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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가 전해주는 이바구
오 종 락
옛날 어머니가 한 번씩 말씀하시던 행운의 손목시계 이바구가 떠오른다.
그 행운의 손목시계는 당숙부님의 금장손목시계다. 지금으로부터 약 60여년 전 손목시계가 참으로 귀하던 시절 이야기다. 나의 시골 동네에서도 손목시계를 차고 있는 사람은 한 두 사람 될까 말까 했으니 말이다.
큰집의 종손이며 우리집의 맏아들인 큰형은 머리도 수재이고 공부도 꽤나 잘하여 부모님과 집안 대소가 어르신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면서 학교에 다녔다. 어머니는 큰형의 중요한 시험을 앞둔 날이나 큰 행사가 있을 때면 한동네 길건너에 사시는 당숙부님을 찾아가서 손목시계를 빌려 오곤 하셨다. 어머니가 큰형의 시험 때문에 손목시계를 빌리러 가시면 당숙부님은 싫은 내색 한번 안하시고 그 귀한 금장손목시계를 벗어 어머니 손목에 채워 주시면서 “큰조카가 시험을 잘 봐서 꼭 합격해야지요” 하시며 따뜻한 격려의 말씀을 항상 잊지 않으셨다. 그 후 시간이 흘러 나와 조카들이 시험을 앞두고 있을 때면 어머니는 너희 큰형은 당숙부님이 시계를 빌려 주시면서 따뜻한 격려의 기운 덕분에 시험도 합격하고 성공한 것 같다며 자식들에게 그 말씀을 늘 해 주시곤 하셨다. 그 시계는 단순하게 시간만 알려주는 시계가 아니었다. 큰집과 작은집간의 우애의 상징이고, 숙질(叔姪)간의 사랑의 정표였으며, 합격을 보증해 주는 부적(符籍)과도 같은 시계였다.
그 당시는 시계가 매우 귀하여 정확한 시간을 알 방법도 마땅치 않아 시골에서는 버스시간이나 열차시간을 맞추기가 여간 힘든 시절이 아니였다. 큰형은 6.25. 동란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 학업을 중단했다가 다시 독학으로 공부를 시작했으면서도 당숙부님의 시계와 격려 덕분인지, 그 어렵던 대구의 최고 명문 중․고등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한 후 발군의 실력으로 6년간 연속 우등상을 수상하며 부모님과 대소가 어르신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세월이 흘러 내가 당숙부님의 연배(年輩)가 되고 보니 그 당시 대소가의 따뜻한 정이 새삼 그립다. 당숙부님은 성격이 호탕하시고 집안 대소사에도 앞장서시며 경사가 있는 날이면 우리민요 “성주풀이” 한가락을 멋들어지게 부르시며 분위기를 띄우시던 좋은 분이셨다. 오늘은 서랍을 정리하다 옛날 손목시계를 보니 문득 그 분의 모습이 떠오르며 몹시 그립다.
어머니의 시계이바구를 들으면서 자라던 내가 어느덧 시간이 흘러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때 아내가 혼수품으로 가져온 벽시계가 나의 행운의 시계 역할을 했다. 직사각형 모형으로 가로가 조금 더 긴 전자벽시계다. 그 시계는 엔틱색상의 나무재질로 숫자는 검정색 굵직한 글씨로 새겨져 있고 시계침은 황금색으로 되어 있어 세련된 멋은 적으나 시간이 눈에 잘 들어오고 단순하면서도 나름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 시계는 큰방이나 거실 전면에 늘 걸려 있었으며 결혼 이듬해부터 우리집에 행운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기다리던 첫아들이 축복속에 태어났고 다음해는 내가 공무원시험에 합격하여 발령까지 받게 되었다. 또한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독립할 때까지 우리집 시간알림이 역할을 톡톡히 해왔고, 특히 그동안 고장 한 번 없이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며 건전지만 갈아 주면 만사 오케이였다. 이사를 여러차례 다닐때에도 아무런 탈없이 35년간을 동행하며 같이 생활해 오다가 올봄에 아쉽게도 작별을 고하게 되었다.
약 8년 전에 새아파트로 이사를 오면서 새집의 분위기에 걸맞은 상징물로 양면클래식시계를 구입했다. 아내와 나는 거실과 주방사이 기둥에 새로 사온 시계를 걸면서 새집에서의 평안과 행운을 기원했다. 그 동안 사용하던 행운의 시계는 새로 구입한 양면클래식시계에게 자신의 자리와 임무를 물려주고 작은방 한구석 벽에 걸려 있는 처지로 바뀌었다. 나는 오래된 친구와 작별하는 기분이 들어 작은방으로 시계를 옮기면서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시계도 우리네 인생과 같이 나이를 먹으면 뒷방으로 물러나는구나” 싶은 마음에 더욱 애잔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최근에 그 시계가 보이지 않아 아내에게 물었더니, 아내는 시계뒷부분에 녹이 쓸어 시간도 잘 맞지 않고 고장이 나서 재활용통에 넣었다고 했다. 나는 내게 이야기도 하지 않고 치웠다며 아쉬워 하자, 아내는 낡아서 더 이상 사용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다고 한다. 작별인사도 하지 못하고 보낸 것이 못내 아쉽다.
