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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 및 관련 단어 소개 23≫ ◆신비◆
◆신비◆
하느님이 계시한 진리를 신비라 하는데, 신비는 계시되기 이전에 그러한 신비가 일어나리라는 가능성을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으며, 계시된 이후에도 그 내적 본질을 유한한 지성을 가진 인간이 완전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계시된 신비가 이해 불가능한 것은 그것이 무한의 존재이자 창조된 지식으로는 완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인 하느님의 표현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신비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어느 정도의 이해는 가능하다. 따라서 신자들의 주요 의무의 하나는 기도와 연구와 체험을 통하여 계시된 하느님의 진리, 즉 신비에 대한 이해를 깊이고 넓히는 것이다.
출처 : [가톨릭대사전]
◆신비◆
(1) 유한한 정신으로는 이성적으로 깨달을 수 없거나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진리이며 신이 계시한 진리를 가리킨다. 삼위일체와 강생은 그런 신비에 해당한다. 신비는 불가해 한 것이지만 지성적으로 알아들을 수는 있다. 다시 말해 신비가 일단 계시되면 거기에는 모순이 없음을 알 수 있다.
(2) 그리스 교부들의 저술에서 말하는 신비는 라틴어의 sacramentum에 해당하기 때문에 성사,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 계획을 따르셨음을 선포하는 표징의 뜻을 갖는다. 그러므로 성사들은 현재에 그리스도의 구원 신비를 가져다준다.
(3) 전례적 의미에서 신비는 보통 다른 두 단어와 연결되어 있다. 곧 ‘신앙의 신비’가 그것이다. 신앙의 신비란 말은 이 문맥에서는 일차적으로 미사를 가리키며 더욱 특별하게는 성체 축성 다음에 사용되는 말들을 가리킨다. 이 말들은 명백히 방금 제대 위에서 이루어진 실체 변화를 가리킨다.
◆삼위일체◆
삼위일체는 하나의 실체(實體) 안에 세 위격(位格)으로서 존재하는 하느님적 신비를 지칭한다. 하느님의 육화(肉化)와 은총(恩寵)과 함께 그리스도의 3대 신비를 형성하는 이 삼위일체 신비는 내재적 삼위일체(內在的 三位一體, Trinitas immanens)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救世徑輪的 三位一體, Trinitas oeconomica)로 구별되어 파악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구체적 인간 역사와의 관계를 고려치 않고 영원으로부터 내재하는 하느님의 실재를 지칭하고, 구세경륜적 삼위일체는 인간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하느님의 실재를 지칭한다.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이 삼위일체임을 제시하기 위해서 성서로부터 출발한다. 성서는 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계시사(啓示史) 안에서 증언되는 하느님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해 논하고 있다. 이러한 구세경륜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별개의 실재가 아니라, 바로 이 내재적 삼위일체의 계시이다.
1. 성서상의 삼위일체 : ① 구약이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그늘이라고 신약에서 진술되고 있으나 (1고린 10:11, 갈라 3:24, 히브 10:1), 종교사적으로 구약은 엄격한 유일신(唯一神) 사상을 견지하고 있다. 그런데 여러 교부들이 일부 구약성서의 본문들이 삼위일체 신비를 암시한다고 간주한 바 있다. 창세기에서의 '우리' 형식(창세 1:26, 3:22, 11:7, 이사 68), 아브라함에게 나타나는 세 남자들의 방문(창세 18:1-16), 민수기에서의 야훼의 삼중축복(민수 6:24-26), 이사야에서의 세라핌의 '거룩하시다' 삼회찬미(이사 6:3) 등을 말하는 본문들이 삼위일체의 사전계시라고 보는 견해가 있으나, 이러한 해석은 신빙성이 약하다고 오늘날 간주된다. 이러한 견해보다는 구약이 엄격한 유일신주의를 고수하고 있는 가운데에서도 하느님의 내적 생명의 충만함이나 외부지향의 계시를 지니고 있는 지가 주목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야훼 하느님이 당신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 한가운데에서 현존함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한 특정 중개형식(仲介形式)의 명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약에서는 '야훼의 천사'(malakh Jahwe), '지혜'(Chokma), '하느님의 말씀'(dabar Jahwe), '성령'(ruah) 등의 실재에 대해서 기술이 이루어지는데 이들은 바로 하느님의 직접적 작용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 개념들이 '위격'을 그대로 지칭한다고 보기는 힘들지만 신약에서 증언되는 삼위일체 신비를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② 신약성서가 체계적으로 정립된 '내재적 삼위일체' 교리를 명시적으로 내포하고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이 바로 하느님의 내밀한 본성의 계시이기 때문에, 삼위일체의 신비는 여기서 현시된다고 보아야 한다. 신약성서에서 거론되는 '하느님'은 구약에서 역사하는 하느님으로서 한 아들을 가지고 있으며, 성령을 부여하는 하느님을 뜻하고 있다. 여기서 하느님을 '아빠'(abba)라고 불렀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이 아울러 증언되고 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며(마태 12:28, 루가 11:20) 구약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반포된 율법을 능가하는 전권(全權)의 소유자이고(마르 2:23-28, 3:1-8 병행구), 더 이상 앞지를 수 없는 하느님의 임재(臨齋)이며(마태 11:25 이하, 요한 10:30), 성령의 충만이다(루가 4:18). 그의 신적 선재성(先在性)이 명백히 증언되고 있다(요한 1:1-18, 필립 2:5-11). 그리고 신약성서에서는 성령이 하느님과 조물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우주적이거나 종교적 세력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으로서 하느님 구원의 충만이다(루가 4:18, 디도 3:5 이하, 1고린 12:4). 예수 자신은 성령(pneuma)에 대해서는 드물게 언급하고 있고(마르 3:28-30), 그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한 분이라고 지칭된다(마태 12:31, 루가 12:10). 부활이후에 성령의 출현이 보도된다. 성령이 전 교회공동체 안에서 체험된다는 증언이 이루어진다(사도 2:1-41, 4:31, 8:15-17, 10:44, 19:6). 이 성령은 그리스도 계시와의 일치 안에서 역사한다(로마 8:11, 필립 1:19, 2고린 3:17, 갈라 4:66, 1요한 4:1-3).
예수 그리스도(성자)와 성령이 하느님의 현존이라고 증언되기는 하지만, 신약성서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동일시하지는 않는다.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파견하고(요한 14:16·20, 15:26, 16:7, 17:3, 갈라 4:6), 성자와 성령은 성부와 각기 고유한 관계를 맺고 있다(마태 11:27, 요한 1:1, 8:38, 10:38, 15:26, 1고린 2:10). 이를테면 구체적 나자렛 예수가 우리를 위한 하느님(성부)의 현존이면서도 성부 자신은 아니다. 성령도 하느님(성부)의 자기 전달이지만, 하느님의 파악 불가능성을 체험케 하며 따라서 성부와의 구별을 체험케 한다. 신약성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서의 하느님의 단일성과 구별성을 모호하게 알고 있다. 여기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구원작용이 구별되어 증언되고 있으며, 성자와 성령이 단순히 하느님과 조물 사이의 중간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과 같이 배열되고 있다. 예수 세례 때의 삼위일체묘사(마르 1:9-11), 부활한 예수의 세례명령 속에 나타난 성삼형식(마태 28:13)과 다른 많은 삼위일체 정식(定式)들은 이러한 초기 교회의 신앙을 증언하고 있다(로마 1:3-5, 8:9-11, 2고린 13:13, 요한 14:26, 15:26).
2. 삼위일체 교리 : 삼위일체는 엄격한 의미에서의 절대신비(絶對神秘, mysterium absolutum)로서 실증적 계시와 독립해서 인지될 수 없으며, 계시된 다음에도 이성(理性)에 의해 온전히 간파될 수 없다(DS. 3015, 3225). 그리스도 신앙에 절대신비가 있다면 이 삼위일체 신비이고, 가장 기본적 신비이다. 왜 삼위일체가 이러한 가장 기본적 신비인지는 교리상으로 확정된 바 없으며, 왜 이 신비가 우리에게 중요한지, 또 어떠한 구원실재 안에 우리를 위해 소여되어 있는 지도 명시적 사유가 교리차원에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삼위일체 교리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 한 하느님이 세 '위격'(位格, upostasis, persona, subsistentia)으로서 존재하는데(DS. 73, 75, 88, 112, 115, 152, 501, 525, 528-531, 800, 803, 351, 1330), 이 위격들은 하나의 하느님 본성(本性, phusis, natura)이고, 하나의 하느님 본질(本質, ousia, essentia)이며 하나의 하느님 실체(實體, substantia)이다(DS. 73, 75, 88, 112, 115, 152, 150, 501, 525, 527이하, 800, 803이하, 1330이하, 1337, 1880). 이 세 위격들은 동일하고, 동일하게 영원하고 전능하다(DS. 44, 75, 125, 162-169, 188, 501, 526이하, 800, 851이하, 1330). 여기서 사용된 개념들의 교의적 정의는 내려진 바 없다.
