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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4월3일(수)맑음
욕망의 완전한 만족이란 없다. 자기의 욕망이 남의 것을 모방한 것이 아닌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만족할 수 없는 것을 갈망하는 것이 욕망의 속성이다. 그러기에 욕망은 불만족성(dukkha, unsatisfactory-ness, insatiability)이다.
조건 지워진samkhata, 의도된cetayitam, 연기된 것(관계로 이루어진, 인과율 때문에 전개된/paticcasamupanna)은 무엇이나 무상하며 고통이다. 그런 것들은 나의 것이 아니며, 내가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
2019년4월8일(월)맑음
일요일에 송광사 보성 방장 천도제 막제 참석하고 행자 도반들 만나다. 덕조(불일암 암주), 대경(율원장), 원경(심곡사 주지), 보경(탑전), 정인(규봉암 주지), 현명. 보성 대원사 참방하여 현장스님 만나고, 횡천 지나 청암에 사는 미공스님 토굴을 찾다. 근처에 있는 현명스님 토굴에서 쉬다. 아침 일출을 보다.
게송 짓다.
深谷路端有庵靜, 심곡로단유암정 깊은 골짝 끝난 곳에 고요한 암자 있어
碧溪石澗華桃紅; 벽계석간화도홍 푸른 물 시내 옆 복사 꽃 붉어라
正中來時彌空邊, 정중래시미공변 진공의 경지에서 벗어났는가,
金烏飛過一嘯長. 금오비과일소장 금 까마귀 날아가며 길게 우짖는군.
<오곡도 명상수련원 장휘옥 교수 법문>
우리 마음은 항상 같은 길로만 다닌다. 사람과 사물을 늘 고정된 자신의 좁은 시각으로만 보고, 자기 본위로만 생각한다는 말이다. 이 길에서 벗어나 진리의 풍경을 보기란 쉽지 않다. 대부분은 평생을 같은 길로만 다니다가 생을 마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끊임없이 정진하는 사람에게는 막힌 길에서 벗어나 별 것 아닌 것에서 진실을 보는 계기가 찾아온다. 그 계기는 지나가는 평범한 말 한마디일 수도 있고, 평소에 늘 보던 마당의 꽃 한 송이일 수도 있다. 익숙한 경전 한 구절이 마음을 울릴 수도 있다.
불행한 경험이 자신으로 하여금 고정된 길에서 벗어나 진실을 보게 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이 기회는 행복할 때보다는 불행할 때 오히려 찾아온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은 힘들고 어려워야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환골탈태하는 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찾아온 불행을 계기로 과거와 다른 진실한 사람이 되었다면, 이때의 불행은 불행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 불행 때문에 정신 질환을 앓거나 암에 걸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야말로 불행이다.
불행이라 불리는 것에 불행을 반드시 가져오는 고정된 뭔가가 있다면 모든 경우에 그것은 항상 불행을 초래해야 한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불행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어 불행이 다행인 경우도 있다. 따라서 불행이라 불리는 것에는 고정된 불행이란 것은 없다. 대승불교에서 이것을 ‘불행은 공空이다.’라고 표현한다.
불행은 공이기 때문에 인연에 따라 불행이 될 수도 있고, 도약의 계기도 될 수 있다. 도약의 계기로 삼으려는 의도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이것이 선업이다. 불행이라는 생각과 명칭 없이 그냥 그것과 직면하는 것, 그 것은 더 차원 높은 선업이 된다.
자신이 간절히 욕망하는 것을 마음대로 하고자 것은 거기에 의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강력하게 원하는 것은 강력하게 의존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지키고자 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다
*시인 황지우는 십여 년 전 작가와 평론가의 내면적 고민을 들려주는 자리에서 이렇게 이야기했다. “문학이 자본의 부가가치에 의해 계량화되고 교환되는 시장 속에서, 삶이 한낱 시장판이 되어버렸을 때의 그 속물적인 난장 속에서 문학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이 세상에 아름다움과 진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기 위해서만 있을 필요가 있는, 시장에 대한 강력한 항체로서 문학의 귀족성을 나는 요청하고 싶다. 문학은 ‘문화자본’의 부가가치에 의해 계량화되고 교환되는 시장으로부터 은둔해야 한다.” <류지호 칼럼/불광지>
상업화된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자본화하여 전한다. 그런 불교가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거나, 심리적 위안과 자선 사업만으로 자본의 구조를 은폐하고, 체제에 봉사할 뿐이다. 오늘 황지우의 입을 빌려 말하면, 자본의 부가가치에 의해 계량화되고 교환되는 시장 속에서, 이 세상에 진리(다르마)가 아직 존재하고, 무소유와 공동체 수행전통이 아직 존재한다는 것을 알릴 필요가 있는, 시장의 강력한 항체로서 불교의 귀족성(脫俗탈속이라고 해야 할까?)을 이제는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불교는 이제 자본과 시장으로부터 초연해야한다는 내면적 고민이 필요한 때이다.
