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였던 20세기 초반에는 당대의 명창, 명기로 꼽히던 판소리 가수들이 일본에서 유행했던 노래들을 우리말로 번안해서 취입했는데 이것이 한국 대중가요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도월색(“시들은 방초”), 김산월(“장한몽”) 등을 시초로 해서 1920년대에는 윤심덕이 “사의 찬미”를 취입하며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를 부른 가수로 이름을 올렸고, 1930년대에는 고복수의 “타향살이”, “사막의 한”이 히트를 치면서 처음으로 레코드가수로 성공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윤심덕(“사의 찬미”), 이애리수(“황성옛터”), 채규엽(“술이란 눈물이냐 한숨이냐”) 등은 일제 강점기 시절 한국 대중가요의 초석을 다졌고, 고복수(“타향살이”), 이난영(“목포의 눈물”), 남인수(“애수의 소야곡”), 백년설(“나그네설움”), 김정구(“눈물젖은 두만강”) 등의 가수와 노래들이 민족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며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부연설명: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가 어느 노래인지에 대해서는 다소의 이견의 여지가 있으며, 대체로 “사의 찬미”, “낙화유수”, “황성옛터” 등의 노래가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편입니다. 그중에서도 일반적으로는 1926년에 발표된 윤심덕의 “사의찬미”가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이자 대중적인 히트곡으로 인정받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한편 “낙화유수”는 1927년에 발표된 노래로서 동명의 무성영화 “낙화유수”의 주제곡으로 쓰인 노래입니다. 발표된 시기는 “사의찬미”보다 1~2년 가량 나중에 나왔지만, “사의찬미”가 번안곡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순수한 국내 작사가, 작곡가에 의해 창작된 대중가요로서는 “낙화유수”가 최초의 대중가요로 꼽히기도 합니다.
“낙화유수”는 우리나라 최초의 여배우로 알려진 이정숙(이월화)에 의해서 불리워졌습니다. 이정숙은 이월화라는 예명으로 더 유명한데, 전문적인 가수가 아닌 배우 출신입니다. 1927년에 무성영화 “낙화유수”가 단성사에서 상영될 당시에 단성사 무대에서 배우 이월화(이정숙)가 직접 주제곡인 “낙화유수”를 불렀습니다.
“낙화유수”는 영화뿐만 아니라 노래 자체도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면서 1929년에는 정식 음반으로 발표되었습니다. 1930년에는 인기 배우 김연실이 부른 음반이 발표되며 더욱 유명해졌습니다. 이후 “낙화유수”는 황금심, 신카나리아 등의 가수들에 의해 불리워졌으며, “강남 달”이라는 별칭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한편 1930년대에 남인수가 발표했던 “낙화유수”는 동명이가(같은 제목의 다른 노래)입니다.
한편 “황성옛터”는 본래 1920년대에 작사가 왕펑과 작곡가 전수린에 의해서 “황성의 적”이라는 제목으로 만들어진 노래였고, 시간적으로는 “낙화유수”보다 먼저 만들어진 노래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구전으로만 전해져왔기 때문에, 공식적인 기록상으로는 “낙화유수”가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황성의 적”(황성옛터) 역시 종종 “한국 최초의 대중가요”로 소개되기도 합니다.
“황성의 적”은 순회극단이 단성사에서 공연을 할 당시에 배우들에 의해서 불리워졌는데, 최초로 이 노래를 부른 사람은 배우 신일선이었습니다. 이후 무대에서 주로 “황성의 적”을 부른 사람은 이애리수였습니다. 이애리수는 본래 전문적인 가수가 아닌 배우 출신이었지만, 순회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할 당시에 “황성의 적”을 부르며 막간가수로 활동하다가 1932년에는 “황성의 적”을 정식으로 음반으로 발매하며 배우 겸 가수가 되었습니다.