② 그런데 이 위격들은 서로 구별된다(DS. 75, 531, 1330이하, 2828). 성부는 다른 원천을 가지고 있지 않고(DS. 75. 189, 525, 800, 1330이하), 성자는 성부의 실체로부터, 오로지 성부로부터 출생하였다(DS. 44, 189이하, 76, 112, 125, 163, 525이하, 800, 804, 1330이하). 성령은 출산되지 않고(DS. 75, 527), 하나의 유일원리로서의 성부와 성자로부터 발출된다.(DS. 71, 189이하, 75, 150, 527, 800, 850, 1300, 1330). '출산'(出産, generatio)과 '기출'(氣出, spiratio)은 신성의 전달 내지는 파견이라는 점에서 일치하고, 이 전달이 한편으로는 성부로부터 출산되고 또 다른 편으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기출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러나 '출산'과 '기출'이 어떻게 구별되는지 교리적으로 확정되어 있지 않다.
③ 하느님 안에는 실제로 구별되는 관계(關係, relatio)가 있으며(DS. 531, 573, 800), 따라서 하느님의 본질과 관계를 통해서 구성된 하느님 위격들 사이에 실질적 차이가 있다(DS. 73, 189, 973이하). 그런데 세 위격들이 하나의 하느님 본질과 동일하면서 상대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모순이 되지 않는 근거가 보다 선명하게 제시될 필요가 있다.
④ 하느님의 '관계적' 위격들은 하느님의 본질과 실제로 구별되지 않아서 (DS. 529, 580, 1330), 이 본질과 함께 하나의 사위일체(四位一體, Quaternitas)를 구성하지 않는다(DS. 534, 803이하). 하느님 안에서는 상반되는 관계(relationis oppositio)가 존속하지 않는 한, 만사가 하나이며(DS. 1330), 각 신적 위격은 전적으로 다른 위격들 안에 존재하며(DS. 1331), 세 위격들이 각기 하나의 참 하느님이다(DS. 529, 680, 790, 851).
⑤ 하느님의 위격들은 존재(存在, esse)와 역사(役事, operatio)면에서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DS. 189, 112, 501, 800, 851), 외부를 지향해서 오로지 하나의 역사원리(役事原理)일 뿐이다(DS 501, 531, 800, 1330). 세 위격들의 역사의 동일성을 말하는 공리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효능인(效能因, causa efficiens)이며(DS. 3814), 이 공리로 말미암아 오로지 로고스(말씀)만이 인간이 되었다는 육화 교리와 '창조되지 않은 은총'(gratia increata) 교리가 부인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인간이 된 위격은 성부나 성령이 아닌 성자 위격이며, 세 위격들은 인간과 각기 고유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 교리들로부터 파생되는 교리인, 성부로부터의 성자와 성령의 구세경륜적 '파견' 교리는 교도권에 의해서 거의 계발되어 있지 않다(DS. 527, 536, 1523). 요컨대 삼위일체 교리는 하느님의 내적 본질 구명에 치중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3. 삼위일체론의 신학적 기점 : 삼위일체는 있을 수 있고 생각될 수 있는 지복(至福)의 신비임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신심생활과 교의신학에서도 삼위일체론이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주고, 그리스도인들이 삼위일체의 신비성을 깨닫지 못한 채 단지 그리스도 교화한 유일신론자들처럼 생활하는 것같이 보인다. 삼위일체 교리를 대할 때, 이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며, 사람들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으며 이 신비가 왜 계시되었는지 질문하게 된다. 사변적 삼위일체 교리가 신자들로 하여금 이 신비에 대한 신심을 촉진하기보다는 소원감을 느끼게 하는데 한 몫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삼위일체 신비에 대해 사변적 고찰을 시도하는 전통적 입장과 대조적으로 역사(歷史) 안에서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하느님의 행업(行業)을 삼위일체의 본질로 파악하여 이 신비를 구원의 신비로 제시하려는 현대 신학자들의 취지와 입장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전통적 삼위일체론과 현대 신학의 삼위일체론의 기본입장이 요약 소개될 필요가 있다.
① 아우구스티노에 의해 계발되고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심화된 이른바 '심리학적 삼위일체론'(心理學的 三位一體論, De Trinitate psychologica)은 사계에서 고전적이고 전통적 삼위일체론으로 간주되고 있다.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다"라는 성서적 진리를 자신의 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모상이 원형을 반영한다는 사실에 착안해서, 모상의 본질을 구명해서 원형이신 하느님의 내적 신비를 일별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하느님 본질의 단일성과 세 위격들의 구별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유비(類比)를 인간영혼(anima)속에서 찾고자 하였다. 그래서 기억(mens), 인식(notitia), 사랑(amor)이 영혼의 세 가지 속성으로 파악되고, 이들이 삼위일체의 내재성을 특정하게 이해토록 하는 유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기억하고 인식하고 사랑하는 영혼의 유비속에서 본질적으로 하나인 실재의 세 현실적 요소들로서의 위격들을 본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의 기억이 성부에, 인식이 성자에, 사랑이 성령에 해당된다고 설명된 것이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이 실제로 구별되면서 하나의 하느님 본질과 하나가 되는 자립적 관계(自立的 關係)라고 규정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 역시 아우구스티노를 따라 인간 정신생활의 성취 속에서 하나의 하느님 안에서의 세 위격의 현존을 파악하는 유비를 보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발출(發出, processus)의 성격을 순수정신의 내재적 행위로 규정한다. 이 발출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정신의 두 기능, 인식(認識, cognitio)과 의지(意志, voluntas)가 하느님의 발출에 상응하는 유비로 등장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느님 안에서 말씀[知性]과 사랑[愛志]의 두 발출 이외에 다른 발출은 가능하지 않다고 본 것이다. 그는 하느님의 발출의 성격을 지성과 의지의 성취양식을 분석하는 가운데 파악하려고 하였다. 그는 지성의 발출이 유사성(類似性, similitudo)의 근거에 입각하여 발생하기에 출생(出生, generatio)이라고 규정한다. 출산자는 자신과 유사한 것을 출산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의지의 발출은 유사성의 이유 때문에서가 아니라 원하는 상대자에로 이끌리는 성향(inclinatio in rem volitam)에 입각해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하느님에게 있어서 말씀을 산출하는 지성작용은 유사성의 산출과 같아서 '출생'이라고 지칭할 수 있고, 하느님에게서의 의지작용은 유사성의 출산행위가 아니라 성향적 발출행위이기에 '기출'로 표현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 심리학적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의 내적 신비를 구명하는데 기여하였다. 이 신학의 기본 통찰들은 학설이기는 하지만 교회의 공적 가르침을 부연해서 해설한다고 볼 수 있다.
