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를 통틀어 가장 완강하고 꼿꼿하게 일제에 맞섰고, 최후까지 일점 흔들림 없던 지사(志士)로 꼽히는 세 명이 있다. 단재 신채호, 만해 한용운 그리고 심산 김창숙이다.
단재와 만해는 해방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그것이 아쉬울 수도 있었겠지만, 그 뒤의 전쟁과 독재를 경험하지 않은 것은 오히려 다행한 일일지도 모른다. 단재나 만해 성격에 이승만 같은 이를 만났더라면 폭탄이라도 들고 경무대로 돌진했을지도 모르니까. “이 늙은이야. 내 너 같은 자에게 이 나라를 맡기자고 독립운동 한 줄 아느냐!” 하면서. 차라리 먼저 죽은 것에 가슴 쓸어내렸는지도 모른다. 일본인도 아니고 해방된 제 나라의 대통령을 두고 “내 죽거든 내 눈을 빼 대한문에 매달아 놓으면 포악한 독재정권이 반드시 망할 것을 목격하리라.”고 절규하는 심산을 내려다보면서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선비, 일제에 항거하다
심산은 전통의 명가 의성 김씨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유학자의 엄격한 가정교육하에서 자라났다지만 그의 아버지는 천민 의병장이 건방지다고 목이나 치던 양반 꼴통이 아니셨다. 공부하는 아들을 불러 농사일을 시키며 귀천이 따로 있지 않다고 교육시켰다고 하니까. 을사조약이 맺어졌을 때 서울에 올라가 울분을 토하다가 그 빵잽이 인생을 처음 시작한 이 청년 유림은 경술국치를 맞고는 아예 혼이 나가 버린 듯 술로만 세월을 보내다가 다시 한 번 절치부심한다. 내 기어이 잃어버린 나라를 다시 찾으리라.
3.1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는 유학자로서 뼈저린 통한을 남긴다. 민족대표라는 33인 가운데 기독교가 16명 천도교도 15명 불교도도 2명이 낀 데 반해, 조선 왕조 5백 년 동안 우대받았다는 유림 선비들의 이름 석 자는 눈을 씻고 봐도 끼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김창숙으로서는 부끄럽기 이를 데 없는 일이었다.
“우리나라는 유교의 나라였다. 실로 나라가 망한 원인을 따져보면 이 유교가 먼저 망하자 나라도 따라서 망한 것이다. 지금 광복운동을 선도하는 데 3교의 대표가 주동을 하고 소위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다.”라며 울분을 터뜨린 그는 뒤늦게나마 유림의 체면을 세울 일 하나를 기획한다. 이름하여 파리 장서 사건이다. 김창숙의 주도로 약 137명의 유림들이 연명한 독립탄원서를 평화회의가 열리던 파리로 보낸 것이다.
이 탄원서의 기초를 만든 것은 경남 산청의 유림 곽종석이었는데, 그는 죽을 자리를 얻었다고 기뻐하며 적극적으로 나섰고 체포된 뒤에도 일본 법에 호소하는 죄수가 아닌 적국의 포로라고 주장하며 항거하다 고문 후유증으로 옥사한다. 그 기개를 김창숙은 고스란히 받아 안는다. 상하이로 망명한 김창숙은 손 하얀 선비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웠던 과감한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친일파 자금이 흘러든 부호의 집 담을 넘는 것까지도 말이다.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아오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던 그는 결국 그것이 빌미가 된 2차 유림단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다. 14년 형을 선고받은 그는 말할 수 없는 악형에 시달린다. 그 와중에 그는 이런 한시를 써서 내민다.
“조국 광복을 도모한 지 10년에 가정도 생명도 돌보지 않았노라. 돌무더기 아래 스러진 일생은 백일하에 분명하거늘 고문을 야단스레 할 필요가 무엇이냐.”
이에 기가 질린 일본 형사는 고문의 강도를 낮췄다고 한다. 뭘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영감이로구나 싶었겠지. 그뿐 아니라 그는 재판 과정에서도 변호사를 거부한다. 김완섭 변호사가 와서 간청을 했지만, 그는 끝내 변호를 거부했다. 그 변호 거부의 변이 비장하나 참담하다.
“어머님 돌아가시고 자식도 죽어 집이 망했으매, 늙은 아내와 며느리의 울음소리, 꿈결에도 소스라치네. 포로 신세의 광태(狂態), 어찌 욕되다 이르리오. 바른 도리 얻어야 죽음도 영광인 줄 알리라. 그대들의 구구한 변호, 사양하노니, 병든 이 몸 구차히 살기를 원치 않노라.”
