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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해 배상법
21: 26-36
26. 사람이 그 남종의 한 눈이나 여종의 한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 대신에 그를 놓을 것이며
27. 그 남종의 한 이나 여종의 한 이를 쳐서 빠뜨리면 그 이 대신에 그를 놓을찌니라
28. 소가 남자나 여자를 받아서 죽이면 그 소는 반드시 돌에 맞아 죽을 것이요 그 고기는 먹지 말것이며 임자는 형벌을 면하려니와
29. 소는 본래 받는 버릇이 있고 그 임자는 그로 인하여 경고를 받았으되 단속하지 아니하므로 남녀간에 받아 죽이면 그 소는 돌로 쳐 죽일 것이고 임자도 죽일 것이며
30. 만일 그에게 속죄금을 명하면 무릇 그 명한 것을 생명의 속으로 낼 것이요
31. 아들을 받든지 딸을 받든지 이 율례대로 그 임자에게 행할 것이며
32. 소가 만일 남종이나 여종을 받으면 소 임자가 은 삼십 세겔을 그 상전에게 줄 것이요 소는 돌에 맞아 죽을찌니라
33. 사람이 구덩이를 열어 두거나 구덩이를 파고 덮지 아니함으로 소나 나귀가 거기 빠지면
34. 그 구덩이 주인이 잘 조처하여 짐승의 임자에게 돈을 줄 것이요 죽은 것은 그의 차지가 될찌니라
35. 이 사람의 소가 저 사람의 소를 받아 죽이면 산 소를 팔아 그 값을 반분하고 죽은 것도 반분하려니와
36. 그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는 줄을 알고도 그 임자가 단속하지 아니하였으면 그는 소로 소를 갚을 것이요 죽은 것은 그의 차지가 될찌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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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은 우리나라와 우리 교회에 참으로 기쁘고 즐거운 일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는 세계 야구대회에서 야구의 종주국이라는 미국은 물론 두 번씩이나 일본을 꺾고 4강에 진출하였습니다. 오늘 일본과 다시 한 번 준결승전을 치르게 되는데, 꼭 이겨서 준우승은 물론 우승까지 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의 우승을 간절히 바라는 것은 단순한 민족주의적인 감정에서만이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냄으로 말미암아 세계 각처에서 복음을 전하는 13000여명 선교사님들이 힘을 얻어 복음을 더욱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으면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동계 올림픽에서 보았던 것처럼, 13억 중국은 물론 일본까지 누르고 세계 7위라는 위업을 달성하는 등, 이젠 어느 나라도 얕볼 수 없는 5천년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황금기를 맞고 있는데, 이는 여러 차례 말씀드린 대로 정치가들이 정치를 잘해서가 아니라, 오직 한국 교회와 한국 교회의 선교 열정을 보신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교회가 잘되면 국가도 반드시 잘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잘되면 가정도 잘되리라 믿습니다.
그런 점에서 지난 주간에는 우리 교회 안에도 여러 가지 기쁘고 복된 일들이 많이 있었음을 알려 드립니다. 부흥 성회를 통하여 은혜를 충만하게 받은 것도 감사한데, 성회 후에 여러 가지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서 어떤 권사님은 갑상선이 낫고, 어떤 여집사님은 오랜 천식이 나았으며, 어떤 남자 성도는 축농증이 심하여 병원에 수술할 일정까지 잡아 놓았는데 이번에 깨끗이 나았고, 어떤 젊은 성도는 희미하게 잘 보이지 않던 눈이 밝히 보게 되었으며, 방언의 은사를 받은 집사님도 몇 분이 있습니다. 이러한 성령역사의 열매들이 앞으로도 속속 나타날 줄로 믿고 우리 모두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돌리도록 합시다.