『법구경』에 이런 말씀이 있다.
“얼마나 큰 기쁨인가. 깨어 있는 이를 찾아서 그와 함께 하는 삶이여. 만일 함께 갈 벗이나 스승을 만나지 못했거든 왕국을 버리고 떠난 왕처럼 숲속의 코끼리처럼 혼자서 가라. 그러다 덕스럽고 슬기로운 이들을 만나면 기꺼이 그들과 동행하면서 도중의 위험을 함께 극복하라. 달이 별들의 길을 쫓아가듯이 저들의 뒤를 따라가라.”
『출요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가서는 부드러운 안색이 되고 들어와서는 기쁨을 함께 하여, 서로 존경해 아버지인 듯 형인 듯 대하며, 상대를 내 몸과 다름없이 여겨 마음으로 늘 친하게 지내야 한다. 이렇게 서로 존경하면, 모두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4가지 출세간법(승의제, 무위법)의 하나인 nibbana닙바나는 천오백 가지 번뇌를 줄인 열 가지 번뇌 중 세 가지 번뇌가 뿌리 뽑힌 청정한 상태로 최초의 성스러운 과위(수다원)에서 체험하는 경지이다. 이는 삼보에 대한 확신, 법과 사성제를 이해하는 상태이다.
①몸과 마음들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 모두가 사라진 고요함을 닙바나라고 한다.
②생겨나지 않음의 성품, 고요한 성품을 닙바나라고 한다.
③생기고 사라지는 몸과 마음 차례가 소멸한 성품을 닙바나라고 한다.
④생기고 사라지는 모습, 상카타(sankhata조건), 개념, 이미지가 모두 소멸한 성품을 닙바라라고 한다.
⑤오취온을 만들어 유지 존속하려는 업이 모두 소멸된 것을 닙바나라고 한다. <붓다라키타>
언어를 매개로 사유한다. 언어가 없으면 사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만 느낄 뿐이다.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하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을 지켜라.
그것에 대한 개념과 어휘가 있을 때만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수 있다.
그것에 대한 개념과 어휘가 없다면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말할 수 없다.
2019년4월29일(월)비.
화엄사에서 명섭, 본해스님 오셔서 점심공양하다.
<제일의공경>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이것이 공성의 의미이다.
화는 있되 화내는 자는 없다. 착한 놈도 없고 악한 놈도 없다. 다만 착한 행이 있고 악한 행이 있을 뿐이다. 잘 난 놈도 없고 못 난 놈도 없다. 다만 잘 난 행동이 있고 못 난 행동이 있을 뿐이다. 몸은 실체가 없다. 몸은 업보로 얻는 것이다. 자기의 몸은 스스로의 노력(건강한 식습관과 적당한 운동)으로 제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갈 수 있다. 자기의 삶은 스스로의 힘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그의 삶을 강제하거나 구속할 수 없다.
화는 화를 먹고 자란다. 화를 풀지도 말고 참지도 말라. 다만 화를 보라. 중생은 화를 내고 나서 안다, 보살은 화를 낼 때 안다. 부처는 화를 내기 전에 안다.
생각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것이 중생이다. 끊어라. 멈추라.
洗腦세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세뇌를 해야 한다.
유/무의 문제에 빠지지 말라. 존재의 유/무란 (연기해서 생멸하는)현상일 뿐이다.
모든 현상dharma은 연기/관계에서 생겨난 것이다.
닭이냐 달걀이냐의 문제는 환원주의적 사고에서 나온 선형적 인과론의 모순을 보여준다. 복잡다단한 만물은 더 이상 소급할 수 없는 제일 원인(태초, 창조)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것이 환원론이며, 사물은 단일자monad들이 모이고 쌓여서 이루어졌다는 발상이 원자론(요소실재론)이다. 환원론적으로 생각해보자면 그 태초이전은 언제 시작되었는가라는 무한 소급의 오류에 빠진다. 원자론은 양자역학의 등장으로 퇴색하고 말았다. 그러면 대안이 되는 패러다임은 무엇인가? 상호인과율과 상대론적 세계관을 통합한 일반시스템이론(general system, 유기체론)이다. 그러므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라는 질문은 묻는 방식에는 오류가 내포되어있다. 어떤 것이 어떤 것의 먼저냐는 질문은 선형적 인과율과 결정론적 인과율에서 나온 발상이다. 자연은 선형적 인과율을 뛰어넘어 훨씬 유연한 상호인과율이 작용한다. 달걀 없는 닭 없고, 닭 없는 달걀 없다. 그러므로 달걀과 닭 사이엔 선후가 없다. 닭이 있어야 달걀이 있고, 달걀이 있어야 닭이 있게 된다. 함께 나타나고 함께 사라진다. 상호인과 관계에서는 어떤 것이 어떤 것보다 먼저라기보다는 함께 의존하여 발생한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이 공생공존이다.
