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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전체주의 발생 이유
전체주의가 발생하는 이유는? (Adorno vs. Arendt)
나치즘과 Heidegger
서양 대의민주주의 이념의 핵심적 가정 中 하나는 투표에 의해 뽑힌 자는 그가 누구든 (개인들의 의지가 보편적으로
실현되기 때문에) 공정하고 선한 정치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 같은 믿음은 Hiter의 총통 당선으로 말미암아 환상임을 확인했다.
Hitler는 직접선거에 의한 압도적 당선자였다. 이것은 다수결의 이념이 절대진리가 아님을 입증했다.
독일주민들은 스스로를 작은 히틀러로 여겼다. 자발적 복종이 부른 비극. 물론 독일의 자본주의적 모순 등 당시 상황이
국민들을 그렇게 만든 측면도 있었다.
총통과의 내면화된 관계를 통해 이제 주체의 초자아에 내면화된 총통이 각기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런 나치즘(국가사회주의)의 논리에 20세기 최고의 존재론자 Martin Heidegger가 깊이 연루되어 있었다.
하이데거의 철학체계 자체가 이미 나치즘의 내적구조와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 그 내적구조란 독일 민족주의였다.
『동일성과 차이』 (Identitǟt und Differenz)에서 “존재는 ‘밝히면서 건너옴’으로 스스로를 내보인다. 존재자로서의
존재자 자체는 ‘밝혀져 있음 속에서 다가와 그 안에서 스스로를 간직하는 도래’라는 방식으로 나타난다.”고 했다.
형광등의 불빛을 존재에, 방안에 있는 사물들을 존재자에 대입해보면 쉽게 이해 가능.
불빛이 마치 방안을 밝히면서 오는 것 같고, 사물들은 불빛에 의해 밝아진 방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존하면서 나타
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존재 자체가 불빛처럼 강림하지 않으면 존재자들은 그 모습은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
Heidegger 생각(발상)이다.
하이데거가 강조한 존재는 신처럼 전능한 것. 존재 자리에 Hitler를, 존재자들 자리에 독일 국민들을 代入하면 이해
가능 (의도적인 것).
하이데거에 있어서 진리란 존재(Hitler)가 스스로를 드러내서 존재자(주민들)를 밝히는 사태를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논쟁과 추론 통해 진리를 얻으려고 했던 철학자가 아니라, 존재의 소리를 직접적으로 들을 수 있었다고
이야기 되는 Socrates 이전의 시인과 사상가들을 좋아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존재의 소리를 들었던 시민, 사상가들처럼 하이데거는 총통의 강림을 맞이하는 충실한 사제 노릇을 스스로 실천했던
셈이다. 존재신학의 사제라고 부를 만큼.....
나치즘에 열광하던 독일국민과는 달리 당시의 광기에 압도당해 불안, 공포에 떨던 사람들은 히틀러에 의해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의 공포감은 Auschwitz로 현실화되었다.(400만 명이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되었다. 그중 3/2가 유대인.)
후에 나치즘으로 상징되는 전체주의를 철학적으로 해부하는데 유대인 철학자들이 나선다.
그중 독일에서 활동했던 Theodor Adorno(1903-1969)와 미국으로 건너간 Hannah Arendt(1906-1975)가 대표
적인 인물.
Adorno : “이성의 논리 자체가 전체주의를 낳았다.”
젊은 시절부터 Adorno는 Arnold Schőnberg의 無調음악에 심취했을 정도로 예술적 재능과 감수성 탁월.
그는 “아우슈비츠 이후에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아우슈비츠 상처가 컸다.
그 생각(숙고)엔 아우슈비츠를 낳은 것은 광기나 비정상이 아니었다. 그 참혹한 학살을 일으켰던 주범은 오히려 지금
까지 서양철학이 그토록 자랑하던 이성 혹은 합리성 이었던 것이다.
이 같은 통찰을 아도르노는 1961년 파리 college du France 강의를 통해 처음으로 대중에서 알릴 수 있었다.
1966년 출간된 『부정변증법』 (Negative Dialektik)은 이 때 강의를 엮어 만든 것.
“대량 학살이란 절대적 통합(개념의 통합)이다. 이런 통합은 사람들이 획일화되는 곳이면 어디서나 등장하게 된다.
아우슈비츠는 순수동일성(이성의 合一)은 죽음이라는 철학명제가 진실임을 확증했다.” (『부정변증법』)
Platon 이후 서양철학은 인간의 이성이 복잡하고 다양한 세계를 파악할 수 있는 순수한 동일성 혹은 본질을 추구하고
촉구해야만 한다고 강조해 왔다. 그렇게 해서 출현한 것이 존재, 인간, 동물, 생물, 여성, 남성, 백인, 흑인, 독일인,
유태인 등과 같이 다양한 개체들을 분류하고 규정하는 개념들이었다.
Concept나 Begriff가 붙잡는다는 의미를 가진 것도 이 때문이다.
개념으로 무엇인가를 포착하기 위해 이성은 개체들이 가진 복잡성과 차이를 제거하고 획일화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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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보/보수, 좌/우의 ‘이성의 순수성’에 대하여 -- 칼럼/논문
이성의 욕망 하이데거(후설)
아우슈비츠, 아도르노
전체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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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성이 지향하는 내적인 논리는 개념(뜰 채)으로 개체들(잠자리나 나비)을 포획하기 위해서 개념의 同一性을
편집증적으로 지향하는데 있다.
동일성을 추구하는 이성의 욕망에서 Adorno는 마침내 전체주의의 기원을 발견하게 된다.
동일성에 대한 욕망은 German 민족의 순수성을 지향하며 이것이 이런 순수성을 더럽히는 차이로서 유태인과 집시
들을 제거하려는 나치의 편집증적 욕망으로 실현되었다고 본 것이다.
하나의 개념 속에 포획된 개체들은 이제 교환 가능한 것으로 사유된다.
『차이와 반복』 (Difference et Répétition)에서 Gilles Deleuz가 얘기했던 것처럼, 일반성 (géneralité)와 특수성
(particularité)의 회로가 개념의 자기동일성이 관철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동일성의 논리에 지배되면 그들은 이제 유태인1, 유태인2, 유태인3, 유태인4라는 특수성으로만 사유될 뿐이다.
물론 여기서 유태인이란 개념은 일반성을 상징한다. 그래서 만일 히틀러가 유태인 1명을 데려오라 명령을 내리면
그의 부하는 Adorno, Benjamin, Arendt, Levinas 중 누구라도 데려오면 된다.
이들 4인은 유태인이라는 일반성에 의해 포획된 특수한 것들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개념의 동일성 혹은 이성의 순수성이 아우슈비츠를 낳았다면, 다시는 이 세상에 그 같은 비극이 도래하지 않게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관성과 특수성의 회로, 혹은 개체들을 다른 것으로 교환 가능한 것으로 보는 이성의 논거를
해체하는 것이다. Adorno가 비개념적인 것을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이런 맥락에서였다.
비개념적인 것, 개별적인 것, 특수한 것, 다시 말해 Hegel이라는 이성주의 철학자가 쓸모없는 실존이라고 배척했던
것들을 Adorno는 철학적으로 구제해야 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Adorno가 언급한 특수한 것은 Deleuz에 의하면 단독적인 것으로 번역될 수 있는, 그러니까
교환 불가능한 개체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Adorno의 부정변증법은 이런 맥락에서 제안된 것이다.
Hegel의 변증법은 개체들 간의 대립과 차이를 강조하는 것 같지만, 최종적인 목표는 개념을 통한 종합이었다.
그렇기에 헤겔 변증법은 개념의 자기 동일법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Adorno는 자신이 제안한 변증법의 中心은 종합이 아니라 종합되지 않은 모순의 원칙을 관철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부정변증법』에서 그가 개념의 자기동일성에 저항하는 이질적인 것을 강조하면서 자신의 변증법이
“비동일성에 대한 일관된 의식”이라고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였다.
그의(Adorno) 변증법에 의해서도 이제 Adorno, Benjamin, Arendt, Levinas는 특수성의 굴레에서 벗어나 단독적인
것으로 사유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그래서 Adorno의 부정변증법은 단독성의 변증법 혹은 차이의 변증법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아렌트 : “인간의 無思惟 때문에 전체주의가 발생한다.”
그녀의 평생 화두는 전체주의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것.
1951년 출간한 『전체주의의 기원』 (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도 그런 것. 그러나 이 책에서 그녀는 전체
주의 발생 원인을 철학적으로 해부하는 데는 불성공.