또 기쁜 소식들이 있습니다. 성회 첫날 시작된 새 성전 터 정지 작업과 매립 작업을 하던 중 지난 주간에는 170여 평을 더 사들여 우리 교회의 대지 서편 땅의 효용 가치가 훨씬 높아지게 되었으며, 그리고 또한 지난 주간 우리 성도들 중에 세 가정이나 개업을 하였고, 또 어떤 가정의 자녀는 삼성 계열의 회사에, 어떤 가정의 자녀는 어려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는 등 기쁜 소식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는 성도들에게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좋은 일들이 많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특별히 새 성전 건축의 대 역사를 앞둔 우리 교회에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축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 산 언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도덕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십계명을 주신 데 이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회생활을 할 때 지켜야 할 시민법을 주셨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사형에 해당하는 죄’에 대한 율례가 있었는데,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2)부모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3)사람을 유괴한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4)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시민법 중에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해 보복법(同害 報復法)’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동해 보복법’은 범죄자에 대한 하나님의 엄격한 공의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법을 주신 본래의 의도는 죄 범한 자를 심판하기 위한 것도 있었지만, 보다 더 크게는 보복의 악순환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동해 보복법’을 피를 부르는 잔인한 보복의 형벌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예를 들면 제임스 2세가 즐기던 오락 중의 하나는 발을 죄이는 형구를 이용해 죄수의 사지를 비트는 것이었으며, 헨리 4세를 죽인 암살자는 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네 필의 말에 의해 사지가 찢겨 나가도록 했고, 사람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이거나, 사람의 몸을 마치 나무를 썰듯이 톱으로 썰어서 토막을 내어 죽인다거나, 마차 바퀴로 깔아뭉개는 등등의 갖가지 형태의 잔인한 사형 집행 방법이 공공연히 사용되었던 것에 비추어 보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동해 보복법’은 무자비한 복수의 실천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감정에 의해 저지를지도 모르는 잔인한 보복 행위를 방지하는 동시에, 형벌의 고통을 일깨워 줌으로써 끔찍한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동해 보복법’은 잔인한 보복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보호하고자 하시는 자비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사랑의 법이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비의 정신이 신약 시대에 이르러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과 용서의 법으로 완성되고 승화되었습니다. 즉 예수께서는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랑이 없으므로 남의 허물을 용서치 않는 행위, 또한 복수에 불타오르는 이글거리는 분노를 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알지 못했을 때의 나는 용서의 사람일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그 크신 용서의 사랑을 받은 지금의 나는 용서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따라서 용서하지 못함은 악을 행한 사람 때문에가 아니라, 용서하지 못하는 나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지 못함은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한 나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인간의 감정,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라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그러한 사람을 용서하고 오히려 축복을 빌어주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시민법 중 소유주의 책임에 대한 ‘손해 배상법’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9-30절을 보면 소가 본래 받는 버릇이 있음을 알고 이로 인해 경고를 받았으면서도 주인이 단속하지 않아 소가 사람을 받아 죽였을 경우에 대한 규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이 경우에는 그 소와 함께 그 소 임자도 죽이거나 생명의 속죄금을 내도록 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법은 일면 소 임자에게 가혹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 임자가 직접 사람을 죽이거나 의도적으로 소로 하여금 사람을 죽이도록 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 임자가 자신의 소가 언제든지 사람을 받아 죽일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의를 기울여 적극적으로 불의한 사고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임무를 소홀히 한 그 행동은 소가 사람을 받아 죽이는 것을 방조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소 주인에게 그 책임을 묻게 하신 것입니다.
이 법의 중요성은 여기에 있습니다.
