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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이형우 신부
1. 교회의 유일한 축제인 빠스카 축제와 그 연장
성서와 전례와 교회생활에서 중심적인 주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로 요약되는 빠스카 신비는 그리스도교의 모든 신비를 수렴하는 중심이며, 구세사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점이며 그 목적이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이 선포한 신앙의 핵심은 주님의 수난과 부활이었다. (29-30쪽)
☕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였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초세기 신자들은 인간을 구원하고 우주 만물을 복원하러 오신 성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실제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유대교에서 지키던 안식일(토요일) 대신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을 지키기 시작하였으며, 빠스카를 교회의 유일한 전례 거행으로 삼았다. (30쪽)
2세기부터 교회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당일을 특별한 기념일로 정하여 기도와 단식을 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거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이날은 한 해의 중심이 되는 날이 되었으며, 주일들은 마치 마르지 않는 샘에서 홀러나오는 물과 같이 부활 대축일을 기념하였다. 그러나 신자들은 빠스카 축제가 지니고 있는 엄청난 신비와 기쁨을 하루에 소화하기가 벅차 아쉬움을 느끼게 되었다. (30쪽)
3세기부터 교회는 빠스카 축제를 50일간 연장하여 거행하면서 그 마지막 날인 50일째 되는 날에 오순절(성령강림절)이라는 대축일을 지내기 시작하였다. (30쪽)
2. 빠스카 축제의 준비
교회는 빠스카 축제를 합당하게 맞이하기 위한 준비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영적 기쁨은 이를 갈망하면서 고대하는 데에서 고조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준비 기간이 연장되고 그 중요성이 점차 강조되었다. 초기에는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신 성 금요일, 무덤에 계신 성 토요일 그리고 부활하신 주일을 성삼일로 하여 지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성삼일은 주님의 최후만찬을 기념하는 성 목요일이 포함되면서 성 목요일, 성 금요일, 성 토요일 밤 전례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된 데에는 성 토요일 밤 전례가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함과 동시에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30쪽)
초기 3세기까지는 부활 대축일을 맞이하기 위해 한 주간 전부터 준비하였으며, 하루나 이틀 단식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2세기 리옹의 이레네우스 주교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떤 곳에서는 하루, 다른 곳에서는 이틀, 또 다른 곳에서는 40시간 단식하였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5,24)고 한다. 215년경에 로마에서 편집된 것으로 보이며, 당시 교회의 공식 전례와 규범을 증언하는 『사도 전승』 33에 의하면, 부활 대축일 전 이틀간 단식한 것으로 되어 있다. (30-1쪽)
곧이어 이 성삼일을 준비하는 성주간 제도가 생겨났는데, 엄밀하게 말하자면, 성지주일부터 성 수요일까지는 준비기간이고, 성 목요일부터 부활 대축일까지는 빠스카 축제로 간주되었다. 그렇지만 부활 대축일 후 빠스카의 기쁨을 50일간 연장하여 경축하는 데 비해 그 준비기간을 한 주간으로 하는 것은 너무 짧게 여겨졌다. 그래서 일차로 연장한 것은 세 주간 단식하면서 부활절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기간의 전례의 특징은 요한 복음에서 택한 복음을 듣는 것이었는데, 오늘의 전례에서 사순시기 제3주일부터 제5주일까지 요한 복음을 듣는 형태로 그 흔적이 남아 있다. (31쪽)
그렇지만 부활 대축일 후 그 기쁨을 50일간 연장하여 경축하는 부활시기와 3주간의 준비 기간 사이의 차이가 아직도 크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4세기말부터 40일간의 단식일을 정하여 부활 대축일을 준비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를 시작하는 첫째 주일은 부활 대축일로부터 역으로 계산하여 사십일 되는 날이라는 뜻에서 사순시기라는 이름이 생기게 된 것이다. (31쪽)
☕ 사순시기의 유래다.
