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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생활사 독후감과제>
한국역사연구회 지음 -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읽고...
담당교수: 박경하 교수님
소속학과: 사회학과
학번: 20145734
이름: 한경준
<Ⅰ.서론>
누군가 본인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이에 대해 명확하고 구체적으로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니, 구체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무엇인지 콕 찝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대부분의 우리나라 청년들은 명확한 자기 자신의 소원과 비전 그리고 사회가 제멋대로 정해놓은 관념적 잣대에 의해 수도 없이 수동적으로 몸을 맡기며 살아간다. 이는 많은 이들이 88만원세대, X세대 등 수없이 다양한 표현으로서 ‘현대’사회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가난이 시대를 구분 없이 나타나고, 어느 시대나 난세의 영웅과 억울한 피해자들이 존재한다.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서 가장 다사다난했던 조선시대 역시 예외는 아닐 것이다.
단언컨대, 이 세상에 그리고 우리의 역사에 나보다 불우하고 처랑햔 사람들은 너무나도 많았을 것이다. 수업을 듣고 나서, 현대사회와는 매우 상이했던 과거 조선시대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러한 역경을 극복하였나, 그리고 기록된 역사가 되지 못한 실제 역사의 주인공들이었던 민중들의 생활은 어떠하였나가 몹시 궁금해졌다. 때문에 나는 이에 대해 보다 상세히 기술되어있고 직접적 경험과도 같은 간접경험을 할 수 있는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책을 선정하여 이를 통해 조선시대의 민중생활사를 제대로 탐구하고 싶었다. 흔히 모두들 조선시대에 대해 말해보라면 모두 왕실과 궁중을 비롯한 지배층을 위주로 말한다. 역사서 혹은 우리가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학습하는 역사교과서 역시 이런 부분에만 치중해서 기술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나는 이 과목을 수강하고 나서 우리나라의 역사의 태동을 이끈 장본인들은 민중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먼지처럼 잊혀지고 기억되지 않는 그들의 실제의 삶을 느껴보기 위해 책을 4월초부터 읽어왔다.
<Ⅱ.본론>
나는 서론에서 제시한 궁금증들과 목표의식을 해결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두 가지 분석 기준을 잡고 독서에 임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첫 번째로 민중들의 삶의 기반이 된 ‘공동체’라는 틀과 두 번째로 역사를 이끌어낸 주인공으로서 민중들의 생활이다. 역사는 이미 기록되어 전승되어 왔고 대부분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에 그들의 억울함과 안타까움을 해결해주기에는 냉정하게 늦었다. 하지만 나라도 이 책을 읽고 조연으로서 그들의 삶을 비추어주고 주목해주자는 취지에서 앞서 제시한 두 가지 분석틀을 가지고 집중적으로 책을 분석하며 읽었다.
1.민중들의 생활양식이자 삶 그 자체였던 ‘공동체’
내가 찾고자하는 이러한 조선시대 민중들의 모습들은 ‘두레’를 통해 전형적으로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조선시대 마을의 조직들은 시대와 사회구조에 따라 명칭과 성격은 달리하지만,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특히 ‘두레’ 조직은 우리 사회 역사의 여타 다른 조직들과 비교했을 때 특별한 모습과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에 주목하게 된 이유는 두레는 생산 주체인 피지배 농민들이 구성한 노동 조직이라는 점, 대상의 범위가 전통적인 생활문화 공간이었던 마을을 단위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특별했다고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레는 단순한 노동조직이라기보다는 마을 문화의 총체적인 모습과 관련되면서 기능하고 있었다. 이는 우리의 전통적인 마을 문화 변천상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조선시대의 역사를 살펴보면 두레 이외에도 양반 신분의 동계나 문중계, 혹은 마을 주민 모두 대상으로 했던 대동계나 향약계 촌계와 특정 목적만을 위한 상부계,유산계 등도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두레 조직은 농업과 관련된 특정 목적의 조직임에도 구성원이 차지하는 마을에서의 지위로 인해 다른 조직과 비교하면 독보적인 성격을 지닌다. 다시 말해, 두레는 청장년으로서 마을의 실질적인 노동력을 가진 집단이었으며 공동체 운영의 각 방면에서 동원될 실질적인 연령층이 주된 핵심세력이었기 때문에 생활문화와 관련된 방면에서는 이들의 협조와 참여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이는 책에서도 단적으로 ‘이념보다 앞선 공동체 문화’라는 표현으로 나타난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 한 점은 두레는 기본적으로 지주층의 참여나 간섭을 일체 배제하고 자작농과 소작농을 구성원으로 택했기 때문에 신분제적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보이려고 했을 것은 자명하다. 이는 내가 책을 읽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문제의식과 궤를 같이한다.