상호인과율에 비추어 볼 때 사고와 행위의 주체로서 ‘나’는 실제로 환경과 상호작용 하고 있는 행동의 동적 패턴이며, 그렇기 때문에 내가 겪는 일상의 경험과 ‘나’를 분리할 수 없다. 그래서 ‘나’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이렇게 자아를 상호연기적 과정으로 보는 것이 무아라고 이해할 수 있다.
12入處: 內6입처 & 外6입처. 자아와 세계가 분리되어 경험되는 인식론적 근거가 된다.
자아를 실체시 한다(실아, 아견, 아집). 대상을 실체시 한다(실법, 법견, 법집).
본래 一空인데 나와 세계로 분리되어 경험된다. 그래서 경험하는 주체로서 나는 내입처로,
경험되는 대상세계는 외입처로 분리된다. 내입처는 ‘나’가 머무는 장소가 되고 외입처는 ‘객관 대상’이 머무는 장소가 된다. 그래서 處처 ayatana라고 한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 노무현 정신의 핵심은 시민 개개인의 각성, 그리고 각성한 개인들의 연대이다.
2019년5월16일(목)맑음, 음4월 보름
연경처사 차타고 지리산을 향해 달리다. 화엄사 선등선원에 하안거를 지내기 위해 입방하다. 선원장 본해 스님이 맞아주신다. 한주실에 짐을 풀어 정리하다.
과거를 질질 끌고 다니지 말라. 결별을 잘 하는 법을 배워라. 몸의 순환에 충실 하라. 수행은 몸으로 익히는 것이다. 무엇을 더하기보다는 덜어내라. 잘 쉬고 잘 자라. 오늘에 대해 어떠한 미련도 없이 시간의 흐름을 끊은 듯 바로 내려놓아라. 동의보감에 의하면 사람의 수명은 호흡인데 그 호흡의 숫자가 정해져 있다. 선천 60, 후천 60, 도합 120세가 인간의 정명이다. 매일을 창조적으로 살아라. 돈이 안 되는 일을 하는 것이 창조적으로 산다는 것이다. 무슨 일을 하던 돈이 개입되면 사업이 되고 만다.
행복한 것도 훈련해야 된다.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면 원한감정이 싹튼다. -니체
사랑이란 삶을 선물하는 것이다.
사랑의 죽음이라는 결별을 선물하는 것도 사랑이다.
우리 몸은 타자들의 공동체이다. 나의 몸은 내 것만이 아니라 공동소유이다.
運命운명이란 ‘명命을 運轉운전한다.’는 뜻이며, 時勢시세는 ‘때時의 形勢형세’를 말한다. 상황과 시운의 유불리가 시절인연이라는 것이다. 성공도 좌절도 결국은 ‘타이밍’이 결정한다. 그러니 뜻대로 이루어졌다고 용약할 것도 없고, 느닷없이 난관에 부딪혔다고 낙담할 것도 없다. 시대적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때를 만나지 않고 이루어진 역사는 없다. 그러니 그 흐름에 따라 유연하게 흘러가라.
“누군가가 자신을 혁명적 투사라고 믿는 바로 그때, 어떻게 해야 파시스트가 아닐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는 말과 행동에서, 심장과 쾌락에서 파시즘을 떨쳐낼까? 우리의 행동 속에 배어 있는 파시즘을 어떻게 해야 색출해낼까?”라는 푸코의 질문은 뼈에 사무친다.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신체 깊숙이 새겨진 리듬과 강밀도를 바꾸라! 이것이 명리학의 개운법이다. 집단의 운명 또한 다르지 않다. 사회를 바꾸고 싶다면 반드시 환기해야 한다. 혁명이란 시스템과 구조의 변혁이 아니라 그 안에 내재한 욕망의 흐름을 창조적인 순환으로 변주하는 것이다.
“개미는 단것에 모이고 사람은 새로운 것에 모인다. 문명인은 격렬한 생존 가운데서 무료함을 한탄한다. 서서 세 번의 식사를 하는 분주함을 견디고 길거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병을 걱정한다. 삶을 마음대로 맡기고 죽음을 마음대로 탐하는 것이 문명인이다. 문명인만큼 자신의 활동을 자랑하는 자도, 문명인만큼 자신의 침체에 괴로워하는 자도 없다. 문명은 사람의 신경을 면도칼로 깎고 사람의 정신을 나무공이처럼 둔하게 한다. 자극에 마비되고, 게다가 자극에 굶주린 자는 빠짐없이 새로운 박람회(요즘은 백화점, 공연장, 클럽, 놀이동산 등)에 모인다.”(나쓰메 소세키, <우미인초>)
나는 자신의 아버지이며 어머니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식이기도 하다. 나 자신이 나의 가족인데 또 다시 무슨 가족이 필요한가? 아빠, 엄마, 자식이라는 닫힌 삼각형에서 벗어나라. 거기는 ‘가족’이란 이름으로 서로 기대고 빨아먹으면서 죽을 때까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감옥이다.
