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장흥위씨 세거지
위씨들은 평화촌에서 집성촌시대를 마감하고 다핵구도(多核構圖) 양상으로 변화 발전한다. 즉 평화촌 한 마을 거주에서 여러 곳으로 분산하는 구도를 일컫는다. 아마 그 시기는 16세 휘 자공(自恭)과 18세 용(庸) 두 선조를 이주 1세대라고 하면 19세와 20세는 이주 2세대에 해당된다. 그 분들은 1450년대 후반에서 1500년대 초에 평화를 떠나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정착한다.
사람은 먹고살기 위해 또한 보다 좋은 삶의 조건을 찾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조건이 좋으면 오래 살고, 조건이 나쁘면 옮기게 마련인 것이다. 조상들 또한 마찬가지다. 당신들의 시대에서 지금보다 잘 살 가능성을 보고 생활의 무대를 옮겼을 것이다. 그러나 막연한 이거는 어려운 문제다. 아무리 조건이 나쁘더라도 연고 없는 이주는 불가능하다. 타향은 그만큼 두렵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남녀의 혼인에 의한 이거가 가장 흔한 사례이다. 사실 남녀가 혼인을 통해 맺은 인연만큼 튼튼한 인연은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이거라는 중대한 문제도 서로를 믿기 때문에 이루어 진 것이다. 우리 조상들도 이곳저곳에 까닭 없이 옮겨 사는 것 같지만 그 속을 보면 혼인이라는 인연이 크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 이끌어 주기에 가능한 결정이 곧 이거인 것이다.
그리고 이거의 또 다른 변수는 전쟁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조선반도 백성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전쟁으로 인해 태생지를 사수하던 삶의 패턴은 사라지고 백성들의 이동현상이 심하게 일어난다. 위씨로 말하면 이주 3세대가 등장한다. 크고 작은 전쟁과 난리는 물론 가뭄과 수해 등 재해와 전염병 등으로 말미암아 비롯되는 이주도 적지 않다.
더욱이 동학란과 일제 36년 6․25한국전쟁 등은 가히 핵분열(核分裂)에 가까운 대이동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과거 한 집안이 한 마을을 온통 차지했던 이른바 자작일촌의 개념은 전국에서 몇 곳을 제외하고 거의 자취를 감춰가고 있다. 어떤 동네는 한 집안 모두가 이사를 가고 없는 경우도 있다. 지금은 빈집만 있을지라도 위씨들이 집성촌(派別)을 이루며 살았던 현장도 있다.
1) 존재공의 소거지 기록
그런데 세거지(世居地)에 대한 기록은 전무하다시피 한다. 위씨의 경우 존재공(存齋公)께서 '위씨제파소거지(魏氏諸派所居地)'를 기록해둔 것이 유일하다. 그리고 임자보(壬子譜)까지 보첩의 상단에 간단한 거소를 표시한 것이 전부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누가 언제 왜 이곳을 떠나 그곳에 어떤 과정을 거쳐 정착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우리는 물론 어느 성씨도 기록이 없다.
우선 존재공의 제파(諸派) 소거지를 보자. 전남의 경우 장흥군은 관산(冠山)방촌(傍村)·당동(堂洞)·평촌(平村)·옥동(玉洞)·옥산(玉山)·와룡(臥龍)·신촌(新村)·성자(聖子)·만연(萬年)마을, 용산(蓉山)은 계산(桂山)·모산(茅山)마을, 안양(安良)은 월암(月岩)·동촌(東村)·동계(東溪)·기산(岐山)·모령(茅嶺)·목단(牧丹)마을, 장흥읍은 행원(杏園)·건산(巾山)·향양(向陽)·월평(月枰)·연산(蓮山)마을, 부산(夫山)은 기동(基洞)·효자(孝子)·월만(月滿)마을, 유치(有治)는 단산(丹山), 장동(長東)은 율곡(栗谷), 장평(長平)은 종정(鍾亭)·녹양(綠楊)마을, 대덕(大德)은 초당(草堂)마을이다.