즉 사람은 누구나 타인의 생명을 빼앗을 권리가 없을 뿐더러, 더 나아가 타인의 생명을 보호하고 위기에 처한 생명을 구해야 하는 적극적인 의무도 함께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부주의나 무관심으로 인하여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생명을 잃게 된다면, 그 누구도 그 일에 대한 책임에서 제외될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보면 자신의 생명과 신체에 직접적인 위협이 가해지지 않는 한, 타인이 겪는 죽음의 위협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외면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약한 자들이 불의한 권력이나 폭력에 의해 목숨을 잃어 가고 있는데도 자신에게 해가 닥칠까 염려하여 누구도 나서서 적극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사람을 보호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억울하게 잡혀 와서 죽는다고 통곡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저항운동에 가담하다가 잡혀 와서 죽어 마땅하지만 자기는 그저 장사나 하고 돈이나 벌면서 살아왔는데, 이처럼 억울하게 죽을 수는 없다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로베르 장군'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장면입니다. 그 영화에서는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 나치에 저항다가 수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잡혀왔는데, 그중에 저항운동에 참여한 적이 없는 한 젊은이가 잘못 잡혀 와서 억울하다고 외치는 장면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청년이 이처럼 큰소리로 외치고 있을 때에 침묵하던 한 저항운동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그 사실, 그것이 바로 당신이 죽어야할 이유입니다. 전쟁은 5년이나 계속 되었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 갔으며, 수많은 집과 도시들이 파괴되어 갔는데 도대체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죽어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우리의 무관심 속에 생명을 잃어 간 사람들의 생명에 대해, 그들을 직접적으로 죽인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들이 죽어 갈 때 외면하고 무관심한 우리 자신들에게도 함께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타인이 해를 입지 않도록 주의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타인의 생명을 핍박하고 위협하는 세상의 불의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항하고 사회 속에서 몰아내는 일에 앞장 서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성도들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인 것입니다.
31-32절을 보면 사람을 받아 죽인 소의 임자가 생명의 속전을 낼 때, 죽은 자가 아들이든지 딸이든지 구별 없이 똑같이 율례대로 행하고, 죽은 자가 남종이나 여종일 경우에도 똑같이 은 삼십 세겔을 배상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이처럼 생명의 속전에 있어서 남녀의 차이가 없이 똑같은 금액을 배상하도록 한 것은, 생명의 가치에 있어서 남녀에 차별이 있을 수 없고 동등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것은 여자를 남자에 비해 천하게 여겼던 고대 근동 사회의 관습에 비추어 볼 때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회에서는 감히 남자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천하고 가치 없는 여자의 생명의 속전을 남자와 똑같이 매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무도 분명하게 남자와 여자의 생명이 하나님 앞에서 동일한 가치를 지녔음을 밝히 가르쳐 줍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의 생명이란 그가 남자이든 여자이든 똑같이 귀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남자나 여자 모두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원리와 달리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사람의 생명의 가치를 똑같이 취급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낙태입니다. 지금도 태아가 여아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낙태 수술을 통해 얼마나 많이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만일 태아가 남아였다면 그렇게 쉽게 죽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사회는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대접하고 존귀하게 여기면서도, 여자는 남자에 비해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고 하찮게 여기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이것 또한 남자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생명과 존재 가치를 차별하는 것입니다. 물론 창조의 질서 상 남자가 여자에 비해 우위에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자가 남자에 비해 열등하다거나, 생명의 가치에 차이가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란 누구나 동일한 가치를 지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자와 남자는 서로 도와야 할 협력자의 관계이지,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남아 선호 사상이나 남성 우월주의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고귀한 생명의 가치를, 사람이 자기 멋대로 판단하고 구별하는 잘못된 사상입니다. 