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쨋날 2017.08.04 (금)]-비온뒤 갬 오늘은 집안시로 이동 하여 고구려 유적지를 돌아보는날 오늘도 4시반 기상후 호텔내 식당 에서 아침을 하고
방으로 들어와 잠시 밖 풍경을 감상, 어제 야경이 최고 였던 그곳이다 07:30 중동데이지 호텔 로비에 모여 준비하고 길일에 결혼식등을 위해 설치한 장식품 이다. 오늘은 통화에서 집안으로 120여km 1시간40분, 그리고 통화를 거처 심양까지 420여km 6시간 먼거리 강행군이다. 07:50 - 길을 나선다. 비가 많이온다. 오늘은 백두산이 폭우로 입산 금지 되었다는 소식이다. 우린 다녀왔으니 휴~~~ 다행이다 집안으로 향하는 길목 지금 가는 길은 몇년 전 고위공무원들이 연수차 왔다가 사고로 10여명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그이후 사고 대책으로, 시진핑이 지시하여, 고속도로 건설이 한창이다. 아직은 위험하다 이제곳 집안시도착, 집안시가 곧 과거 국내성 다. 중국 지린성[吉林省]의 시(市)이며 고구려유적지가 많이 남아있다. - 다민족 거주지로서 한족이 86.4%를 차지하며 조선족·만족·후이족·멍구족·시버족 등의 소수민족이 13.6%를 차지한다. 소수민족 중에서는 조선족이 가장 많다. -동남쪽으로는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마주하고, -북쪽으로는 백산시,통화시 통화현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본래 명칭은 지안[輯安]이며 퉁거우[通溝]라고도 불린다. 1965년부터 지안현이라 불렸으며 1988년 5월에 시로 승격되었다. -신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살기 시작했으며, 고구려문화의 발상지이자 고구려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지안은 고구려 유리왕이 졸본에서 천도하여,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으로 고구려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지안에 남아있는 고구려의 유적은 200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시 중심에는 국내성의 성벽이 남아있고, 위나암성(환도산성)과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릉이 유명하다. 지안에 남아있는 고구려의 고분 약 1만 2000기에 이른다.
다음은 가이드가 말한다 -중국에서는 새벽 2~5시 사이에는 모든 차량이 운행 중단이다. -집안성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편안하게 산다는 뜻이다 -북한 정부에서 집안시를 계속 띠어 달라고 하니까 중국에서 평양을 주면 테어주겠다고 해서 결국은 주지 않겠다는 것이고. -중국이 광계토대왕비와 태왕릉등을 유네스코에 먼저 가입시키고 말았다. -졸본성이 첫째수도이고.집안성이 475년동안 2번째.평양성이 241년간 세번째 수도이다 -집안에서 발굴된 무덤이 무려 12,000개이다 -장군총은 장수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유네스코에 중국과 북한에서 등제했다 주몽ㅡ졸본성ㅡ유리왕ㅡ국내성으로 이전ㅡ6대왕 태조대왕이 국가기반을 바로 세웠다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 16대 유리왕때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다 -19대 광개토대왕이 19세에 왕에 등극하여 수많은 전쟁과 영토 확장을하고 38세에 돌아가심. -처음에 백제를 먼저 공격하여, 고구려를 섬기겠다고 다짐 받음. - 졸본성도 처음엔 방어 위주로.국내성은 주변이 산의로 둘러쌓인 요세의 산성이며. 평양성도 방어 위주 성도였다 -당나라때는 전쟁시 선두부대를 30만명을 먼저 보내고 후군으로 50만을 보낸다 수나라도 고구려를 치다가 망했고 당태종도.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전해서 우물속에. 