40일 기간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니체아 공의회(325)의 결정 사항 제5항이다. 알렉산드리아의 총주교 성 아타나시오는 329년에 보낸 축일 사목서간에서(아타나시오, 서간 3,6) 사순시기 시작일과 부활 대축일 날짜를 명시하면서 신도들이 어떻게 사순시기를 지내야 하는지 설명하고 있는데, 총주교가 교구 내 본당들에게 매년 이런 편지를 보내는 것은 이미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전통으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동방교회에서는 4세기초부터, 그리고 서방교회에서는 4세기말부터 사순시기를 지내기 시작하였다. “40”의 숫자는 성서에 나오는 여러 사건들과 연관이 있지만, 사순시기의 직접적인 기원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기도와 단식을 하신 예수님의 생활(참조: 마태 4,1-11; 마르 1,12-13; 루가 4,1-13)에서 영감을 받았다. (32쪽)
㈜ : *현재 전해오는 최초의 축일 사목서간은, 알렉산드리아의 디오니시오 총주교(+264-265)가 보낸 것으로, 에우세비오의 『교회사』 7,20에 단편으로 전해오고 있다.
한편 사순시기는 주일부터 시작되었으며, 40일을 계산하는 방법에 있어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그 기준은 단식하는 일수를 어떻게 40으로 맞추느냐에 달려 있었다. 동방교회에서는 사순시기 동안의 주일과 토요일에 단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부활 대축일 전 7주간을 사순시기로 정하였다. 이렇게 할 때 사순시기 제1주일부터 부활 축일까지 50일이 되며, 부활 대축일부터 50일째 되는 주일을 오순절, 즉 성령강림 축일이 되기 때문에 부활 축일을 중심으로 완전한 균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서방교회는 주일만 단식일에서 제외시켰으므로 부활 대축일 전 6주간을 사순시기로 하였다. 이렇게 계산하더라도 단식일이 36일(6일×6주)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7세기부터 이를 보완하기 위해 4일 앞당겨 “재의 수요일"을 사순시기의 시작일로 삼게 된 것이다. (32쪽)
☕ 그 당시에는 사순시기에 매일 한 끼씩 단식을 했다.
초세기에는 요즘처럼 미사 전례를 매일 거행한 것이 아니라, 전례 집회는 주일과 수요일과 금요일에 있었는데,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성찬 전례 없이 말씀의 전례만 거행하였다. 5세기부터는 월요일, 화요일, 토요일에도 말씀의 전례를 하는 집회가 생겨났으며, 6세기부터는 평일의 전례에서도 성찬 전례가 거행되었다. 목요일만 전례가 없었는데, 8세기부터는 목요일에도 전례를 거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순시기의 전례는 단계적으로 풍부해졌다. 사순시기 동안 교종은 로마의 성직자단과 신자들과 함께 매일 다른 성당에 모여 전례를 거행하는 관습이 생겨났는데, 전례가 거행되는 성당을 그날의 “Statio”(집회소)라고 불렀다. 원래 2세기초에는 이 “Statio”가 단식하는 수요일과 금요일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그후 기도 모임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가, 전례를 거행하는 성당을 가리키는 말로 발전되었다. 이렇게 해서 사순시기 동안 주일뿐만 아니라 평일을 위해서도 성경 독서가 짜여지고 기도문이 정착된 것이다. (32-3쪽)
4. 사순시기와 세례성사 준비
사순시기는 예비자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집중적으로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예비 신자들은 이에 앞서 3년간 단순 예비자로 준비를 해야 했다. 세례식은 주로 부활 밤에* 거행되었으므로 사순시기는 예비자들의 집중적인 세례 준비를 위한 시기가 되었다. 그 해에 세례를 받게 될 예비자들은 사순시기 제1주일에 등록하여 집중적인 교육을 받았다. 특히 종교해방(313) 이후 성인(成人) 입교자들이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에 그 필요성은 더욱 커져갔다. (33쪽)
㈜ : *떼르뜰리아누스는 198~200년경에 쓴 『성세론』 19장에서, 세례는 전례적 의미와 잘 맞는 부활 축일에 우선적으로 거행하고, 그 다음으로 성령강림 축일에 거행하며, 필요한 경우에는 어느 일요일에도 거행할 수 있다고 한다.
