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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디모데전서 4:11-16
제목: “연소年少”함에서 “성숙成熟”함으로
일시: 2020. 8. 30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디모데는 바울의 1차 전도여행 때에 바울을 만나 그의 제자가 되었고 바울은 그를 영적 아들로 여겼다. 디모데는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서 바울과 동행하였으며 바울은 그를 동역자로 생각했다. 바울은 그를 사랑하는 영적 아들이요 믿을 만한 동역자로 여겨 고린도교회, 빌립보교회, 데살로니가교회 등등 도움을 필요로 하는 교회에 그를 보내어 사역을 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렇게 신뢰를 하고 기대가 컸던 만큼 바울은 디모데가 더욱 더 성장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바울은 그가 로마 옥에 있을 때에 디모데에게 목회서신이라 불리우는 디모데전후서 두통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바울이 디모데가 더욱 더 성장하기를 바랬던 것이다.
II. “연소함”에서 “성숙함”으로의 변화가 필요했다.
디모데는 바울이 말했듯이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진 순수한 청년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변화가 필요한 “젊은이”었다. 디모데는 에베소에서 목회하는 훌륭한 젊은 사역자이기는 했지만 바울이 볼 때 좀 약하게 보였을 것이다. 바울이 언급했듯이 디모데가 사역을 하는데 좀 아쉬운 것이 연소하다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제 30세가 조금 넘은 디모데가 에베소교회 안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 사역을 하는데 사회적인 경험과 지혜가 좀 부족하지 않을까하는 노파심이 있었다. 바울이 그런 디모데를 볼 때, 한편으론 믿음직한 청년으로 보기도 했지만 행여 아직 설익어 부족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하는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젊은 친구가 위장병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특히 디모데의 신앙의 뿌리를 보면, 그는 외조모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로부터 순수한 신앙을 이어받았다. 비록 아버지가 헬라인이었지만 유대인의 교육방식과 같이 모계로부터 믿음을 전수받은 것이다. 바울은 그런 디모데를 “거짓 없는 믿음을 가진 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으로 디모데는 소위 오늘날 말하는 “금수저”였다.
예)구약의 인물 가운데 저는 이삭을 닮았고 신약의 인물 가운데는 디모데를 닮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금수저라는 말이다. 그 말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유한침 다른 동역자가 한 말이다. “권목사님은 금수저고 나 같은 사람은 흙수저이지요”라고 말한 것이다. 아버님이 돈이 있거나 권력이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신학교의 교수로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러워했다. 어디를 가서 소개를 해도 “아 권혁봉교수님 아들이군요”라고 금방 소개가 되었다. 아버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책, 학교에서 다 하지 못한 토의를 집에서도 할 수 있다는 것, 앞으로 계속 신학을 하고 사역을 하는데 조언을 해줄 어른이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내게 페이퍼를 주시고 책을 소개하시고 요즘은 카톡으로 은혜 받은 것이 있으면 나누어 주신다. 그런 의미에서 금수저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독일에 와서 금수저선교사가 된 느낌이다. 세계에 흩어진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다 힘들어 하는데 우리는 여기서 얼마나 좋은 곳에 있는가? 늘 빚진 마음이다.
그러나 금수저의 문제는 야성이 없다는 것이다. 세파에 부대끼면서 살지를 않았기 때문에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쉽게 파닉에 빠지게 된다. 물론 한 번의 표현으로 디모데를 그렇게 평가하면 억울할지 몰라도 그는 눈물이 많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디모데후서1장 4절에 바울은 “네 눈물을 기억한다”고 했다.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 180도 변한 바울은 온갖 시련과 핍박을 다 경험하고 로마옥에 갇히기도 한 강인한 사람이었다. 그런 바울이 어릴 때부터 믿음의 가정 속에서 자라나 순수함을 가지고 있었던 디모데를 볼 때 강인한 야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곱게 자란 사람은 순수함은 있을지 몰라도 연구소 실험실이나 바이러스가 없는 무균실, 혹은 온실속의 화초과 같다. 면역력이 약하기에 찬바람과 세파 등 작은 시련에도 견디지 못할 수 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연소함에서 성숙함으로 성장하기를 바란 것은 바로 그러한 성장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가 디모데에게 필요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6:12)고 담대함을 독려하고 있고 디모데후서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고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는 결단과 각오를 시키고 있다.
예)우리 어린 아이들이 초등학교 슐킨트가 되었다. 아이들이 상급학교에서 잘 적응할지 걱정이 되며 부대끼는 자기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청소년들이 성인이 되고 자립하는 청년이 되었다. 더 넓게 펼쳐질 세상에서 우리 청소년들이 청년으로 잘 헤쳐나갈지 이제 흥분이 된다. 새롭게 시작하는 비즈니스와 계획이 예상하던 대로 혹은 그 이상으로 운영이 될른지, 유학생활의 뚜껑을 열면 어떠한 일이 생길는지 우리는 긴장도 되고 초조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연소함에서 성숙함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이런 변화가 없다면 아주 무료할 것이다. 변화가 있을 때 흥미진진하고 변화가 있을 때 설레임이 있는 것이다.