1963년에 출간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에서 비로소 전체주의의 비밀을 푸는 해법을
제시. 아이히만이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무사유 때문이었음을 제시.
철저한 무사유 = 타자 입장에서 생각할 수 없음을 의미.
따라서 사유란 단순히 생각함이 아니라 타자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말한다.
사유는 우리(인간)에게 주어진 천부적인 능력이 아니라(이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수행해야만 하는 의무
(실천, 윤리, 도덕의 문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악은 너무나도 평범한 것이라고 했다.
전체주의를 막는 유일한 방법이 주체의 시선이나 태도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본다면, 이것만으로는 매우 불충분하다.
전체주의적 비극을 조장하는 사회구조 혹은 체계를 새롭게 변형시키려는 작업도 동시에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사회의 체계를 어떤 식으로 바꾸면 될까?
Simone Weil(시몬 베이유)의 『자유와 사회적 억압의 원인들에 대한 성찰』 (Réflexions sur les causes de la
liberté et de l'oppression sociale)에서 그녀는 “가장 인간적인 문명은 육체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문명”이라
고 했다. 사회의 분업화와 체계화의 핵심에는 늘 정신노동, 육체노동의 2분법이 있다.
육체노동에 비해 정신노동을 중시하는 가치가 내재해 있다.
체계는 최고의 상급자가 가장 정신적인 노동에, 최하 계층은 가장 육체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구조로 작동한다.
베이유는 바로 이 같은 구조를 붕괴시켜야 한다고 주장.
단순한 결과론적 얘기겠지만 어떤 상급자라도 유사한 육체노동에 종사하게 되면 그 사회체계는 결코 비대해질 수 없
을 것. 따라서 베이유가 제안했던 인간적인 문명이 실현된다면 인간 개체 한 명 한 명을 작은 수단으로 간주해 온
국가 같은 거대 매체들은 더 이상 발을 붙일 수가 없을 것.
결론
나치즘은 근대민주정치의 핵심인 대의민주제의 맹점(선거는 자유인의 보편성을 발현한 것이라는)을 상징하는 사건.
히틀러는 독일인의 뜻을 대변하기보다는 조작, 환상의 노예로 만들어 조종했다.
대표자에게 권리를 양도한 이상 독일인들은 대표자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소외)
이 대목에서 안타까운 점은 나치즘에 의해 피해를 보았던 Adorno와 Arendt가 대의민주제의 맹점을 우회해 버렸다는
것이다.
Adorno가 나치즘과 대량학살이 이성이 가진 동일성(개념의 순수동일성)의 논리의 필연적 귀결이라고 평했다면,
Arendt는 그 원인을 각 개인들의 무사유에서 찾았다. 결국 그들은 각 개인들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개인들이 이성을 지나치게 중시하고 타자의 입장에서 사유치 못한다면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가 항상 반복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하지만 나치즘을 이해하려면 개인 내면의 문제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문제도 함께 고려(숙고)해야 한다.
이 점에서 짐멜 Georg Simmel의 작은 논문 『대도시와 정신적인 삶』 (The Metropolis and Mental Life)은 20세기
정치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유익한 논문이다.
Georg Simmel(1858-1918) 니체, 베르그송, 딜타이 등과 함께 生의 철학자.(기존의 이성주의 ,주지주의, 기계론적
세계관에 대해 살아 있는 생을 그 자체로 이해하려함)
위 논문에서 짐멜은 산업자본주의의 발달이 대도시의 탄생으로 이어지고, 이로부터 인간의 내면세계가 과거와는 다
르게 변모했다고 얘기한다.
그가 주목하는 변화는 대도시인들이 “상호무관심(indifference)이나, 속내 감추기(reserve)라는 태도 그리고 정서적
인 태도보다는 지적인 태도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표면적으로, 시골인보다 대도시인들이 자유로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대도시에서는 자신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상대방에게 어떤 정서적 반응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관심하고 속내를 감추는 지적인 대도시인들이 출현하면서 19세기 이후부터 지금까지 정치는 전혀 다른 외양을 갖게
된다. 어떻게 하면 이 익명의 도시인들을, 자신의 사적인 일에 몰두하는 고독한 개인들을, 한데 모여들게 할 것인가?
이는 정치인들에겐 사활이 걸린 문제.
정치인들은 고독한 개인들, 즉 군중을 먼저 묶지 않는다면, 이들이 어떤 우발적인 계기로 상호 연대하여 자신들에게
저항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경험했다. 1871년의 Paris Commune이 대표적 사례다.
1895년 Gustave Le Bon(르봉)이 『군중심리학』 (La psychologie des foules)를 썼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정치가들은 군중들이 자발적으로 상호 연대하기 전에 그들을 다른 논리에 근거해 응집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히틀러보다 더한 사람, 위치에 오를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축제 festival이었다.
이것은 물론 로마시대 colloseum의 열광에 대한 반복이라고 독해될 만한 것이다.
이것은 1934, 1935, 1936년 Nürenberg에서 연이어 열린 나치전당대회나 1937년 Berlin Olympic 대회에서 확인된
바 있다.
축제와 대항적 축제가(기존의 대의민주제에 저항하는 축제-촛불시위?)가 갈등을 유발한다.
Antonio Negri가 다중이라고 했던 것은 대항축제를 통해 구성된 혁명적 군중들, 혹은 대의민주제를 거부하고 직접민
주제를 꿈꾸는 주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면으로 보나 우리는 지금 축제의 정치 속에 살고 있다.
물론 그것은 우리가 파편화 되어있고 생활 속에서의 강렬한 유대를 상실했음을 반영한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어떤 결단의 지점에 서있는지도 모른다. 그들의 정치적 축제에 휘둘리는 축제의 수동적 대상이 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연대적 삶을 표현할 수 있는 축제의 능동적 주체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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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er(1864-1920)
Jean Baudrillard(1929-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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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자본주의 생존방법
무엇이 자본주의를 살아가게 하는가? (베버 vs. 보드리야르)
자본이 살아가는 방법
상업자본주의(merchant capitalism)→ 공간적 차이를 이용한 잉여가치 창출
산업자본주의(industrial capitalism)→ 시간적 차이를 이용한 잉여가치 창출
(잉여가치 = 최초의 가치를 넘는 초과분. Marx는 자본주의, 정확히 말해 산업자본이 노동자를 착취한다고 주장)
Max Weber (1864-1920) : “굴욕정신이 자본주의를 발달시켰다.”
근대사회란? 산업자본주의에 입각해서 새롭게 구성된 사회.
18세기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으로 시작되어 19세기에 자신의 모습을 거의 완전히 갖추게 된 사회를 의미.
“protestant적 정신은 굴욕을 심화시켰다. 금욕(규범)을 위해 노동을 소명으로, 즉 구원의 확보수단으로 노동을 소명
의식화 하는 심리적 동인을 만들어 냈다.
금욕은 他面에서 기업가의 화폐취득도 召命으로 해석, 노동의욕을 가진 자들에 대한 착취를 정당화했다.
분명한 것은 직업으로서의 노동이란 의무를 수행하면서 부르주아 계급이 神의 나라를 배타적으로 소망할 때나, 혹은
교회 규율이 당연히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강제할 때 요구되었던 것이 엄격한 금욕이었다.
이 금욕정신이 자본주의적 의미에서 노동의 생산성을 촉진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영리활동을 소명으로 보는 것이 근대 기업가의 특징이듯이, 노동을 소명으로 보는 것도 노동자들의 특징이 된 것이다.”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Die Protestantische Ethik und der Geist des Kapitalismus)>
기독교적 삶은 정신적 삶이다. 현실(현세의 삶)은 늘 심판의 대상이다.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사후의 심판만이 영원한
삶이며, 그 같은 삶은 결국 정신적 삶을 추구하게 된다.
따라서 기독교는 육체적 욕망. 쾌락을 저주하며 그것을 사탄의 유혹으로 본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의 굴욕주의다.
Weber는 이 같은 금욕주의가 절약/근검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 정신을 가능케 해주었다고 주장.
베버는 자본가, 노동자의 임무를 신이 정해준 숙명인 것처럼 생각했다.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현세의 대립이 Weber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본가나 노동자들이 모두 자신들의 임무를
금욕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되었다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잉여가치 창출. 그러나 노동자들에게는? ...)