숨었다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 -당태종의 유언으로 앞으로 고구려를 절대로 공격하여 말라고 했다 -라당연합군이 선두 10만 보급부대 50만 비사성을 먼저 공격하였고. 연개소문이 죽고. 나서 아들 연남생이 군권과 정권을 장악했으나 왕을 도와주지 않아서 화려했던 고구려가 668년에 막을 내렸다 -신라도 계속 밀고 올라와서. 결국은. 고구려가 멸망했다 -고구려는 705년 동안. 28대 보장왕까지 장수하고 오랜 역사를 누렸다 -광개토는 넒은 영역을 넓혔다는 말이고 후세왕이 그렀게 부르게 되었으며 *19대 장수왕은 20세에 등극해서 78년간 왕위를 누리다가 98세에 돌아가였다 오래 장수했다해서 장수왕이라 칭한다 -장수왕 아들 조다에게 왕위가 계승 되지 않고 손자에게 바로 물려주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도 쪼다라는 말이 전해진것 아닌가? 생각한다 *6대 태조대왕은 7살에 즉위하여 103세로 사망했고 94년간 왕위를 누른 최장수왕이다는 설이 있다 -고구려왕은 평균 20~30년 왕위를 누렸었다. - 강정원대장의 전매청에 같이 근무했던 친구분이 중국에서 5년째 홍삼 공장을 짖고 있다. -집안은 중국에서 인삼재배를 가장 많이하는 지역이다 고구려 유적 관광을 위해 이곳에 들러 신고해야 하는곳이다 잘 정비 되고 가꾸어진 시내를 벗어나 고구려 유적지 가는길 10:30 -광개토대왕 비 및 능 관람을 위한 주차장도착 유적지 입장 태준이는 아직도 회복이 되지않아 입구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휴식하고 -내용은 이렇다!- 초등 4년생 태준이가 지난 밤 과식으로 체하여 심한 고통을 받다. 의견은 분분했다. 다 토하여 탈수증세가 있으니 곧장 병원으로 가서 진료를 받자는 할배측과, 이제 위기는 넘겼으니 곧 회복할 것이어서 병원갈 필요가 없다는 할매측. 결론은 버킹검, 할배가 할매를 이기는 나라는 없다. 여기에는 나름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근거가 있었다. 아이 키우는 지혜는 할매들이 더 나으니 이런 상황에서는 할매 판단에 맡기라는 것. 그렇다. 할배들은 나라를 구하는 일들과 같이 큰 일에서는 위력을 발휘하지만 이런 일에는 그냥 조또 아닌 이론일 뿐이고, 할매는 실제 삶에서 우러난 훈육의 엑기스이었다. 결정적인 것은 아이의 법적 후견인인 선옥규 동문께서 병원이 아니라 광개토대왕릉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태준이는 토할대로 토하더니 지금은 새근새근 자고 있다. 곧 회복할 것이다. 입구에서 <광개토대왕비> 사전적의미는 다음과 같다 -집안시 역전에서 동북으로 3-3.5㎞ 가량 떨어진 지점인 大碑街에 서 있는 비로,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의 훈적(勳績)을 기리고 그의 사후 왕릉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왕이 죽은 지 2년째 되는 해인 414년 9월 29일에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이 세웠으며, -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고구려의 영역확장 과정과 그 사회상 및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를 보여주는 내용들이 담겨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비는 높이, 너비가 6.34×1.3-2.0m 가량 되며 무게가 37 ton에 이르는 거대한 4면에 글자가 새겨진 비이다. - 각 면은 물갈이를 하였다. 비문에 의하면 광개토왕(391-412)의 정식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며, ‘영락(永樂)’이란 연호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 비를 ‘호태왕비(好太王碑)’, 또는 ‘영락대왕비(永樂太王碑)’라고도 부른다. 이 비는 고구려의 왕릉급 무덤들이 집중적으로 존재하는 우산을 뒤로하고 압록강을 앞에 둔 위치에서 동쪽으로 약 45。정도 치우친 동남향에서 서북향 방향으로 서 있다.