더구나 이로 인해 여아를 낙태시키는 행위야말로 생명을 죽이는 살인 행위이며,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만드신 생명의 가치를 무시하는 심각한 범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 세상의 잘못된 풍조를 본받지 말고,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서로 고귀하고 가치 있는 하나님이 창조물로 여기고 존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 35절에 보면 어떤 사람의 소가 다른 사람의 소를 받아 죽이면 산 소를 팔아 그 값을 반분하고 죽은 것도 반으로 나누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경우는 다른 소에 의해 죽임을 당한 소의 주인이 물질적으로 손해를 보게 되므로, 어떤 면에서는 공정하지 못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러한 법을 세우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해답은 공동체라는 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경우에는 다른 소를 죽인 소의 임자에게 전혀 고의성이 없고, 평소에 그 소가 다른 소를 받는 버릇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사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다 보면 생길 수 있는 사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이런 경우에 한 당사자에게 일방적인 책임을 묻지 않으시고, 양자가 함께 손해를 감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즉 한 공동체에서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은 축복과 성공을 함께 나누듯이, 피치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 손해나 불행도 함께 나눠야 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에서는 좋은 것만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불행과 고통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공동체란 혼자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힘을 모아 함께 살아가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잘못된 미덕중의 하나가 바로 방관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과 관련이 없는 일에 사람들은 끼어들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자녀들도 자기와 관련이 없는 일에는 끼어들지 말라고 은연중 강조하며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직접적으로 손해 보는 일이 생기면, 목숨을 걸고 입에 거품을 무는 것이 현대인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 눈을 크게 뜰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혼자 잘 되겠다는 이기주의는 결국 함께 망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부동산투기니 과소비니 하는 것이 자기에게 큰 이익을 주는 것 같지만, 이러한 가운데에서 나라의 경제가 흔들리고 민족간에 분열이 생기고, 세금 포탈이 일어나고, 보이지 않는 낮은 자들의 눈물이 생겨나고, 가진 자들에 대한 증오심이 폭발하면 지존파와 같은 끔찍한 일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또는 직장이나 사회에서 뜻하지 않은 불행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고 타인에게 그 책임을 모두 전가시키고, 자신은 어떤 손해도 보지 않으려는 자세는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가족에게 불행이 다가올 때 서로가 힘을 합해 그 불행이나 손해를 감당해야 하듯이, 교회 안에도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누구의 책임을 따지기 전에 먼저 모든 성도들이 힘을 합쳐 그 어려움을 나누어 짊어져야 합니다.
어느 대재벌에게는 나이 들어 낳은 일곱 살 난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늦게 본 아들인지라 어찌나 귀엽고 귀하던지.....아들의 일곱 번째 생일 날 그는 또래 아이들이 입어보지 못한 멋진 승마복을 선물했습니다. 그리고 야외로 산책을 나갔는데, 승마복을 입은 아이의 모습이 너무도 자랑스러워 보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녁 무슨 영문인지 씩씩해 보이던 아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온갖 좋다는 명약과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을 앓다가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얼마 후 아들을 죽게 한 원인을 캐어보던 그는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생일날 입었던 그 옷에 수를 놓은 가난한 침모 방에서 병균이 묻어 온 것이었습니다. 어둡고 추운 지하실 방에는 삯바느질로 간신히 생계를 꾸려가던 부인과 병들어 누운 남편이 있었는데, 남편이 오한이 나 벌벌 떨자 마땅히 덮을 이불도 없던 터에, 부인은 수를 놓던 양가죽 승마복으로 따뜻이 감싸주었던 것입니다. 그 어둡고 그늘진 방안에 퍼져 있던 병균이, 호화롭고 따뜻한 대재벌의 집안으로 옮겨 죽을 줄이야 아무도 몰랐던 것입니다. 이렇게 아들을 잃은 대가로 대부호는 새롭게 깨닫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동안 가난한 사람들에게 너무 했구나, 내 것만 챙기기에 급급해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모른척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되었어, 남을 위해 베푸는 것이 나를 위한 일이라는 걸 좀더 일찍 깨달았더라면......”하면서 크게 후회했다고 합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오늘은 여러 가지 ‘손해 배상법’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고의적으로는 물론이려니와 부주의 하여 타인의 생명이나 재산이나 명예에 손해를 입히는 행동을 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모두가 자신만을 챙기는 이기주의의 시대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성도들은 특별히 이웃의 영혼에 대하여 항상 깊은 관심과 따듯한 동정심을 가지고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요 17:3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도 모르고, 오직 돈만 알고, 쾌락만 추구하고, 이 땅의 것만 바라보고 살다가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질 영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만일 성도들이 이러한 불신 영혼들에 대해 관심이 없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겔 3:17-19에 보면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케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네가 악인을 깨우치되 그가 그 악한 마음과 악한 행위에서 돌이키지 아니하면 그는 그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너는 네 생명을 보존하리라.”
그러므로 금년 봄에도 우리 교회에서 전개하게 될 총동원 전도 운동에 빠짐없이 동참하여 이웃의 생명과 영혼을 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