장 보드리야르 : “소비야 말로 자본주의 발전의 숨겨진 동력이다.”
1970년에 Weber 주장에 근본적인 도전을 한 책이 등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의 사회』(La Societē de Consomm
ation) 산업자본주의 발달 핵심은 기술개발에 의한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허영과 욕망을
부추기는 유혹적인 소비사회의 논리가 있다고 선언.
그에 따르면, 산업자본주의 하에서는 생산보다 오히려 소비가 더 생산적이라는 역설적 주장이 성립된다.
상품이 소비되지 않는다면 산업자본은 자신의 무한한 생산력을 과시할 수 없다. 결국 자신의 수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산업자본은 반드시 사람들로 하여금 지속적인 소비를 하도록 강제할 수 있어야만 한다.
따라서 산업자본은 상품에 사용가치 이상의 것을 각인해 넣어야 한다.
그 이상의 것을 보드리야르는 기호(sign)가치라 불렀다.
“객관적 기능의 영역 안에서 사물들은 교환이 불가능하다. 객관적 기능 영역은 구체적인 사용의 세계. APT, 자동차는
각기 객관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명시적 영역 밖에서 어떤 사물이라도 무제약적인 방식으로 대체 가능
하게 된다. 객관적인 기능 영역을 벗어나면 사정은 달라진다.
자신의 신분, 富裕 정도를 과시하는 차원이라면 고급 자동차, 고급 아파트는 대체가능. 교환가능.
이런 암시적 의미의 영역 안에서는 사물은 기호(Sign)라는 가치를 띠게 된다.
따라서 세탁기는 도구로 쓰이는 것과 함께 행복, 위세 등의 요소로서의 역할도 한다. 바로 이 후자의 영역이 소비영역
이다. 여기서는 다른 모든 종류의 사물들이 ‘의미를 표시하는 요소’(signifying element)로서의 세탁기를 대신할 수
있다. 상징(symbol)의 논리와 마찬가지로 기호의 논리에서도 사물은 이제 명확하게 규정된 기능이나 요구와 더 이상
무관하다.
그 이유는 바로 사물이 전혀 다른 것 (그것은 사회적 논리일 수도, 욕망desire의 논리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에 대응하
고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 사물은 의미작용(signification)의 무의식적이고 유동적인 영역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소비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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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칼럼)문제 : 보드리야르의 선물(증여 논리)과 빌게이츠의 창조적 자본주의(creative capit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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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리야르는 객관적 기능의 영역을 넘어서는 차원, 즉 암시적 의미의 영역에서 사물들이 기호의 가치를 갖는다고 주장.
기호의 차원이 바로 산업자본주의가 소비의 논리에 의해 작용하고 있는 영역이라고 보면서, 그는 그 사례로 세탁기를
언급. 세탁기는 도구(사용가치)이면서 행복, 위세 등의 상징요소. (사용가치와는 구분되는 기호가치) 그는 세탁기의
사용가치와는 무관한 이런 관념적인 가치를 ‘기호’(sign)라고 불렀다.
그가 말한 소비의 논리란 바로 이 기호를 구매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인간은 타인과 차별하려는 욕망, 허영이 있다(구별 짓기 욕망).
그는 기호가치를 해명함으로써 산업자본이 어떤 식으로 우리 인간을 포획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이런 통찰을 통해 그가 진정으로 꿈꾸었던 것은 자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실마리를 얻는데 있었다.
마침내 그는 선물이나 증여의 논리를 통해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주장.
“4가지 논리가 논쟁의 대상이 될 것이다. .........유용성의 논리, 거래의 논리, 증여의 논리, 신분의 논리 ― 사물은 이
가운데 어느 하나에 입각하여 정돈됨에 따라 각각 도구, 상품, 상징, 기호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정확하게 말
해서 선물은 사용가치도, 경제적 교환가치도 지니지 않고 있다.
증여될 물건은 상징적 교환가치만을 갖는다. 이것이 선물의 역설이다.“
<『기호의 정치 경제학 비판』(Pour une Critique de l'economie politique du signe)>
4가지 중 증여의 논리만이 반자본주의적 논리를 함축하고 있다. 책을 선물했다면 받은 책은 순수한 증여의 논리에
따르는 순간 상징이 되며(주는 사람의 마음) 자본주의로부터 가장 멀리 벗어나게 된다.
선물을 Max가 얘기한 것처럼, 인간을 인간으로서만, 사랑을 사랑으로서만, 신뢰를 신뢰로서만 교환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맑스의 『1844년 경제학-哲學手敲』 (Ő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물(화폐, 상품)이 인간을 지배하는 세상(자본주의)을 벗어나야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세상이
된다는 것. 보드리야르는 말년의 저서 『암호』(Mots de Passe)에서 세계의 모든 것들을 교환 불가능한 것, 즉 일종의
선물로 보자고 역설했다. “세계는 교환될 수 없는 것이다. 총괄적으로 보면 세계는 아무데서도 등가물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세계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에 그것이 가치로서 평가되고 비교되고 측정될 수 있는 外的인 것이라
는 것은 전혀 존재치 않는다.”(『암호』).
탁월한 심미적 감수성을 갖추지 않고 있다면 그 누가 자본주의를 넘어서려는 보드리야르의 유언을 지속적으로 실현할
수 있을까?
결론
Weber는 서양에서 유독 자본주의가 발달한 이유를 protestantism이 지향하는 금욕적인 생활에서 찾으려 했다.
이런 금욕주의적 생활을 추구했기에 자본가, 노동자 모두는 소비를 억제하고 생산부분에만 집중가능 → 부의 축적.
그렇다면 Weber의 말대로 금욕적 소비상황이 자본주의 발달의 동력이었다면, 산업자본이 만들어 낸 엄청나게 많은
상품들은 그동안 과연 누가 구매해 온 것? (보드리야르의 의문).
보드리야르는 생산부문보다 소비부분이 자본주의 발달의 진정한 동력이라고 주장.
자본주의는 상품을 가진 사람보다는 자본을 가진 사람에게 우월함을 보장하는 체제다.
노동력이라는 상품만을 가지고 있을 때 우리가 자본가보다 열등한 지위에 있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소비자는 월급을 받는 순간 돈을 가지게 되고, 자본가는 상품을 가지고 있게 된다. 이 순간 노동자는 소비의 자유라는
환각에 빠진다. 그런데 자본가는 우리(노동자)에게 허용된 이런 순간적인 자유나 우월함을 오래 참지 못한다.
왜냐하면, 소비자의 돈을 회수치 못할 경우 잉여가치를 얻을 수 없고, 나아가 그 돈으로 생산에 재투자할 수 없기 때문
이다. 자본가가 다양한 유혹의 기술을 개발하는데 혈안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자신의 우월성을 보장해주는 돈을 강제로 뺏을 수 없다면 자발적으로 소비하도록 유혹하는 방법밖에 없을 것이다.
여기서 상품에 부가된 기호(sign)가 바로 자발적인 소비를 유도하는 치명적인 미끼로 기능하게 된다.
그렇다면 소비자를 유혹하는 미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을까? 그는 불가능한 교환(L'echange impossible)을 얘기했다.
교환은 교환이지만 자본주의 입장에서는 불가능한 교환이라는 것- 바로 선물교환이 그곳이다.
우리 모두,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교환될 수 없는 선물로 사유하자는 것이다. 교환될 수 없는 것
들을 주고받을 때 우리의 교환은 반자본주의적일 수밖에 없다.
(유언에서 선물의 논리를 그토록 강조했던 것도 이 같은 맥락)
23 사랑이란
사랑은 타인과 하나가 되는 것일까? (헤겔 vs. 바디우)
‘사랑해’라는 말의 내적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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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gel(1770-1831)
Badiou(19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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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rtre - “사랑에 빠진 자가 원하는 것은 사랑받는 자가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점이다.”
Jacques Lacan - “사랑이 발생하는 것은 욕망과 그 대상의 불일치 때문이다.” (『세미나』 Le Séminaire 8권에서).
라캉은 욕망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역시 결여를 전제로 한다고 보았다.
사랑은 우리가 특정한 타자를 특별한 사람으로 느끼고, 동시에 그 타자가 우리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해 주기를 바라
는 감정. 사랑에 관한 난점은 Sartre가 지적했듯이, 타자로 하여금 나를 특별한 사람으로 생각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데 있다. 타자의 타자성, 혹은 타자의 자유는 사랑의 감정에서 가장 이율배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랑의 열정을 가능하게 해주면서 동시에 사랑을 비극으로 만드는 계기이기도 하다.