강진군 강진읍·군동면 평덕(平德)·성전(城田)마을, 영암군은 금정(金井), 보성군은 회천영천(聆川)·웅치왕초(王草)·조성용전(龍田)·득량해평(海枰)·벌교고읍(古邑)·벌교읍, 여수시 봉두(鳳頭)·신대(新大)·평려(平呂)·화정개도(盖島), 순천시 승주(昇州)·황전죽동(竹洞), 고흥군 고흥읍·포두장촌(長村)·도화(道化), 곡성군 석곡송정(松汀), 담양군 창평(昌平)·장산(長山), 해남군 옥천(玉泉), 완도군 완도읍·청산(靑山), 목포시, 광양시 등이다.
광주시, 제주도 제주시 삼도건립동(三徒建入洞)·서귀포시(西歸浦市), 서울시, 인천시, 경기도 부천시·수원시·성남시·의왕시·군포시·안양시·안산시·일산시·고양시·의정부시·남양주화도읍 창현(倉峴)·가평·개성(開城), 전북 전주시·익산시·김제시·남원시 운봉(雲峯), 대전시, 충남 연기·장항, 충북 옥천군 안남오덕(五德)·보은삼승(三升)·영춘·제천·내속(內俗), 경남 통영시·도산·사천·고성, 대구시, 경북 김천·예천군 상리명봉·상주·청송·의성·인동·풍양·효갈·개령 등에 흩어져 살고 있다.
함경도에는 함흥·영흥을 비롯해 평안도 구성(龜城)·곽산(郭山)·의천(宜川)·정주(定州)·태천(泰川)·삭주(朔州)·안주(安州)에 위씨가 살고 있다. 한편 강원도에는 춘천시·원주시·영월군 서면·횡성군·인제군·삼척군 후평(後坪)·평창군 남면에 관북에서 내려왔거나 남쪽에서 올라간 일가들이 살고 있다. 존재공의 소거지에 따르면 전체 125개 마을에서 위씨들이 살고 있다.
2) 장흥군의 마을유래지
장흥군은 1986년 12월 30일자로 관내 마을의 유래를 집대성한 '마을 유래지'를 발행했다. 이 유래지가 어느 정도로 각 마을 주민의 성씨들을 파악했는지는 알 수 없다. 유래지에 따르면 장흥군내 전체 마을 가운데 장흥위씨가 살고 있는 마을은 다음과 같다. 즉 장흥읍은 향양(向陽)1구(生陽) 7가구, 향양2구(月坪) 2가구, 행원(杏園) 35가구, 연산(蓮山)2구(飛燕) 7가구, 평장(坪場)1구 6가구 등이다.
관산읍 관내는 죽교(竹橋)3구(內鶴) 4가구, 농안리(農安) 화운(畵雲) 2가구, 용전리(龍田) 와룡(臥龍) 37가구, 용전리 만년(萬年) 3가구, 옥당(玉堂)1구 3가구, 옥당3구(玉山) 38가구, 옥당3구(新村) 15가구, 당동(堂洞) 8가구, 방촌리 계춘동(桂春洞) 16가구, 신기(新基) 13가구, 내동(內洞) 41가구, 호동(壺洞) 12가구, 탑동(塔洞) 14가구, 산저(山底) 27가구, 평촌(平村) 13가구 등이다.
용산면 관내는 운주리(雲柱) 2구 봉황(鳳凰) 5가구, 모산리(茅山)1구 5가구, 계산리1구(桂山) 3가구, 안양면 관내 기산리(岐山) 2구(東溪) 7가구, 비동리(飛東) 8가구, 당암리(堂岩) 1구(月岩) 23가구, 당암리 2구(余岩) 3가구, 모령리(茅嶺) 1구(茅嶺) 3가구, 모령리 3구(牧丹) 6가구, 해창리(海倉) 3구(橋洞) 2가구, 장동면 관내 봉동리(鳳洞) 1구(밤실) 3가구, 배산리(盃山) 2구(牛峰) 3가구, 만년리(萬年) 4구(三亭) 2가구, 하산리(霞山) 산동(山東) 2가구다.
