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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님:
아라한과를 이루고 보니 .. 소멸이 무상하지 않음은 도리어 체험으로 확증할 수 없더라... 열반에 머물러 있음이 확증이 안되는데...이게 무슨 가르침인가? ... 이제 그냥 믿으라고? ...그래서 여기서 떠나는 자들과, 떠나지 않는자들의 두 부류로 갈린다는거죠?
소멸을 추구하는 부류는 실망하고 떠날 것이고,
소멸이라는 경계를 추구하지 않고 신심을 내는 아라한들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 생을 즐기지도 않고 멸을 즐기지도 않는다. 생에도 머물지 않고 멸에도 머물지 않는다..
바로 소멸이라는 경계를 추구하지 않고 신심을 내는 아라한을 이르러 ㅡ 법성게구절 .. 초발심시 변정각ㅡ에서 말하는 바로 그 초발심자라는거죠.. 맞나요
본글에서 ["태어남을 있게 하는 업"과 "여타의 업"을 본질적으로 다르게 취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여타의 업이란 무위법인가요?무위법은 무엇을 말하는건가요?
[그렇다면 어떠한가? "아직 있지도 않은, 아라한과의 성취를 고려하면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 없는 미래의 사건"을 조건으로 성립할 수 있는..."과거"와 "더 먼 미래"가 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 부분도 이해가 어려운데 다시 설명해 주세요
방문객님:
[혼란을 느낀 부류] : 기억하기님처첨 이해할 수도 있을 거구요. 어쨌든 스스로 이룬 성취에 매몰되지만은 않은 이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태어남을 있게 하는 업"과 "여타의 업"을 본질적으로 다르게 취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①{태어남을 있게 하는 업}은, 말 그대로 {다음 생을 있게 하는 업}입니다.
상좌불교 교학상으로는, {'금생의 마지막 찰나' 즉 '죽는 순간'에 일으키는 업}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②{여타의 업}은, {그러한 업이 아닌 일체의 업}을 말합니다. 특히 아라한과 관련한 논점은, {("태어남을 있게 하는 업"은 아니지만), 아직 과보가 드러나지 않은 과거의 "(여타의) 업" : 미도래 업}과 관련됩니다.
[그렇다면 어떠한가? "아직 있지도 않은, 아라한과의 성취를 고려하면 있을지 없을지도 알 수 없는 미래의 사건"을 조건으로 성립할 수 있는..."과거"와 "더 먼 미래"가 된다. 이상하지 않은가?] :
{(상좌불교 교학상) 아라한과}는, {"시작을 알 수 없는 때로부터의 미도래업 일체에 대한 과보"가 드러남}을 전제하지 않습니다. 미도래업이 있어도, 아라한과는 성취되죠.
결국 미도래업과 그 과보는, 그 미도래업의 과보가 산출될 조건이 성숙하는 태어남등을 전제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아라한과를 고려하면 있을지도 엄을지도 모르는 미래의 태어남등}을 조건으로 성립하는 {"과거의 미도래업"과 "그 미도래업에 따른 미래의 과보"}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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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미도래업과 그 과보와 관련한 논점에서, [구사론]은 아라한과의 성취에 따라 미도래업은 무위법이 된다고 봅니다.
[청정도론]은, 기억이 명확하지 않은데요. 까먹었을 수도 있긴 한데요. 어쨌든 기억이 없는 것으로 추측할 때, 별 다른 설명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애초 청정도론은, 논리구조상 네가지 "법(빠라마타)"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식, 심소, 색, 열반의 네가지 법입니다. 따라서 논리구조상 추측할 때, 별 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예상됩니다.
미도래업이 없는 것인가? 그렇게 볼 수는 엄어요. 왜 그런가? 미래의 과보를 산출하므로, 없다고 할 수만은 엄거든요. 하지만 있다고만 할 수도 엄어요.
상좌부등 소위 소승의 교학상, 무상하여 스러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연기의 이치는 조건에 따라 있고 조건에 따라 엄는 것을 말하므로, 미래의 과보를 생각하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해야 합니다.
여기에 상좌불교등 소위 소승 교학상 찰나생멸의 "멸"을, 기계적이고 도식적으로 이해하는 일의 문제점이 나옵니다. 찰나생멸의 멸은, 여실한 멸이 아니라, 단지 조건상 멸일 뿐인 거에요.
