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 임란의병전적지 성역화사업 준공 축
2011. 8. 27. 봉 화 군
제2부 위패봉안 고유제 (11:00)
중앙-김복규 문화관광과장
외삼문을 들어서자 내삼문 사이 좌측에 전시실이 있다.
전시실에는 항일의병 봉화 의병군의 창의 배경과 창의대장 류종개(柳宗芥)
이하 의병들과 소천전투에 대한 사진 설명이 있다.
입구에는 봉화군청 직원분들의 안내가 열심이다.
전시실에 소개된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자면
향토 항일의병 봉화 의병군 - 소천 전투
◆ 소천 전투 직전의 상황
1592년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선조 26년(1593) 봄, 삼척에 있던 왜장 모리
요시나리의 3천 병력이 봉화군의 소천을 지나, 춘양을 향해 그 퇴로를 모색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의병장 류종개는 적이 통과할 봉화군 법전면과 소천면의 경계에 위치한 화장산 바로 아래에 있는 목비골과 전피현(前皮峴:노루재)에 의병 6백명을 매복시켰다.
◆ 의병장 류종개와 의병들의 장렬한 전사
왜적의 선발대가 의병이 매복한 곳을 통과할 때 일제히 공격하여 적의 깃발을 뺏고, 수많은 적을 무찌르며 서전을 통쾌하게 승리하었다
그러나 이틀후 왜적의 본대 3천여 명을 맞아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끝까지 결사항전 하였 으나 신식무기인 조총을 가지고 있는 적의 세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류종개 창의대장 이하 600여 명의 의병이 이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를 하고 말았다. 의병장 조헌의 금산 전투에 버금가는 대단한 혈전이었다.
왜군은 인적이 드문 봉화땅을 안심하고 행군하다가 뜻밖에 우리 군민들의 공격을 받고 혼비 백산하여 감히 안동등 내륙으로 진격하지 못하고 영양(英陽)을 거쳐 울진항(蔚珍港)으로 철수 하였다.
향토 항일의병 봉화 의병군 - 내성의병대 창의의 배경
◆ 임진왜란 발발과 봉화 주변의 상황
봉화군 소천면(小川面)과 법전면(法田變)의 경계에 있는 화장산(華獐山) 주위 30리는 임진 왜란 때에 우리 고장의 젊은이와 왜병들 사이에 일대 혈전을 벌였던 유서 깊은 곳이다. 조선 제14대 선조(宣祖) 25년(1592) 왜장 가또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이끄는 5만의 적은 평안도와 함경도를 유린했다.
이듬해 봄 그의 부하 모리 요시나리는 3천의 병사로 남하해서 강원도에 침입하여 삼척부 (三陟府)를 점령한 후 안동을 향하여 진격하고 있었다.
◆ 의병장 류종개와 의병 결성
사간원 전적(司諫院典籍)의 관직에 있다가 부모의 상을 당하여 향리에 와있던 류종개는 임진 왜란으로 왜적이 우리나라에 쳐들어 와서 20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40일 만에 평양성을 함락하는 등 파죽지세로 우리나라를 유린하는 것을 알고, 김중청과 힘을 합쳐 의병을 모집 하였다.
류종개를 추대하여 대장(大將)을 삼고 임흘(任屹)로 부장(副將)을 삼아 규약 16조와 군령 5조를 정하고, 참모에 김인상, 윤흠신, 윤흠도를 결정하고 무장을 갖춘 후 의병 인원 모집을 더하고 군졸(軍卒)을 훈련시켰다.
창의대장 류종개와 600의병
■ 의병장 류종개
►류종개(柳宗介, 1558∼159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계유(季裕). 예안출신. 권옹(倦翁)빈(贇)의 아들이다.