-높이 6.39m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비이며 네 면에 모두 1,770 여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3부분으로 -첫부분은 먼저 시조 추모왕(鄒牟王; 주몽 朱蒙, 동명성왕 東明聖王)의 신이한 행적을 담은 건국신화를 소개하여, 고구려의 왕실이 신성하고 존엄함을 강조하였고 그것이 세대를 이어 광개토왕에 그대로 계승되었음을 밝혔다. -두 번째 부분은 광개토왕의 위대한 업적을 기린다는 첫부분 말미의 언급에 따라 구체적인 업적의 내용을 열거하였다. 연대순으로 광개토왕 시대의 주요한 정복활동과 그 성과를 자세하게 설명하였다. -마지막 부분은 광개토대왕의 왕릉을 지키는 수묘인(守墓人)에 관한 규정을 적고 있다. 여기에는 수묘인들의 출신지와 각 지역별 차출호수를 기록하고, 수묘인을 구민(舊民)과 신민(新民)으로 편성하게 된 경위와 이 규정을 감히 거스르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이를 통해 광개토대왕이 활발한 정복사업을 벌여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였고, 고구려 중심의 독자적인 천하관(天下觀)이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비문에는 여러 차례 광개토대왕이 한반도에 침입한 왜군(倭軍)을 격파하였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특히 정면 9행의 신묘년(辛卯年) 기사(記事)는 고구려 등 삼국(三國)과 왜의 관계를 전하고 있어, 그 이해를 둘러싸고 학계에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비 가까이에는 광개토대왕릉으로 추정되는 태왕릉(太王陵)이 있다
비 는 유리 누각안에 있으며, 내부에서는 사진촬영도 금지 되어있고 현장에 나와 있는 중국인 안내자의 통역으로 이루어 진다고한다 그러나 오늘은 가이드의 직접 설명을 허락했다 가이드는 이렇게 설명한다 *광개토대왕비 글자는 1775자중 약150자가 훼손되었다. - 비석에 쇠똥을 발라서 이끼와 잡목을 반나절 동안 태우다가 많은 글자가 훼손되어 안타깝다. -광계토 대왕 비문 첫면은 고구려 건국과 주몽왕 기록이고 무게가37톤이나 된다 - 호태왕은 주변의 왕을 거느리는 칭호이고 - 중국은 황제 일본은 천황 이라한다 - 집안시 주봉인 오녀봉 석산에서 가장큰 비석돌을 만들어 옮겨와서 세웠다 - 청나라 농부가 우연히 1880년에 발견하여 왕실에 보고한후 -청나라주재 일본 관리가 1883년에 탁본을 떠다가 - 1884년부터 연구하여, 1889년에 최초로 광개토 대왕비문 내용을 발표를함. -비문의 역사왜곡은 일본이 임나일본부설이라고 석회를 바르고 글자획을 위조해서 탁본 떠 일본으로 보내 왜곡을 했다 지금은 탁본 원본이 없다 -고구려는 원교근공 정책으로 백제와 동한 연등과 싸워. 요동지역을 빼았았다는, 전쟁에서 승리한 내용등이 새겨진 3면의 글자가 파괘 위조 되었다 -일본으로 옮겨 갈려고 단동항까지 가져갈려다 다시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다 -미천왕은 신분이 미천하다고해서 미천왕이고, 연나라 백성이 다니는곳 길에 묻었다. - 4면에 330호가 능지기로 묘지를 잘 지키라는 내용이다 “원래 태왕릉 주변은 게딱지 같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인민군이 마을 출입을 막고 순식간에 모두 철거해, 화단과 길을 조성했고, 현재 주변을 정비중에 있다한다 께끗하게 정비되고 관리된다 광개토대왕(태왕릉) - 태왕릉은 중국 길림성 집안시 태왕향 통구 분지의 우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으며, 방형 평면을 가진 계단식 돌무지무덤이다. -이 능은 흙 담으로 쌓은 능원 내에 자리한다. -무덤의 동편으로 제대로 불리는 시설이 있고 동북편으로는 건물지 등이 확인되었으며, -남쪽으로 딸린무덤[陪塚]이 있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1913년 조사 시 출토된 “원태왕릉안여산고여악(願太王陵安如山固如岳)”이라는 명문이 있는 벽돌에 근거하여 태왕릉이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1966년 중국 측에서 우산묘구 제541호묘(JYM 0541)로 편호하였다. 이 능에서 동북쪽으로 300m 거리에 광개토왕비가 있다. 태왕릉 11:20 - 다음장소로 이동하기위해 주차장 근처 매점에서 가이드가 사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휴식 그냥 "아이스깨끼" 유적지 주변 마을전경 11:30- 장수왕릉으로 이동 장수왕 릉 -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通溝平野]에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고구려 최대형 무덤인 태왕릉(太王陵)·사신총(四神塚) 등 석릉과 토분(土墳) 1만 기(基)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完存)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화강암 표면을 정성들여 가공한 절석(切石)을 7단의 스텝 피라미드형으로 쌓았는데, -기단(基壇)의 한 변 길이 33m, 높이 약 13m 이다. -기단의 둘레에는 너비 4m로 돌을 깔았으며, -그 바깥둘레에 너비 30m 의 역석(礫石)을 깔아 능역(陵域)을 표시하였다. 널방[墓室]은 화강암의 절석을 쌓아 지었는데, 천장석(天障石)이 있는 굴식[橫穴式]이며, 2개의 널받침[棺臺]이 있다.
- 1905년 일본인 학자 도리이가 처음으로 현지조사하고, 프랑스 학자 E.샤반과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 등이 조사하여 《남만주조사보고(南滿洲調査報告)》 등에 발표한 뒤부터 학계에 알려졌다. - 돌무지돌방무덤[積石石室墓]은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로부터 5세기에 나타나며, 기와를 통해서는 4세기 중엽 이후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므로 이 장군총의 연대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일 것으로 보고 있다.