찰나생멸을 말하지만, 그 멸은 멸만은 아닌 거예요. 최소한 도래업과 미도래업을 분별하여, 그에 상응하게 또 다시 멸을 분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작업을, 소위 소승부의 교학은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틀렸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애초에 교학이란...특정 수준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의심을 제거하고, 해당 특정 수준에서 수행하는데 유용한 방편을 제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제한성은, 부처님 가르침이 원만한 방편인 것과는 비교된다고 평가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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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법을 공부한다는 것에는, 수행에는...소위 실참이든 소위 교학이든...늘 이해의 문제가 나옵니다. 그래서 도식적 기계적 암기만 해서는 제대로 공부했다고 할 수는 엄어요. 물론 기계적인 암기도 어느 정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암기했다고 해서, 이해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예로, 위에 제기된 논점조차 모르면서, 암기만 하고서는 난 안다고 떠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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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님:
방문객님...제가 알기로는 미도래업은 아라한에게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요...그럼 위의 논점은 뭡니까. 아라한의 의심에서 소멸은 그냥 죽으면 끝난다는 뜻 아닙니까? 그래서 의심했다는 뜻 아닌가요?
그리고 대승에서는 어짜피 어떤 존재로든 존재해야 되니까 아라한이 천명한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와 모순될 수 밖에 없어요...아니면 말을 말든가...왜 쓸데엄는 말을 해서 사람헷갈리게 하냐구요...
부처님이 소멸을 추구했다는 말이 있음니까? 열반이 완전한 죽음은 아니라구요.부처님이라고 용빼는 재주가 있을 거 같소...처음부터 출가한 이유가 윤회에서 벗어나는 거잖소...윤회에서 벗어나는 건 신과의 합일. 순수정신. 진아. 이름이야 어쨌든간에 뭐가 있을 수 있냐구....아니면 처음부터 헛소리를 하지 말던가...
상좌부교학에선 부처님께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네요...열반에 들어계시니...기복종교도 아니고 좋지...열반에 든 이가 또 태어날거 같으면 뭔데 윤회를 벗어나네 뭐네 헛소리를 하는 거냐구...쩝
방문객님:
위 본글과 꼬리말의 내용은, 상좌부를 포함한 소위 소승에 입각해 나오는 겁니다. 아직 대승으로는 제대로 나아가지도 않았어요. 소위 소승에 입각할 때 나올 수 있는 문제 제기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근데 무슨 대승에서는 모순될 수 밖에 엄다는 겁니까... 논점과 관련해, 대승의 입장에서 적은게 어디 있어요?
나원참... 저는 말이죠... 상좌부등 소위 소승의 고승이나 제대로 공부한 이들은, 제가 제기한 문제를 이미 알고 있다고 봅니다. 제가 아는 것을, 그들이 모르겠어요?
애초 구사론이 미도래업을 일단 무위법으로 간주한 것 자체가, 소위 소승계열쪽은 관련된 문제의식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도 있어요.
청정도론은, 적었듯, 기억상 추측할 때...별 다른 설명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청정도론을 적은 붓다고사는, 구사론을 적은 바수반두와 시대상 큰 차이가 엄어요. 그리고 바수반두와 같이 북인도 출신입니다. 북인도의 고승이었어요.
무슨 뜻인가? 붓다고사 역시 구사론에 소개된 관련 설명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설명을 회피한 거예요... 유위법이었던 행온 즉 심소가, 아라한과의 성취로 무위법이 된다고 설명하기도 그렇고... 그런 설명은, 단순한 의심제거용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어차피 아라한과 관련한 설명은, 여러 문제를 일으킬 수 밖에 엄으니까요. 중요한 것은, 일단 당장 수행하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소멸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적당히 뭉개버려도 된다구요...
왜 그런가? [소멸이 알려지지 않은 이는...일단 소멸이 알려지면, 해결된다]는 막연한 기대를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현재 모를 수 밖에 엄다, 그리고 지금 당장 수행하는데 적절하고 유용한 방편은 이미 제시되었고...당장 제거되어야 할 의심은 제거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소멸이 알려지기 전에는, 위의 본글에 제시된 것과 같은 의문이 반드시 필요한 것만은 아니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남인도 특히 실론 정도가 되면 말이죠... 경쟁 학파가 없어요. 당시 완전 깡촌이예요. 그러니 북인도 승려가 그곳에 가서는, 최고 권위자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무슨 뜻인가? 구사론과 같이 그러한 부분을 해명할 필요성이 별로 없었다는 거예요. 경쟁 학파가 엄으니까... 시비 거는 놈이 엄었다는 거예요. 그러니 당장의 필요성도 엄고...특별한 필요성 혹은 지금 당장의 필요성이 엄는 경우, 적당히 뭉개버려도 되는 거예요.