원리적으로 우리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타자의 자유를 부정하여 사랑의 비극을 피할 것인가?
아니면 타자의 자유를 긍정하여 사랑의 비극을 감내할 것인가! 전자의 길을 따랐던 사람이 Georg Wilhelm Friedrich
Hegel(1770-1831)이라면, 후자의 길을 따랐던 사람이 Alain Badiou (1937~ )였다.
헤겔 :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
헤겔은 자본주의 시민사회를 전제로 사랑과 아울러 가족의 논리를 다음과 같이 사유했다. “사랑을 이루는 첫 번째 계기는 내가 오직 나만을 위한 독립적인 인격이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내가 스스로를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인간으로 느낀다는 데 있다.
두 번째 계기는 내가 자신을 타자 안에서 발견하고 이 타자 안에서 인정을 얻는다는 것, 그리고 역으로 그 타자도 역시 내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을 얻는다는 데 있다.” (『법철학 강요』 Grundlinien der Philosophie des Rechts).
헤겔은 “부부 사이에서의 사랑의 관계는 아직 객관적이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객관적 사랑의 정체는 바로 자녀를 낳는 행위로 드러난다고 보았다. 헤겔에게서 자식이란 존재는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한 결과물(자식은 바로 남편과 아내의 객관화된 존재).
Badiou : “사랑은 둘의 경험이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Hegel의 판타지는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사랑을 객관적으로 만들려고 할 때 결국 비극으로 결말을 맺게 된다는 것이다. 타자의 자유를 긍정하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 타자의 주관 혹은 내면을 긍정하지 못한다면, 사랑에 남겨지는 것은 참담한 비극일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Sartre와 Beauvoir의 사랑은 타자의 자유를 긍정하면서도 사랑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 특별한 사례이다.
두 사람은 헤겔의 사랑에 대한 관점을 거부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Sartre의 사랑은 철학적으로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바디우의 과제였다. 바디우는 『조건들』 (conditions)에서 “사랑은 융합적인 것이라는 관념에 대한 거부 - 사랑은 구조 속에서 주어진 것으로 가정되는 둘이 황홀히 하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 황홀한 하나란 단지 다수를 제거함으로써만 둘 너머에 설정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희생적이라는 관념에 대한 거부- 사랑은 동일자를 타자의 제단에 올려놓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사랑은 둘이 있다는 後사건적인 조건 아래 이루어지는, 세계의 경험 또는 상황의 경험이다.”
헤겔에 있어서 결혼과 가족은 두 사람이 하나로 결합되는 계기 혹은 둘의 주관적 사랑이 우리라는 객관적 사랑으로 질적으로 변화하는 계기로 사유되었다.
바디우에 있어서는 하나라는 것은 둘의 일시적인 효과로 사유될 수 있을 뿐이라고 지적. (하나라는 순간적인 느낌의 이면에는 둘의 의지가 끈질기게 지속(작용)되고 있다.)
“사랑이란 그 자체가 비관계, 탈결합의 요소 속에 존재하는 이 역설적 둘의 실재성이다. 사랑이란 그런 둘에의 접근이다. 만남의 사건으로부터 기원하는 사랑은 무한한 또는 완성될 수 없는 경험의 피륙을 짠다.” (『철학을 위한 사랑』. Manifeste pour la philosophie. Badiou)
결혼과 인간의 자유에 관한 둘이 품고 있는 자유의 진실을 철학적으로 실천했던 사람들 - Sartre vs. Beauvoir/ Walter Benjamin vs. 아샤 라시스Asja Lācis(라트비아 수도 Riga 출신의 불쉐이키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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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ter Benjamin : Berlin 시립도서관에서 연구 몰두. 1924.3까지 600여개 인용 자료수집, 일목요연하게 정리. (읽고 다시 숙고하면서 모은 이 자료들은 건축자재료 쌓여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원초적 착상을 빌려와 불을 붙여야 할 건초더미로 대기하고 있다고 표현. (건축자재 <건초더미) - Arcade project (그의 연구계획名).
Thomas Samuel Kuhn, 美 Ohio Cincinnati生, 사회학자/철학자 (1922-1996).
Karl Raimund Popper(1902-1994)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영국 철학자, 20C 가장 영향력 있는 과학철학자. 고전적인 관찰 - 귀납의 과학방법을 거부. 과학자가 개별적으로 제시한 가설을 경험적인 증거가 결정적으로 반증하는 방법을 통해 과학이 발전함을 주장. (유태계 변호사의 아들)
결론
20C말 프랑스의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의 기획은 범주적으로 동일성(identity)의 의미를 지니기 위해 그간 차이(difference)를 억압하고 은폐해 왔다는 사실을 폭로하는데 있다. 다시 말해, 차이가 우선적인 것이고, 동일성은 이런 차이를 억압하고 나서야 비로소 등장하게 되는 파생적 범주에 지나지 않는다고 본 것이다.
기원이나 근거도 아니면서 그 자리를 찬탈했다는 점에서 동일성은 지배의 의지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동일성을 해체하는 것은 그것의 파생성과 지배의지를 폭로하는 일이다. 동일성의 해체를 통해 차이를 발견한다는 것은, 차이를 가능하게 하는 타자를 발견한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해체의 끝에서 우리는 타자 - 더 정확히 말해서 - 타자와의 비대칭적 차이(asymmetrical difference)의 관계를 발견하게 되었다.
헤겔도 타자와의 비대칭적 차이를 발견한 철학자였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비대칭적 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하나 혹은 하나됨을 통해 차이를 미봉하려 했다는데 있다. 반면 Badiou는 비대칭적 차이를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더라도 끈덕지게 견뎌내야 한다고 역설한다. 사랑의 관계에서 역설했던 둘이란 바로 이 비대칭적 차이를 상징하는 것. 둘을 하나로 환원하려는 유혹을 견뎌 낼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사랑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윤리학』 (L'ethique에서 그가 주체란 충실성(fidelité)의 지지자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이는 결국 둘에 대한, 즉 비대칭적 차이에 대한 충실성을 말한다. Sartre의 죽음이 지식인의 죽음이었다면, Popper의 죽음은 철학자의 죽음이었다.
24 과학사의 이해
과학사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포퍼 vs. 쿤)
과학과 철학의 관계
과학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시선을 만드는, 따라서 기존의 시선을 폐기하는 혁명성을 가지고 있다. 반면 과학의 혁명성을 추동하는 기술은 유용성으로써의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하지만 과학은 인간의 유용성을 넘어서려는 초월성,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는 혁명성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혹은 그 가치를 증명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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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x(1818-1883)
Wittgenstein(1889-1951, 62세)
Martin Heidegger(1889-1976)
Karl popper(1902-1994)
Thomas Kuhn(1922-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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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신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창조하고, 따라서 새로운 진리를 발명한다.(Heidgger는 과학을 단순히 기술통치의 결과라고 주장. 그는 과학이 새로운 기술을 추동하는 것이지, 기술이 결코 과학을 추동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Heidegger는 과학이 가진 혁명성을 은폐하는데 일조한 셈이다.)
Socrates 이래로 철학은 과학을 비롯한 모든 앎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라고 이해되어 왔다. 이 점에서 현대 프랑스 철학자 Alain Badiou는 철학의 본령에 가장 충실한 학자였다고 볼 수 있을 것.
바디우는 진리의 工程들이 철학의 조건이라고 이야기한다. 이것은 결국 철학이 진리를 직접적으로 생산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진리란 무엇이 생산하는 것일까?
바디우에 따르면, 수학·시·정치 그리고 사랑이 진리를 생산하는 4가지 중요한 진리공정이라는 것. 바디우에 의하면 철학은 다양한 진리공정들이 각자의 자리를 잡고 서로 소통할 수 있는 통일된 개념적 공간을 마련하는 데 있다. 시, 정치, 사랑이라는 진리공정이 신세계를 우리에게 열어 주듯이, 수학으로 상징되는 과학도 우리에게 신세계를 열어주는 공정 중 하나라는 것.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 기존 철학이 두 가지 경향의 흐름으로 갈라설 수 있다는 점이다.
①하나의 흐름은 과학이 제공하는 신세계에 대한 불신입장(즉 Heidegger로 대표되는 철학적 입장)
②과학이 열어 놓은 신세계를 긍정하며 그것을 포괄하는 새로운 철학적 전망을 모색하는 철학적 입장- 이 입장에 서게 되면 철학자는 그 세계와 소통할 수 있도록 시, 정치, 사랑을 다시 숙고해야만 하는 지난한 과정에 빠지게 된다.