② 현대 신학적 삼위일체론은 하느님의 내적 본질 구명에 역점을 두는 전통적 삼위일체론과는 달리 역사 안에서 구체적으로 계시되는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의 실상을 파악하려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는 전통적 삼위일체론의 일방성이 지양되고, 내재적 삼위일체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의 동일성이 강조되면서 인간과 조물 일반을 향한 하느님의 구원행업이 바로 내재적 삼위일체의 본질로 파악되고 있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이 인간 역사로부터 분리된 신적 실재에 대한 사변적 이론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안에서 인간과 관계를 맺는 하느님의 역사에 관한 실천적이고 생동적 사유가 된다. 전통적 삼위일체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양자택일적 입장을 정립하고자 시도하는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와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1926~ )의 삼위일체론적 기점은 범례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라너는 삼위일체를 구원신비로 이해하려는 취지로써 삼위일체론을 전개한다. 그는 구원이 하느님의 자기전달(Selbst-mitteilung Gottes)인 은총 안에서 성취되는데, 이 은총이 삼위일체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로서 당신을 자신 안에 폐쇄시키지 않고 외부로 건네준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외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가능성의 조건으로 수취자(受取者)가 요청된다. 이 수취자가 바로 정신과 육신의 합일체인 인간이다. 라너에 따르면,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참으로 인간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존재론적 구조에 상응해서 초월적(정신)이고 역사적(육신) 양식으로 발생한다. 인간의 역사성에서 비롯하는 전 인류사는 하느님의 계시사(啓示史)와 구세사와 공존한다고 그는 보고 있다. 하느님이 자기전달을 통하여 인간과 세계의 근원으로 작용하면, 구체적 인간 역사가 바로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현현이자 인간에 의한 수용의 역사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제공이 인간에 의해 전적으로 수용될 경우에 신인(神人)그리스도의 출현이 발생한다고 라너는 본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의 절정인 그리스도의 육화를 '행해진 진리'라고도 라너는 부른다. 그리고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초월적으로 작용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다가온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수용하도록 하는 힘이 바로 성령이라고 규정된다. 여기서 성령의 고유성이 사랑(Liebe)이라는 통찰이 생겨난다. 또한 라너는 하느님의 자기전달이 진리로 발생하는 한, 역사를 지니며 역사를 형성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자기전달이 사랑으로 발생하는 한, 이는 절대 미래를 지향하는 초월 안에서의 역사의 재현이라고 본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역전시킬 수 없이 나타나는 구체적 역사로서의 역사와 완성된 최후 미래를 지향하는 초월은 구별되면서 나름대로 하느님의 자기전달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한 분 하느님이 자기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가운데 파악할 수 없는 신비로 머무르는 한, 그 분을 성부라고 부른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인간의 초월성을 주도하는 원리로 전달하는 한, 그 하느님을 성령이라고 부른다. 하느님의 이 자기전달은 역사 안에서 현현되는데 이 분이 곧 성부의 육화된 말씀, 성자라고 불린다." 한 분 하느님의 자기 전달의 세 측면이 동일시되거나 온전히 분리되지 않으면서 온전히 주어진다고 라너는 보고 있다. 그리고 말씀(진리)과 성령(사랑)의 두 파견은 인간과 세계를 향한 하느님의 자기전달 속에서 상호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도 하나로 환원되지 않는 두 소인(素因, Moment)들로 파악된다. 하느님의 자기전달은 초월적으로 성령 안에서, 그리고 역사적으로 성자 안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라너는 이 이중 파견이 바로 하느님 자체에 근원을 두고 있다고 강조한다. 하느님 성부가 자기전달을 통해서 당신을 전달하고, 다른 편으로는 '진술된 것'과 '수용된 것'과의 실질적인 구별을 이룩한다. 그리고 전달된 것이 '전달자'로서의 하느님과 '전달된 것'으로서의 하느님 사이에 실제적 구별을 지양하지 않는 한에서, 바로 하느님의 '본질'로 표시될 수 있다고 라너는 보고 있다. 그는 이렇게 내재적 삼위일체가 인간의 충만으로서 전달됨으로써 구원이 성취된다고 보고 있다. 라너는 성자와 성령의 파견과 발출을 하느님의 (내재적이고 구세경륜적) 자기 전달의 발생으로 규정함으로써 삼위일체 신학을 구원의 신비로 이해한 것이다.
몰트만 역시 라너처럼 내재적 삼위일체와 구세경륜적 삼위일체의 동일성을 강조하면서 삼위일체를 정관적으로 사유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이해하려고 한다. 그는 삼위일체를 궁지에 처한 조물들의 자유를 위한 그리스도의 수난역사의 압축으로 보면서 십자가의 신학이 삼위일체론이며, 삼위일체론은 십자가의 신학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와 하느님 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것을 삼위일체적으로 이해한다. 아들 예수는 하느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인간을 위하여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죽음에로 건네지면서 죽음의 고통을 당하고, 아버지는 아들의 죽음에서 그의 아버지되심의 죽음을 고통당한다는 것이다. 몰트만에 의하면, 아들의 버림받은 상태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가장 깊이 분리되어 있으며, 동시에 아들의 양도 속에서 가장 깊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부터 발생한다고 진술된다. 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희생의 성령으로서 버림받은 인간들에게 와서 새 생명의 가능성과 힘을 선사하는 절대적이고 무제한적 사랑이라는 것이다. 몰트만은 십자가 사건을 종말론적 삼위일체 사건으로, 생명을 창조하는 사랑의 현재적 성령 가운데서 사랑하는 아버지와 사랑받는 아들 사이에 발생한 사건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리고 몰트만은 하느님의 역사는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서 절정에 이르렀으며, 인간의 모든 역사를 그 속에 내포하고 있어서 역사의 역사라고 이해한다. 결과적으로 죄와 죽음의 성격을 지니는 인간의 모든 역사가 하느님의 역사인 삼위일체안에 통합된다는 통찰이 파생된다. 그래서 인간고난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고통이 아닌 고통이 없고,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과 기쁨에로 통합되지 않는 삶이나 기쁨도 없다는 것이다. 몰트만에게서 삼위일체가 고통에 찬 조물의 역사와 관련된 실재임이 적나라하게 기술되고 있다. 몰트만이 삼위일체론을 하느님과 조물 일반, 특히 자유로운 조물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역사의 원리'로 제시한 것은 그리스도 신앙의 하느님 이해뿐만 아니라 신앙의 쇄신 자체를 위해서도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창조 이래의 역사과정은 성령 안에서 부활한 성자를 통하여 조물, 특히 인간을 향하는 하느님 성부로부터의 구원역사이자, 성령에 의해 이끌린 인간과 세계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께로 인도되는 귀환역사로 이해될 수 있다. 구체적 경위는 신비로 머무르지만, 인간과 세계의 완성된 구원이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될 삼위일체적 하느님의 완성된 역사와 동일하다는 사실을 삼위일체 신비는 내포하고 있다. (沈相泰)
◆계시◆
1. 종교학적 의미 : 계시(啓示)란 말마디는 어원적으로 '드러나다', '나타나다', '열어 밝히다'(revelare)라는 동사에서 유래한다. 따라서 '계시'란 일반적으로 어떤 '감추어져 있는 것', '가려져 있는 것'이 '자기를 드러내다', '자기를 나타내다', '자기를 열어 밝히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종교에 있어서 그 토대가 되는 것은 '거룩한 것'(聖, Das Heilige)이다. 따라서 종교학적으로 볼 때, '계시'라는 개념은 흔히 '거룩한 것'이 '자기를 드러내다', '자기 자신을 열어 밝히다'(聖顯, Hierophania)라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① '거룩한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신비'(神秘, Mysterium)이다. 다시 말해서 '거룩한 것'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감추어 두고 있다. 어둠의 장막 속에서 자기 자신을 숨겨 두고 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거룩한 것'을 있는 그대로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 우리 인간이 일상 생활에서 접촉하고 있는 사물 또는 사건들은 드러나 있다. 감추어져 있지 않다. 그들은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을 나타내고 있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직접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모두가 '속(俗)된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속된 것'이며, 또한 '속된 것'의 영역에 속한 것들이다. 이와는 달리 '거룩한 것'은 그 자체로 자기 자신을 감추어 두고 있다. 어둠 속에서 자기 자신을 숨겨 두고 있다. 우리 인간은 이 '거룩한 것'을 결코 직접적으로 있는 그대로 경험하거나 체험할 수 없다.
② 이 '거룩한 것'은 때때로 그리고 예외적으로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일정한 장소, 일정한 역사 속에서 자기 자신을 열어 밝힌다. 그러나 '거룩한 것'은 이 때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아닌 다른 것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자기 자신을 나타낸다. 다만 다른 것 즉 '속된 것'을 매개로 해서만이 자기 자신을 열어 밝혀 준다.
'거룩한 것'은 때로는 일정한 사물(事物) 즉 나무 · 바위 · 하늘 등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이들 사물을 통해서 '거룩한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이 흔히 오래된 고목나무 앞에서 또는 커다란 바위 앞에서 엎드려 절하는 것은, 그들이 바로 이 나무 또는 바위를 통해서 '거룩한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하늘을 두려워하고 경천사상(敬天思想)을 갖게 되는 것은, 그들이 바로 하늘을 매개로 하여 '거룩한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거룩한 것'은 또한 때때로 일정한 사건 그리고 그 사건과 관련되는 인간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열어 밝혀 준다. 사람들이 흔히 어떤 인간 즉 예언자나 성자(聖者)를 두려워하고 경외(敬畏)하는 것은, 그들이 이러한 예언자나 성자를 통해서 '거룩한 것'을 얻어 만나기 때문이다.