- 이 무덤의 주인공으로는 광개토대왕과 그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의 것이라는 두 설이 있는데, 중국측에서는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고 있으나 고분의 유품이 모두 도굴당하였기 때문에 추측에 의존하고 있다. 입구 장수왕릉은 규모는 조금 작으나 보존이 잘되어 동방의 피라미드라 한다. 후면 패총은 후궁의 무덤이라한다. 1110개돌과 묘실과 50톤의 덥게 돌로 쌓았다. 속은 모래나 자갈을 쌓아서 만들었다. 내부는 자갈이다. 외부만 잘다듬어진 큰돌로 덥는다. 묘실에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묘실 크기 만큼 덥게 돌을 크게해서 묘실 옆으로 물이 흘러 내리게 50톤 짜리 돌이 들어 올려?다 -공사기간이 약 10~20년 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인무덤은 도굴꾼이 받침돌을 뽑아서 기울고 허물어졌다 후면 동반 무덤 후궁의 무덤이라한다 도굴되어 무너저 내렸다 기념사진 하나~ 둘~ 셋 웃어요 이제 나가자 인근의 귀족 묘와 5호묘로 우산 귀족묘원 고구려 귀족들의 묘지군이라한다 유네스코 등재후 조성되고 관리되고있느며 계속 공사중 그중 내부가 공개된 "오회분" [集安 五?墳 ] -집안시 우산하 고분군에 속하는 고구려 돌방봉토무덤(石室封土墳)으로, -집안 분지 중앙에 투구 모양의 고분 5기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 있어서 오회분이라 부른다. -서쪽 고분이 1호분이고 동쪽으로 가면서 5호분까지 매겨져 있다. -오회분 바로 뒤편에는 통구 사신총과 방단돌무지무덤(方壇積石塚) 등이 분포한다. 4호분과 5호분에서 벽화가 발견되었다. - 5호묘는 오회분 가운데 가장 동쪽에 위치한다. -일제시대에 금엽(金葉) 4개가 출토되었다하여 사엽총(四葉塚) 혹은 사혈총(四頁塚) 등으로 불리거나, -당시 고분의 일련번호에 따라 통구 17호분(通溝 17號墳)이나 서강 62호묘로 불렸다. -봉분 외형은 절두방추형으로 4호분과 유사하지만 저변의 직경이 51m에 달하여 규모는 훨씬 큰 편이다. -널길의 좌우 벽면을 비롯하여 널방의 4벽과 천장 등에 걸쳐 화강암에 직접 벽화를 그렸는데, 지금도 채색이 선명하다. 벽화의 주제와 수법 등은 4호분과 거의 동일하다. 널길 양벽에는 역사도(力士圖)를 묘사하였는데, 연좌대(蓮座臺)에 앉아 활시위를 당기거나 창을 들고 널방을 지키는 모습으로 그렸다. 널방 네 모서리에는 괴수와 교룡이 들보를 받치는 모습, 천장 고임에는 용으로 휘감긴 들보를 그려 가옥구조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다. 널방의 각 벽면에는 동벽에 청룡, 서벽에 백호, 남벽에 주작, 북벽에 현무 등 사신도를 웅혼하고 섬세한 필치로 생동감 넘치게 그렸다. 사신도의 여백에는 연화문(蓮花文), 화염문(火焰文) 등 다채로운 문양을 그려 놓았다. 천장 고임에는 마름모무늬, 인동당초무늬, 연꽃무늬, 하늘나무, 용을 타고 악기를 연주하는 천인(天人), 여러 별자리 등을 그렸다. 동벽에는 복희·여와형 해신과 달신, 북벽에는 용을 타고 승천하는 천왕과 북두칠성, 서벽에는 수레의 신, 남벽에는 신농씨 등이 등장한다. 천장석에는 북극성 등의 별자리와 함께 청룡과 백호가 뒤엉킨 모습이 그려져 있다. 