과학에는 역사가 있고 그만큼 철학에도 역사가 있다. 역사 속에는 세계를 거짓세계/진짜세계로 양분하려는 종교적이고 허위적인 이분법이 발을 들여놓을 수가 없다. 역사는 오직 낡은 세계와 신세계라는 역동적인 생성과 창조의 과정만이 숨을 쉬는 곳이다.
이 점에서 과학과 철학은 역사성, 따라서 역동성을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과학은(Badiou의 말처럼)혁명적인 진리공정이기 때문에 역사성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의 혁명적인 변화(역사성)는 어떤 논리에 의해 발생되는 것인가?
Karl Popper: “인간의 비판적 이성이 과학을 발전시킨다.”
과학의 역사를 보면, 인간은 자신이 이론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주장을 경험을 잣대로 비판하고 수정해 왔다. 이로부터 비판적 합리주의(Critical rationalism)가 형성되었다. 비판적 합리주의는 이성의 합리적인 추론만을 맹신하지 않고, 논리적 추론을 항상 경험에 비추어 점검하려는 포퍼의 의지를 반영하는 입장이다.
Popper는 인간의 이성을 낙관했던 철학자. 오직 비판적인 이성을 통해서만 과거의 과학이론과는 다른 새로운 과학 이론을 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이런 확신을 갖게 된 것은 Wien에서 Einstein의 강의를 직접 들었던 경험 때문일 것.
Newton의 고전물리학과는 전혀 다른 신물리학을 제안하면서 새로운 관찰과 경험을 유도했던 Einstein이야말로 그에게는 비판적 합리성의 전형으로 보였을 것. Einstein과 같은 비판적 지성을 통해서 과학은 새로운 이론을 만들면서 점진적으로 진보한다는 것 - 이것이 바로 Popper가 생각했던 과학의 발전이었다.
포퍼는 Wien 대학시절 인문학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Sigmund Freud의 정신분석학 혹은 Karl Marx의 역사철학에 강한 매력을 가졌다. 하지만 그는 과학적 태도로 Freud나 Marx의 주장을 이해하려고 했다.
프로이드 추종자가 인간의 의식적 행동은 무의식에 의해 결정된다던가, Marx 추종자가 인간의 행동은 경제적 동기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했다면 Popper는 아마도 일관된 과학논리로 맞섰을 것. 결과적으로 Popper의 그 같은 태도는 Freud나 Marx의 추종자들로부터 강한 반발을 샀다. 그들은 Popper가 기존의 보수적인 이론을 묵수하면서, 신이론의 형성과 발전을 방해한다고 간주했다. 이런 갈등이 Popper에겐 상처와 고독감을 줬다. 이 같은 상처, 고독은 Popper가 인문학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그만큼 결여했기 때문에 생긴 것. 인문학은 인간과 사회 그리고 역사를 미래적이고 보편적인 잣대로 해석하여 실천적인 전망을 낳으려는 학문이다.
Popper는 정신분석학이나 정치경제학을 유사과학(pseudo-science)이라고 공공연하게 비난하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게 된다. Freud나 Marx의 주장엔 반증가능성이 부재하기에 그들 이론이 비과학적이라고 맹비판. 하지만 Popper의 치우친 평가와는 달리, Freud나 Marx의 주장에도 역시 반증가능성이 충분히 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프로이드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Lacan(1901-1981. Freud에 대한 최초의 해석자)이나 Marx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Althusser(1918~1990. G.바슐라르의 가르침으로 Hegel연구)의 이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후에 popper가 『열린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에서 맑스 철학을 공격했던 것도 역시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반증가능성이 없는 철학이 어떤 사회를 지배하는 순간 인간의 비판이성은 숨을 쉴 수가 없으며 따라서 그런 사회는 닫힌 사회로 간다는 것. 모든 이론과 주장에 반증가능성을 허용할 수 있는 사회야말로 그가 원했던 열린사회였다.
Thomas Kuhn : “과학사는 단절적인 혁명의 과정이다.”
Popper에게서 과학적 지식은 그의 책 제목대로 이론적 추측(conjectures)과 논박(refutations)의 과정을 통해서 누적적으로 진보하는 것이었다. 그의 이런 생각은 소박하고 낙관적인 진보관을 반영하는 것. 그런데 1962년 popper의 진보과학관은 『과학혁명의 구조』(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라는 책이 출간되면서 큰 위기를 맞는다.
쿤은 이 책에서 포퍼의 생각과는 달리, 과학은 누적으로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인 단절을 겪는다고 주장. 쿤은 이런 혁명적인 단절과 변화를 paradigm이란 개념으로 설명하려 했다. paradigm이란 말은 pattern, model, 예 등을 의미하는 희랍어 paradeigma로부터 유래한 것. 그는 패러다임을 ‘어느 주어진 시대의 어느 성숙한 과학자 사회에 의해 수용된 문제풀이의 표본’이라고 정의했다.
정해진 paradigm에 따라 이루어지는 과학적 활동을 Kuhn은 정상과학, normal science라 불렀다. 사실 과학혁명은 이러한 정상과학이 붕괴되는 것을 의미한다. 쿤은 정상과학의 붕괴는 새로운 paradigm의 도래 때문에 발생한다고 보았다.
갈릴레오로부터 시작된 근대물리학, 아인슈타인 이후의 현대물리학은 각각 상이한 paradigm의 지배를 받는 상이한 정상과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철학적으로 살펴 볼 때 쿤의 paradigm 개념은 많은 부분 Wittgenstein적인 통찰에 의존하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Philosophical Investigations)에서 ‘우리에게는 다양한 언어활동들이 존재하며 그 활동마다 양립불가능하고, 통약(공통점) 불가능한 고유한 규칙이 함축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Kuhn은 ‘다양한 언어활동에는 환원 불가능한 고유한 규칙이 존재한다는 Wittgenstein적인 통찰을 과학활동과 역사에 적용했던 셈이다. 『과학혁명구조』에서 쿤이 규칙이란 단어를 빈번하게 사용했던 것은 비트겐슈타인에게서 유래.
쿤은 paradigm으로부터 paradigm으로의 이행은 강제될 수 없는 개종경험과 비슷하다고 보았다. 쿤의 paradigm 이론을 보면, Michel Foucault의 épistémē' 에피스테메 개념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말과 사물』(Les mots et Les choses)에서 푸코는 에피스테메를 한 문화의 어떤 시점에 하나만 존재하는 모든 지식의 가능성 조건이라고 정의하면서, 르네상스 시기(1500-1660년), 고전주의 시기(1660-1800년), 근대시기(1800-1950) 그리고 구조주의 시기(1950년대 이후)를 서로 통약 불가능한 시대로 구분했던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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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스테메 : platon철학에서 이데아에 대한 지식을 이르는 말. Aristotle철학에서 실천적 목적에 제약을 받지 아니하는 원리 및 원인에 대한 순수한 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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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과 푸코를 통해 우리는 20세기의 역사학적 상상력이 공유하는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역사를 연속적이고 누적적이라기보다 불연속적이고 단절적이라고 보려는 사유경향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따르고 있는 현재의 규칙들은 과연 어떤 것일까? 쿤과 푸코를 통해 역사학은 과거시대의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단순한 역할만으로는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현재의 우리 삶을 지배하는 내적인 규칙을 반성하기 위한 성찰을 자임하면서, 역사학은 비로소 인문학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결론
20세기는 투명한 이성 혹은 명료한 사유와 같은 이념이 좌절되었던 시기(라고 미래 세대는 기억할 것). 의식의 이면에 무의식이라는 암흑지대를 발견했던 Freud, 우리가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언어규칙을 해명했던 Wittgenstein, 우리의 의식 이면에는 신체적 세계가 있다는 것을 사유했던 Merleau-ponty, 고독한 주체도 text의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을 통해 투명한 의식의 신화를 해체했던 Derrida, 현실적인 주체 이면에 유동적인 욕망의 힘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던 Deleuze, 모든 시대에는 무의식적인 사유규칙으로서 에피스테메가 존재한다고 폭로한 Foucault.......이런 사유경향은 과학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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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can (1901-1981)
Deleuz(1925-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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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per는 과학의 역사를 인간의 투명한 이성, 혹은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사유의 전개과정이라고 이해한 순진한 철학자. Thomas Kuhn은 과학의 역사도 과학자가 의식하지 못한 일종의 사유규칙, 즉 패러다임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주장.