나아가 두레의 확산은 조선 후기 촌락 사회의 변화와도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기도 한다. 책은 대체로 조선 후기의 촌락은 인구의 자연 증가, 농지의 확대 및 분포상의 변화, 동족 마을의 형성 과정과 맞물려 변화하였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는 실제로 조선후기에 와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두레는 일부지역의 노동조직에서 출발하여, 농업기술상의 변화와 관련하여 확산되어간 측면도 있지만, 사회구조가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부각된 것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생산력의 향상으로 농민의 자율성이 높아졌을 때 기능이 더욱 강화되어, 기층 촌락민의 입장을 대표하는 조직으로 기능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존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체로 두레는 하나의 자연 마을을 기본으로 한다. 물론 상이한 경우도 존재하지만, 적절한 규모의 인구와 농지가 있는 마을에서는 두레꾼이 확보되면 언제든지 조직이 가능하였다고 한다. 즉, 마을에 거주하는 청장년 중에서 일정 노동력만 가지고 있는 것을 인정받으면 간략한 절차에 의해 직접적으로 바로 두레에 참여할 수 있었다. 10~50명 규모. 신분보다는 나이에 의해 서열이 결정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두레의 심사 과정이었던 ‘들돌들기’, 신입례 과정인 ‘진세턱’뿐 만 아니라 호미씻이와 두레기 등도 조선시대의 민중들이 공동체양식과 의식에 입각하여 얼마나 슬기롭게 생활해나갔는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나는 이러한 대목에서 다시금 ‘성장’과 ‘극복’이라는 단어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수많은 가능성과 길속에서 좌충우돌하고 산전수전 다 겪으며 우리는 때때로 힘들지만 그만큼 성장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더 쉽고 평탄한 길로 들어섰다고 해서 그 끝이 성공으로 귀결된다는 법은 없으며 반대로 거칠고 힘든 길을 걷고 있다고 해서 마지막이 창대하지 말라는 법 역시 없다. 조선시대의 농민들 역시 이러한 맥락과 같이 묵묵히 앞길을 걸어 나가며 지혜롭게 삶의 역경을 헤쳐 나갔을 것이라 확신한다.
하지만 내가 가진 문제의식을 대하는데 있어 비단 농민들의 입장만을 생각해보기만 해서는 원하는 답을 얻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역시 들었다. 따라서, 같은 ‘공동체’이지만 농민이 중심이 된 ‘두레’와 대척점에 있는 ‘향약’에 대해서도 논해야할 것이다. 흔히 향약이라 하면 우리는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 등 추상적인 덕목들을 우선적으로 떠올린다. 하지만 이러한 덕목들은 사실 조선시대에 사족들에게는 단지 향촌 자치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명분에 불과했다. 이는 역으로 일반 민중, 백성들은 일상생활을 직접적으로 규제 받도록 하는 작동기제였음을 뜻한다. 향약은 조선 사회의 변화와 궤를 같이하며 범위가 축소되어 동약, 동계의 형태로 시행되기도 했고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는 폐허가 된 향촌을 복구하고, 파괴된 신분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 사족들이 일반 백성들을 포함한 범신분적 형태로 동약, 동계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
하지만 엄밀히 말해, 향촌 자치제로서 향약은 분명한 한계점을 지닌다. 그것은 조선 사회악 신분제에 기인하여 운영되었다는 점이다. 향약의 상층부를 양반이 장악하고 이들에 의해 획일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양반의 권위가 드높았고, 상민,농민 에게는 처벌과 평가의 잣대가 엄격했고 가혹했다. 때문에 때때로 향약은 지역 사회에서 권세를 장악하고 있는 양반의 불법적인 침학 도구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는 영원히 지속된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부터는 향약을 장악해나갔던 양반들의 지위가 전반적으로 하락하였고, 일반 백성들 중에서는 재산을 모아 신분 상승을 도모하려는 움직임이 꾸준히 일어났으며 양반 내부에서 조차 사회적 경제적 격차도 크게 벌어졌다고 책은 전한다. 농업과 상업의 발전 과정에서 부를 모은 일부 상민은 심지어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회적인 지위 향상도 도모하여 그들을 억압하는 신분 질서 역시 조금씩 극복해나갔다고 한다. 이러한 향약 역시 우리가 민중생활사를 제대로 파악하는데 좋은 소재라는 생각이 든다. 이면과 양면을 모두 볼 줄 알아야만 비로소 목표와 문제의식은 해결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해 보았을 때 역시, 조선사회에서 민중들은 여전히 어려운 위치에 있지만 조금씩 점차 여러 역경과 제약들을 극복해나가는 과정들을 역동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대로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한다면 조선시대의 민중들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가장 큰 원인기제는 ‘공동체’였음이 일시적으로 나마 자명한 원인이자 진리라고 결론내릴 수 있겠다.