월천 조목(趙穆)선생의 문인으로 1579년(선조 12) 22세에 진사가 되고, 훈도로서 1585년 28세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정자가 된 뒤 사간원 전적(司諫院典籍)의 관직에 있다가 부모의 상을 당하여 향리에 와있던 류종개는 임진왜란으로 왜적이 우리나라에 쳐들어 와서 20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40일만에 평양성을 함락하는 등 파죽지세로 우리나라를 유린하는 것을 알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의병을 훈련시키며 전투에 대비하던 중, 왜군이 화장산의 전피현(前皮峴:노룻재)을 통과할 것을 예측하고 의병 6백을 매복하고 왜군을 일제히 공격하여 서전을 통쾌하게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틀후 왜적의 본대 3천여 명을 맞아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끝까지 결사항전 하였으나 류종개 대장을 비롯한 수백여 의사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의병장 류종개는 왜군에 생포되어 적이 항복을 강요하며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살가죽을 벗기는 고문에도 끝내 굴하지 않고 적장을 꾸짖으며 숨을 거두었다. 임진왜란 전투사상 가장 비참한 죽음을 당한 의병장이다.
사후 조정에서 증(贈), 통정대부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주증되고 충신 정려각을 상운면 문촌리에 건립하였다. 봉화 문계서원(文溪書阮)에 봉향(奉享)되었으며, 봉화의 경현사우 (景賢祠宇)에 제향되었다.
■ 의병 장수들
►김인상(金麟祥, 1557~1592)
본관은 안동으로 자는 시백(時伯). 호는 학산(鶴山)이다. 임진년에 왜군이 쳐들어와 조선
팔도와 삼경을 유린당하고 선조대왕이 피난길을 떠나는 국난시대를 맞이하였다. 글 읽고
앉아있던 시골의 올 곧은 선비로써 의분을 참지 못하여 부친이신 백암공에서 허락을 받고, 부인 배씨에게 부모님을 부탁한 연후에 풍산사람 류종개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류종개는 소천 노루골에서, 김인상은 춘양에서 왜군의 침입을 막고 있던 중 적이 대군을 몰아 한꺼번에 쳐들어옴에 끝까지 활과 창검으로 수많은 적을 무찔렀다. 그러나 마침내 왜적 에게 생포되어 낯가죽이 벗겨지고 뼈를 쪼개 높은 나무에 머리를 거꾸로 매달아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적을 크게 꾸짖으며 36세로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에 조종에서는 삼강록 충신전에 싣게 하고 풍산 상리마을에 정려각을 세우게 하였으니 고향 안동 풍산 상리마을 삼강당 칠정각에 공은 충신으로 여섯분의 효자, 열녀와 더불어 위령제향하고 있으며, 선조 께서는 친필로 창의 충절을 가리는 만사를 내려, 특별히 공의 기개를 후손에 영원히 귀감하였다.
►임흘(任屹, 1557~1620)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탁이(卓爾). 호는 용담(龍潭) , 부라산인(浮羅山人), 구방재(求放齋) 양심재(養心齋), 주일헌(主一軒)
임흘의 선대는 송나라 소흥부 자계 출신의 명문이다. 시조 임온(任溫)은 중국 송나라에서 벼슬을 했으며, 시조의 6대손 임주(任澍)가 원나라에 벼슬을 하다 원의 공주를 따라 고려에 왔다가 머물고 돌아가지 않았다. 임주는 벼슬이 어사대부(御使大夫)에까지 올랐다가 벼슬을 그만두고, 풍천 임씨의 성을 하사받고 안동에 세거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류종개(柳宗介), 윤흠신(尹欽信), 윤흠도(尹欽道), 김중청 (金中淸) 등과 힘을 합쳐 왜적을 막았으나 패하여 김해(金垓)의 의진(義陣)에서 군사를 다시 모아 왜적에 대항하였다. 임흘은 훗날 퇴계의 고제인 월천 조목의 문하에 나아가 배움으로써 퇴계 학파의 학통에 참여하게 된다.
►김중청(金中淸, 1566∼1629)
자는 청지(淸之)이화(而和), 호는 구전(苟全), 본관은 안동이고, 봉화(奉化)에서 살았다. 태사(大師) 선평(宣平)의 후손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몽호(夢虎)의 아들이다. 가정(嘉靖) 병인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학문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통하여 선생이 그를 매우 인물 감으로 여겼다. 선생의 행장(行狀)을 지었다.