결국 현대철학의 흐름은 근본적으로 Renē Descartes의 Cagito라는 투명한 주체의 이념, 즉 자신의 생각으로 모든 세계의 확실성을 담보할 수 있다는 유아론적 이념에 대한 파산선고라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인간의 사유능력을 함부로 과소평가해선 안 될 것이다. 우리 사유의 불투명성을 발견한 것도 바로 우리의 사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에겐 다음과 같은 철학적인 과제가 남는다.
20C를 전후해서 발견한 인간의 불투명성을 수용하면서 우리는 소망스러운 미래의 모습을 열어 보이는 새로운 사유를 어떻게 창조할 수 있을까?
25 욕망이란?
욕망은 부정적인 것인가? (Lacan vs. Deleuze)
욕망이란 이름의 저주가 풀릴 때까지.
서양의 정신을 지배해 온 것 = 그리스 철학 전통/ 기독교 정신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양철학에서는 인간이 이성을 가진 동물이라고 규정되었다. 여기서 순수한 이성만을 가진 존재 -神, 이성과 동물성이 섞여 있는 존재 -人間, 순수하게 동물성만을 가진 존재 -動物에 대한 추론이 가능해졌다.
서양 사유의 전통에서 볼 때 인간은 神이 될 수도 있고, 동물로 전락할 수도 있는 분열적인 존재로 이해되었다. 인간이 동물적인 욕망에 사로잡히게 된 이유는 그가 가진 정신적 능력을 방기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사유 경향이 동양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불교에서는 탐욕을 극복대상으로 설정. 유학도 節欲, 寡欲을 강조.)
생산력이 저조할 때 인간이 공동생활 규범으로 채택할 수 있는 것은 금욕이나 절욕. 18, 19세기 이후 서양에서 비로소 욕망을 긍정적으로 응시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8세기 이후 산업자본주의의 급격한 발달로 말미암아 서양 사회는 폭발적인 생산력의 시대로 들어선다.
특히 20세기 후반 서양 사회가 Beaudrillard의 말처럼 소비사회로 본격적으로 진입하면서부터 욕망은 이제 인간의 가장 소중한 가치로까지 격상된다. (물론 이것은 인간의 욕망을 증폭시킴으로써 자신의 상품을 판매하려는 산업자본주의의 무의식적인 동기 때문에 가능했던 결과였다. 그래서 Beaudrillard의 다음 통찰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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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1856-1939)
라캉(1901-1881)
들뢰즈 (1925-1995)
보드리야르 (1929-2007)
데리다 (1930-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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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출, 향유, 무계산적인 구매 (사는 것은 지금, 지불은 나중에)라고 하는 주제가 절약, 노동, 유산이라는 기존의 친교육적인 주제들을 대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대체는 외관상으로만 인간의 혁명일 뿐이다. ……소비자의 그 욕구와 충족은 오늘날에는 다른 생산력(노동력 등)과 마찬가지로 강요되고 합리화된 생산력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소비의 사회』 La Sociétē de consommation)
철학적으로 볼 때 20세기 후반부터 공동체보다는 개인을, 이성보다는 감성을, 정신보다는 육체(몸)를, 동일성보다는 차이를, 정착민보다는 유목민을 강조하는 지적 경향이 보다 강하게 대두되었다. (兩次 大戰의 결과?)
흔히 이러한 일련의 경향을 postmodernism 혹은 해체주의(deconstructionism)라고 부른다. 이런 신 사유경향은 기존의 낡고 억압적인 사유를 극복하면서 개인의 자유, 해방을 도모하려 하였다. 이런 사상적 흐름은 인문학적으로 볼 때 바람직한 현상. 그래서 Derrida, Deleuz에 열광. 그러나 이 대목에서 Beaudrillard의 차가운 진단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산업자본은 다양한 광고 전략을 통해 하나의 개인마저도 다양한 소비주체로 분열시킨다. 엄마로서, 직장여성으로서, 동창회원으로서 친구들 앞에 과시키 위해 소비해야 할 때가 있다. 이처럼 어떤 개인이 상품들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서로 상이한 취향과 관심을 가질수록 산업자본은 통일된 한 개인의 경우에서보다 더 많은 잉여가치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보드리야르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산업자본이 개인적 욕망과 그 충족의 자유를 선전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가 결코 아니고, 오직 자기 자신의 생존을 위한 것이다. (이 얼마나 끔찍한 지적인가? 인간은 양차 대전 후, 아니 그 전부터 지금까지 모든 억압적인 中心을 공격해서 삶을 해방시키려고 했던 인간의 사상적 노력마저도, 자본주의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이토록 적절히 활용하고 있는 것일까?)
라캉 :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부정적으로 억압되어 왔던 욕망 개념을 사유하는데 있어서 첫 번째 통로는 Freud의 정신분석학이다. Freud는 투명하고 이성적이라고 이해해온 인간정신의 이면에 무의식으로 요약되는 욕망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렇다면 순수이성과 정신을 추구했던 과거의 동서양 사유 전통은 뭔가? 꿈일 수밖에 없단 말인가?)
정신분석학이 어떻게 욕망을 사유했는지를 이해키 위해서는 Lacan의 정신분석학 통찰을, Lacan의 정신분석학을 알기 위해서는 Alexandre Kojeve(1902-1968)의 욕망이론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 코제브(의 욕망이론).
코제브는 인간의 욕망을 타자에 대한 것과 대상에 대한 것으로 나누어 설명. 그는 인간의 욕망이 기본적으로 타자의 욕망일 때에만 인간적일 수 있다고 주장. 모든 욕망에는 타자의 욕망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 ― 이것이 바로 코제브의 욕망이론.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것이 코제브의 주제).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랑하는 타자의 육체를 통한 성적만족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 타자로부터 자신이 사랑받으려는 데 있다는 것.) ― 그래서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것. 코제브는 또 자연적 대상에 대한 욕망도 분석하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대부분 사람들은 돈, 권력, 미모, 명예 따위를 욕망한다는 것. 그 이유는 타자들이 그것들을 욕망하기 때문이라는 것.
“세상에 태어날 때 주체는 타자로부터 욕망되는 자로서건, 아니면 욕망되지 않는 자로서건 간에 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한다.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 정신분석의 방법을 고안함으로써 Freud가 밝힌 진리의 본성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에크릿』Ecrits (저서라는 뜻)>
Freud나 Lacan의 정신분석학은 한 가지 전제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미숙아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것.
Africa의 초식동물은 태어난 지 1~2시간 안에 태어난 곳을 벗어나지 않으면 피 냄새 맡고 달려온 육식동물의 먹잇감 된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걸어야만 한다. 그러나 인간은 1년 아니 훨씬 더 지나야 독립적 생존이 가능하다. 다시 말해 인간은 매우 결핍된 존재이다. 이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서 타자로부터 지속적인 사랑을 받아야 한다는 점은 단순한 선택사항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적 조건임을 알 수 있다.
갓난아이에게 최초의 타자는 어머니다. 갓난아이는 타자로부터 지속적인 사랑을 받기 위해 타자가 자신에게서 욕망하는 것을 행하려고 한다. 어른이 되고 나서 인간은 자신이 타자가 욕망했던 것을 욕망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쉽게 망각한다.
그러나 자신의 김치찌개 선호와 스파게티 선호는 사실 어머니의 욕망을 반복하는 것일 뿐. 그런데 어느 날 어머니의 욕망을 수용하느라 억압되었던 자신의 욕망이 분출되는 경우가 발생할 수도 있다. 부모 자식 간의 대립, 갈등은 이런 점에서 보면 매우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욕망은 어머니의 것이지 나의 것은 아니다. 언젠가 우리는 진정한 주체로서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Lacan은 “자신이 욕망하는 것이 진실로 자신이 소망하는 것인지 혹은 소망하지 않는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주체는 다시 태어날 수 있어야만 한다.”고 말했다.
Deleuze: “욕망은 결여가 아닌 그 자체로서 생산적인 것이다.”
들뢰즈의 아장스망 (異接的인 것들이 連接的으로 연결되어(생성)―새로운 배치(아장스망. agencement)를 이루어 내는 것.
욕망에 관한 Lacan의 입장은 2중적(공헌)
① 욕망이 인간 삶과 사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을 밝혔다. 이 점에서 욕망을 금기시해왔던 서양 전통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있다.