1932년에 발표된 “황성의 적”의 음반은 무려 5만장이 팔려나갔는데, 인구비례로 환산했을 때,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500만장의 가치에 해당할 정도의 엄청난 인기였습니다. “황성의 적”의 히트에 힘입어서 배우 겸 가수 이애리수의 인기도 절정을 달렸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윤심덕-사의 찬미”, “이애리수-황성의 적”은 한국 최초의 대중가수와 대중가요로서 역사의 첫페이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황성의 적”은 나중에 “황성옛터”로 제목이 변경되면서 오늘날까지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이난영은 1930년대 초~중반에 걸쳐서 활동하면서 윤심덕과 이애리수의 바톤을 이어받아서 당대 최고의 여가수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특히 1935년에 발표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일제 강점기 시절의 최대의 히트곡으로서 널리 사랑받았고, 광복 이후에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많은 국민들에게 사랑받고 있습니다. 또한 “목포의 눈물”은 오늘날 프로야구팀 해태(KIA) 타이거즈를 상징하는 응원가로도 널리 불리워지고 있으며, 김대중 대통령을 상징하는 노래로서 호남인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노래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고복수는 1934년에 “타향살이”를 발표하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데 이어서 “사막의 한”, “짝사랑”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1930년대 가요계의 최고의 스타로 군림했습니다. 고복수와 동시대에 활약한 라이벌 가수로서는 채규엽, 강홍식이 대표적으로 꼽히고 있는데, 채규엽은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가수”로서 이름을 올렸고, 강홍식은 배우 겸 가수로서 높은 인기를 얻었습니다.
1935년에는 "삼천리"라는 잡지에서 가수 인기순위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었는데, 남자가수 부문에서는 채규엽이 1위, 김용환이 2위, 고복수가 3위를 차지했고 여가수 부문에서는 왕수복이 1위, 선우일선이 2위, 이난영이 3위를 차지했습니다. 또한 왕수복은 남녀 가수를 통틀어서 채규엽, 김용환, 고복수, 선우일선, 이난영 등을 제치고 최다 득표자의 영예를 차지했습니다. 오늘날과는 달리 가요차트나 시상식 같은 체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던 시절에 사실상 최초의 설문조사 자료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1930년대에 인기를 누렸던 가수들 중 여가수 부문에서는 왕수복, 선우일선 등이 주축이 된 평양 기생 출신의 여가수들이 1930년대 초~중반에 걸쳐서 한바탕 거센 돌풍을 일으켰고, 이후에는 이난영과 장세정이 당대 최고의 여가수로서 쌍벽을 이뤘습니다. 남자가수 부문에서는 1930년대 초~중반에 걸쳐서는 채규엽이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로 전성기를 누렸고,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고복수가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오늘날 1930년대 가요계의 역사를 간략하게 정리할 때, 단일 히트곡으로서는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일제강점기 시절 최고의 히트곡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이난영은 일제 강점기 시절 최고의 여가수이자 보컬리스트로서도 명성을 떨친 것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30년대의 전체적인 가요계 판도를 조명했을 때는 고복수가 193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은 최고의 톱스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고복수는 남인수, 백년설이 등장하기 이전까지 국내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인물로서 기억되고 있습니다.
1930년대까지는 고복수가 가요계 최고의 톱스타로 군림하다가 1930년대 후반에 남인수, 백년설, 김정구 등의 신진세력이 등장하면서 세대교체가 이뤄졌습니다. 특히 1934년에 고복수의 “타향살이”가 히트한 시점이 “고복수 시대”의 개막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1938년에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이 히트한 시점부터 “남인수 시대”의 개막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데뷔 시기는 남인수, 김정구 등이 1936년에 데뷔했고 백년설은 그보다 조금 뒤인 1938년에 데뷔했습니다.
194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남인수와 백년설이 가요계 최고의 톱스타로서 양대산맥 체제를 형성했고, 이들에게 최고의 스타 자리를 내준 고복수는 주로 무대 공연 위주의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남인수와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김정구는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까지 남인수, 백년설과 함께 당대 최고의 톱스타로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김정구의 대표곡인 “눈물젖은 두만강”은 세월이 흐른 뒤인 1960년대 초반에 TV 반공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사용되면서 다시한번 유명해졌습니다.