③ 이와 같이 '거룩한 것'은 그것이 자기 자신을 드러낼 때에는, 언제나 일정한 장소와 일정한 역사 속에서 자기 자신을 한정시키게 된다. 다른 사물이 아닌 바로 이 '사물'에, 그리고 다른 사건이 아닌 바로 이 '사건'에 제한하여 자기 자신을 나타낸다. 그리하여 다른 나무가 아닌 바로 구체적인 이 나무만이 '거룩한' 나무로, 그리고 다른 사건이 아닌 바로 구체적인 이 사건 만이 '거룩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또한 다른 사람 아닌 바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이 사람만이 '거룩한' 인간[聖者]으로 인정된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이러한 사실에 대한 경험은 역사적으로 일정한 형태의 종교들을 형성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그 결과로 세상에는 다만 하나의 종교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종교들이 존재하게 된다. (鄭達龍)
[참고문헌] M. Eliade, The sacred and the profane, New York 1961 / F. Heiler, Erscheinungsformen und Wesen der Religion, Stuttgart 1961 / G. Van der Leeuw, Phanomenologie der Religoon, T?bingen, 1956 / R. Otto, Das Heilige, Munchen, 1963 / M. Scheler, Vom Ewigen im Menschen, Bern-Munchen 1968 / B. Welte, Religionsphilosophie, Freiburg 1978.
2. 성서적 의미 : 그리스도교의 계시 개념은 여타 종교에서 이해하고 있는 계시 개념과 일치하고 있지 않음을 미리 밝혀 둔다. 성서 안에서는 계시자인 '거룩한 것'이 '거룩하신 야훼 하느님'으로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즉 성서적 계시는 가장 거룩한 존재자로서의 인격적 신(神)이 자유로이 자기자신을 드러내신다는 데에 그 특색이 있다. 그러나 성서 안에서 '계시'를 표현하는 용어는 단일하고 명확하기보다 다양한데, 이는 성서가 계시에 대한 개념 내지 반성보다는 계시의 사실과 그 사건 자체를 더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성서적 계시는 역사적 행위 안에서 완성된다. 왜냐하면 거룩한 하느님은 시간의 제약 안에 들어오셔서 천천히, 점진적으로 인류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기 때문이다.
① 구약성서 : 구약성서는 스스로 추상적 사고단계 내에서 하나의 신을 유출해 내고 있지 않다. 구약성서는 오히려 신이 자신을 스스로 계시하시기를 원하셨을 때에만 비로소 신은 인식 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신명 4:32 이하).
하느님의 계시는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실질적인 삶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계시에 의해 생존을 유지하였다. 그래서 하느님은 자신의 이름을(이사 64:1 이하), 자신의 권능을(예레 16:21), 자신의 위대한 일을(하바 3:2), 자신의 도우심(시편 98:2)을 계시하시며, 그것들만이 유일무이한 것임을 알리고 계시다. 그런데 하느님의 계시는 바로 역사 내에서 발생하므로, 인간과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역사는 하느님 계시의 대상이요 수단이 된다. 하느님은 특정 인물들을 통하여(아브라함, 모세, 예언자들) 자신을 계시하시며, 또한 폭풍이나 구름, 기둥, 불기둥, 나무소리, 바람소리 등의 형태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이는 하느님이 이 세계 내에서 매개물을 통하여 인간에게 자신을 알리시는 형태들로서, 하느님 계시의 역사 관련성을 표현하고 있다(출애 19:16, 14:24, 2사무 5:24, 1열왕 19:12, 시편 8:4, 19:2). 또한 계약의 궤, 천막, 성전, 하느님의 지팡이, 희생제물 등이 계시의 특정장소로 등장하는 것은 계약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는 역사 내에서의 하느님 의지의 계시를 현시함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동시에 인간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장소가 된다. 즉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야훼임을 백성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심이다(예레 31:34, 에제 36:38, 37:28, 이사 43:10). 하느님의 자기 계시는 순수 인간적 지성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바 역사라 칭하여지는 인간적 성취 안에서 비로소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 내 행위자로서의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 및 온 세계백성을 위한 약속으로 자신을 계시하고 계신다(미가 4:5, 6:3 이하, 예레 11:5, 신명 4:37, 출애 32:13, 이사 41:8 이하, 창세 9:1).
② 신약성서 : 신약성서는 결정적 계시자로서의 예수에게로 집중되어 있다. 계시관에 입각하여 신약성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의 약속이 충만되었음을 기술하고 있다.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는 빛이고 진리이며 계시자이다. 그러나 바울로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하느님 신비의 내용-계시된 자-이 된다. 어쨌든 '계약', '하느님의 나라', '하느님의 백성' 등의 신·구약의 근본 개념들은 신약성서의 여러 귀절들을 통하여 결국 구약성서의 옛 계약에서 나타난 하느님의 약속이 구약성서의 하느님 상(像)과 함께 새로운 계약인 그리스도 안에서(에페 3:6) 계시의 충만으로 주어지고 있음을 지시하고 있다.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는 이스라엘 역사와 그리스도가 연결됨을 기술하고 있고(로마 9장 이하), 구약의 구절들을 요한복음(3:9)은 아드님의 증거로서 얘기하고,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3:15)는 신앙인들을 아브라함의 유산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러한 신약성서의 진술들은 모두 예수가 구약성서의 약속이 충만된 하느님의 계시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계시이다. 왜냐하면 예수는 구세사 안에서 모든 약속의 충만이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활은 인간의 삶은 원하시는 생활하신 하느님의 자기 계시이다. 하느님은 약속의 말씀과 약속 충만의 업적 사이에서,즉 과거로부터 현재를 뛰어넘어 개방된 미래에로 뻗쳐진 역사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고 계신다. 계시는 예수를 뛰어넘지는 않지만,-바로 예수 안에서 인간의 구원이 존립 가능하므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계속 작용한다. 그러므로 계시는 역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고, 충실한 말씀으로 인간에게 있어서 하느님 말씀의 역사인 것이다.
3. 교의신학적 의미 :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계시는 초세계적인 하느님께서 스스로를 열어 보이시는 것이다. 이러한 계시는 먼저 행위 자체로서의 계시인 능동적 계시(revelatia activa)와 계시된 것을 의미하는 수동적 계시(revelatia passiva), 이중의 측면에서 고찰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초자연적 계시는 본질에 있어서 하느님이 스스로 자신을 인류에게 열어 보이셨다는 데에 존재한다고 천명함으로써, 계시의 개념을 순수 지성적으로 추구하려는 경향을 배척하고 있다. 이 초자연적 계시는 역사적 행위 안에서 일어나고(계시헌장 3항), 계시의 완성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달한다.
① 하느님의 창조업적인 피조물 안에서 자연적 방법으로 하느님의 계시가 파악되기도 한다(자연적 계시, revelatio naturalis). 그러나 피조물의 자연적 인식가능성을 뛰어넘는 초자연적 계시(revelatio supernaturalis)는 고유의 의미에서 계시라 불려진다.
② 초자연적 계시는 내용적으로 다시 구분될 수 있다. 죽은 후에 영원히 축복받게 되는 인간에게 하느님은 자신을 열어 보이시므로, 이 축복받은 인간은 하느님의 신비를 하느님을 통하여 하느님 안에서 완전히 인식할 것이다. 이러한 계시를 영광의 계시(revelatio gloriae)라 부른다(로마 8:18 이하, 1베드 1:5 참조). 그러나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하느님의 초자연적 신비가 완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실질적으로 초자연적 실재인 하느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말씀계시) 하느님의 신비를 표현하는 상상이나 개념들은 유비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뿐이다. 사도 바울로는 그래서 “우리가 지금은 (하느님을)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본다“(1고린 13:12)고 하였다. 하느님은 초자연적인 말씀계시를 통하여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업적계시로 부르신다. 그러므로 자연적 신인식(神認識)은 구세사와의 맥락 안에서 가능하다. 또한 초자연적 계시는 일반 구세사 전반을 의미하는 일반적 초자연적 계시와 특수한 구세사, 즉 신·구약 성서에 담겨진 내용을 의미하는 특별한 공적 직무적 계시로 구분되기도 한다.
③ 전달되는 진리가 신비로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을 때 초자연적 계시라 부른다. 초자연적 말씀계시가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일 때 공적 계시(revelatio publica)라 부르고, 다만 한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계시는 사적 계시(revelatio privata)라 부른다.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공적 계시의 절정이고 종결임은 신앙의 진리이다. 그리고 공적 계시의 확실한 선포는 마지막 사도가 죽으면서 끝났다는 것은 적어도 신학적으로 확실하다. “로마 교황과 주교들은 … 새로운 공적 계시를 신앙의 유산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없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헌장 25항).
