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23)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24-25)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6)
'다가서서'로 번역된 '와익가쉬'(waiggash)의 원형 '나가쉬'(nagash)의 기본 뜻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까이 가다' (창세27,27; 2사무1,15), '접근하다'
(민수4,19; 사도20,21)이다.
당시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대면하여 서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더욱 하느님 앞으로
다가섰다는 사실은 그가 소돔 성을 향해 얼마나 간절한 심정을 가졌는지를 반영한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친밀함과 기도에 대한 확실한 응답을 얻기
위한 간절함이 들어있는 행동이다.
시편 73장 28절의 "그러나 저는, 하느님께 가까이 있음이 저에게는 좋습니다."라는
말씀을 떠오르게 한다.
창세기 18장 23절의 '의인'에 해당하는 '차디크'(tsadiq; the righteous)는
'의로운'(창세20,4; 시편116,5), '옳은'(잠언25,26; 이사41,26)이란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의로움을 지닌 사람'(탈출9,27; 잠언18,17), '옳고 참된 것을 말하는 사람'
(이사41,26), 특히 '의롭고 흠없는 사람', '하느님의 법도를 순종하는 사람'
(창세6,9; 시편5,13)이란 의미로 쓰였다.
즉 의인의 기준은 성품의 완전함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바른 태도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뜻과 의지에 따라 살고 하느님의 율법을
준행하려는 경건한 사람을 가리킨다.
반대로 '악인'에 해당하는 '라샤'(rasha; the wicked) 역시 일차적으로는 '사악함'
(시편5,5), '불의'(잠언4,17), '죄악'(시편125,3; 에제7,11)을 뜻하는 말이나 하느님의
성품과 그의 뜻에 위배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그리고 '쓸어버리시렵니까'에 해당하는 '싸파'(sapa)는 '밀다'(이사7,20), '잡아채다',
'빼앗다'(이사40,15), '치다'(1사무26,10)라는 뜻으로서, 어떤 쌓여 있는 사물을
'휩쓸어 파괴시켜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 단어가 하느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는 '파괴시켜 버리다'(destroy),
'쓸어 버리다'(sweep away)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차원에서 창세기 18장 23절은
하느님께서 경건한 사람들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거나 쓸어 버려서는 안된다는
아브라함의 간절한 호소를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창세기 18장 24절에서 아브라함은 구체적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데, 먼저 의인
쉰명에서 시작하여 여섯 차례에 걸쳐 의인 열 명이라도 있으면, 동성 연애 때문에
망하는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유보시켜 달라고 간구한다.
그가 이처럼 쉰 명에서 시작한 것은 소돔과 그 인근 성읍(고모라, 아드마, 츠보임,
초아르; 창세기 14장), 즉 다섯 성읍들에서 적어도 한 성읍에 의인 열 명 정도는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추측으로는 당시 소돔 성의 인구가 얼마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소돔이
비옥한 평지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창세13,12) 전체 인구는 많았고, 그 가운데
쉰 명은 지극히 적은 수였기에 이 정도의 의인은 있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송봉모 신부님의 아브라함에 관한 글에서는 그 당시 소돔 성읍의 인구를 만 명
정도로 본다.
어쨌든, 아브라함이 이렇게 적은 수를 내세워 소돔성의 구원을 호소한 것은 의인
쉰 명이라도 크게 생각하실 것이라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혹시 ~있다면'으로 번역된 '울라이 예쉬'(ullai yesh)에서 '울라쉬'는 '아마도'
라는 뜻이며, '예쉬'는 '~이 있다'(there is)란 뜻이다. 직역하면, '아마도' (쉰 명은)
있을 것입니다'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의심섞인 추측을 반영하는 말이다.
즉 그 많은 소돔성의 인구 중에 설마 쉰 명이 없을 것인가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6)
'용서하다'에 해당하는 '나사'(nasa)의 기본적 의미는 '들어 올리다'
(예레4,6; 에제3,14)이고, '(사람의 머리를)들다'(욥기10,15; 즈카2,4)라는 뜻도 있다.
이것은 죄인의 머리를 들게 해주는 것이나 죄벌의 비천하고 낮은 자리에서 들어
올려서 다시 높여 주는 행위가 모두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관련이 있기에, '용납하다',
'사유하다', '용서하다'(창세13,6.7; 미카7,18; 탈출10,37참조)란 뜻도
지니게 되었다.
또한 '그곳 전체'에 해당하는 '레콜 함마콤(lekol hammaqom; all the place;
the whole place)은 '콜'(kol)이 '모두', '다', '전체'(창세2,2), '모두', '전부'
(신명1,22)라는 뜻이 있으므로, 이것은 '의인 뿐만 아니라 악인도 거주하는 모든
성읍(지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창세기 18장 26절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이 제시한 조건(창세18,24)을 기꺼이
수락하고 풍성한 자비를 약속해 주셨음을 보여 준다. 이 약속은 죄인을 징벌하시는
하느님의 공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자비)에 근거한 것이다.
하느님도 아브라함도 여섯 번의 흥정을 통해 이토록 서로 자비에 호소하고 자비를
표출하지만, 기어이 자비를 받아 입을 만한 의인들이 없어 불과 유황의 징벌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원리를 볼 수 있다. 즉 의인으로 말미암아
악인도 구원에 동참하는 길이 열려지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원리는
단 한 사람뿐이었던 의인 예수님, 무죄하신 예수님을 통해 수많은 죄인들이 구원받는
십자가 사건에서 최고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다(로마5,18; 에페2,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