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난 당황하지 않으려고 앞을 똑바로 처다 보았다. 그 룸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나를 보고 있는
데 그 세 사람은 나를 전혀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오민주라는 여자가 나를 옆으로 쳐다본
다.
저 당연하다는 확연한 미소를 띄면서 ....
저 두 사람들로 인해 미세히 떨리는 얼굴이 떨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 주저
앉고 싶을 정도로.....
그때 누군가 나의 팔을 자신의 팔에 끼우는 것을 느꼈다.
나를 보며 환하게 웃는 그 사람을 보았다. 장세진 .. 김인혁의 친구.....
“ 그렇게 울 거 같은 얼굴 사람들도 다 알거에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쓰러지거나 울
거는 아니죠 ? ”
번쩍 드는 정신.....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눈물이 많았던가 ..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
었을 때에도 난 울지 않았다.
난 그를 옆으로 올려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 난 울지 않아... 그리고 더 이상 김인혁에게 기
대지 않아... 나도 혼자 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거야.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를 보여줄 거야. 아직까진 난 그 사람의 아내니까.....
난 할 수 있는 한 가장 차분하고 우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 아직 날 모르는 군요 ... 난 그렇게 잘 우는 성격이 아니에요... 오늘 날 에스코트하는 분은
세진 씬가요 ? ”
나를 보는 그의 눈에 웃음이 빛난다. 그가 김인혁이 있는 곳을 턱으로 가르키더니 나의 귀에
속삭인다.
“ 아직은 모르죠... 하지만 그런 영광을 주신다면 일회용 에스코트는 멋지게 할 수 있을 거 같
은데요 ... ”
나도 김인혁과 오민주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김인혁의 등을 살짝 쓰다듬는 것이 보인다.
“ 내 남편은 바쁜 거 같으니 부탁드릴게요.... 다른 분들께 소개 시켜주시겠어요 ? ”
그가 한동안 나를 놀란 눈으로 보더니 크게 웃으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 무리로 이
끈다. 나이가 지극해 보이시는 어떤 여자 분에게 다가가는 장세진을 따라서 난 발길을 옮겼
다.
그 분은 하얀 머리에 인상적인 검은색 정장을 입고 계셨다. 퉁퉁한 몸이 그녀를 더욱더 귀엽
게 보인다. 나이가 들어 귀엽게 보이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인데.....
“ 최사장님...... 그렇게 보고 싶어 하시던 이수하씨 대령했습니다. ”
그 인자하신 분은 장세진을 보며 얼굴을 웃으며 찡그렸다.
“ 장세진... 니가 그렇게 말하면 내가 스토커가 된 거 같잖니... 안녕하세요... 난 최미령이란
사람이에요 .. 꼭 만나고 싶었는데 이제야 만나네요 ... ”
나에게 손을 내미는 잡고 그 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 만나서 반갑습니다. 이수하입니다. ”
“ 생각했던 것보다 굉장히 아름다운 사람이네요..... 아! 수하씬 기억을 못하겠지만 수하씨 결
혼식날 봤어요... 그때는 애기 같았는데... 아름다운 여성이 됐네요. ”
난 그녀를 보며 미소 지었다. 최사장님의 따뜻한 음성에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 그런데 인혁이는 어디 간 거야 ? 이렇게 아리따운 부인을 놔두고 ..... ”
“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10초 후면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
난 장세진이 유쾌하게 말하며 손으로 가르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뭐가 못마땅한지 얼
굴은 잔뜩 찡그리고는 이쪽으로 성큼 성큼 걸어오고 있다.
# 18
“ 언제 온 거야 ? 왔으면 왔다고 해야 할 거 아니야 ? ”
사람들이 많은지도 모르는 건가 ? 김인혁은 화가 난 듯한 얼굴로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한
쪽 손에는 아직도 오민주의 팔을 끼고서 ...
자기는 저 여자를 데리고 얘기하느라 내가 온지도 몰랐으면서... 이제 내가 왔다는 얘기를 안
했다고 화난 다는 거야?
여기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이제는 그에게 휘둘리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던 것을 기억
해냈다.
더 이상 당황도 울지도 않을 거야.....난 당황한 얼굴을 거두고는 환하게 웃었다.
“ 바쁘신 거 같아서요.. 다행히 세진씨가 최사장님께 인사를 시켜주셔서 이렇게 뵙고 있었어
요. ”
그때서야 사람들이 주위에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김인혁은 오민주에게 팔
을 빼더니 최사장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 어머니 오셨습니까 ... 죄송합니다. 오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습니다. ”
최사장은 환하게 웃으며 인혁을 안았다. 어머니 ?
“ 한국에 잠깐 볼일이 있어서 들렸단다. 네 부인이 한국에 있다는 소리를 듣고 보고 싶기도 하
고.... 참 좋구나 . ”
김인혁은 최사장을 향해 따뜻한 시선을 보내더니 나를 자신의 몸에 꼭 밀착시켰다. 갑자기
한 그의 행동에 숨을 헐떡였다.
“ 어머니께 제일 먼저 인사 시켜드리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세진이가 먼저 해드렸군
요... ”
“ 니가 결혼해서 행복한 모습을 보니 참 좋구나.... 우리 세진이도 얼른 결혼해야 할텐데.. ”
밝게 웃던 장세진이 최사장을 뒤에서 안는다.