반면 북인도는, 소위 소승 계열이 대승 계열과 경쟁해야 했습니다. 상황이 다르니, 다루는 내용도 차이가 날 수 밖에 엄는 겁니다. 그래서 구사론이 청정도론보다 훨씬 더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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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한국의 상좌불교 행자들이 암기만 하고 이해는 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누차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의문이 생길 수 있어요. 소멸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적당히 뭉개도 된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왜 굳이 그러한 지적을 했는가? 이와 관련하여, 크게 두가지 이유를 말할 수 있어요.
1. 적절히 대승을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2. 지금 한국의 상좌불교 행자처럼 교학을 대하면 말이죠... 교학을 바르게 파악하지도 몬하구요. 설령 소멸이 알려지더라도, 고착화된 상태 그대로일 수 밖에 엄거든요. 요가행자처럼... 이처럼 뚜렷한 이유 즉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런즉 공격도, 님처럼 걍 똥싸지르는게 아닌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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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몇 마디 추가합니다. 본글에서 지적했듯...상좌불교등 소위 소승부의 교학체계상, "태어남을 있게 하는 업"과 "여타의 업"을 본질적으로 다르게 취급하고 있구요. 결국 아라한과의 성취는, [죽음의 순간, 단지 "새로운 태어남을 있게 하는 업"을 일으키지 않을 수 있는 힘]의 성취가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해는요... 죽음의 순간을 통제할 수 있다면, 개차반으로 살아도 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이러한 이해와 결론은요. 아함부의 아리타경 즉 니까야의 알라가뚜빠마경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상좌부등 소위 소승부의 교학에 입각하는 한은, 위와 같은 비판에 제대로 반박을 할 수 없어요.
기껏해야 개차반으로 살면, 죽음의 순간에 통제력을 획득할 수 엄다고 해야 하는데...그 이유를 설명할 수 엄는 거죠... 이러한 지적이, 상좌부등 소위 소승부 교학이 틀렸다는 말은 아니구요. 교학이란게 뭔지, 이해를 해야 한다는 겁니다.
교학의 조건을 살피고, 무엇을 말하는지 그 뜻을 알려고 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몬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이해몬한 상태로 그칩니까? 아니예요... 암기한 거나 늘어놓으면서 오취온이나 오온과 관련한 온갖 말도 안되는 잡설을 늘어 놓고, 그런단 말이예요. 선불교의 몇 선사들이 불교를 망쳐놓두만, 상좌불교가 들어오니 이제 자칭 상좌불교행자들이 불교를 망치고 있는 겁니다
감귤이 위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고, 물이 더러운 거지... 그러다보니 고작 청정도론 하나 그것도 삐리리 하게 외우고 말이지, 이건 뭐 아주 법사 나셨어... 확실하게 알았다느니, 온갖 개폼만 잡는 거나 배워가지고 말이지... 이건 뭐 무슨 초딩도 아니고... 나원참... 수행이 무슨 퀴즈쇼인가? 삶이 무슨 퀴즈쇼여? 어이가 없단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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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대승부 특히 유심론에서는...몇 번 적었듯..."해탈은 알라야의 통제", "깨달음은 알라야의 총체적 성취"로 설명합니다.
알라야의 총체적 성취가, 불공여래장이라고 할 수도 있구요. 알라야의 통제는, 공여래장이라고 할 수도 있죠. 이러한 방식으로 미도래업과 관련한 문제를 극복합니다...
용수님: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방편이죠. 속임수인데요.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속임수에 걸려들죠.이미 윤회에서 벗어나 있어요. 윤회라고 생각하는 이마음이 지금 이자리에 있을뿐이죠
윤회와 인과가 밀접하죠. 윤회의 무서움. 인과의 무서움. 그래서 선순환과 악순환의 사이에서 선순환으로 가려고 하는 거죠.가장 큰 선순환은 불법을 하는 것이고 가장 큰 악순환은 인과를 무시하는 것이죠.
