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을 위한 채식주의가 아니라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과 개를 죽인 트라우마로 고기를 먹지 못하고 남을 해치지 않는 꽃이나 나무를 동경하며 정신병원에 보내지는 영혜의 아픔이.....
1부 채식주의자는 영혜 남편의 관점에서, 2부 몽고반점은 영혜 형부의 관점에서, 3부 나무 불꽃은 영혜 언니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채식주의자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사회적 폭력 등 수많은 폭력을 이야기하지만, 영혜에 게 가장 강력한 폭력은 어릴 때 아버지로부터 폭력이 아니었을까?
아버지가 영혜에게 했던 폭력들을 확인해 본다.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아니야, 내가 면목이 없네. 가부장적인 장인은 지난 오년간 들어본 적 없는 사과조의 말로 나를 놀라게 했다.
배려의 말 따위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월남전에 참전해 무공훈장까지 받은 것을 큰 자랑으로 여기는 그는 목소리가 무척 크고, 그 목소리만큼 대가 센 사람이었다.
내가 월남에서 베트콩 일곱을.... 하고 시작되는 레퍼토리를 사위인 나도 두어번 들은 적이 있었다.
먹어라. 애비 말 듣고 먹어.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다.
아버지,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순간, 장인의 억센 손바닥이 허공을 갈랐다. 아내가 뺨을 감싸쥐었다. 아버지!!
정서방, 영호 둘이 이쪽으로 와라! 두 사람이 영혜 팔을 잡아라. 예?
한번만 먹기 시작하면 다시 먹을 거다. 세상천지에, 요즘 고기 안 먹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
마침내 다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장인이 한번 더 아내의 뺨을 때렸다.
아버지! 처형이 달려들어 장인의 허리를 안았으나, 아내의 입이 벌어진 순간 장인은 탕수육을 쑤셔넣었다.
처남이 그 서슬에 팔의 힘을 빼자, 으르렁거리며 아내가 탕수육을 뱉어냈다. 짐승 같은 비명이 그녀의 입에서 터졌다.
...... 비켜!
아내는 몸을 웅크려 현관 쪽으로 달라가는가 싶더니 뒤돌아서서 교자상에 놓여 있던 과도를 집어들었다.
아내의 손목에서 분수처럼 피가 솟구쳤다. 흰 접시 위로 붉은 피가 비처럼 쏟아졌다.
동서는 특공대 출신답게 능숙한 솜씨로 아내의 손목을 지혈한 뒤 그녀는 들처업었다. 자네는 빨리 내려가 시동 걸어!
(영혜의 꿈 이야기)
.....내 다리를 물어뜯은 개가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묶이고 있어.
나보다 몸집이 큰, 잘생긴 흰 개야. 주인집 딸을 물어뜯기 전까진 영리하고 동네에 소문났던 녀석이었지.
아버지는 녀석을 나무에 매달아 불에 그슬리면서 두들겨패지 않을 거라고 했어. 달리다 죽은 개가 더 부드럽다고 말을 어디선가 들었대.
나는 꼼짝 않고 문간에 서서 점점 지쳐가는, 헐떡이며 눈을 휘번덕이는 흰둥이를 보고 있어. 번쩍이는 녀석의 눈과 마주칠 때마다 난 더욱 눈을 부릅떠.
나쁜 놈의 개, 나를 물어?
다섯 바퀴째 돌자 개는 입에 거품을 물고 있어. 줄에 걸린 목에서 피가 흘러. 목이 아파 낑낑대며, 개는 질질 끌리며 달려. 여섯 바퀴째, 개는 입으로 검붉은 피를 토해. 목에서도, 입에서도 피가 흘러, 거품 석인 피, 번쩍이는 두눈을 나는 꼿꼿이 서서 지켜봐.
일곱 바퀴째 나타날 녀석을 기다리고 있을 때, 축 늘어진 녀석을 오토바이 뒤에 실은 아버지가 보여. 녀석의 덜렁거리는 네 다리, 눈꺼풀이 열린, 핏물이 고인 눈을 나는 보고 있어.
그날 저녁 우리집에선 잔치가 벌어졌어. 시장 골목의 알만한 아저씨들이 다 모였어. 개에 물린 상처가 나으려면 먹어야 한다는 말에 나도 한입을 떠넣었지. 아니, 사실은 밥을 말아 한그릇을 다 먹었어.
들깨 냄새가 다 덮지 못한 누린내가 코를 찔렀어. 국밥 위로 어른거리던 눈, 녀석이 달리며, 거품 섞인 피를 토하며 나를 보던 두 눈을 기억해. 아무렇지도 않더군.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어.
손목은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아픈 건 가슴이야. 뭔가가 명치에 걸려 있어. 그게 뭔지 몰라. 언제나 그게 거기 멈춰 있어. 이젠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덩어리가 느껴져.
피와 살은 모두 소화돼 몸 구석구석으로 흩어지고, 찌꺼기는 배설됐지만 목숨들만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 번만, 단 한 번만 크게 소리치고 싶어. 캄캄한 창밖으로 달려나가고 싶어. 그러면 이 덩어리가 몸 밖으로 뛰쳐나갈까. 그럴 수 있을까. 아무도 날 도울 수 없어. 아무도 날 살릴 수 없어. 아무도 날 숨 쉬게 할 수 없어.
......꿈 때문이에요. 꿈? 그는 되물었다. 꿈을 꿔서.... 그래서 고기를 먹지 않아요.
..... 늘 달라요. 어떨 땐 아주 낯익은 얼굴이고, 어떨 때는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에요. 피투성이일 때도 있고.... 썩어서 문드러진 시체 같기도 해요.
손이 거칠었던 아버지에게 차례로 빰을 맞던 어린시절부터 영혜는 그녀에게 무한히 보살펴야 할, 흡사 모성애 같은 책임감을 안겨주는 존재였다.
영혜가 처음 이상해진 것은 삼년여 전 갑작스럽게 채식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채식주의자들이야 이제는 흔해졌지만, 영혜의 경우 특이한 점은 그 동기가 불분명하다는 것이었다.
오래전 그녀는 영혜와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홉살이었던 영혜는 말했다. 우리, 그냥 돌아가지 말자.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 모르게 그녀에게만 조심스러워했다.
온순하고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해질녘이면 대문간에 혼자 나가서 있던 영혜의 어린 뒷모습을.
그들은 여기 갇혀 있다는 것이다.
이 여자가 그렇듯이.
영혜가 그랬듯이.
그녀가 이 여자를 안지 않은 것은, 영혜를 이곳에 가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영혜 언니)
첫댓글 책을 당근마켓에서 사서 남편의 얘기 읽는 중이라 블로그는 안들어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