계시의 중계방법에 따라서, 하느님의 사자(使者)에게 직접적으로 내려지는 계시를 직접적 계시(revelatio immediata)라 하고, 하느님의 사자를 통하여 인류에게 중계되는 계시를 간접적 계시(revelatio mediata)라 부른다. 구원의 신비의 초자연적인 공적 계시는 근본적으로 인류를 위한 간접적 계시인 것이다. (朴順信)
◆강복◆
준성사의 하나로 사람이나 물건에 하느님의 은혜를 비는 행위. 교회는 신자들 생활의 거의 모든 사건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신비에서 흘러 나오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하여 성화되도록(전례헌장 61) 끊임없이 간구(懇求)하고 있다. 강복은 이처럼 교회의 간구의 힘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얻는 수단이며, 이는 교회가 제정한 것이다. 보통 성직자가 오늘 손으로 십자가 표시를 그으며 기도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강복은 전례 중에 전례 집전자가 참석자들에게 하기도 하고 전례 밖에서 하기도 한다. 혼인강복(전례 78)과 미사 강복은 전자의 대표적인 경우이며 이 밖에 전례 중 복음을 낭독하려는 부제나 고해성사를 보려는 참회자에게 강복하기도 한다 구약시대에도 사람이나(민수 6:22-24) 음식에(1사무 9:13) 전례적 강복을 하였다. 넓은 의미로서의 비전례적인 강복은 신자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주교나 사제가 신자에게, 부모가 자녀에게 할 수 있고, 신자가 십자 성호를 긋는 것은 자신에게 강복하는 의미가 있다. 강복을 하는 궁극적인 주체는 하느님이시다. 강복의 대상은 사람뿐 아니라 집, 음식물, 전답 등 사람과 관련있는 모든 사물이 포함된다. 강복은 준성사에 속하므로 사효적(事效的)인 성사와 달리 강복 받는 자의 신앙 정도에 따라 그 효과를 얻는다. (⇒) 준성사
출처 : [가톨릭대사전]
◆성체◆인쇄
한자 聖體
라틴어 Eucharistia
영어 Eucharist
[관련단어] 성체성사
빵과 포도주의 외적인 형상 속에 실제로, 본질적으로 현존(現存)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말한다. 어원적으로는 희랍어 '유카리스티아'(eucharistia)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말의 본래의 뜻은 '감사하다'는 것이다. 이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은혜에 감사함을 의미한다. 구약성서에는 성체에 대한 많은 예표(豫表)들이 나오는데 창세기 14장 18절의 '떡과 술'의 표현이 그 한 예이다. 또한 예수는 스스로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1)라고 하셨으며, 최후만찬 때 하신 말씀(마태 26:26-28, 마르 14:22-24, 루가 22:19-20, 1고린 11:23-25)을 통하여 성체성사(聖體聖事)를 설정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체에 대한 확신은 예수의 강력한 말씀에 근거하므로 성체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성체는 미사 중 성찬의 전례 부분에서 축성되어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해져 한 가지 신비를 세 가지 측면에서 보여준다. 우선 성체는 세상 끝날까지 인간과 함께 계시기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비롯된 '실재적'이며 '신체적'인 현존이다. 또한 성체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이다. 즉, 미사성제를 통해 이 희생이 계속됨으로써 그리스도는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성체는 사랑의 일치를 보여준다. 즉 신자들은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하느님과의 일치라는 영혼의 초자연적 생명을 기르게 되는 것이다. (⇒) 성체성사
출처 : [가톨릭대사전]
◆파스카 신비◆
(1) 특히 최후 만찬부터 예수 부활 대축일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구속 행위를 표현하는 공통 개념이다.
(2)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가 전례주년을 개정하고 로마 예식에서 전례력을 인준한 문헌의 제목이다. 한 해의 여러 전례 시기를 통해 파스카 신비가 펼쳐지듯이 새 전례력은 하느님 백성에게 그리스도의 신비 전체를 더욱 강렬하게 체험하게 할 것으로 기대된다.
출처 : [전례사전]
◆그리스도의 신비체◆
그리스도께서 강생의 신비를 널리 전하고 지속하기 위해 세우신 가톨릭교회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교회는 가시적이고 살아 있으며 성장하는 유기체로서 하느님의 성령에 의해 활력을 받기 때문에 ‘몸’[體]이다. 교회의 본질적 특성은 신비이지만 교회의 모든 법과 가르침과 예식들은 은총의 성사적 원천이므로 ‘신비적’이라 할 만하다. 교회의 창시자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보이지 않는 머리로 머무시고 그분을 통해 지체들에게 모든 축복이 내린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비체’라는 말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사성(聖事性)을 뜻한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온 세상에 은총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께서 세우신 새 법의 위대한 성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바치셨다. 성체성사에서 예수님은 사제요 제물로서 신비체와 일치하여 당신 자신을 봉헌하신다. 교회(敎會 Churches) 참조.
출처 : [전례사전]
◆신앙의 신비◆
신앙의 신비는 계시와 그리스도교 신앙의 일차적 대상인 구원의 신비를 가리킨다(1디모 3,9). 신앙의 신비는 파스카 신비요,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당신 백성 한가운데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신비이다. 신앙의 신비는 예수님의 구원적 사랑으로 실현된 하느님의 전체 계획이며 성체성사의 성사적 표지 아래 포함되어 있다. 전에는 신앙의 신비라는 말이 성체 축성의 일부 말마디였다. 지금은 주례자가 회중에게 기념 환호송을 선포하도록 초대하면서 선포하는 표현인데 이는 파스카 신비를 요약한다.
출처 : [전례사전]
◆묵주 기도◆
묵주 기도는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외는 전례 신심 기도이다. 성서에 나오는 열다섯 개의 신비들이 묵주 기도의 주제이다. 묵주 기도는 이 신비들을 묵상하면서 15단을 바친다. 15단을 5단씩 묶어 각기 환희와 고통과 영광을 묵상하는 묵주 기도는 예수님의 강생과 고통과 영광에 초점을 맞춘다. 묵주 기도는 150개의 시편을 외는 대신 성모송을 150번 반복하기 때문에 ‘마리아 시편집’이라 불리기도 한다.
교회는 이 신심 기도를 강력히 추천하며 많은 교황들이 묵주 기도를 참된 그리스도론적 신심을 발전시키는 훌륭한 기도로 칭송하였다. 특히 묵주 기도에서 묵상하는 신비들은 성서와 전례에서 따온 주제들이기 때문이다. 묵주 기도를 바치면 대사를 얻을 수 있다.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에서 정확히 지적하듯이 묵주 기도는 대중 신심이며 전례에서 유래하여 백성을 전례로 인도하는 기도이다. 묵주 기도는 전례와 쉽게 조화를 이루는 경건한 기도이다. 전례는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묵상하는 묵주 기도에서 기억하는 것과 똑같은 신비를 거행한다.
그러므로 전례에서 원동력을 받는 경건한 삶을 실천하는 묵주 기도는 신도들의 마음과 정신을 그리스도의 신비와 친숙하게 한다. 그래서 묵주 기도는 전례 행위에서 신비들을 거행하기 위한 훌륭한 준비일 수 있다. 그러나 전례를 거행할 때 묵주 기도를 바쳐서는 안 된다.
출처 : [전례사전]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 항목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예수님은 삼위일체의 제2의 위격이시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사람이 되시고 죽으셨으며 다시 살아나셨다. 예수님은 일차적으로 전례를 통해 온 백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교회를 세우셨다. 구원 역사에서 그리스도 중심성은 그분의 네 가지 칭호를 통해 더욱 생생하게 드러날 수 있다.
(1) 중개자. 이 칭호에는 예수님의 강생부터 주님 승천 대축일 기간에 강생하신 말씀께서 세상에서 당신 사명을 수행하시며, 특히 수난과 부활을 통해 이룩하신 구원 업적이 뛰어나게 잘 표현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지금도 천상 어좌에서 중재를 계속하고 계시며(히브 7,25) 교회의 가시적인 중재와 더불어 각자를 구원하시기 위해 성체성사를 통해 중재하신다.
