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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새봄학기 특강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말씀/눅10:1-20
요절/눅10:2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
오늘 말씀에는 세상의 영혼들을 구원하길 원하시는 예수님의 간절하고도 절박한 심정이 잘 담겨 있습니다. 그런 심정으로 70명의 제자들을 전도여행 보내십니다. 이들을 향한 주님의 비전은 무엇이었을까요? 지금 이 시간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마음과 비전은 또한 무엇일까요? 우리는 세상 영혼들을 어떤 마음과 자세로 섬겨야 할까요?
예수님은 칠십 명의 제자들을 전도여행 보내십니다. 칠십은 완전수로 유대인들에게 있어 세상 모든 민족과 나라들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칠십 명을 세우셔서 전도여행 보내신 것은 세상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비전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따로 세우시고 둘씩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십니다. 아마도 혼자 가는 것보다는 둘이 가는 것이 사역하는데 서로 의지도 하고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전도여행을 내보내면서까지 제자훈련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일까요? 복음 전파가 그만큼 시급했기 때문입니다. 또 더 많은 일꾼들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 추수할 것은 많고 일꾼이 적기 때문에 예수님은 더 많은 일꾼들을 밭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이 시급히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이때만 그러신 것이 아닙니다. 승천하시기 전에도, 지상명령을 주시고 열두 제자들과 그들을 통해 제자가 된 사람들을 통해 계속해서 이 추수하는 사역을 하도록 하십니다. 여기서 추수할 것은 구원받아야 할 영혼들, 복음이 필요한 인생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죄 가운데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서는 구원자를 간절히 갈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고 그들에게 시급히 천국 복음이 전파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일을 열두 제자들에게, 또 70명의 제자들에게, 또 그들의 제자들에게, 더 나아가 우리에게도 맡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추수하는 일꾼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첫째,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2b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 예수님이 추수하는 일꾼들에게 가장 먼저 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더 많은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골 농사일에서 보면, 일꾼을 섭외해서 보내는 것은 주인이 할 일입니다. 그런데 일꾼이 왜 다른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해야 할까요? 곡식 추수하는 현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인이 일꾼들을 밭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일꾼들이 나가보니 자신들이 감당하기에는 추수할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러면 일꾼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스로 일꾼들을 찾아다닐 수는 없습니다. 자신들이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주인에게 일꾼들을 더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추수하는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밭의 상황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일꾼들을 보내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왜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일까요? 기도해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모르고 계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일꾼이 된 나를 통해 이루어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추수하는 주인과 추수하는 일꾼들의 마음이 일치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꾼들의 마음이 영혼들에 대한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 안타까운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으로부터 전도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통로가 바로 기도입니다. 내가 추수하는 게 힘들어 더 많은 일꾼을 보내달라기보다는, 이 기도를 통해 나의 심정이 추수하고자하는 마음으로 뜨거워지도록,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추수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나와 우리 교회 동역자들을 통해 영혼들이 추수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고 뜻입니다.
누구든 어느 곳에서든 주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추수하는 일꾼입니다. 가정에도 복음을 전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나의 직장에도, 내가 다니는 학교에도 추수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내가 속한 사회 공동체, 내가 속한 나라에 추수할 일꾼들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계속해서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마다, 또 동역자들과 만나 모임하고 기도할 때마다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겠습니다. 또한 내가 추수할 일꾼으로서의 사명감에 불타올라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추수를 위해 가야 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예수님은 가만히 있으면서 일꾼을 보내달라고 기도만 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기도하라고도 하셨지만 “갈지어다”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기도는 매우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지만, 기도가 복음을 들고 가는 것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일꾼들이 필요한 곳에 내가 가야 합니다. 아직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죄의 길을 걸으며 심판과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그들에게, 어둠 속에 방황하는 자들에게 가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것을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이라고 표현하십니다. 전도자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위험하니까 가지 말아야 합니까? 만약 여러분이 구조대원이라면 위험이 있다고 해서 재난 현장에 안 갈 것입니까? 위험을 알면서도 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만큼이나 절박감을 가지고, 복음 전파의 시급함을 느끼며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요즘 기도하면서 진주UBF에도 목자들이 세워져야 할 텐데, 그래야 진주 캠퍼스 복음 역사가 끊기지 않고 계속 이루어질 텐데 하는 생각들이 계속 들었습니다. 안주하며 그저 그렇게 지내다 시간만 흘려보낼 것이 아니라, 캠퍼스 역사가 나 때로만 끝나고 문 닫을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캠퍼스 복음 역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영혼들에 대한 안타까움, 제자양성에 대한 절박함, 복음 전파의 시급함을 제가, 우리 모두가 회복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해야 할 세상은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어렵고 힘듭니다. 생각만큼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저 받아들이지 않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대적하기도 합니다. 