② 하지만 그는 인간 욕망을 결여/결핍으로부터 설명하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그의 욕망 개념에는 결여와 결핍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여전히 남아있다.
Deleuz는 욕망의 중요성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Lacan의 욕망 개념에 남아 있는 부정적 이미지를 극복하려고 했다. Deleuz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성 개념과 관련된 들뢰즈의 존재론을 알아야 한다. 우선 생성이란 개념은 창조라는 개념과 구별해야 한다. 기독교 우주론이 시사하는 것처럼 창조는 무에서 유가 발생하는 것. 그러나 Deleuz의 생성은 유에서 유가 발생하는 것.
『과정과 실재』 (Process and Reality)에서 Alfred North Whitehead(1861-1941)는 ‘이접적 다양성’disjunctive diversity이 ‘연접적’conjunctively으로 결합되는 것이 창조성이라고 했다.(*Alfred North Whitehead: 생성의 역동적 과정을 중시. 모든 존재자들이 合生 (concrescence)에 의해 출현한다고 생각. 함께(con) 자라남(crescence)를 의미하는 합tod은 이접적으로 존재하는 다원적 요소들이 연접적으로 결합, 새로운 계기가 출현하는 메커니즘이다. Deleuz는 자신의 연결(connection)개념이 Whitehead의 합생과 같다는 사실을 발견.)
들뢰즈에게서 생성은 이접적인 것들이 연접적으로 연결되어 새로운 배치, 즉 아장스망(agencement)을 구성하는 것으로 사유하고 있다. “아장스망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양한 이질적인 합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나이 차이, 성별 차이, 신분 차이, 즉 차이 나는 본성들을 가로 질러서 그것들 사이에 연결이나 관계를 구성하는 다중체(multiplicité)이다. 따라서 아장스망은 함께 작동하는 단위이다. 그것은 공생이며 공감이다.” (『대화』 .Dialogues)
들뢰즈에 있어서 우리의 욕망은 새로운 타자와 마주쳐서 그것과 연결하려는 긍정적인 힘, 다시 말해 새로운 연결 관계를 만들려는 생산적인 힘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결론
Lacan → 결여가 욕망을 낳는다. 결여만 충족되면 욕망은 발생할 이유가 없게 된다.
Deleuze → 욕망은 결여가 아니라 충만으로 사유된다. 욕망은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역량, 혹은(외부의)타자와 접촉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모습을 창조하려는 근본적인 동력으로 간주되었기 때문. (그의 정신적인 mentor 스피노자와 니체가 생각나는 대목이다.)
스피노자가 인간의 본질을 원천적인 욕망 conatus로 정의했다면, 니체도 힘에의 의지가 인간의 본질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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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malaya는 말은 눈을 뜻하는 him과 저장을 뜻하는 alaya(알라야)가 결합된 것. 그래서 한자문화권에서는 雪藏山이라고 한다.
해탈은 구성된 주체에서 또 다른 구성하는 주체로의 이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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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leuze는 주체는 접촉과 연결을 지향하는 욕망이 방해될 때 생기는 것이기 때문에 주체를 탄생시키는 것은 욕망의 좌절이라고까지 했다. 그러니까 들뢰즈에게 주체란 태생적으로 부정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들뢰즈 = 주체를 탄생시키는 것은 욕망의 좌절
바타유(Georges Bataile) = 금기를 통해 욕망의 주체가 탄생한다.
Althusser = 호명을 통해 주체가 구성된다.
Foucault = 훈육을 통해서 사회적 주체가 구성된다.
Deleuze에게 있어서 주체란 둥그런 용기를 빼앗긴 둥근 얼음과도 같다. 얼음은 자신이 만들어졌던 둥근 용기를 동경한다. 둥근 용기에 담길 때에만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욕망은 둥근 용기에서 얼기 이전의 유동적인 물과 같다. 마주치는 용기가 무엇이든, 물은 용기의 모양을 따라 달라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코 자신의 유동성을 상실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런 유동적이고 생산적인 욕망을 회복하는 것 - 이것이 들뢰즈가 우리에게 요청했던 것이다.
26 소리의 세계
소리의 세계에는 어떤 논리가 숨겨져 있는가? (Derrida vs. Deleuze)
唯識불교로부터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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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의 해탈이란 하나의 구성된 주체에서 또 다른 구성하는 주체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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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불교는 인간의 의식을 8층위로 해부.
(Vasubandhu의 유명한 八識(Asta Vijnāna)이론. 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촉감).
뜻의 의식(mano-vijnāna. 다섯 가지 감각의식이나 언어 혹은 개념을 대상으로 하는 뜻의 의식),
마니스 의식(manas. 뜻의 의식을 벗기고 나면 나라고 하는 자의식이 나타난다.)
알라야 識(alaya vijnāna-일종의 기억의식. alaya가 저장을 의미하고 vijnāna는 의식을 의미) - Freud 관점으로
보면 무의식을 칭한다.
결론적으로 5가지 감각의 panorama에서 보이는 세계로 가면 갈수록 상대적으로 객관적인 세계가,
반대로 감촉의 세계로 가면 갈수록 주관적인 세계가 열린다고 보았다.
서양철학이 보이는 것(눈의 세계)과 들리는 것, 즉 눈과 귀라는 감각(외부세계-객관적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을
때 唯識불교가 후각, 미각, 촉각(주관적 세계)의 중요성을 사유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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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rida (1930-2004) - 순수한 소리 세계 부정
Deleuze (1925-1995) - 소리의 혁명성 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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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에서는 유독 보이는 세계에 대한 논의에 가장 집중해왔는데, 이 점은 Idea를 강조한 Platon의 경우에서부터
드러난 전형적인 현상이었다.
그러나 보이는 객관적 세계에 주목하면 들리는, 냄새나는, 감촉의 세계는 사유하기 힘들 것.
다행히 Descartes 이후 서양철학은 들리는 세계에 주목하기 시작.
cogito가 자기반성이든 아니면 내면에 울려 퍼지는 양심의 소리든 간에 서양의 근대철학은 내면적 소리의 세계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점에서 현대 프랑스철학이 서양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이 보다 분명해진다.
현대 프랑스 철학에 이르러 드디어 보이는 세계를 넘어서 들리는 세계마저도 비판적으로 성찰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Jacques Derrida(1930-2004)와 Gilles Deleuze(1925-1995)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두 사람은 모두 음성이나 소리의 세계를 진지하게 성찰했던 인물인데 흥미로운 점은 소리의 세계에 대한 두 사람의
성찰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Derrida가 순수한 소리의 세계를 부정한 반면 Deleuze는 소리의 세계가 가진 혁명성을 긍정하려 했다.
데리다 : “순수한 음성의 세계는 불가능하다.”
데리다는 Platon이래 서양철학이 이성중심주의(logocentrism)로 전개되었다고 평가.
데리다에게는 이성중심주의 = 음성중심주의(phonocentrism)를 의미.
고대 Greece에서 Logos라는 개념은 법칙이라는 의미 外에 말, 언어라는 뜻도 가지고 있었다.
이성중심주의가 음성중심주의임을 금방 유추가능.
『그림엽서』(la carte postale)에서 데리다는 Freud와 Lacan의 정신분석학을 논평하면서 정신분석학이 자유연상
이나 최면기법으로 발화되는 피분석자의 생생한 말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신분석학은 피분석자의 생생한 말과 피분석자의 반복되는 말을 구분하면서 후자의 말을 폄하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하지만 생생한 말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우선 녹음된 말이나 반복되는 말 자체가 먼저 논의자 편에 있어야 하지 않
을까 하고 데리다는 생각.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학이 함축하는 음성중심주의를 해체하는 데리다의 한 가지 방법이었다.
데리다가 음성중심주의를 비판한 이유는 순수한 의식주체를 해체하기 위해서였다.
『목소리와 현상』(La voix et le phénomenē)에서 데리다는 “의식이란 자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의식주체란 자신의 독백을 듣는 고독한 주체라는 것이다.
데리다는 바로 이런 고독한 의식주체의 순수성을 해체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이것이 음성주의를 해체함으로써 가능하다고 보았다.
나는 그걸 원치 않아, 나는 꼭 살아남아야 돼와 같은 다양한 내면적 독백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음성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나는 살아 있어 라고 누군가가 말했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무슨 일 있었어? 지금은 괜찮아 라고 되물을 것.