초기에는 세례 전 예비자들의 집중적인 교육 기간에 세 단계 입교 예식이 있었다. 이 단계 예식은 구마 예식과 훈시로 되어 있었다. 단계 예식은 미사의 말씀의 전례 부분에서 거행되었으며. 사순시기 제3주일, 제4주일, 제5주일에 거행하였다. 후에는 주일이 아닌 평일로 이전되어, 사순시기 미사와는 상관없이 거행되기도 하였다. (33쪽)
5. 사순시기와 속죄행위
세례성사로 원죄와 개인의 본죄까지 모두 깨끗이 사함을 받은 신자가 배교나 살인이나 간음과 같은 중대한 죄를 저지른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문제에 대해 초대교회는 다음의 두 가지 경향을 두고 오랫동안 논쟁을 벌여왔다. 첫째 경향은, 세례의 중대성과 교회의 완전성을 강조한 나머지 죄사함의 기회는 한 번의 세례로 끝나고 그외에 다른 가능성이 없다는 엄격주의적 경향이다. 둘째 경향은,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죄사하는 권한을 주셨기 때문에(마태 16,19), 교회는 진심으로 통회하는 죄인들을 용서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공식적인 태도는 중죄(重罪)를 지은 신자라도 죄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고, 이에 대한 첫 사료는 2세기 중엽에 씌어진 『헤르마스의 목자』 제4계명 3,1-6에 나온다. (34쪽)
현대 교회에서는 신자들이 고백성사를 자주 볼 수 있지만, 이러한 개인 고백성사 제도는 6세기부터 시작되었고 이전에는 신자들에게 죄사함의 기회가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초대교회에서 신자들의 죄사함을 이처럼 엄하게 한 이유는,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신자가 다시 죄를 지어 마귀의 종살이로 되돌아가는 일은 있어서도 안되며, 또 죄는 신자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교회 신비체를 손상시키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34쪽)
특히 초기 300여 년의 박해시대 동안 배교자들은 교회의 가장 큰 현안 문제였다. 교회는 그들을 파문하여 교회 집회와 전례에서 완전히 배제시켰다. 그런데 파문받은 신자들 중에 어떤 이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 교회에 돌아오기를 원하였다. 떼르뚤리아누스(155-220)는 3세기초에 저술한『통회론』 제4장에서 당시 교회에서 실시되고 있던 파문받은 이들의 참회 절차를 이렇게 소개한다. 교회로부터 파문을 받은 신자는 먼저 개인적인 회개와 보속을 하면서, 신자 공동체 앞에서 직접 자기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주교와 신자들 앞에 엎드려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간청한다. 이때부터 그는 참회자로 분류되어 보속을 해야 하며. 공적으로 화해가 선포될 때까지 교회의 전례에 참석할 수 없었다. (34-5쪽)
기적의 그레고리우스(213-270?)는 그의 『법 규정 서간』에서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다. 이전의 교회 문헌들에서는 파문받은 죄인들이 교회로부터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 공적 고백, 참회, 화해 선언을 거쳐야 한다고만 서술되어 있는데, 이 서간은 둘째 요소인 “참회”를 어떻게 하는지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참회자는 먼저 성당 문 밖에서 엎디어 울면서 신자들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주기를 빌어야 한다. 둘째 단계에서 그는 성당 현판에서 말씀 전례까지만 참여하고 성찬 전례는 참여할 수 없다. 셋째 단계에서는 성당 안에 들어을 수 있으나 바닥에 엎디어 말씀 전례까지만 참여할 수 있다. 넷째 단계에서 화해 선언을 받은 그는 비로소 성찬 전례에 참여하고 성체를 영할 수 있다. (35쪽)
여기에 나타나 있는 특징은 각 단계마다 장소적인 변화가 있으며, 파문받은 사람은 화해 선언을 통해 정상적인 신자의 신분에 복귀된 다음에야 성찬 전례에 참여하고 영성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초대교회에서 예비자들은 말씀 전례까지만 참여하고 성찬 전례에는 참여할 자격이 없었다. 따라서 파문받은 사람이 참회하는 절차는 어떤 의미에서 예비 신자의 경우와 같이 교육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서간보다 한 세기 후에 대(大) 바실리우스(330-379)가 쓴 서간 217에서는 위에 서술된 네 단계에서 첫째 단계에 3년, 둘째 단계에 3년, 셋째 단계에 3년, 넷째 단계에 2년으로 모두 11년이 걸린다고 되어 있다. (35쪽)
파문받을 만한 큰 죄를 짓지는 않았지만 현세에 살면서 죄를 짓고 사는 일반 신자들은 사순시기에 어떻게 하였는가? 그들은 단식, 자선, 자기에게 잘못한 이들에 대한 너그러운 용서 그리고 선행 등 수계 생활을 열심히 하여 자기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빌었다, 그런데 6세기부터 개인 고백성사 제도가 생기면서 사순시기가 파문받은 참회자의 참회 기간이라는 관점이 점차 사라지고 대신 일반 신자들이 평소에 지은 자기 죄에 대해 속죄하는 시기라는 점이 강조되기 시작하였다. (36쪽)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