인과에서 선인선과는 속세 즉 윤회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인과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 또한 인과의 무서움 때문에 그렇죠.나는 악만 행하기 때문에 윤회가 무섭죠. 그래서 염불하는 것이죠. 윤회의 무서움, 인과의 무서움 때문에 염불하는거죠. 나약한 중생이기에..
첫댓글 아라한들만이 윤회를 하지 않습니다. 열반을 실현한 성자들 가운데 윤회하는 분들이 더 많은 셈이죠...개차반으로 살면 열반을 실현하더라도 윤회한다는 말입니다.저는 청정도론은 아직 안 읽어봤구요 아비담마 길라집이는 읽어봤습니다. 여기서 아라한의 마음은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에요. 더 이상 개차반일 수 없는 거죠...그래서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천명할 수 있는 거죠...방문객님이나 용수님은 할 수 엄는 거라구요...
구경해탈지는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꿰뚫어 안다는 뜻입니다.그냥 구경해탈지혜에요. 상수멸은 소멸일 뿐이에요. 열반이 아니라니까요....구경해탈지는 아라한과를 성취하면 스스로 [반열반]할 거라고 꿰뚫어 안다는 겁니다. 반열반에 든 자는 윤회하지 않습니다. 이게 상좌불교의 기본교리에요...화엄은 모르겠구...
반열반을 단순한 소멸로 보면 그냥 아라한들은 죽으면 끝(존재의 무화.생물에서 무생물.오온의 흩어짐)이라는 거 밖에 안되잖아요. 그럼 결국 모든 불자들이 완전한 죽음을 추구한다는 애기밖에 더 되겠어요...염세주의로 빠진다구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구차제정의 경계를 본 것은 구경각이 아닌 거 같은데요...한문을 봐도 다른 거 같고...
분노게이지 급상승으로 눈이 뒤집혀서 말이죠. 무자게 거칠게 적었는데요. 순화해서 적은 후, 거친 꼬리말은 삭제하겠습니다.
아라한이 윤회한다고 적은 것이 아니라, 청정도론등 상좌부 교학 더나아가 소위 소승이라 칭해지는 학파들의 교학이 지적한 것과 같은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상좌부 교학상...멸진정 즉 니로다삼마빠띠는 아라한의 징표라 할 수 있고, 니로다삼마빠디를 상수멸이라고도 합니다. 상좌부 교학상...상수멸이면 식도 멸한 것이고 '오온의 드러남'이 괴로움이므로, 상수멸은 괴로움이 소멸했다는 겁니다. [일차적 의미의 "열반"]이란 표현에서 열반은, 상좌부 교학을 고려한 겁니다.
동문서답은 지양하세요.
멸진정은 불환자와 아라한의 징표구요...열반은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 모두 한 찰나라도 실현해야 하는 거라고 합니다. 불환자나 아라한 모두 멸진정을 체험한 후 소멸로 기울지 않고 열반으로 기운다고 합니다. 멸진정이 열반이라면 예류자 일래자도 멸진정을 체험한 게 되는데 예류자 일래자는 멸진정을 체험 못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상수멸은 마음과 마음부수의 소멸일 뿐 색온의 소멸이 아니죠. 오온이 소멸한 건 아니거든요. 오온이 소멸해서 괴로움이 소멸할려면 반열반할 수 밖에 없어요...반열반은 한 찰나라도 열반을 체험해야 한다고 할 때의 열반과 같은 거구요...반열반은 멸진정과 다른거죠.
삭제된 댓글 입니다.
한 찰나라도 열반을 실현해야한다는 뜻은 한 찰나라도 열반을 실현했다는 뜻이었습니다. 오해가 없길 바랍니다...
열반은 감각대상이 소멸해서 순수한 앎만 남아있는 상태라고 마하시 사야도의 법문에 나오는데요...수행을 하다보면 이런 상태를 체험한다고 합니다. 이런 상태가 열반이라면 타종교의 순수정신과 동일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여기서 한 찰나라고 해서 열반이 유위법의 무상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건 잘 모릅니다. 뭐 체험이 없으니...