묘 내부로 들어가 벽화를 보았으나 , 사진 촬영이 거부되어 그때 기억을 되살리고자사진자료를 첨부한다 12:30 - 유적지를 나와 12:30 - 집안시내에 있는 점심식사장소 북한에서 운영중인 식당(묘향산) 에 도착 들리는 얘기로는 요즘은 묘향산식당에서 남측 사람은 일절 받지 않는다 한다 예약을 하려고 전화를 하면 남한 사람이면 전화를 끝는다. 통화시의 북한 식당도 최근에 문을 닫았다 그러나 과거 전직장에서 부터 강종원대장 의 친구 분이 이곳에 짖고있는 홍삼정 제조공장 기술자문을 위해 5년째 상주해있어 입장자체가 어려운 이곳을 그분 도움으로 경험하고, 후한대접을 받았다. 모두 자리에 착석 어려운 가운데 이런 경험하게 해주시고, 대접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모든 북한주류 그리고 맛있고, 푸짐한 음식을 맛보고 행복함 공연도 감상하고 함께 하기도 꽃배달(팁) 춤과 노래도 이제 아쉬운 작별 14:00 - 식사를 마치고 친구 분과 인사도 나누고 다음행선지로 점심을 마치고 식당앞의 국내성을 찾았다 국내성 -과거 고구려의 도읍지, 이 성의 위치는 현재의 위치로 비정한다면 중국 지린 성 지안(집안)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고구려의 2번째 수도로써 한때 환도성 or 국내성 중 어느쪽이 고구려의 2번째 수도인가에 대해 말이 많았으나 - 현재는 평양-장안성과 마찬가지로 산성인 환도산성과 평지성인 국내성을 통틀어서 묶는 편, 즉, 당시 고구려는 평지성인 국내성이 뚫리면 근처의 환도산에 위치한 산성인 위나암성(삼국사기에 기록된 환도성의 당시 명칭)으로 도피하여 외세에 저항했다. -일반적으로 '말 달리는 만주 벌판'의 이미지로 알려진 고구려지만 초기 고구려의 수도인 국내성 주변의 지형은 평야와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산골짜기 속의 압록강변 작은 평지에 있다. 구글 지도로 보면 국내성은 신라 수도였던 경주 분지 넓이의 반의 반도 되지 않는다 -. 국내성 옛 모습은 사라지고 성벽만이 인고의 세월을 견디고 있다. 흥망성쇠를 이 국내성도 결코 피해가지 못했다. 국내성이 있는 집안은 환인에서 4시간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기마민족이었던 고구려인들이 환인을 중심으로 기원전 27c~ 3c까지 30여년간 이일대를 호령했다.
국가형태가 안정되고 국운이 번성하여 안정적 기틀을 마련하기위한 영토의 확장이 불가피하게되어 한숨에 달려 택한곳이 집안이라는 곳이다. 집안은 산으로 둘러쌓인 완만한 구릉지로 농사를 지을수 있는 평야와 적의 공격으로부터 적절히 방어할수 있는 지형을 갖추고 있다.
특히 도심을 둘러싼 압록강의 지류천이 흐르고 있어 농업용수로나 적의 방어수단으로의 기능이 탁월한 곳이다.
국내성의 성터가 뚜렸이 남아있는 집안시내는 우리나라 면단위의 소도시로 비교적 조용한 곳이었으나 최근 광개토왕비및 장수왕릉, 국내성터등 고구려의 유물을 관광하러 오는 관광객들로 도시정비가 한창이었다.
국내성은 도심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있어 그사이를 두고 공동주택(아파트)이 들어서 있어 역사의식에 대한 그들의 의식을 의심케 했다. 성의 축조방식은 수원성의 축조방식과 매우 흡사해 적으로부터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학익(학날개)형태를 이루고 있다.
