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을 왕창 뺌으로써 다이어트의 스타로 떠올랐던 개그우먼 이영자. 그녀가 어디에 숨었는지 요즘은 잘 볼 수 없다. 그녀가 국민을 속였네, 성형외과 의사랑 어떤 꿍꿍이속을 가졌네 등은 잘 알 수 없으나 그녀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우리사회의 여러 논란들을 보고 우리는 미에 대한 우리사회의 완고한 가치관을 실감 있게 접할 수 있다. 날씬함. 아름다움이 날씬함으로 포장되는 견고한 미의 제국. 이것이 다인 것처럼 생각되는 풍토에서 저 멀리 먹고살기에 허우적거렸던 생고의 시절은 이제 한 토리도 찾을 수 없게된 것 같다.
그렇다면 살찐 것은 정말 배척 당해야하는 바이며 이에는 아름다움의 속성이 도저히 없는 것인가. 살쪘다는 것이 부끄러워지는 현재의 주된 가치관에는 문제제기가 될 수 없을 것인가. 살찐 사람은 정말 건강할 자격이 없는가. 살찐 사람은 황천길에 그렇지 못한 날씬한 사람에 비해 좀더 가까이 서 있는가.
미의 기준은 역사적으로 변해져 왔다. 날씬함이 현대의 미적 추구이라면 르네상스의 미적 추구자 들은 한결같이 풍만함을 아름다움으로 묘필해왔다. [살들아! 내살들아!]라는 서글픈 현재의 고함소리는 적어도 중세에 있어서는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어구들이었다. [베들레햄]이라해서 배 둘레에 햄을 두른, 허리 없는 사람들의 슬픈 형국이 농으로 주고받는 세상이지만 우리들의 내부적 깊은 곳에서 이 중세의 미적 추구자들이 가졌던 페트 페티쉬(Fat fetish)의 욕구가 꿈틀거리고 있음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
최근의 여론조사는 이런 페트 페티쉬의 욕구가 강하게 춤추고 있다는 현상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남성들은 가장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여성의 연령을 36세로 고정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팔청춘도 아니요 탱글탱글한 20대가 아니라 한다. 즉 애를 한 둘 낳은 가슴이 풍만할 데로 풍만한, 그리고 허리엔 살이 붙어 날씬한 것이 사라졌을 지라도 적당한 두께의 허리가 안정성을 확보하는 그런 연령의 나이를 성숙한 정신과 더불어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이런 일련의 내용에 불만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줄 안다. 그러나 그들은 알아둘게 있다. 예컨대 그런 사람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가져보면 풍만함의 생명력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게된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여성의 불룩한 배와 모유하기 위해 부풀어오르는 가슴, 아이를 튼튼하게 낳기 위해 충분한 영양섭취로 인해 토실토실해진 자신의 아내를 어떻게 아름다움의 최상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이윽고 태어난 아기를 보라. 토실토실함은 사랑스러움의 극치가된다. 이것이 행복을 가미한 아름다움이다. 억지로 날씬하게 해서 느끼는 행복함은 아침안개와 별다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우린 어느 순간엔가 이런 살들에 대해 병적으로 혐오증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도 보릿고개 따위는 없어진 먹고 살만한 세상이 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대의 거대한 포퓰리즘의 세계와 마초주의에 의한 상품생산성의 극대화는 이상적인 여성을 끊임없이 날씬함으로 세뇌시켜왔다. 이들의 전위부대는 영화, 방송, 언론, 각종 여론조사 등이었다. 여기에 상업성이 결부되면서 여성의 비만은 거의 죄악으로 둔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