그래도 열반은 마음의 대상이 됩니다. 법과 함께 의근과 연기하는 것으로 생각되는데요...책에 보면 의근은 법과 열반을 대상으로 한다고 나옵니다. (도표라서 잘못된 이해일 순 있지만요)
상수멸의 증득은 열반이라 하지 않습니다. 탐진치의 소멸이 열반이다라고도 하는데요...이 경우에도 상수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열반의 상태는 무상하지 않고 괴로움이 아니며 무아라고 합니다...단순히 공성을 의미하는 것인지 어떤 경계를 의미하는 것인지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요. 공성을 의미한다면 공성을 깨닫는 건 어렵지 않다고 봅니다. 그냥 직관적 앎이라면 누구나 가능하고 굳이 네 단계로 성자를 분별하여 7번 다시 태어나느니 한번 다시 태어나느니 하며 윤회적인 관념을 가지고 이름을 지을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이름 자체에 윤회의 관념이 들어있으니까요...열반을 어떤 경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요...
과거에도 적었듯...청정도론은, 아나함도 멸진정에 든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멸진정은 아라한의 징표라 할 수 있고]라 적었습니다.
과거 고요님과 관련 이야기를 하다가...고요님이 자꾸 동문서답만 해서, 제가 적지 않았었는데요. 열반을 마음의 대상으로 한다고 하지만...소위 네가지 성자 위계의 "도(업)"와 "과(보)"는, 직관입니다.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는 직관입니다. 즉 "도"는 그러한 직관으로 향하는 것이고, "과"는 그러한 직관에 이르는 겁니다. 이러한 직관이 어떻게 발생하는가는, 소위 성자 위계마다 틀려요. 어쨌든 열반이 직접 식의 대상이 되지는 않습니다. 상좌불교에서도, 열반은 직접 대상이 되지 않아요.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 있다] 즉 [조건지어지지 않은 것이 있음을 아는 것(열반을 아는 것)]이라서, 그냥 간략히 [소위 성자의 "도(업)"와 "과(보)"는 열반을 대상으로 한다]고 설명되는 겁니다. 그리고 소멸 즉 멸진정은, 대상이 아닙니다. "대상이 되는 것"과 "대상으로 하는 것"이 함께 해야만 대상이란 것도 성립하는데, 소멸에서는 그 두가지 모두 없거든요. 현재 진행되는 논의의 출발점이 되는 [해탈 그리고 아라한의 의심 - 대승의 태동]이라는 본글에서도 [물론 소멸은 과보가 아니다. 따라서 소멸은, 형성과 쌍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소멸은 무상하지 않을 수 있다. "형성과 형성된 것"이 무상하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열반이란, 탐진치의 소멸입니다. 상좌불교의 성자는, 낙장불입 성자입니다. 왜 낙장불입으로 구성하는가? 이에는, 이론적 현실적 이유가 있어요. 이론적 이유는, [경]에 근거합니다. 부처님께서 [어떤 어리석음이 소멸하면, 다시 그 어리석음이 발생할 수는 없다]고 말씀하시는 대목이 나와요. 현실적 이유는...어리석음이 소멸하고 다시 발생할 수 있다면, 금생에 아라한이더라도 다시 어리석음이 발생할 수 있거든요. 결국 낙장불입을 고려할 때, 논리적으로는 말이죠... 탐진치가 소멸하지 않으면, 소멸은 알려지지 않아요. 탐진치가 소멸하지 않으면, 니로다삼마빠띠가 불가능해요. 그러면 왜 아나함은 멸진정의 증득이 가능하다고 하는가?
멸진정을 증득해도 아라한이 아닐 가능성을 열어 둘 현실적 필요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실적 필요성에 따른 아나함의 멸진정 증득 긍정은, 낙장불입과 충돌합니다. 어째서 그런가? 소멸은 무색계 존재등에 대한 탐욕을 제거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상좌불교 아나함 관련 설명을 보면, 아나함은 무색계 존재등에 대한 탐욕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일시적으로나마 무색계 존재등에 대한 탐욕이 제거되는 것을 긍정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일시적인 탐욕등 세가지 뿌리의 제거가 긍정된다면, 한번 소멸한 어리석음이 다시 발생한다는 것을 긍정하는 것이고...이는 곧, 낙장불입의 부정이죠.