실제 사도들은 후에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연약한 양과 같은 제자들을 험한 세상에 내보내셔서 강하게 제자훈련하십니다. 예수님은 어리다고 언제까지나 품에 품고만 있지는 않습니다. 거친 세상에서 세찬 비바람을 맞으면서 복음을 전하도록 하십니다. 진주에 있는 캠퍼스는 그렇지 않지만, 수도권이나 광주권 대학들은 캠퍼스에서 복음을 전하다보면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캠퍼스 폴리스들이나 학교 당국에서 쫓아낸다고 합니다. 또 이단들로 극성입니다. 복음을 전해도 거칠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상한 사람 취급하며 경계심을 갖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런 환경과 씨름하면서 강하고 담대한 복음의 투사들로 우리들을 키워가십니다. 완벽하게 준비된 사람들만 파송받고 전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숙한 사람들만, 목자들만 복음을 전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일지라도 어느 누구라도 복음을 영접한 자이면 세상에 내보내십니다. 거친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다 보면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복음 들고 나아가는 자에게 우리 주님이 능 동행하시며 능력을 더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리 가운데서 어린 양이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아무리 힘이 세거나 사나워도 이리를 이길 수 있는 어린 양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무작정 제자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린 양이 이리 가운데서 살아남는 방법은 목자와 함께 있으면 됩니다. 목자의 보호를 받으면 됩니다. 양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얼마나 머리가 단단하고 얼마나 빨리 달릴 수 있고 얼마나 이가 튼튼하냐가 아닙니다. 자기들끼리야 그것이 의미가 있겠지만 포식자들 가운데 있을 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목자의 보호를 받고 그 목자를 믿고 목자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셋째, 제자들은 전도여행하면서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전대나 배낭이나 신발을 가지지 말며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며” 전대나 배낭은 여러 물건을 휴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전도여행 중 앞으로 먹을 것, 여벌의 옷 등을 여기에 넣어 다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럼 어떻게 필요를 채울 수 있을까요? 길에서 만나게 된 지인에게 구해야 할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길에서 아무에게도 문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먹고 자고 하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5).” 또 말씀하십니다.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7).” 일꾼들의 필요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믿는 자들, 복음의 일꾼들을 영접하는 자들을 통해 채워질 것입니다. 이는 반드시 복음의 일꾼들을 영접해주고 섬겨주는 사람들이 있음을 전제하는 소망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복음의 일꾼들은 하나님이 섬길 자들을 붙여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해 본질적인 사역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복음의 일꾼들이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기보다 그것들은 도울 자들을 붙여주셔서 채워주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본질적인 사역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일꾼들의 본질적인 사역이 무엇입니까? 복음 전파입니다. 제자 양성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집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의 일꾼들은 도움의 손길에게, 나를 섬겨주는 자들에게 더 요구하거나 더 나은 대우를 받으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집에 거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만족하고 먹고 마시면 됩니다. 더 좋은 음식, 더 좋은 집, 더 나은 대접, 더 부자인 사람들을 찾아다녀서는 안 됩니다. 만약 전도자들이 그렇게 하면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의 진정성이 약화될 것입니다. 복음 팔아 자신들의 배를 채우려는 양아치들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은 신뢰할만한 분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말뿐만 아니라 삶과 행동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라면 그에 걸맞는 삶,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 준비 없이 다니라는 말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라는 것이고, 그것이 삶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넷째, 복음의 일꾼들은 복음을 힘써 전해야 합니다. 전도자의 책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가까이 왔다” 이것이 제자들이 가서 모든 이들에게 전해야 할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한 반응은 각각 다를 것입니다. 영접하는 사람도 있고 영접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영접하는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전도자는 영접하는 사람과 함께 먹고 교제해야 합니다. 또 병자들을 고쳐야 합니다. 교제와 치유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에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고 치유가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접하지 않는 사람은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전도자는 영접하지 않는 사람을 향해 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려야 합니다. 이것은 장차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맛보기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이 미워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거절하는 것이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님을 알게 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의 말을 영접하면 예수님의 말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저버리는 자들은 예수님을 저버리는 것이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저버리는 행위입니다. 제자들이 전하는 예수님과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향락에만 빠져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추수할 일꾼들이 해야 할 일과 자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같은 추수할 일꾼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자세는 어떠합니까? 많은 사람들이 옛날에 비해 양들을 얻는 것이 힘들다고들 합니다. 캠퍼스와 이 사회의 현실이 복음 수용성이 현저히 떨어져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추수할 것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또 우리 교회처럼 몇 명 안 되는 동역자들 가지고는 추수할 일꾼이 적어 안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추수할 것도 없는 것 같고, 일꾼들도 적고! 추수하는 것 자체도 힘들고!”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심정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고,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달라고, 내가 그 추수할 일꾼으로 쓰임 받게 해달라고, 그런 심정과 열정을 더하여 주시라고 기도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갈지어다’ 추수할 현장으로 나아가야겠습니다.