III. 연소함에서 성숙함으로 변화할 때 아픔이 있다.
연소함에서 성숙함으로 나아갈 때 내일을 향한 기대와 소망이 있다. 설레임이 있다. 따분하지 않고 흥미가 있다. 그러나 변화의 설레임이 두려움이 되기도 한다. 새로움이 익숙하지 않은 불편함이 되기도 한다. 긴장이 짜릿함을 넘어 아픔이 되기도 한다. “아픈 만큼 성숙해지고”라는 노래 가사처럼 성숙의 변화에는 아픔이 따른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연소함에서 성숙함으로 변화는 것을 장밋빛 좋은 말로만 하지 않고 대단히 강한 어조로 각오를 단단히 시키고 있다. 아픔이 있을 것이니 각오하고 있으라는 예방주사를 맞추고 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딤전6:12)!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1:8)!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 병사와 같이 전장터에서 싸움을 싸워야 하고 경기자가 최선의 경주를 하고 농부가 수고의 땀을 흘리는 것과 같이 그 변화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아픔을 “성장통”이라 부른다. 사람들이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이런 성장의 통증 때문이다.
예)성장통은 갑자기 키가 큰 사람들이 성장과정에서 겪는 통증이다. 성장통은 한달에 1cm 씩 뼈가 자라면 옆에 있는 인대나 연골 등이 함께 빨리 성장하지 못하기에 생긴다고 한다. 신체 뿐 아니라 정신적인 성장통도 있다. 아이들이 말을 안 듣고 울고 떼쓰고 Nein만 하는 미운 세 살이 되기도 하고, 더 크면 청소년기가 되어 사춘기를 세게 하기도 한다.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로 성장통인 것이다. 우리 젊은 지체들 역시 이곳 독일에 와서 성장통을 갖는 것이다. 한국에 있었으면 편안한데 이곳에서 그 어려운 독일어를 하고 매일연습과 훈련을 하며 독일사회 속에서 부대끼면서 사는 것은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성장통이다.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기도제목이 있는가? 결혼, 직장, 학업, 출산과 양육... 변화가 있고 성장을 도모하기에 성장통이 있는 것이다. 성장하는 그 과정의 아픔으로 얻는 결과는 내일을 위한 것이요 성숙함을 위한 것이기에 그 아픔은 아름다운 것이다. 젊어 고생은 사서하지 않는가!
아파도 우리는 이 싸움을 싸워야 한다. “선한 싸움”이기 때문이다. 힘들어도 이 고난을 이겨내야 한다. 결국 우리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아픔을 견디어 낼 때 연소함에서 성숙함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 통증을 못 견디는 사람이 있다.
예)주변에 한 후배목회자가 있었다. 저와 대화 가운데 몇 번 충격적인 표현을 썼던 분이다. 첫 번째 충격적 표현은 “목사님 저는 대인기피증이 있습니다”라고 말이었다. 사람 만나는 것이 언제나 긴장되는 것은 알겠는데 목사가 그러면 어떻게 하냐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 그는 그랬다. 일이 있어 그분에게 전화를 하면 일차 사모님과 웬만한 일은 처리를 해야했다. 얼마 되지 않아 어느 선교사들의 모임이 있었는데 동역자들 대부분이 참가하는 모임이었다. 그가 보이지 않자 가장 어른 목사님이 그에게 개인적으로 전화해서 좀 나무라셨던 것 같다. 그가 내게 와서 자신의 감정을 다 이야기하고 마지막 충격적인 말을 남긴다. “목사님 그래서 이제 잠수탈랍니다.” 아니 그 동안도 사람들을 기피하면서 잘 교제하지 않는데 여기서 잠수타면 어떻게 하는가? 그를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픔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저는 그의 영적 아비가 되지는 못하는 것 같다. 변화되지 않는 그를 보고 내 마음에는 “내가 그대를 고치기 위해 역사적 사명을 띄고 이 땅에 태어난 것도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모데를 영적인 아들도 생각하고 더 성장할 후배동역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에게 아픔이 있어도 연소함에서 성숙함으로 변화를 요구한 것이다.
기독교 전승에 따르면 그런 디모데가 그의 사역지 에베소에서 아르테미스여신이 우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이에 광분한 군중들에 의해 곤봉에 맞아 순교했다 한다.
IV. 디모데는 연소함에서 성숙함으로 가는 과정에 있다. 믿기에는 불안하고 불안하기에는 믿음직하다. 어리기에는 다 컸고 다 컸기에는 어리다. 그래서 아직 완성되지 않는 ing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심전력”하라고 주문하고 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희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4:15).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라는 것이다. 디모데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아직 연소하니 “아무것도 할 수 없어” “해본 적이 없어 아직은 못 한다”라고 말하지 말라. 전심전력할 뿐이다. 스스로 완성되었다고 여겨 “이제 이만하면 됐어” “이 나이에...”라고 말하지도 말라. 연소함에서 시작하여 성숙함으로 가도록 전심전력하여야 한다.