상좌불교에서는 말이죠... 상응한 탐욕이 제거되지 않으면, '바른 선정(색계 선정)'에는 이르지도 못하는 것으로 설명합니다. 그만큼, 낙장불입에 철저한 편이에요. 현실적으로, 요가와 차별하기 위해 그런 것도 있어요. 그럼에도 왜 멸진정을 증득해도 아라한이 아닐 가능성을 열어 둘 현실적 필요성이 있었는가? 왜 그러겠어요? 이는 쉽게 추측할 수 있어요... 청정도론을 적은 붓다고사, 청정도론은 상좌불교의 유일한 체계적 논서라고 할 수 있어요. 그만큼 북인도의 승려가 건너왔음에도 독보적 위치를 누렸습니다. 여하간 청정도론을 적은 붓다고사는 북인도에서 소멸이 알려진 자들에 의한 많은 병폐를 봤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구사론을 적은 바수반두는, 청정도론을 적은 붓다고사의 선배입니다. 대선배예요... 쉽게 말해...붓다고사가 사미일 때, 바수반두는 대상좌였단 말이예요. 물론 바수반두가 유심론으로 전향하지만, 여하간 전향하기 전까지는 북인도에서 "Maha Thera"였어요. 무슨 뜻인가? 붓다고사는 구사론 공부를 했다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구사론은 청정도론의 어머니라고 봅니다. 구체적으로는 조금씩 다르지만, 취한 입장도 조금 다르고 말이죠...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거으 대동소이한 내용을 가지고 있어요. 우리가 이해한다는 것은, 암기의 문제가 아니예요. 지 딴에는 암기만 하고는 스스로 이해했다고 우쭐거릴지도 모르지만, 천만에 말씀입니다.
논리적으로, 소멸의 증득은 아라한"만"의 징표입니다. 그쪽 체계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엄어요.
부처님의 말씀, 제거된 어리석음이 다시 발생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현실을 고려하면, 일시적 어리석음의 제거는 긍정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일시적 제거가 가능하다는 것을 부처님께서 모르셨겠냐 말이지, 아니거든... 그러니 그러한 부처님 말씀의 의미 파악 문제가 나옵니다. 여기서부터는 다양한 견해들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비로소 대승도 등장할 수 있어요. 우리는, 퀴즈쇼를 하고 있는게 아니예요. 그러한 암기 여부를 묻는 유치한 수준은, 최악의 어리석음에 찌들 때로 찌든 애들이나 하는 것이고... 어른이 할 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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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로 적는 것보다 이 아래가 적절하겠구만... 그 심심님은 말이죠... 우기기는 무자게 우겨요... 도표만 보지 말고, 설명도 읽으라고... 내 말이 맞다고... 이건 무슨... 불쌍한 인간들... 정말 무자게 구차하게 구누만...
상대방 견해를 비판해야 하는데, 떠벌이들은 비판을 몬해... 아는게 엄거든... 이해하고 있으면, 비판할 수가 있는데... 비판을 몬하는 것은, 이해가 엄다는 것이거든... 앵무새인 거지... "나 좀 알아죠" 이러면서 미쳐 날뛰는 짓일 뿐이라고... 알아주긴 개뿔이나 알아죠...뭘 보여줘야 알아주지... 우리가 많이 알 필요는 엄어요. 중요한 것은, 이해라고... 세련되지 않더라도, 이해가 있는 이는 있는 거요...
방문객님 말이 맞는지 안맞는지 내가 우째 압니까... 무슨 신통이 있는것도 아니고...방문객님이 한 체험을 내가 해본 것도 아니고...논리적으로 맞으면 맞는거구 아니면 아니라고 판단할 수 밖에 없거든요...
그러니까 논리적으로 비판하시든가... 지금 당장 능력이 안되면, 공부하고 이해한 다음 관련 논점으로 비판하든가... 그럼 되는 거 아니요. 내가 적은 내용에서, 내 체험등이 맞는지 안맞는지가 왜 나온단 말이오. 구차하게 좀 굴지말라니까... 사내새끼가 왜 그래? 뭘 말하고 싶은데? 님이 지금,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뻔하잖아... 그렇지 않아요?
우리가 말이죠... 이해하려면, 먼저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생각이 꽉 차있으면, 왜곡해서 받아들여요. 이해가 될 수 엄는 거야... 그래서 이해한다는 것은, 스스로 상응한 만큼 비울 수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해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유익함이 있습니다.
내가 왜 이러는데요 한번 말씀해보시죠...
위에 그 이유를 적어 놨으니, 읽어 찾아보시고... 다음에 봅시다. 이번 논점과 관련하여, 적절한 대응이 있지 않는 한은 앞으로 그냥 무시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