성의 정면에 압록강의 지류천을 마주하고 있어 어떤 형태로든 적이 하천을 건너 공격해 오게 만들어 1차적으로 적의 기운을 빼고 적이 성중앙을 중심으로 양쪽 성의 날개 중앙부에 들어왔을때 협공할수 있는 형태로 축조된 것으로 지혜로움을 엿볼수 있다. 이제 압록강이다 가까운 곳에 북한만포시와 접한 압록강변 이다
기쁜마음은 아니지만 기념사진은 남기고 압록강 상류고 맞은편이 북한 만포시 여기가 하류 저먼곳 북한과 왔다갔다 하는 철교 긴장감 없이 한가롭기만하다 강에는 유람선도 다니고 저쪽이 만포시 구리광산과 그마을 우린 이렇게 기념사진을 찍고 다음 목적지 심양으로 출발 이제 태준이도 정신을 찾았다 집안시내를 지나 외곽으로 달리고 휴게소가 썰렁 더덕밭도 지나고 통화시를 거처가는길 버스안 채용창 과장은 얘기한다. - 시진핑 집권 이후로 부패 공무원들을 많이 짜르고있다 전에는 상해파가 정권을 장악했고, 시진핑 집권이후로는 북경파가 장악을 하여 집권을 한다 - 공무원의 접대와 고급호텔 투숙을 자제 하다보니 호텔과 대형식당이 많이 망하고 있다 -술값을 200위안 미만으로 제한했다. -중국은 술을 잘마셔야 일이 잘 타협이 된다. -요즘은 뇌물은 직접 받지 않고 제3자를 통해서 전해 받는다. -45위안 담배를 2갑정도 뇌물로 많이 주며 최근에는 개선되고 있다 -중국은 교통벌점이 가혹하다 그래서 교통순경의 파워가 세다 우리나라 7~80년대와 비슷하다 -요즘엔 청탁을 함부로 받지 않는다. 특히 사회주의국가들이 부정 부패가 심하다. 소련.베트남도.중국.북한도 부패가 심하다. 옛날에는 구정때만 고기를 실껏 먹었다 북한에선 1999년 후로 3년동안 재해가 심해서 배가 고파서 북한 사람이 중국으로 많이 넘어왔다. -북한여자들이 중국 노총각과 결혼해서 살다가 노예처럼 살기도 하고 신분증도 없이 차와 비행기를 타지도 못하고 살고있다 지금은 모든 것에 신분증과 면허증을 제시 해야만 여관도 들어갈수 있다. 걸리면 현지파출소에 가서, 신분증을 받아 와야 한다 . 요즘엔 중국 치안이 많이 좋아지고 있다 -중국이 압록강.두만강 강밑으로 터널을 파서 자원을 가져오고 있다 -앞으로 전망은 1위가 요령시.2위가 장춘시.3위가 흑룡강성이다 요령성은 최근 마이너스 성장이다. 하남성은 2.3모작을하고.하북성은 공업지역과 광산에서 나는 매연등이 심하다. 동북삼성의 공기가 북경보다 10년정도 차이가 난다. 동북 3성으로 중공업 공장이 이전하게 되면 매연공해로 북한과 일본이 걱정된다. 앞으로는 시골 호적으로 사는 사람이 대우를 받는다 도시 사람이 농촌으로 이주가 않된다 민족간의 갈등과 소수민족이 점유하는 자원이 문제이다. 내몽골 천연가스가 엄청나다 모든자원을 탐측만 해놓고 아끼면서 수입해서만 사용한다 등소평의 첫번째 유언이 죽고난뒤 50년 동안은 국내에서 전쟁을 절대로 하지말라 했다 히토류가 전세게에서 80%가 중국에서 생산된다 히토수출을 수출량을 줄이라고 자제해라 했다. 히토류는. 재생이 않되는 엄첨 귀한 중국의 지하자원이다 고로 자원에서 세계 재패를 할것이다 홍콩이 중국 반환이 1997년에 반환됨 새로 부상하는 심천에 500만명 거주하고. 유동인구까지. 약2천만명이나 된다 홍콩과 거의 같다 심천의 부동산 가격이 홍콩을 따라가고 있다 월급10% 오르면 물가는 15%가 오르는게 중국의 문제점이다 그래도 먹는것. 땅에서 나는 것은 가장 저렴하다 중국인들 한국 밥솥을 가장 많이 사온다 35만원에 사와서 중국에서 팔면 60만원정도 받는다. 탈랜트 김수연이 광고비만 10억원 받는다 최근엔. 송준기가 시대가 올줄 알았는데. 태양의 후예가 심혜교로 중국이 요구했다. 사드로 중국 광고를 한건도 못했다 한류에서 비자금이 많이 생긴다고 해서 정치적으로 자제되고 있다 휴게소에 잠시들르고 손님과 차량이 한가하다 심양으로 갑니다 장장4시간이 걸린다 고속도로를 달린다 인삼 재배지 옥수수 밭 오늘의 마직막 목적지 심양이 얼마남지 않았습니다 20:30 - 호텔에 도착 맛난저녁도 먹고, 마시고 태순씨와이미영씨 생일 축하와 16회 고 이왕호. 이장노 선배님 칠순도 함께 축하 케익커팅
덕분에 신나게 마무리 하고 22:00 - 우린 이렇게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이제 각자 방으로 갑니다 과음 하였다고 집사람에게 구사리 먹으면서..ㅠㅠ 이렇게 오늘 하루도 마무리하고 다음은 심양 , 그리고 귀국편 입니다 |
출처: 여 행 기 원문보기 글쓴이: 너른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