어머니는 그가 중국에 있을 때 쓸쓸히 돌아가셨고 아들 둘은 모두 일제의 손에 죽었으며 며느리는 청상이 되어 집안을 지키고 있었다. 그 모두를 바라보기만 할 뿐 살펴주지 못했던 가장으로서의 괴로움이 어찌 작았을까. 하지만 그는 자신을 피고인으로 여겨 변호를 받을 요량이 없었다. 자신의 주청에 따라 기꺼이 독립 청원서를 쓰고 죽을 자리를 얻었노라 기쁨을 감추지 못하던 곽종석이 ‘포로’를 자임했던 것처럼. 그는 고문으로 두 다리를 못 쓰는 앉은뱅이가 되지만 끝내 살아남아 해방을 본다.
선비, 독재에 항거하다
그러나 그는 일찍이 1921년에 김원봉, 이극로, 오성륜 등과 함께 “스스로 조선 민족 대표라 일컬으면서 미국의 노예 되기를 원했음은 그 광복 운동 사상에 치욕 됨이 크다. 이것은 방치할 일이 아니므로 문책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격렬히 성토했던 바로 그 인물, 미국에 한국을 위임통치해 줄 것을 요청했던 이승만이 해방된 나라의 정권을 잡는 걸 지켜봐야 했다.
적어도 해방 공간에서 이승만 ‘박사’에게 따박따박 꼬장꼬장 꼬챙이 같은 질문을 꽂아넣은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이승만에게 김창숙은 이렇게 묻는다.
“당신이 이미 민족을 팔았거니와 어찌 다른 날에 국가를 팔지 않는다 보장하겠는가.”
남북의 분단을 누구보다 가슴 아파한 그였고 5.10 남한 단독 선거도 반대한 그였지만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한 북한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삼팔선을 베고 죽을지언정 분단은 안 된다며 삼팔선을 넘는 김구에게 “이승만하고도 협조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김일성의 협조를 얻어내겠는가.” 한탄했다고 하며, 6.25 때 서울이 함락된 후 남로당의 거물 이승엽이 회유했으나 단호히 거절하고 1.4 후퇴 때에는 부산으로 남하한다.
언젠가 부산 피난 시절 성균관대학교 졸업식에서 그가 남긴 훈화가 발견됐다.
“우리가 이 성대한 식전(式典)을 거행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3.8선 이북 전선에서는 우리 국군 장병 몇백, 몇천 명이 총칼에 선혈을 뿌리고 사장(沙場)에 백골을 묻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국군 장병 수십만이 피를 뿌리고 지켜낸 공화국이 망가지는 것을 그는 참을 수 없어 했다. 이승만 정권이 효창운동장을 짓는답시고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등 독립운동가들의 묘를 옮기려 들었을 때 불도저 앞에 드러누워 저지하거나 이승만 대통령의 출마를 반대하거나 하야를 권유하는 등 이승만의 눈에 가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자유당 일방으로 악법들을 통과시키고 시행함은 전 책임이 대통령에게 있음으로 하루라도 빨리 하야하라.”
그리고 그는 끝내 이승만 대통령이 성난 국민들에 의해 하와이로 쫓겨 가고 새로운 민주정부가 들어서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군인들의 쿠데타는 기껏 4.19가 일궈 놓은 성과를 군홧발 아래 뭉개고 말았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김창숙은 1962년 5월 10일. 그가 그렇게도 반대했던 단독선거가 있은 지 14년 만에 세상을 뜬다.
두 아들은 벌써 불귀의 객이 된 지 오래였고, 너무나 애처로운 나머지 담배라도 배우라며 담배를 가르쳐 준 며느리가 그 유족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성균관대학교 총장부터 백범기념사업회장, 안중근기념사업회장, 장 자리는 꽤 도맡아 했지만, 그는 집도 절도 없었다. 병원비조차 없어 여관과 병원을 전전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선비의 죽음이었다.
그가 1957년 지은 「통일은 어느 때에」란 시를 읽어 본다.
조국 광복에 바친 몸
엎어지고 자빠지기
어언 사십 년
천하는 지금
어느 세상인가
사람과 짐승이 서로들 얽혔네
붉은 바람 미친 듯
땅을 휘말고
태평양 밀물 넘쳐서
하늘까지
닿았네
아아, 조국의 슬픈 운명이여
모두가 돌아갔네
한 사람 손아귀에……
반역자의 주먹에
평화는 어느 때나
실현되려는가
통일은 어느 때에 이루어지려는가
밝은 하늘 정녕
다시 안 오면
차라리 죽음이여
빨리 오려므나.
성균관대 학생들은 오랫동안 청년 심산을 외쳤다. 언제부터인가 심산상이 제정되어 민주화와 인권 운동에 발자취를 남긴 이들에게 수여되어 심산의 이름이 이어지나 했다. 그런데 검색하다 보니 이 심산상이 2006년 17회 이후 중단돼 있다고 한다. 하필이면 그때쯤 삼성이 성균관대 재단을 장악했다는 사실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