도, 코흐도, 페스트랴코프도, 또 다른 문지기도, 그리고 첫 문지기의 여편네도, 그때 손님으로 와서 문지기 방에 앉아 있던 여자도, 그때 마침 마차에서 내려 여자와 팔을 끼고 문을 들어오던 7등관 크류코프도, 누구나 다, 즉 여덟 사람 내지 열 사람의 증인이 모두 하나같이 미콜라이가 미트레이를 땅바닥에 쓰러뜨리고 그 위에 올라타서 때리니까, 이쪽도 그의 머리털을 움켜쥐고 상대를 때리고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어. 두 사람은 길을 가로막고 뒹굴어서 통행인들에게 방해가 됐지. 결국 사방에서 욕을 얻어 먹은 거야. 그런데 두 사람은 마치 '조그만 어린애들같이', 증인의 말을 문자 그대로 빌리자면 말이야, 엎치락뒤치락하면서 소리 지르고 때리고 큰 소리로 웃곤 했다는 거야. 그리고 애들같이 서로 쫓으면서 거리로 뛰어 나갔단 말일세. 알겠나? 그럼 여기서 좀 곰곰 생각해보게. 4층에는 아직 따뜻한 시체가 뒹굴고 있었단 말이야, 발견되었을 때는 여전히 온기가 있었으니까! 만약 그 두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미콜라이 한 사람만이 하수인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죽인 후 트렁크를 부수고 금품을 강탈했거나 또는 단지 강도를 도왔거나 했다면 말이야, 난 한 가지만 자네한테 질문하고 싶네. 도대체 지금 말한 바와 같은 심리 상태, 즉 외치고 웃고 문간에서 아이들처럼 맞붙어 싸우는 것이 도끼니, 피니, 간악하기 짝이 없는 계략이니, 세심한 주의니, 강탈이니 하는 것과 과연 일치할 수 있을까? 방금 사람을 죽이고 불과 5분이나 10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그렇지 않나? 아직 시체가 따뜻했으니까....별안간 시체를 내버려두고 방문도 열어놓은 채, 게다가 지금 그쪽으로 사람들이 올라간 것을 알면서 훔친 것을 내버려두고 길 가운데서 아이들처럼 뒹굴고 깔깔거려 뭇사람의 주의를 끌 수 있겠나.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는 증언이 일치하는 증인이 열 사람이나 있다고!"
"물론 이상해! 물론 불가능한 얘기지, 그러나......."
"아니, 그러나가 아니야. 만약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미콜라이의 손에 들어온 귀고리가 실제로 그에게 불리한 중대한 물적 증거가 된다고 한다면, 하긴 그 증거는 그의 진술에 의해 해명되고 있으니까 아직은 왈가왈부할 여지가 있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면 무죄를 증명할 만한 사실도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더욱이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더하지.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나라 법률학 성질상 그러한 사실이, 단순히 심리적 불가능성이라든가 정신 상태에 기초를 두고 있는 사실이 거부할 수 없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그것이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유죄를 긍정하는 일체의 물적 증거를 뒤집어엎을 수 있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겠느냐 말이야? 아니, 받아들여질 만한 탄력성을 가지고 있을까? 아냐, 받아들일 리 없어, 절대로 받아들여지진 않을 거야. 상자는 발견되었고, 본인은 목을 매어 죽으려고 했으니까. '자기에게 죄가 없다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어!'하는 식이지. 바로 이것이 중요한 점이야, 내가 화를 내는 건 바로 이 점이란 말이야! 내 마음 알겠나?"
"그래, 자네가 화를 내는 것도 이해가 가. 그런데 말이야, 한 가지 물어볼 것을 있었네만, 귀고리가 든 상자가 정말로 노파의 트렁크에서 나왔다는 것은 무엇으로 증명되지?"
"그건 증명이 됐지." 라주미힌은 눈살을 찌푸리고 내키지 않은 어조로 대답했다. "코흐가 그 물건을 기억하고 있어 전당 잡힌 사람을 가르쳐주었지. 그러자 그 사내가 분명히 자기 것이라고 증명한 거야."
"그거 좋지 않은데. 그럼 또 하나, 코흐와 페스트랴코프가 올라갔을 때 미콜라이를 본 사람은 없었나? 그 점을 어떻게 증명할 수 없을까?"
"그게 문제야, 아무도 본 사람이 없거든." 라주미힌은 화난 듯이 대답했다. "그게 아주 곤란한 점이야. 코흐와 페스트랴코프조차 위로 올라갈 때 두 사람을 못 봤다니까. 하긴 그들의 증언은 이 경우 대단한 의의를 갖지 못하지만. '그 방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은 분명히 보았습니다. 아마 그 안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죠. 그러나 지나칠 때 별로 주의하지 않았으므로 일꾼이 안에 있었는지 어떤지는 기억에 없습니다'라는 거야."
"흠! ....그러고 보면, 서로 때리고 킥킥거리며 웃었다는 것만이 유일한 변명이 되는 셈이군. 가령 그것이 유력한 증거라고 하세. 그러나....한마디 더 묻겠는데, 자네 자신은 이 사실 전체를 어떻게 설명하겠나? 귀고리의 발견을 어떻게 설명하겠나? 정말 그의 진술대로 주운 것이라고 한다면 말일세."
"어떻게 설명하다니? 설명할 게 뭐가 있겠나, 뻔한 얘기지! 적어도 사건을 이끌어갈 경로는 명료하게 증명되어 있어. 바로 상자가 그것을 증명하지. 다름 아니라 진범이 그 귀고리를 떨어뜨리고 간 거야. 살인범은 코흐와 페스트랴코프가 방문을 두드릴 때는 그 방에서 문고리를 잠그고 숨을 죽이고 있었어. 그런데 코흐가 어리석게도 아래층으로 내려간 거야. 그 밖에는 도망칠 길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놈은 층계에서 코흐와 페스트랴코프와 문지기의 눈을 피해 비어 있는 방으로 몸을 감추었어. 그것은 마침 미트레이와 미콜라이가 밖으로 뛰쳐나간 직후였지. 그래서 범인은 세 사람이 위로 올라가는 동안 문 뒤에 숨어서 발소리가 사라지기를 기다렸다가 유유히 아래로 내려간 거야. 그것은 마침 미트레이와 미콜라이가 길거리로 뛰어 나간 뒤고, 모였던 사람들이 죄다 흩어진 뒤라서 문간에는 아무도 없었을 때야. 어쩌면 본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별로 주의하지 않았겠지. 사람이 지나 다니는 것은 별로 이상할 것도 없으니까. 그 상자는 그놈이 문 뒤에 서 있을 때 호주머니에서 떨어졌는데, 놈은 그것을 몰랐지. 그 상자야말로 범인이 그곳에 서 있었다는 것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어. 사건의 실마리는 여기 있는 거야!"
"교묘하군! 아니, 정말 교묘해! 보통 교묘한 것이 아니야!"
"아니, 왜 그래? 왜 그렇다는 거지?"
"모두가 너무 잘 들어맞는단 말이야...너무 딱 들어맞아....마치 무대 위의 연극처럼."
"아니, 뭐라고?"하고 라주미힌은 외치려고 했으나 바로 그 순간 문이 열리고, 그곳에 있는 사람 누구와도 안면이 없는 낯선 사나이가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