그리고 유치면 관내는 단산(丹山)에 30가구, 부산면은 기동리(基洞) 내기(內基) 36가구, 외기(外基)에 23가구, 성자(成子)에 11가구가 살았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장흥군 관내 자연부락 중 모두 33개 마을에 434가구의 위씨들이 사는 것으로 집계됐다. 지금은 고향을 떠났다고 보는 것이 옳다. 단산의 경우 탐진댐 축조로 수몰되면서 위씨들이 살았던 곳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3) 장흥군 2000년도 전화번호
2000년 6월 10일 읍내 광주복음문화사가 발행한 장흥군내 개인별 전화번호부를 보자. 옛날 같으면 전화를 가설한 가구가 많지 않지만 지금은 거의 집집마다 전화가 있다. 전화번호부에 나타난 상황만 봐도 거주자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986년으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의 위씨는 각 마을에 얼마나 사는지 보자.
장흥군의 경우 장흥읍내 건산리 76, 교촌리 1, 금산리 1, 기양리 3, 남외리 3, 덕제리 1, 동동리 4, 연산리 5, 예양리 10, 원도리 7, 충렬리 1, 행원리 29, 향양리 13 등이다. 장흥읍에만 156가구가 살고 있다. 관산읍에는 죽교1구 1, 3구 5, 옥당 1구 12, 옥당 2구 51, 4구 5, 5구 9,성산 2구 8, 농안리 1, 와룡 2구 25, 만덕 3, 방촌리 71, 송촌 2구 11, 지정 1구 1 등 모두 162가구가 살고 있다.
대덕읍은 연평리 1, 초당리 6, 거정리 4, 분토리 1, 가학리 1, 부산면은 내동 3, 자미 4, 용반 2, 효자 1, 호계 2, 성자 8, 기동 21가구이며, 안양면은 기산 5, 동계 4, 비동 9, 월암 15, 운정 2, 모령 2, 목단 7, 삼교 2, 신촌 1, 수문 1가구 등이다.
용산면은 어동 2, 어서 3, 봉황 4, 접정 4, 녹원 3, 관지 2, 모산 5, 계산 3, 삼십포와 풍길 각 1가구, 유치면은 오복 2, 단산 26, 관동, 송정 2구, 녹용 1구 등 1 ~2가구가 살고 있다. 장동면은 삼정 2가구가 있다. 장평면에는 용강 1구, 2구, 탑동, 양촌, 대림, 녹양에 1~2가구가 산다. 회진은 면내에 4가구가 전화번호에 실려 있다.
사실 세거지의 유래를 밝히는 문제는 매우 어렵다. 한 사람의 입향조도 어떤 과정을 거쳐서 정착했는지 확실한 근거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보첩의 기록을 근거해서 거꾸로 추적하기는 더욱 어려운 것이다. 첫술에 배부르지 않지만 후생들이 계속 보완하면 언젠가는 세거지의 유래가 완성되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자세한 기록에 세거지의 역사와 장소를 잘 알게되었습니다
우리 장흥위씨 세거지 역사가 잘 정리된 글이네요.
본향 장흥에 위문중 종친분들이 각마을마다 골고루 많이도 사셨네요.장흥군 관산 방촌은 우리 아버지가 태어나신곳이기도 하고 선대 할아버지들의 고향이시기도 합니다.잘보고 많은걸 알고 갑니다.고맙습니다.
위씨들의 거주지도 이제
전국은 물론, 세게적으로
넓어진 것 같습니다
일단은 인구면에서 적정선 이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희안하게 화순은 없네...^^
장흥위씨 세거지 역사 좋은 정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