(2) 사제. 예수님은 강생하시는 순간부터 사제이시다(히브 10,7 이하 참조). 사실 그분은 유일하고 참되며 최고이고 완전하며 영원한 사제이시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제직을 위한 희생 제물이시고 세상의 구속을 위하여 봉헌된 제물이시다. 그분의 희생 제사는 십자가의 제대 위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3) 예언자. 예수님은 강생하시어 세상에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이시다. 그분의 강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알려질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위대한 예언자이시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계시를 완성하시고 모든 인간에게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신다.
(4) 왕. 예수님은 당신의 인간 본성을 삼위일체의 제2의 위격이 지닌 신적 본성과 하나로 묶는 신비한 일치로 인해 왕이시다. 예수님은 획득한 권한에 의해서도 임금이시다. 곧 그분은 인류의 구속을 완수하셨기 때문에 임금이시기도 하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완전히 다 내어 주셨기 때문에 부활과 승천을 통해 아버지로부터 받으신 영광 때문에도 임금이시다. 예수님은 이 왕권을 영원히 행사하실 것이며 최후 심판 때에는 특수한 방식으로 왕권을 행사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몸, 곧 교회의 머리이시다(골로 1,18 참조). 그분은 당신 몸인 교회를 당신 은총으로 채워 주시고 당신의 인성(人性)을 통해 신적 생명(삶)을 끊임없이 부어 주신다. “그분한테서 온몸이 영양을 받아서 모든 기관이 관절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자 맡은 일을 하고, 그리하여 몸은 자라고 또 자라서 사랑으로 스스로를 세우게 된다”(에페 4,16). 우리는 이를 하느님께서 영원으로부터 가지고 계셨으며 구약성서에서 다양하게 드러났고 신약성서에서 충만히 계시되었으며 종말론적 완성을 이룰 때까지 교회 안에서 영구히 남을 그리스도의 신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전례 - 신비 안의 그리스도
전례는 그리스도 신비를 특수하게 실현한다. 그리스도의 위격과 구속 행위는 교회와 인간과 우주, 특히 전례에 계속 흐르고 있다. “전례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이다. 전례 안에서 인간의 성화가 감각적인 표징들을 통하여 드러나고 각기 그 고유한 방법으로 실현되며 그리스도의 신비체, 곧 머리와 그 지체들이 완전한 공적 예배를 드린다”(「전례 헌장」 7항).
전례는 또한 ‘기념’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 전례는 과거의 사건을 의식적(儀式的)으로 상기하고 현존하게 하며 미래에 완전히 실현되게 한다. 전례는 동시에 그리스도와 교회에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 구원의 총체적 성사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의 원(元) 성사이시고 교회는 구원의 보편 성사이다(「교회 헌장」 48항 참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밝혔듯이 전례는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현존케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교회, 특히 전례 행위 안에 계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미사의 희생 제사 안에 현존하신다. (…) 곧, 그리스도께서는 주례자의 인격 안에는 물론 특히 성체 재료들 안에 현존하신다. 당신 능력으로 성사들 안에 현존하시어 누가 세례를 줄 때에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다. 당신 말씀 안에 현존하시어 교회에서 성서를 봉독할 때에 당신 친히 말씀하신다. 끝으로, 교회가 기도하고 찬양할 때에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겠다’(마태 18,20)라고 약속하신 바로 그분께서 현존하신다”(「전례 헌장」 7항).
그리스도의 현존은 유일무이하지만 다양한 방식으로 실현된다. 그분의 현존은 ‘참된’ 현존이다. 성체성사의 현존만이 유일하게 ‘참된’ 현존이라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교황 바오로 6세가 관찰한 것처럼 이는 다른 현존들이 참되지 않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초자연적 실재의 표지들을 통해 실현된다. 그분의 현존은 ‘인격적’ 현존이며 그리스도와 신도들 사이에 인격적인 관계를 설정한다.
그리스도의 현존은 전례주년 전체에서 드러난다. 교회는 매주 주님의 날 주님의 부활을 기념한다. 교회는 매년 주님 수난 성지 주일과 더불어 가장 장엄한 축일인 예수 부활 대축일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기도 한다. 더욱이 교회는 연중 주기 안에서 성령 강림 대축일에 강생과 탄생부터 승천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전체 신비를 나타내며 복된 희망의 기대와 주님의 재림을 표현한다.
그리스도를 만남
이처럼 교회는 구속의 신비들을 기념하면서 신도들에게 주님의 권능과 공로의 보고를 열어 준다. 그래서 이 보고는 항상 현존하며, 신도들은 그 공로를 보존하고 은총으로 충만하게 된다.
예수께서는 모든 성사에 현존하신다. 용서하고 치유하며 당신의 사제직과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주시는 예수님은 항상 파스카 신비의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또한 당신 생애의 정점이자 당신에게 영광을 안겨 준 사건, 곧 죽음과 부활 사건 안에서 영원한 예수님이시다. 모든 성사는 우리를 죽으시고 새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행위 안으로 ‘영적으로, 그러나 참으로’ 끌어들인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 안에서 변화된다. 우리는 각 성사에 적합한 방식으로 그분과 일치한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성사 거행에 온 마음으로 참여할 때에만 비로소 가능하다. 그러면 각 그리스도인은 “오 그리스도님, 저는 주님의 성사 안에서 주님을 뵙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한 성 암브로시오의 말을 반복할 수 있다. 그리스도(Christ), 예수 그리스도의 축일(~祝日 Jesus Christ, Feasts of), 하느님(God) 참조.
출처 : [전례사전]
◆사랑◆
적극적 친교로 이끄는 선(善)을 향한 정서적 경향을 뜻한다. 관계를 맺고 통일시키는 힘을 지닌 사랑은 자기 만족을 위해 어떤 대상을 찾는 이기적 사랑일 수도 있고, 통교를 통해 자기의 관대한 태도를 드러내는 사욕 없는 사랑일 수도 있다.
달리 말해, 사랑은 존재와 존재가 서로 이끌리는 것이다. 사랑만이 살아 있는 존재를 결합시켜 그 존재들을 완성하고 충족시킨다. 사랑만이 그들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그 무엇으로 그들을 받아들이고 결합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큰 힘을 가졌으며 우주 에너지 가운데에서도 가장 신비로운 것이다. 결국 사랑이란 하느님이 창조 과정에서 모든 의식 체계에 부어 주신 이끌림이다.
모든 존재는 하느님의 실재에 참여하며 거기서 하느님의 실재를 끌어들인다. 진실하고 충만한 존재로 통합되고자 하는 열망은 스스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뜻한다. 이는 이런 염원을 충족시켜 주는 사랑이 하느님의 선물(그러나 아주 새롭고 초자연적 존재 차원의 선물)이기도 하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이것을 그리스도교 사랑이라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하느님은 무한한 사랑이시다.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드님의 상호적 사랑이시고 인간 존재와 모든 피조물의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는 분이다.
그리스도교 사랑은 우리가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을 우리 자신처럼 사랑하도록 우리 영혼에 주입된 신적 덕행이다. 이 사랑은 다른 모든 덕행보다 뛰어난 덕행이다. 사랑은 영원하고 다른 모든 덕행을 완성하며 우리의 모든 행위가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하고 우리를 정화하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참된 우정을 세워 주기 때문이다.
사랑은 신학적 덕행이라 불린다. 신앙의 덕과 희망의 덕처럼 사랑의 직접 대상은 하느님 자신이시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당신 안에서 무한히 선하시고 우리의 사랑을 무한히 받으실 분이시다. 사랑은 또한 획득된 덕행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 영혼에 부어 주신 덕행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사랑의 승리는 강압이 아니라 설득력과 매력 또는 마음을 끄는 힘, 결코 소진되지 않는 무한한 사랑의 힘에 의해 이루어진다.
신적 사랑과 부부 사랑, 동료 간의 사랑 그리고 공동체의 사랑 안에서 사랑이 드러난다. 우리가 참된 관계에서 한 개인을 사랑하면 그것은 모든 인간과 온 우주를 사랑하는 것이다.
전례 : 실천적 사랑
전례는 신앙과 희망과 더불어 그리스도교의 실천적 사랑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교회가 지극히 선하시고 지극히 위대하신 하느님께 바치는 ‘경배’는 지속적인 가톨릭 신앙고백이며 희망과 사랑을 지속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 점을 간명히 표현하였다. “신앙과 희망과 사랑으로 하느님을 경배해야 한다”(「하느님의 중개자」 47항). 전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매우 특별한 방식(예수께서 아버지께 드리는 경배에서)으로 신도들을 당신께 끌어당기시고 그들이 신앙과 희망과 사랑을 실천하여 아버지를 경배하게 하신다.