임진(1592)년에 류종개(柳宗介) 공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고, 경술(1610)년에 비로소 벼슬길에 올라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갑자년 이괄(李适)의 난리에는 본현의 의병장이 되었다. 일찍이 천추사(千秋使)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조정에 나아갔을 때 황태후(皇太后) 상을 만났다.
공이 문장과 경술(經術)로 동류들의 추중을 받았다. 혼조(昏朝)를 만나 조정에서 벼슬할 마음이 없었으나, 거듭 어버이의 뜻을 어기고 애써 녹봉으로 봉양하는 일을 하게 되었으며, 스스로 '구차하게 보전한다.'는 의미의 구전(苟全)이란 호를 한 것도 바로 그 뜻을 표현한 것이었다. 만년에 한가로이 시골집에서 생활하면서 생도들을 가르치며 스스로 즐겼다.
숭정(崇禎) 기사년에 세상을 떠났다. 반천서원(槃泉書院)에 제향되었다.
►윤흠신(尹欽信 ~1592)
본관은 예천으로 춘양에 살았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흠도(欽道)와 더불어 자진하여 의병장(義兵將) 류종개(柳宗介)의 군(軍)에 참여하였다 소천(小川) 전투에서 전사(戰死)하였 으며 정려(旌閭)되었다. 이때 전사한 윤흠신의 목없는 시신을 전장에서 부하가 발견하고 그 시신을 업고 진평동에 와서 동네사람에게 장례를 치러줄 것을 부탁하였다. 또한 본인도 죽거든 장군님 발아래에 묻어 줄 것을 말하고 자결하여 그 부하도 윤흠신 묘 아래에 묘를 썼다고 한다.
►윤흠도(尹欽道 1567~1592)
본관은 예천으로 춘양에 살았다. 자는 홍지(弘之), 별동(別洞) 상(祥)의 후손이자 윤흠도의 동생으로 융경(隆慶) 정묘년에 태어났다. 풍류가 고매하고 재능이 비범하였다. 임진년에 형 흠신(欽信)과 더불어 참의 류종개, 처사 임흘과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가 형제 모두 전몰했다. 뒤에 관직이 추종되고 정려(旌閭)되었다. 단곡(丹谷) 곽진(郭晉)이 지은 공의 정려문에서, 형제가 함께 처사 물암(勿巖)에게 수학했다.라고 하였다.
►금 은(琴 은 1533~1592)
봉화인으로 자는 여임 호가 고암인데 계의 손자로 일찍이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명 진세하였다. 그는 청량산의 용운정사에 머물면서 문장에 대해 논의할 때 조리 정연 하게 사례를 들어 심오한 학문의 밑바탕에 근거하여 퇴계에서 문의하자 선생이 극찬하시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또한 효자로서 세간에 널리 알려졌고, 형제와 친우간에도 우애가 돈독 하였다고 전해진다.
특히,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문객인 류종개 대장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고 창의 종군하다가 소천전투에 참가하여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선조는 금은의 공을 높이 인정하고 공조참의의 증직을 내렸다.
►권현수(權賢秀 1564~1592)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자는 탁이(卓爾)로 태사의 후손이고 이차자 극수원종공(二次子 克秀原從功)이며 증(贈) 형조참의(刑曺參議) 언기(彦紀)의 아들이다. 임진왜란 때 종형 판관 (判官) 충남(忠男)과 함께 의장종사관(義將從事官)으로 류종개의 휘하에서 분전하다가 장렬히 순국했다. 저서로는 낙양세교(洛陽世橋)가 있다.
►권 경(權 檠) : 군관으로 참여
시도기에 방문객이 방명하자 직원들은 조화 달기에 바쁘다.
개 독
삼 상 향
초헌관 박 노 욱
아헌관 금 상 균
종헌관 류 만 수
망 료
기 념 촬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