삶과 죽음이 동일한 맥락에서 동시에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음에 대해, 혹은 삶에 대해 발언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데리다에 의하면 삶과 죽음, 남성과 여성, 밤과 낮, 아래와 위, 안과 바깥등이 대립하면서 서로 의존하고 있는 차이의
세계가 우리의 의식이나 현재적 발언까지 지배하고 있다.
사실 음성만으로 우리가 모든 내용을 순수하게 파악할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음성으로 발화되는 언어는 자신을 넘어서는 무엇인가와 깊이 연루되어 있다고 (데리다는)본 것이다.
그는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il n‘y a pas de hors-texte)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 있다.
아무리 순수해 보이는 음성언어 혹은 순수의식도 결국 차이의 세계, 즉 일정한 텍스트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차이의 세계를 떠날 수가 없다.
들뢰즈 : “청각은 시각을 전복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데리다는 음성으로 발화된 소리가 가진 의미의 내적논리를 知的으로 해명하는 작업에만 몰두했던 것.
이 점에서 그는 소리만이 가진 고유한 세계를 경시했던 platon 철학의 전통을 다른 면에서 그대로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그의 text나 Lacan의 상징적인 것 역시 여러 면에서 볼 때 들리는 세계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성이나 소리의 세계에는 데리다의 비판과 달리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또 다른 층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는 들리는 세계를 보이는 세계로 환원시키지 않고 들리는 세계 그 자체를 긍정하는 것이 필요할 텐데 바로 이런
작업을 진지하게 수행했던 사람이 들뢰즈다.
그는 『천개의 고원』(mile plateaux)에서 “음은 탈영토화(déterritorialisation) 될수록 그 만큼 더 정련되고 특수성을
획득해 자율적인 것이 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반대로 색체는 사물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점점 더 영토성에 밀착되어 간다.
즉 색체는 탈영토화 될수록 용해되고, 다른 정보들에 의해 인도되는 경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탈영토화는 고정된 지역을 벗어난다는 의미로서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창조하기 위해 기존의 가치와 의미를 떠나는
운동을 나타내는 개념.
『차이와 반복』(Differénce et Répétition)에서 (들뢰즈는) 잠재성(virtualité)과 현실성(actualité)이 실재성(réalité)
의 두 가지 측면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주어진 어떤 현실적인 대상도 현실적으로 주어진 모습(현실성) 이외에 앞으로
다르게 생성될 수 있는 잠재적인 성격(잠재성)도 아울러 갖고 있다는 것.
그래서 새로운 모습으로 생성되기 위해서는 잠재성의 층위로의 운동이 우선 불가피하다.
이때 탈영토화라는 것은 현실성을 떠나서 잠재성의 층위로 복귀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 즐겨 사용했던 은유에 의하면 ‘정주민적인’(sédentaire) 삶이 현실성을 상징한다면, ‘유목민적인’(nomadique)
삶은 잠재성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들뢰즈가 색채와 음을 탈영토화라는 개념으로 구별했던 이유= 그림 속 다양한 색채들- 빨강, 파랑, 노랑 등 - 은 마치
(정주)민처럼 canvas 위에 분배되어 있다. 이런 색깔들은 자신이 속한 위치에서 탈영토화 되려는 순간 서로 용해되어
버리고 만다.
하지만 소리는 어떤가? 가사를 가진 대중음악을 가사를 갖지 않은 음악으로, 나아가 그것을 다시 더 추상적인 음악으로
탈영토화 시켜보도록 하자. 이 경우 더 세련되고 자율적인 것으로 들리는 음악, 혹은 순수한 추상음악을 얻게 될 것이다.
들뢰즈는 색채와 음을 통해 보이는 세계와 들리는 세계를 질적으로 구분코자 했다.
보이는 세계가 현실성이 지배하는 세계라면(그림세계 -정주적 세계), 들리는 세계는 그보다는 잠재성이 지배하는 세계
(음악적인 세계-유목민적 삶)라고 본 것.
그래서 탈영토화가 진행되면 색체의 세계는 용해되어 버리지만 음의 세계는 자율성을 갖게 된다고 보았다.
탈영토화를 통해 얻어진 자율적인 음은 듣는 사람에 따라 상이한 정서적 감동을 줄 수 있는 잠재성을 갖는다.
이런 추론 끝에 Deleuze는 보이는 세계보다는 들리는 세계가 더 우리의 정서를 자극하게 된다고 주장.
정서란 지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잠재성의 층위에 보다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들뢰즈에 의해 우리는 바수반두의 통찰에 근접할 수 있는 시각을 재확인(시각중심주의→청각중심주의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삶이 향기, 맛, 감촉의 역량으로부터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받고 있는지 아직도 제대로 해명하지
못했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바수반두가 말했던 것처럼, 이 모든 감각들이 마치 침전물처럼 가라앉아서 형성된 기억의식이나
심층적인 정서와 행동의 문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Deleuze 철학뿐만이 아니라 뇌 및 신경과 관련된 최신 과학, 정신분석학 그리고 유식
불교 등 모든 지혜를 모두 집결시켜야 한다.
“음은 우리 내면으로 침투하고, 우리들을 몰아내고, 질질 끌고 가고, 가로 지른다. 음은 대지를 떠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가 검은 구멍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우리를 우주로 향해 열어 주는 경우도 있다.
색깔로는 대중을 움직일 수 없다. 국기는 트럼펫 연주가 없으면 무력해지며, Laser 광선 역시 음에 맞추어 조절되어
야만 한다.” (『천개의 고원』).
화려한 레이저 쇼도 음악이 없으면 공허한 불빛. 공포영화도 음악이 없으면 no good.
스크린은 멀리 있지만 비명소리는 곧 바로 들린다.
색깔 - 시각적 자극 - 은 우리 실존의 표면만 건드리고 지나갈 뿐이다. 불쾌하면 눈을 감으면 된다.
결론
Vasubandhu는 시각보다는 청각이, 청각보다는 후각이, 후각보다는 미각이, 미각보다는 촉각이, 촉각보다는 의식이,
의식보다는 자의식이, 자의식보다는 기억이 우리 실존의 중핵을 이루고 있다고 지적.
이와 관련해보면 Derrida는 자의식의 세계를 해체하려고 했던 사람.
그에게 자의식은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기능과 같은 것이었다.
너무나도 내밀하고 사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는 자의식이 순수하게 나만의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그런데 Derrida는 이런 내면의 소리의 세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층위에서의 기억의식이라고
지적.
(사실 이것은 Freud이래 정신분석학에서 반복해서 얘기했던 것.
우리의 상상적인 의식은 상징적인 체계로부터 지배받는다는 것이 Lacan의 핵심적인 테마이기도 했다.)
데리다는 직접적인 내면의 소리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자의식이라는 착각을 음성중심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체하
면서 text의 우선성을 강조하게 된다.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세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분절할 수 있는 방법, 즉 text를 내면화하는 방법을 익힌다.
Derrida가 “우리는 text 밖으로 나갈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 대목에서 소리의 세계가 가진 중요성을 성급하게 비판했다는 반론이 제기되는데, 그 비판의 주인공이 바로
Deleuz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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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subandhu의 의식세계 그리고
Derrida(text) 와 Deleuze(영토화/색과 음/좌와 우)의 세계관 (-논문/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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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소리의 세계, 즉 청각의 세계를 형태의 세계, 즉 시각의 세계와 상호 대조함으로써 소리의 세계가 가진
고유성, 혹은 세계가 실존을 뒤흔드는 강력한 힘을 발견(혁명성)한다.
그렇다고 해서 들뢰즈가 자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의식을 다시 긍정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가 강조하려고 했던 것은 외부로부터 들려오는 소리, 즉 인간의 정서를 여지없이 동요시키는 강력함을
가진 소리의 혁명이었다.
파시즘이 소리의 세계를 조작함으로써 개체들을 자발적 복종의 상태로 만들었듯이, 해방적 전략도 개체들의 자기
긍정을 위해서 소리를 창조적으로 생성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이다.
들뢰즈의 논의는 우리 실존이 가진 감응능력을 이해하는 한 가지 실마리를 제공한다.
그가 소리 세계가 가진 고유성을 해명했던 것처럼, 우리는 냄새의 세계, 맛의 세계, 그리고 나아가 촉감의 세계에
대해 보다 깊이 사유해야 한다.
이것을 게을리 하면 국가 혹은 자본이 먼저 우리의 일상적 감각세계들을 점령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