내가 행운의 양면클래식시계를 쳐다보며 시계이바구를 계속 이어가자, 아내는 친정에서 학창시절 자랄때 있었던 시계에 관한 사연 한 자락을 보탠다. 처갓집은 딸부잣집으로 위로 딸이 넷이고 아래로 아들이 둘인데 무뚝뚝한 장인어른은 막내딸이 터를 잘 팔아서 아들을 낳았다며 유독 이뻐하셨고 서울출장을 다녀오시면서 막내딸 선물로 손목시계를 사와서 초등학교 6학년인 막내딸에게만 손목시계를 선물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아내도 그 당시는 어린 마음에 몹시 서운했고 시계를 차고 있는 동생을 부러워한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때 장모님은 다른 딸들에게 너희들도 입학이나 졸업선물로 차례대로 손목시계를 하나씩 꼭 사주마 하시며 딸들의 마음을 달래 주었는데 아내도 고등학교 입학선물로 시계를 선물 받고 무척 기뻐했던 일이 생각난다고 했다. 시계는 내가 그 동안 살아오는데 있어 가장 많은 추억과 사연을 남겨 주었던 소중한 친구의 하나였던 것 같다.
시계는 오늘도 세월과 인생을 함께 달고 쉼없이 돌고 돌아간다. 나의 마음속 시계에는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가 담겨 있고, 우리 가족의 그동안 살아온 세월을 말해 주고 있으며, 또한 아내의 어린시절 추억까지 담고 있다. 내가 시계에 대하여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온 것도 어머니의 시계에 대한 가르침 때문일 것이다.
주방쪽 기둥에 걸려 있는 행운의 양면클래식시계가 옆에서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이런 말을 해 주는 듯 하다. 시간을 함부로 허비하지 말고, 착하게 살다보면 행운은 언젠가 찾아 올 거라고...
아내와 나는 오늘 못 다한 시계이바구를 살아가면서 계속하게 될 것이다. 2015. 5. 26. [7]
첫댓글 그렇게 귀하던 시계도 세월이 가면 뒷방으로 물러나고....
시계는 세월과 함께 쉽없이 돌고 돌아.....
그리고 많은 이들의 어린시절 추억까지를 담고''
평범하지만 그 소박한 삶이 멋있는 우리네 인생인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선생님! 세월가 함께 돌아가는 시계는 우리들에게 참 많은 사연을 남겨준 친구였던 것 같습니다.
당숙 어른이 대범하시고 통큰 분입니다.귀한손목시계를 빌려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고마운 분입니다.그시절 귀한 물품이지요 .한편 시계를 빌려오신 어머님의 정성이 담겨있어 자녀들이 모두 잘된것 같습니다.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보현님! 당숙부님은 큰 어른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세월을 뛰어 넘어 큰 기침을 하시며 골목길을 나오시는 듯 합니다.
시계가 귀할 때 있을 수 얘기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단장님, 감사드립니다. 일찍 찾아온 더위에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부적같은 시계가 보고파집니다.
건필하세요...
불로거사님! 고맙습니다.
하나의 작은 물건도 소중하게 생각하면 행운도 불러오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입니다. 시계의 이바구를 통하여 따스한 인정을 느낄수 있습니다. 뒷방으로 물러났다가 영원히 살져버린 시계 신세가 바로 우리의 운명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잘 읽었습니다
석염님! 공감의 말씀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하나의 시계에서도 우리의 인생을 엿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애잔한 추억이 깃든 시계 이야기 - 지난 어려웠던 시절 애환을 함께해온 시계야 말로 삶의 이정표였습니다. 가슴 뭉클한 시계 이야기 잘 감상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룻배님!
삶의 이정표 역할을 해준 친구 맞습니다. 어두운 밤에 등불처럼 시간의 등불역할을 했던 소중한 친구였습니다.
시계에 담긴 재미있는 이바구 감사합니다.
전선생님, 격려의 말씀 고맙습니다.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옛모습을 잘 그려 놓았습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하는 시간은 정말 귀중하면서도 인생을 가르면서 논하는 것으로 소중한 시간관념을 대수롭지 않게 허바하는 일상을 생각하면 허무함을 느낄때가 있지요~ 알차게 시간을 잘 지키는 자만이 인생의 참된의미를 기록할수 있고 느낄수 있다고 합니다.오늘의 시간은 그 언젠가 그렿게 고대하며 기다렸던 중요한 시간이지만 보내고 보면 아쉬워하는 삶의 기점에서 보다나은 내일을 그리면서 알차게 엮어 갑시다.;
장산님! 감사합니다. 나이들수록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느낌을 받으니까, 주어진 시간을 알차게 쓰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