2.역사를 이끌어낸 주인공으로서 민중들의 현실
조선시대는 누가 뭐라 하더라도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대에는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지향하면서 전제 왕권을 옹호하는 사대부의 권위가 드높았고, 신분 역시 법으로 규정되어 개인의 출세는 물론 사회적 지위와 개인적 일대기 까지도 강제력을 발휘하였다. 가령 대표적으로 최하위 계층인 ‘백정’은 조선사회에서 수없는 탄압과 멸시를 당했지만 난 그들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의 토대가 되어주었음은 너무나도 명확한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조선 전기의 백정은 조선 후기만큼 멸시의 대상은 아니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양반과 백정의 주거 공간이 엄격히 분리되었으며 백정의 집에서 조차 함께 생활할 수 없었다. 백정들에 대한 가혹한 억압과 통제는 형벌의 적용에서도 알 수 있는데, 가령 정부는 이들이 허락 없이 가축을 도살하는 경우, 본인에게 “장형 100대, 유형 3,000리, 몸에 먹물을 넣는 등”의 가혹한 형벌을 실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연좌제’의 개념도 적용하여 가족들은 역참 길을 끼고 있는 각 고을이나 역참의 종으로 삼아졌다.
이를 종합해보면 이들의 처지는 노비보다 전혀 나을 것이 없었던 것이다. 백정에 대한 사회적인 멸시 역시 더욱 심하였다. 백정들은 일반인과는 떨어져 읍 밖의 일정 지역이나 외진 곳에 무리지어 사는 경우가 다 반사였다. 또한 어린아이에게 조차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소인이라 낮추었으며 일반인 앞에서는 갖가지 행동의 제약들이 무수히 많이 존재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짐승과도 같은 대접을 받았던 백정들이 주로 도축업에 종사했던 것은 사실이나, 천하다고 여겨지는 다른 직업들에도 참여했다고 한다. 고리를 제조하는 일, 악기 연주나 노래 혹은 간단한 무용이나 재주로 구걸하며 유령하는 ‘창우’ 생활 등이 그것이다. 백정 마을을 아직도 지방에서 피촌(皮村)이라고 부르는 것도 도축 행위를 토대로 천한 직업을 일삼았기에 그러했다고 보여진다.
<Ⅲ.결론>
나는 살아오면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무얼하든 타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라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나는 이를 지금까지 어디까지나 자기합리화일뿐 그것이 곧 진정한 자유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접하고 실제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일궈낸 민중들의 핍박과 궁한 당시의 처지를 세삼 깨닫게 되면서 나의 생각 역시 조금씩 달라졌다. 그들에게는 최소한 사회적 동물로서의 잣대와 평가도, 타인으로부터 평가받을 ‘자유’ 조차도 사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감명 깊게 읽었던 책 ‘상처받을 용기’ 역시 기층민들의 실제 생활에 대해서는 역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이후 신분제가 조선사회에서 폐지되었고 백정들의 행동은 적극적으로 변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법제적인 차별이 유명무실 해졌을 뿐 관습상의 차별은 여전히 남아있었기에 한계가 있었다. 백정들은 급속한 사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에 대한 차별의 결국 저항하였고 이는 집단적이고 공개적인 탄원이라는 움직임으로까지 나아갔다. 이는 결국 1920년대의 백정 신분 해방운동 ‘형평 운동’으로 나가갔고 그들은 결국 수년간의 설움을 풀 수 있었다.
물론 오늘날에 ‘백정’을 비롯한 천민의 신분들은 더 이상 눈씻고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 곳곳에는 아직도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과 차별의 여러 형태가 남아있다. 한 신분이 사회적, 관습적으로 해방되기에는 너무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책의 구절이 독후감을 쓰는 지금에서야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역사속의 숨은 영웅들은 사실 백성들이다. 난 아직도 그렇게 믿는다. 그들의 노력이 없었더라면 지배층은 존속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들이 순응해주지 않았더라면, 허울 좋은 낡은 관습과 악습들도 지속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조선사회 그 자체를 굴러가도록 하는 톱니바퀴는 맞물려 돌아가는 민중들의 생활 그 차체였던 것이다. 어느 노래의 가사는 “뜨거운 가슴에 불이 한 번 붙으면 그 어떤 폭우도 뚫고 나갈 수 있다‘라고 말한다. 쏟아지는 폭우가 백성들의 장벽과 두려움, 어려움이라면 이를 자신 있게 해쳐나갈 용기 역시 그들에게 있었을 것이고 비록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들은 결국 그 폭우를 뚫고 나왔다. 지금 이 시대를 있게 해주고 지금의 나의 삶의 터전이자 기반을 마련해준 당시 민중들의 보이지 않는 수많은 노력에 다시 한번 감사하며, 그들은 적어도 나에겐 영원한 영웅들이라는 말은 끝으로 독후감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