또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양들을 얻고 제자양성하는 것이 어렵다는 결과를 생각하고 전도할지 말지를 정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우리에게 추수하라고 보내시는 주인은 결과까지 우리에게 책임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복음 전파에 대한 반응은 전하는 자의 몫이 아니라 듣는 자의 몫이요, 듣는 자의 책임입니다. 추수하는 주인은 위에서 언급한 예수님의 명령에 우리가 얼마나 충실하게 순종했느냐 여부로 우리의 책임을 물으실 것입니다. 전도 밭에 쭉정이들이 많다면 추수할 알곡들이 적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의 방해와 로마의 핍박 등 시대 상황은 추수하기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알곡도 별로 없어 보였습니다. 쭉정이들만 가득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과 주님의 제자들이 추수하는 일꾼들로 쓰임 받았을 때 지금 보면 전 세계에 예수님 믿는 신자들이 많게 되었습니다. 벼 이삭도 추수할 때가 지나게 되면 꼬꾸라져 땅에 맞다아 썩게 됩니다. 또 추수할 때가 지나면 공중 나는 새들의 모이 밥이 되고 맙니다. 다만 우리가 추수해야 할 절박감과 시급함을 가지고 추수에 적극 동참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주님은 전도해서 몇 명의 일대일 양을 얻었느냐, 몇 명을 제자로 세웠느냐 묻지 않으실 것입니다. “너는 영혼의 추수를 위해 얼마나 기도했느냐? 냉대를 무릅쓰고 세상 속으로 들어갔느냐? 하나님만 의지했느냐?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했느냐?” 이렇게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의 답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이 맡기신 추수할 일꾼으로서의 책무에 충실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럴 때 주님은 우리에게 양들을 섬기는 기쁨을 주시고 우리의 면류관 삼을 제자양성의 열매도 풍성하게 주실 줄 믿습니다.
칠십 명의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마치고 기뻐하며 돌아옵니다. 그들이 흥분 가운데 말합니다. “주님, 주의 이름이면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사탄이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떨어지는 것을 내가 보았노라.” 귀신들은 사탄의 앞잡이, 똘마니들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사탄에게, 여자의 후손이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마귀의 몰락의 시작이라면, 십자가는 마귀의 멸망의 확증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2장 14절은 말씀합니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예수님 때문에 마귀가 몰락하고 멸망하게 됩니다. 성경의 마귀나 사탄은 같은 의미입니다. 사탄의 똘마니인 귀신들은 예수님의 이름 권세를 가진 제자들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 마귀가 몰락하여 하늘로부터 번개같이 우수수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9절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 뱀, 전갈의 공통점은 독이 있고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동물입니다. 영적으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악의 세력, 사탄 마귀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원수를 제어할 권능을 주셨다고 말하고 너희를 해칠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 제자들이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들은 승리를 경험했고 예수님의 격려와 칭찬이 큰 기쁨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실이 기쁨이 되고 격려가 되지만 그보다 더 기쁜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귀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굴복할 때 기뻐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것 또한 기쁜 일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기쁜 것은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이라고 하십니다. 어떠한 성과, 어떠한 결과, 우리에게 나타난 은사들이 기쁜 일이긴 하지만, 그것에만 매몰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어 그분과 동행하고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악한 자의 공격에 대해 기도할 때 이길 능력이 주어지고, 손을 얹고 기도할 때 질병이 즉시 낫거나, 기도할 때 필요한 물질이 기적적으로 공급된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러나 사실,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이 직접적인 기쁨으로 느껴집니까?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과 동행하며 영생을 누리게 된 본질적인 기쁨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진정한 기쁨이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진정한 기쁨은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과 함께하며 영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또 지금 하나님께 은혜로 쓰임 받고 있다는 이 사실이 우리에겐 크나큰 기쁨입니다.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누리게 하시고 은혜로 우리를 복음의 일꾼 삼아주신 예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는 것이 우리에겐 큰 기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에 대해 인격적이고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 우리의 큰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아들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깊이 느끼고 경험하는 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 안에서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기도하며 영혼들을 향한 하늘 아버지의 마음을 깊이 헤아리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성과나 결과에 매몰되어 기쁨을 잃어버리기보다 다만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알아 절박감과 시급함을 느끼며 복음 전도자의 책무를 힘써 감당하는 우리 교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