*도인이 어느 날 한가하게 시장을 걷다가 우연히 어느 가게의 한 통속에 들어있는 뱀장어를 보았다. 포개지고 뒤얽히고 짓눌려서 마치 숨이 끊어져 죽을 것 같았다. 이때 홀연히 그 통속에서 한 마리의 미꾸라지가 나타나 상하좌우전후로 끊임없이 멈추지 않고 움직이니 마치 神龍신룡 같아 보였다. 뱀장어들은 미꾸라지에 의해서 몸을 움직이고 기가 통하게 되었으며 생명의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제 뱀장어들이 몸을 움직일 수 있고 기를 통하게 되었으니 뱀장어의 목숨을 건진 것은 미꾸라지의 공인 것이 틀림없으나 그 역시 미꾸라지의 즐거움이기도 했던 것이다. 결코 뱀장어들을 불쌍히 여겨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또 뱀장어의 보은을 바라고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스스로 그 ‘본성에 따른’ 것에 불과하다.
-왕심재, <추선부-미꾸라지에 대한 노래>
왕심재는 양명학의 원조인 왕양명의 수제자다. 미꾸라지는 타인을 위해 뭔가를 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본성대로 활발하게 움직였을 뿐이다. 그런데도 다 죽어가던 뱀장어들이 그 기운을 받아 다시 살아났다. 미꾸라지와 뱀장어 사이에는 어떤 부채도 책무도 없다. 이것이 생명의 향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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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지성의 시대, 스마트 정보의 시대, 중년학교, 인생-야학당
마음 둘 곳,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만남, 수행과 양생 공동체
*사랑이란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에게 무차별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내가 좋은 길을 뚫어놓았으니 그 길로 더 빨리 가라고 내모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열어가도록 해야 한다. 남이 닦아놓은 고속도로가 무슨 소용이랴. 울퉁불퉁 진흙탕이라도 내가 가는 길이 더 소중하다. 생명의 원동력인 창조와 순환은 거기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Let it go!’다. 여기서 ‘go’는 자기가 선 자리에서 한 걸음 나아간다는 뜻이다. 내가 걷는 단 한걸음, 그것이 나의 인생이다. 그런데 걸음을 내디디려면 질문이 필요하다. 질문하는 자만이 길을 갈 수 있다. -고미숙
修養수양-수행과 양생. 공부란 무엇인가? 삶을 돌보는 기예, 곧 양생술이다. 배움이 존재와 세계에 대한 탐구라면 가장 구체적인 현장은 다름 아닌 몸이다. 또 그 몸이 움직이는 일상의 動線동선과 리듬이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 또 그 사람과 맺는 관계가 곧 나다! 이것이 무진연기 인드라 망이다. 그런 점에서 배움이란 그 자체로 ‘공동체적 신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 둘 곳,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만남, 수행과 양생 공동체
자기를 구원하는 것은 자기이다.
어떤 메시아나 도인이나 불세출의 스승이 와도 너를 구원하는 것은 너 자신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글쓰기의 창조성>
“창조는 연결이다.”-스티브 잡스
생산수단은 인터넷이다. 스마트폰의 출현으로 누구나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게 된 셈이다. 이제 남는 것은 창조자냐 소비자냐의 구별뿐이다. 자본에 매이지 않고도 창조가 가능한 노동으론 글쓰기가 최고다. 글쓰기는 소통과 순환의 최고형식이다. 언어를 질료로 삼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은 수많은 매체가 범람하지 않는가. 심지어 개인이 언제든 매체를 만들 수도 있다. 게다가 생산수단은 노트북 하나면 충분하다. 수많은 책에 둘러싸일 필요도, 두꺼운 원고지도 필요하지 않다. 노트북 하나면 검색과 생산, 유통까지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것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다.
*헝가리의 애국시인 푀퇴피 샨도르의 ‘희망의 노래’
희망이란 무엇인가? 창녀
그는 누구에게나 웃음 짓고, 모든 것을 준다.
그대가 가장 큰 보물-
그대의 청춘을 바쳤을 때, 그는 그대를 버린다.
희망도 절망도 없는 그 경계에서 살 길을 구하라!
“모두에게 모든 것을, 우리에겐 아무것도! Everything to all, nothing to us”
1994년 나프타NAFTA협정에 반대해서 일어난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혁명군이 내건 구호다. 루쉰魯迅도 혁명이란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