예)영어로 보통 나이를 물을 때 How old are you라고 한다. 20 years old, 5years old 등으로 답한다. 혹은 몇일된 신생아라면 5days old 이런 식이다. 하지만 저는 old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Young 으로 시작하기를 좋아한다. How young are you? 80살 되시는 분에게도 그렇게 묻는다. 80이 되고 100이 되어도 young 이다. 우리는 나이가 든 것이 아니라 연소함에서 시작해서 성숙함으로 나가야 한다. old에서 시작하면 내일이 없고 과거만 있을 뿐이다. Robert Kiyosaki 라는 사람은 When you are young, work to learn not to earn(네가 젊다면 돈 벌려고 일하지 말고 배울려고 일하라)이라는 말을 했다. 저는 이것을 역으로 이렇게 말하겠다. When you work to learn not to earn, you are young(돈 벌려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려고 일하는 사람은 젊은 것이다). 도전적인 배움의 정신이 있다면 젊은 것이다. 젊은 사람은 배우는 사람이다. 심는 사람이다. 투자하는 사람이다. 내일을 계획하는 사람이다.
예)꽤 오래전에 나의 은사 교수님 한분이 이곳을 방문하였다. 은퇴를 하시자마자 오셨으니 65세 정도였다. 그때 제가 니콜라이교회를 방문하여 통일의 현장도 보시고 또한 루터교의 예배도 경험하시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더니 하시는 말씀이 “이 나이에 뭘 또 배웁니까” 라고 하신다. 그래서 그냥 그만 두었다. 아버님에게서 배울 것이 있다면 늘 새로운 경험을 하시고 새로운 책을 구매하셔서 읽는다는 것이다. 또 84연세에 무슨 책을 쓰시겠다고 계획 중이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지시한 땅을 향해 하란을 떠날 때 나이가 75였다(창세기 12:4). 갈렙이 헤브론 땅을 가리키면서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라고 할 때 나이가 85세였다(여호수아 14:10). 지경을 넓힐 때가 그랬다. 변화를 두려워하는가? 이미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다. 굳히기에 들어갔는가? 이미 경화현상이 벌어졌는가? 슬픈 일이다. 그러면 나이가 젊어도 How old are you라고 물을 것이다. 그러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계획하면 How young are you?라고 물을 것이다.
디모데는 순수한 신앙을 가졌다. 훌륭한 젊은이였다. 그래서 이제 그만하면 쓸 만하고 잘 쓰여지면 되겠다 싶었지만 사도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가 더욱 더 성장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에게 두 통의 서신서를 쓰면서 영적 아비로, 선배 동역자로, 온갖 세파를 경험한 어른으로 조언을 하고, 그를 격려하기도 하고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경계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연소함에서 성숙함으로 변화하도록 전심전력하게 한다.
킨더가르텐에 다니던 어린아이들이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서윤, 세아, 세빈, 서유가 있다. 월요일부터 삶이 바뀔 것이다. 이제 12년의 배움의 레이스가 이어질 것이다. 연소함에서 성숙함으로 변화할 것이다. 전심전력하라! 이제 청소년을 넘어 청년이 되는 원준, 하영, 하민이 있다. 삶의 새로운 챞터가 열릴 것이다. 전심전력하라! 이곳에 유학 온 지체들이 있다. 자신의 지경을 넓히려 전심전력한다. 워킹전도사님들이 있다. 이력서를 보내고 오게 되었지만 자격은 없다. 단지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 외에는...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하지 않고 더 배우기 위해 왔기에 전심전력하여 지경을 넓혀야 한다.
V. 코로나로 인해 오랫동안 아이들을 못 보다가 보니 기던 아이가 걷고 걷던 아이가 뛰고 뛰던 아이가 말을 한다. 엄마 아빠가 얼마나 열심히 키웠을까? 많이 컸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진급주일예배로서 새로운 장을 연다. 새로운 세계로 뛰어들어 성장의 변화를 기대한다. 또한 코로나가 여전히 맹위를 떨치지만 지체들이 이제 휴가와 방학을 끝나고 8월을 넘어 9월의 출발선에 섰다.
계속 변화를 소망하라. “그만하면 됐어” “난 여기까지야” 라고 말하지 말고 “아직도 난 부족해”라고 나의 연소함을 고백하라. 나아가 “지경을 넓혀 더 나아가야지”라고 성숙함을 추구하라. 성숙한 내일을 위해 마지막 에너지가 남아 있을 때까지 최선을 다하라. 앞으로 있을 변화를 기대하라. 넘어야 할 산과 건너야 할 강이 있다면 부딪혀라. 변화의 성장통을 견디어 내라. 새롭게 시작하는 한 주간, 그리고 9월을 맞으며 새롭게 일과 학기를 시작하고 새로운 삶의 현장에 뛰어드는 모든 지체들이 전심전력하여 연소함에서 성숙함의 진보를 보일 수 있는 은혜와 축복의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