남인수는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와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광복 전후의 시기에 걸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애수의 소야곡”, “가거라 삼팔선”, “감격시대”, “추억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무너진 사랑탑” 등의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배출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절인 1940년대에 남인수와 함께 쌍벽을 이뤘던 백년설은 “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 “마도로스 수기”, “삼각산 손님” 등의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배출해냈습니다. 남인수와 백년설은 당대 최고의 톱스타였지만, 친일가요인 “혈서지원”을 부르는 데 동원되면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기록되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습니다. (야후 위키백과 참조)
그 외에도 백춘재, 이옥화, 황금심, 고운봉, 백년설, 장세정, 이화자, 박향림, 진방남(반야월) 등의 가수들이 일제 강점기 시절의 식민지배의 애환을 달래주며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한편 김해송과 박시춘 등은 당대 최고의 작곡가로 명성을 떨쳤고, 반야월은 당대 최고의 작사가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특히 김해송은 작곡가 활동과 함께 가수 활동, 연주자 활동 등을 골고루 소화해내며 "대중음악계의 천재"로 불렸습니다. 박시춘은 남인수, 백년설 등의 당대 최고 인기가수들의 노래를 작곡하며 당대의 히트곡들을 배출해낸 작곡가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작사가 반야월은 가수 활동을 병행하며 진방남이라는 예명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광복 이전인 1920~40년대의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를 정리할 때는 윤심덕, 이애리수, 이난영, 고복수, 남인수, 백년설, 김정구 등의 이름이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남인수, 백년설, 고복수, 이난영은 일제 강점기 시절에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국민가수로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특히 남인수의 전성기는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를 거쳐서 1950년대까지도 건재하게 이어졌고 남인수는 당대 최고의 "가요황제"로서 명성을 떨쳤습니다. 오늘날 한국 대중가요의 역사를 정리할 때도 “광복 이전의 가요황제 남인수”와 “광복 이후의 가왕 조용필”은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서 전설 중에서도 왕중왕의 반열에 올라 있습니다.
1945년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는 현인이 최초로 가수로 등록하면서 “대한민국 1호 가수”라는 명예로운 별칭을 얻었습니다. 현인은 광복 이후와 6.25 전쟁 이후에 걸쳐서 주옥같은 히트곡들을 배출해내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남인수는 1940년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면서 “가요 황제”라는 별명을 얻었고 1950년대 들어서도 여전히 가요계 황제로서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1940년대에는 남인수와 백년설이 가요계의 양대 톱스타로 군림했고 1950년대에는 남인수와 현인이 가요계의 양대 톱스타로 군림했습니다.
야후 위키백과에서 과거 가수들의 프로필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일부 가수들은 친일 행적이 발견되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안타까움을 남기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의한 폭압적 식민지배라는 아픈 역사의 상처로 인해서 한국 대중가요의 뿌리가 친일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하지만 광복과 대한민국 건국 이후의 대중가요의 발자취를 알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역사에 대해서도 조사하는 것은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그리고 과거의 불행한 역사의 상처를 딛고 발전을 거듭한 한국 대중가요는 오늘날에는 “한류”라는 키워드와 함께 아시아 각국에서 각광받으며 위상을 떨치기에 이르렀습니다.
{출처: 과거 신문기사와 TV 방송 등을 기본 토대로 해서, 인터넷 검색(네이버, 다음, 가수 홈페이지)을 통해서 얻은 정보들을 참고했습니다. 특히, 옛날 가요 부분은 네이버 지식인, 네이버 백과사전, 위키백과 등의 자료에 더욱 많은 부분을 의존했습니다.}
** 원문 작성자 => JOHN CENA
** 원문 작성 날짜 => 2012년 7월 6일
** 원문 출처 => http://johncena07.blog.me/701417703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