더 나아가 전례 전체가 항상 지향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주시는 아버지 사랑에 대한 인간의 최종 응답으로서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런 사랑이 있기 때문에 그분은 역사 안에서 인류를 당신께 이끄시기 위하여 자부적인 무조건적 사랑을 부어 주시어 능동적으로 개입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전례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참여를 강화하는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없으면 참된 참여가 있을 수 없다. 동시에 참된 전례 참여는 그리스도인들 안에 사랑을 증가시킨다. 전례는 우리에게 사랑의 여러 단계들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하느님의 인간 사랑
하느님의 인간 사랑은 창조(창세 1장 - 부활 성야 제1독서)와 이스라엘 역사(신명 4,37 - 나해 삼위일체 대축일 제1독서; 욥기 38장 - 연중 제12주일 나해 제1독서)에 여러 차례 개입한 사실로 표현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자유로이 선택하신 사랑(신명 7,7 - 시간전례의 연중 시기 제2주간 수요일 말씀 기도의 제1독서)이며 인간 구원을 위해 활동하며 인간의 불충실에도 불구하고 베푸시는 자비로운 사랑이다(호세 14,2-10 - 시간전례의 연중 시기 제19주간 월요일 말씀 기도 제1독서).
이 같은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 성자를 죽음에 이르게까지 하셨다(요한 3,16 - 나해 사순 시기 제4주일 복음). 예수님의 역동적 사랑은 아버지의 사랑에 완벽히 상응하며 신도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랑받는 이들이 되게 하셨다(요한 5,20-25 - 사순 시기 제4주간 수요일 복음). 더 나아가 이 활동적 사랑은 십자가에서 드러났고(다해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수난 복음과 요한 15,13 - 나해 부활 제6주일 복음) 비유를 통해 설명되었듯이(루가 15,11-32 - 다해 사순 시기 제4주일 복음) 자비롭다.
전례는 참여자들에게 이런 사랑을 요구한다. 그래야 그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공유하고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들에게 속할 수 있는 것이다(5월 14일 성 마티아 사도 축일 미사의 본기도).
하느님에 대한 사랑
전례는 또한 우리가 다른 모든 것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함을 지적한다(마태 22,37 - 가해 연중 시기 제30주일 복음). 우리가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더욱 값진 분으로 평가하고 무거운 죄를 지어 하느님을 거역하기보다는 차라리 모든 것을 잃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을 이런 식으로 사랑하는 것이다(고해성사 예식 참회자의 기도). 우리가 작은 죄마저 피하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의 하느님 사랑은 더욱 완전해진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도 주권도, 현재도 미래도, 권세도 높이도 깊이도,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로마 8,38-39 - 순교자 공통 제2독서).
이 사랑은 감미로우신 하느님을 체험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부모와 같이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느낌은 하느님에 대한 느낌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사랑 - 또는 모든 참된 사랑 - 은 느낌의 문제가 아니다. 하느님에 관해 말할 때, 사랑이란 우리 마음속에서 그분을 최상의 선으로 인식하고 우리 의지로써 그분께 매달리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음을 뜻한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뜻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사랑하는 사람은 내 제자로 마땅하지 않습니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사랑하는 사람도 내 제자로 마땅하지 않습니다”(마태 10,37 - 가해 연중 시기 제13주일 복음).
의심할 여지없이 우리에게도 하느님께 대한 강력한 감정을 체험하는 순간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사랑의 시금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내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요한 14,21 - 가해 부활 시기 제6주일 복음).
전례는 참여하는 사람들이 하느님 사랑을 키워가고(연중 시기 제4주일 본기도)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참으로 실천하는 사랑을 요구한다(연중 시기 제30주일 본기도).
자기 사랑
전례는 또한 우리 영혼의 구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함으로써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안녕을 잘 돌봄으로써 우리 몸과 이 세상의 것들, 곧 건강과 재산, 훌륭한 명예와 안전한 직업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이 온 세상을 벌어들인들 목숨을 해치게 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마태 16,26 - 가해 연중 시기 제22주일 복음). 토비트가 말한 것처럼 “죄와 불의를 저지르는 자들은 바로 저희 자신에게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토비 12,10 - 홀수해 연중 시기 제9주간 토요일 제1독서).
그러나 우리는 자기 사랑의 위험을 주의해야 한다. 잘못된 자기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다. 그것은 자신을 들어 높이는 마음이며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모든 사람과 사물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런 사랑은 누가 재판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이기주의는 사람을 과장되고 뻔뻔스럽게 만들며 양심도 없고 공격적이게 만든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자기 사랑의 길이 아니다.
전례에 나오는 모든 본문은 균형 잡힌 인격의 자기 사랑을 가리킨다. 전례 본문들은 참여자들이 세상과 하늘에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룰 것을 항구히 요청하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전례 본문들은 우리 영혼의 구원을 요구한다. 거의 대부분의 영성체 후 기도는 바로 이런 주제로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연중 시기 제30주일 본기도에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주 하느님, 저희 안에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자라나게 하시고 저희가 주님의 계명을 지켜 주님께서 약속하신 바를 얻게 하소서” 하고 기도한 뒤에 영성체 후 기도에서 “성체성사의 은혜를 저희에게 풍부히 내려 주시어 저희가 거행하는 이 신비를 그대로 실현하게 하소서” 하고 기도한다.
이웃 사랑
신약의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가 10,25-37 - 연중 제27주간 화요일 복음)와 예수께서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해 주기 바라는 것을 그대로 여러분도 해 주시오”(마태 7,13 -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복음)라고 말씀하신 황금률에서 볼 수 있듯이 전례는 우리가 이웃 사랑, 곧 세상의 모든 백성을 다 사랑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한다. 이 황금률에서부터 남이 우리에게 해 주기를 원하지 않는 것을 다른 이들에게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명백해진다.
우리는 모든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사심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라고 명하셨기 때문이며 모든 백성이 그리스도의 피로써 구속되어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에로 부름을 받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내 계명은 이렇습니다. 내가 그대들을 사랑한 것처럼 그대들도 서로 사랑하시오”(요한 15,12 - 나해 부활 제6주일 복음. 또한 제2독서인 1요한 4,7-10 참조). 그분은 “모든 이의 아버지 하느님도 한 분이시니, 모든 이 위에 모든 이를 통해 모든 이 안에 계신다”(에페 4,6 - 나해 연중 시기 제17주일 제2독서).
이와 같은 이웃 사랑은 ‘말과 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행위와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1요한 3,18 - 나해 부활 제5주일 제2독서). 우리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비 행위를 실천해야 한다(선행 참조).
그러므로 전례에 참여하는 이들은 전례를 통하여 서로 사랑(실천적 사랑) 안에 성장하고 그들을 위해 준비된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해 주시기를 기도한다(연중 시기 제25주일 본기도).
이 같은 이웃 사랑에는 원수도 포함된다. “여러분의 원수를 사랑하시오”(마태 5,43 이하 - 가해 연중 시기 제7주일 복음). 전례를 통해 참여자들은 이 점에 있어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를 본받아 원수까지도 사랑함으로써 성 스테파노가 차지한 영원한 영광을 얻게 되기를 기도한다(12월 26일 미사 본기도). 계명(誡命 Commandments), 신앙(信仰 Faith), 하느님(God), 희망(希望 Hope) 참조.
◆표지와 표징◆
영적인 것을 나타내는 물질적인 것을 뜻한다. 어떤 학자들은 표지와 표징을 명확히 구분하면서 표징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를 표현하여 존재하게 하는 감각적인 표상이나 사물 또는 행위라고 말한다. 이와는 반대로 표지는 인위적인 것으로서 실재 자체에 내재하지 않는 요인에서 의미를 찾는다.
전례는 하느님께 속한 것들을 표현하기 위해 표징들을 사용한다. 하느님이시며 인간이신 분은 표징의 원형이시다. 신적 본성이 한 위격 안에서 감각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인간성과 결합되기 때문이다.
표징의 종류
(1) 실재(實在)로 충만한 표징들. 성사에서처럼 표징된 어떤 것이 동시적으로 존재하게 되거나, 준성사에서처럼 교회의 전구를 통해 전례 봉사자의 영적 준비 상태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 것들이다.
(2) 자연적 표징들. 물로 씻음, 도유, 안수처럼 어떤 과정이 초자연적 본성과 정화를 초래하고 그것을 강화하거나 은총을 부여함을 표현하는 것들이다.