“ 어머니도 참 지겹지도 않으세요 ? 전 제가 하고 싶을 때 할 겁니다. 이제 제발 포기하세
요... ”
나의 허리에 손에 힘을 꽉 주는 그가 장세진을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쳐다보았다.
“ 걱정 마십시오 . 어머님... 제가 중매 서겠습니다. ”
자기를 바라보며 얼굴을 찡그리는 김인혁을 보고는 장세진은 더욱더 크게 웃는다.
“ 이제 전 가봐야겠습니다. 어머니 이따 저녁에 전화 드릴께요... 그리고 수하씨 ? ”
나를 보며 환하게 미소를 짓는 장세진.... 나도 그 미소에 전염되어 환하게 웃는다.
“ 일회용 에스코트는 이만 물러갑니다. ”
“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
내 한쪽 손을 잡고 그가 입을 맞춘다. 내 허리를 잡은 김인혁의 손에 힘이 들어간다.
“ 그런 신경은 백 번 천 번 써도 상관없습니다. 그럼 전 이만 .... ”
당황한 나를 두고 장세진은 뒤를 돌아 여러 여자들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얼굴이 붉
어지는 거 같다.
“ 수하씨 신경 쓰지 말아요.... 원래 저 아이가 그러니까 .. 아~ 외국생활을 수하씨도 많이 했
으니 괜찮죠 ? ”
자신의 아들이 한 행동에 내가 혹시 불쾌했을 까봐 따뜻하게 쳐다보는 최사장이 참 따뜻하
다.
“ 괜찮습니다. 좋은 분 이신걸요 ”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을 느낀다. 왜 저렇게 화난 얼굴로 쳐다보는지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다.
“ 어머님.... 잠깐 실례하겠습니다. 제 아내를 잠깐 빌려가도 될까요 ? ”
“ 물론이지..... 곧 다시 만나요 수하씨..... ”
최사장에게 고개를 숙이는 나를 자기 팔에 손을 껴 놓고는 그 사람들의 무리를 떠나고 있는
김인혁.... 그의 걸음이 너무 빨라 드레스에 발이 엉킬 거 같았다.
“ 좀 천천히 가요.... 이러다 넘어지겠다구요!! ”
그때서야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연회장 구석자리에 테라스 앞에 있었다.
그가 이리저리 둘러본 후 나를 데리고 테라스로 걸어갔다.
“ 그 자식이랑 무슨 얘기 한거야 ? ”
“ 그 자식이라뇨 ? 세진씨요 ? ”
“ 세진씨 ? 벌써 그렇게 친해진 거야 ? 내 이름은 한번도 부르지도 않으면서..... ”
어린애처럼 얼굴이 벌겋게 올라서는 나를 다그치는 이 사람..... 이 사람이 이렇게 단순한 사
람이었던가 ? 난 입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 어제 일은 지워버리는 거야. 지금은 이렇게 날 솔직하게 대하는 그만 생각하자. 내일
이혼한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할거야.
근데 정말 내가 이 사람의 이름을 부른 적이 없다는 것이 생각났다. 왜 난 부르지 않았을
까...... 어려워서?
“ 왜 웃는 거야 ? 무슨 말했는지 물었잖아 ! ”
난 간신히 웃음을 참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서 더 이상 웃으면 나를
테라스 아래로 던져버릴 거 같았다.
그때와 같았다. 제주도에서 보았던 이 사람의 숨기지 않는 모습... 환하게 웃다가 갑자기 찡
그리는 모습......
너무나 그리웠던 모습을 다시 본거 같아 난 날아갈 듯 가슴이 벅차올랐다.
난 살짝 미소를 지으며 앞에 보이는 테라스를 보며 걸어 나갔다.
“ 그쪽이 너무 바쁘신 거 같아서 잠깐 저와 같이 계셨던 것뿐이에요....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
억 안나요... 별말 안했거든요 . ”
이제야 진정이 됐는지 내 팔을 잡은 힘을 점점 늦추었다.
“ 왜 늦게 온 거야 ? 식은 벌써 끝났다고 .... ”
“ 호텔 입구에 기자들이 많아서 어쩔 수가 없었어요... 미안해요 ...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만 쳐다보다가 그가 피식 웃는다.
“ 미안하다는 말 ..... 너에게 처음 들은 거 같아.. ”
그랬나 ?
그렇겠지.... 5년 전 처음 만났을 때는 이 사람을 너무나 싫어했으니까 ...
“ 소개 시켜 줄 사람들 있다면서요 ? ”
아무말없이 테라스 밖을 쳐다보던 그 시선을 나에게 옮긴다.
“ 별로 소개시켜 주고 싶지 않아졌어.... ”
“ 왜요 ? ”
그가 나를 쳐다보며 내 얼굴에 가만히 손가락을 하나 갖다댄다. 너무나 가까이 그 사람의 숨
소리까지 느껴지며 내 얼굴이 점점 달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그러다 그는 다급하게 손을 내리고는 내 손을 잡았다.
“ .......... 아니야. 가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