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 8장 1-36절 / (15-20절)
15 내가 무리를 아하와로 흐르는 강 가에 모으고 거기서 삼 일 동안 장막에 머물며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 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 16 이에 모든 족장 곧 엘리에셀과 아리엘과 스마야와 엘라단과 야립과 엘라단과 나단과 스가랴와 므술람을 부르고 또 명철한 사람 요야립과 엘라단을 불러 17 가시뱌 지방으로 보내어 그 곳 족장 잇도에게 나아가게 하고 잇도와 그의 형제 곧 가시뱌 지방에 사는 느디님 사람들에게 할 말을 일러 주고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섬길 자를 데리고 오라 하였더니 18 우리 하나님의 선한 손의 도우심을 입고 그들이 이스라엘의 손자 레위의 아들 말리의 자손 중에서 한 명철한 사람을 데려오고 또 세레뱌와 그의 아들들과 형제 십팔 명과 19 하사뱌와 므라리 자손 중 여사야와 그의 형제와 그의 아들들 이십 명을 데려오고 20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느디님 사람 중 성전 일꾼은 이백이십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지명 받은 이들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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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장은 에스라와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사람들의 명단으로 시작합니다. 거의 1500명이 넘습니다. 이들은 제사장 가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사장 가문이라고 모두 레위인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에는 “백성과 제사장들을 살핀즉 그중에 레위 자손이 한 사람도 없는지라”고 합니다. 그때 섬길자를 다시 데리고 옵니다. 그 명단이 15절부터 20절 까지입니다.
에스라는 아론의 16대손입니다. 에스라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예배의 회복입니다. 예루살렘에 갔을 때 가장 타락한 것은 예배였습니다. 예배가 타락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참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배는 드렸지만 삶은 엉망이었습니다. 당시의 말라기는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라 선포합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그들은 이미 십일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요? 십일조만 드리고 십일조의 정신은 없었습니다. 형식만 있고 내용은 없었습니다.
십일조의 원래 정신은 가난한 자를 섬기는 것이고 나의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절대 고백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은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고 십일조는 냈지만 가난한 자들을 착취했습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가증하고 부정직한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했습니다. 음란은 말할 것도 없고 말씀과 반대로 삽니다.
말라기가 십일조를 드리라 말한 이유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을 말합니다. 이때 중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제사장이고 레위인들입니다. 에스라는 백성들이 살아나려면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는 지도자이고 또 하나는 율법입니다. 지금의 교회에 적용해도 손색 없는 지침입니다. 교회가 타락한 원인은 평신도가 아니라 지도자들의 타락이 먼저였습니다. 생선은 머리부터 썩는다 합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썩었다는 게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을 제외시킨 게 썩은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렇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할 사람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성령의 불에 녹아야 할 사람이 목사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올 사람들이 바로 교인들입니다. 믿음은 무통분만이 불가능합니다. 교회가 새로워지려면 교회 안이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에스라가 21절에서 금식을 선포한 사람들은 가장 먼저 지도자들입니다. 에스라가 회복하기 위해서 행한 두 가지는 예배와 율법입니다.
에스라의 정책은 나중에 예수님에 의해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이유는 에스라가 정한 율법 준수가 나중 유대교의 율법주의로 굳어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요구하셨지 형식을 지키길 원치 않으셨습니다. 유대교는 정신은 없고 행위만 남은 종교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심각하게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에스라가 율법의 행위를 강력하게 요구했던 이유는 뭘까요? 당시에 행위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용도 없었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만 드렸지 생활에선 그 어떤 율법의 삶도 없었습니다. 에스라는 생활율법을 선포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유만 있고 책임은 없는 신앙을 합니다. 점점 사회는 개인화 되고 교회는 개인이 믿는 하나님을 참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그래서 참 하나님은 안 보이고 내가 만든 하나님만 있습니다. 교인이 100명이면 하나님도 100이고 1000이면 하나님도 1000입니다. 그래서 응답도 다르고 사는 방법도 다릅니다. 말씀을 외면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기준 삼지 않고 나를 기준 삼기 때문입니다. 그 책임이 누구에게 있을까요? 바로 지도자입니다. 저는 신대교회에서는 지도자입니다. 제가 말씀 앞에 살아도 성도는 탈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탈선했는데 성도들이 말씀 앞에 살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무겁게 오늘 말씀을 받습니다. 지도자가 바뀌어야 교회가 바뀝니다.
저는 새벽을 깨우는 성도는 그 교회의 리더라 믿습니다. 리더가 새벽을 깨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리더는 기도를 포기하진 않습니다. 리더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바꾸는 행동이 아닙니다. 내가 바뀌는 현장입니다. 이제 제대로 기도합시다. 10년 이상 기도했는데 아직 안 바뀌었다면 달라고만 했을겁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구합시다. 답은 말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지도자를 둔 교회는 강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사는 부모를 둔 자녀는 곁길로 가지 않습니다. 삶으로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사람임을 잊지말고 오늘을 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