(3) 특징화된 표징들. 어떤 동작에 의해 특별한 의미가 획득되거나, 팔리움처럼 본래의 뜻과 다르지만 명확히 구분되는 표지로 사용되는 것들이다.
(4) 짜맞춘 글자(monogram)나 표장(標章)은 넓은 의미에서 표징이다. 이 표징들은 신앙의 신비나 신성한 진리를 어느 정도 표현해 준다. 예를 들어 물고기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 물고기를 뜻하는 그리스어는 ‘구세주이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첫 글자와 같기 때문이다. 또한 비둘기는 영혼 또는 평화를 대표한다. 그리고 그리스어에서 키-료(XP)와 같은 문자들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짜맞춘 글자이며 구세주이신 그리스도를 나타낸다. 상징주의(象徵主義 Symbolism) 참조.
출처 : [전례사전]
◆성사◆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된 외적 표지들이나 거룩한 행위들을 가리킨다. 영혼의 내적 성화를 위한 은총은 성사들을 통해 흘러나오거나 전달된다. 성사가 유효하게 거행되고 수혜자의 준비가 올바로 되었으면 성사는 반드시 그 목적을 달성하여 수혜자에게 자동적으로 은총이 전해진다. 그러므로 성사는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를 영구히 지속하며 그 행위가 모든 세대에 현존하고 효험을 낸다.
성화 은총은 세례성사에서 부여되며 필요한 경우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통해 회복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은총의 상태에 있다면, 성화 은총은 성사들을 통해 항상 많아진다. 각 성사는 그 성사를 받을 때나 성사를 받은 사람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마다 실제적 은총을 부여한다.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품성사의 세 성사들은 성사의 인호를 새긴다. 영혼의 초자연적 생명을 더욱 좋게 하기 위하여 각 성사의 특수한 목적에 부합하는 성사의 은총이 각 영혼에게 전달된다.
그리스도께서 일곱 개의 성사를 제정하셨는데, 그 가운데 셋(세례성사, 성체성사, 고해성사)은 직접 세우셨고 넷(견진성사, 성품성사, 병자성사, 혼인성사)은 교회를 통해 묵시적으로 세우셨다. 일곱 성사는 우리 삶의 각 단계마다 우리를 돕도록 제정되었다.
입문 성사
세례성사는 은총의 생명으로 태어나게 한다. 세례성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신비체인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영과 진리 안에서’ 하느님을 경배하게 한다.
견진성사는 우리에게 은총의 삶에서 어른이 되는 힘을 준다. 성령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증거하는 말과 행위로써 ‘신앙을 전파하고 옹호하게’ 해준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우리의 초자연적 생명을 위한 음식과 음료를 준다. 성체성사는 그리스인의 생명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이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거행함으로써 그리스도와 더불어 신적인 제물과 우리 자신을 봉헌한다. 이 성사는 일치된 그리스도의 신비체를 건설한다.
위기의 성사
고해성사는 죄를 치유하는 ‘영혼의 약’이다. 고해성사는 하느님의 자비로 하느님을 거슬러 잘못한 죄를 용서한다. 동시에 고해성사는 죄인들을 교회와 화해시킨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로 교회에도 상처를 입혔기 때문이다.
병자성사는 병자를 영적으로 치유한다. 병자성사는 성령의 은총을 부여하여 인간이 전체적으로 건강해지고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증가하며 악의 유혹과 죽음에 대한 불안을 이겨 낼 수 있는 힘을 준다. 병자성사는 우리를 질병과 죽음에서 그리스도의 고통과 죽음에 동참하게 하여 교회, 곧 하느님 백성의 안녕에 기여하게 한다.
성소의 성사
성품성사를 통해 신비체를 ‘가르치고 다스리며 성화할’ 새 사제들이 생겨난다. 이렇게 하여 성품성사는 교회가 항상 지속되도록 보장한다.
혼인성사는 부부에게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 사이의 일치와 결실을 맺는 사랑에 참여하게 하여 신비체를 위한 새로운 구성원들을 양육한다. 혼인성사는 부부들에게 결혼 상태에서 성성을 얻고 이른바 가정 교회가 되게 해 준다. 부모는 가정 교회에서 말과 모범으로 자녀들에게 신앙을 설교하는 첫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성사들은 삶 전체를 동반하며 매일 매순간 우리와 함께 머문다. 우리가 성사의 은총을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알면, 모든 것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경배하고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해 기여하게 할 수 있다.
성사들은 말과 사물로써 신도들의 신앙을 강화하고 부양하며 표현한다. 따라서 성사들은 자주 신앙의 성사라 불린다.
성사의 수혜자
일반적으로 가톨릭 교역자들은 가톨릭 신도들에게만 성사를 집전해야 한다. 물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가톨릭 교역자에게 고해성사, 성체성사, 병자성사를 받기가 불가능할 경우 신도들은 비가톨릭 교역자들에게서 그 성사들을 받을 수 있다. 단, 그들 교회의 성사들이 유효해야 한다. 가톨릭교회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않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로서 교역자들을 접할 수 없다면, 그들이 이 성사들에 대한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고 또 올바로 준비가 되어 있는 한, 죽을 위험이나 다른 중대한 요구가 있을 때 가톨릭 교역자들에게 그 성사들을 받을 수 있다. 가톨릭교회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않은 동방 교회의 신도들이 올바로 준비된 상태에서 성사를 요청한다면 가톨릭교회의 교역자가 그들에게 같은 성사들을 집전할 수 있다.
예수님과 성사로서 교회
더욱 일반적 의미에서 하느님께 받는 내적 축복의 어떤 외적 표지를 성사라 말할 수 있다. 이런 뜻에서 예수님은 최종 성사이시다. 예수님은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만남의 표지이시고 모든 성사의 근본 교역자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교회는 모든 신도를 위한 구원의 보편 성사로 여겨질 수 있다. 엑스 오뻬레 오뻬라또(Ex Opere Operato), 엑스 오뻬레 오뻬란띠스(Ex Opere Operantis), 인호, 성사의[聖事~ 印號 Character (Sacraments)] 그리고 각 성사들의 개별 항목 참조.
출처 : [전례사전]
◆강생 구속의 신비◆
강생이란 인류를 구속(救贖)하고자 하느님의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심을 말한다. 신학자들은 여기에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이 성취되어 현존한다는 것과, 아직 미완성이라는 것이다.
이를 각각 객관적 구원, 주관적 구원이라고 일컫는다. 전자는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어 역사의 어떤 시점에서 구원 사업을 1회한으로 완수하였음을 말하고, 후자의 경우는 역사의 종말에 가서야 그 구원 사업이 완결됨을 말한다. 그러나 이 구분은 시간적인 구분에 불과할 뿐 타당한 설명은 되지 못한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된 객관적 구원이 각자 안에 주관적으로 실현되는 과정, 즉 그리스도 구원의 은총이 부여되고, 인간이 이 은총을 자유로이 수락하는 과정에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 [용어사전]
◆기적◆
기적이란 인간의 힘으로는 이루어 낼 수 없는 지혜와 능력을 초월하는 초자연적 신비로운 현상을 말한다. 하느님은 이 기적을 통해, 당신을 계시하시고 구원을 베푸신다. 신약 시대는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께로부터 왔음을 드러냈다. 그러나 성서의 저자들에게 있어서의 기적은 하느님이 당신의 뜻과 의지를 드러내거나 실현시키기 위해 도구로 이용한 것이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기적 자체가 아니라, 기적 안에서 표현되고, 이를 통해 전달되는 하느님의 뜻과 의지이다.
출처 : [용어사전]
◆분향◆
분향이란 향을 피움을 말한다. 제단에서의 분향은 하느님의 절대성 앞에 흠숭의 예를 드림을 말한다. 구약은 하느님의 왕권에 대한 승복을 말하고(1열왕 13,1), 신약은 그리스도의 왕권과 신권에의 승복을 말한다(마태 2,11; 묵시 5,8). 이처럼 분향은 절대자 앞에 바치는 제물과 기도의 상징이다.
교회 예절에서의 분향은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제헌(祭獻)의 신비를 담고 있으며, 하늘에 사뢰는 우리의 기도, 즉 하느님의 절대권 앞에 분향으로 승복하고 은혜를 간구함을 말한다.
한편 상가(喪家) 빈소의 신위(神位)에 혹은 사당의 제사 때에도 향을 피운다. 이때의 피어오르는 연기는 우리의 애틋한 정이 세상을 떠난 분이 계시는 명계(冥界)나 하느님이 계시는 천계(天界)로 올라감을 생각케 한다.
출처 : [용어사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