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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이부작(述而不作)
저술한 것이지 창작한 것이 아니라는 뜻으로, 자신의 저술이나 창작을 두고 저자가 겸손의 뜻으로 하는 말이다.
述 : 지을 술(辶/5)
而 : 말 이을 이(而/0)
不 : 아닐 부(一/3)
作 : 지을 작(亻/5)
이 성어는 기술하기만 하고 창작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과거의 문헌을 토대로 말하는 것이지 하늘에서 떨어지듯 새로 창안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진정한 창작은 옛것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연속성에서 탄생하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원문의 술이부작(述而不作) 신이호고(信而好古)는 기술하고 짓지 않으며, 신념으로 옛 것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술(述)은 저술(著述)이란 뜻이고, 작(作)은 창작(創作)이란 뜻이다. 저술은 예부터 내려오는 사상과 문화를 바탕으로 이것을 다시 정리하거나 서술하는 것을 말하고, 창작은 지금까지 일찍이 없었던 새로운 사상과 학설을 처음으로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씨족제 봉건사회의 한 사람이었던 공자는 “태초에 길이 있고, 길은 하늘과 더불어 있었다”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공자는 만약 태초에 있었던 길을 그대로 현사회실에 부활할 수가 있다면 이 세상은 바로 황금시대가 된다고 확신하여, 이 길의 모습을 알고저 하는데 전심하였던 것이다.
태초의 일이었기 때문에 길은 당연히 옛날에 찾지 않으면 아니된다. 공자가 말하기를 “나는 낳으면서부터 이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옛 것을 좋아하여 열심히 구하였던 것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以求之者也/ 論語 述而篇)”라는 말이 그 간의 소식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공자가 말하기를 “옛 것을 배우고 거기에서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溫故知新) 사람 같으면, 선생으로 섬겨도 좋다(溫故知新, 可以爲師矣/ 論語 爲政篇)”라고 있어, 공자가 여하히 태초에 있던 길을 충심으로 추구 하였던가가 상상된다.
공자는 이 성과를 제자들에게 강술하였을 뿐 아니라. 시경(詩經)이나 서경(書經)을 오늘의 형태로 정리하고 춘추(春秋)를 편찬하였으며, 예(禮)나 악(樂)을 제정하여 후세에 전했다고 되어 있지만 태초에 있었을 길을 있는 그대로 현실사회에 실현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거기에는 공자 자신의 개인적인 자의(恣意)는 가해지지 않았다. 공자는 어떠한 경우일지라도, 오직 자기 자신이 “일찌기 실재하였다”라고 믿었던 그대로를 조술(祖述)하고 있는 것이다.
공자의 성품은 겸손하여 자신의 저술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공자가 말하기를 “자기는 있었던 것을 논술하고 있는 것이지 새로이 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옛 것을 믿고 옛 것을 좋아하지 때문이다. 마음 속 깊이 은(殷)나라의 현인 노팽(老彭)을 본 받고저 함이다(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此於我老彭/ 論語, 述而篇)”라는 말로도 그간의 사정을 추찰(推察)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술이부작(述而不作)이란 자신의 저술이나 창작을 두고 저자가 겸손의 뜻으로 하는 말이다.
공자가 술(述)하고 지어내지 않은 것은 공자의 학문의 필연적인 귀결이었지만 중국사회가 오래도록 정체하였기 때문에 선철(先哲)의 말을 ‘술(述)하고’ 자설(自說)을 ‘지어내지 않는다’라는 것이 학자 일반의 태도가 되어, 이것이 또한 반대로 작용하여 중국 문화를 정체시키는 큰 원인이 되었다는 것은 다툴 수 없는 사실이다.
공자는 이 태도를 관철하여 그대 자신의 학문의 기본을 지어내었지만 후세의 아류들이 술(述)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지어내지 않는 것은 결국 자시가 좋아하는 권위에 배궤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공자와 같이 인간에 있어서의 진실을 사랑하려고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위에 나오는 노팽이란 사람은 은(殷)나라의 어진 대신이라고 하는데, 술이부작이란 말 자체도 어디까지나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어서 한 말이었는데, 그것을 다시 노팽이란 사람에게 비교해 본다는 것은 남을 배운다는 똑같은 겸손한 태도에서 나온 말이다.
노팽은 상(商)나라의 현명한 대부로서 고사(故事)를 잘 정리하여 진술했다는 설이 있다. 노팽을 두 사람으로 보아 노(老)를 노자(老子)로 보고, 팽(彭)을 팽조(彭祖)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앞의 주장을 따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리스도교의 성경(聖經) 마태복음 제5장에 나오는 예수의 말 가운데 나오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한 것도 공자의 이 말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다.
사실상 공자가 이 같은 말을 한 것은 창작을 부정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다. 옛것을 제대로 음미도 못한 채, 옛것의 테두리를 벗어나지도 못한 것을 마치 자기가 새로 창안해 낸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있는 그런 젊은 후배들을 깨우쳐 주기 위해 한 말일 것이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공자의 말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옛것을 완전히 내 것을 만듦으로써 새로운 것은 알게 되는 것이 온고지신인 것이다. 거기까지 미치지 않은 사람은 남의 스승이 될 수 없다고 공자는 덧붙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참다운 창작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옛것과 남의 것을 거름으로 해서 자연히 피어난 꽃과 맺어진 열매가 창작인 것이다.
논어(論語)의 술이편(述而篇)은 3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로 공자의 뜻과 행동을 밝히면서 아울러 현자와 군자 그리고 인자(仁者)등이 덕을 어떻게 행하는지 살펴보게 한다. 이 편은 논어에서 꼭 새겨두어야 할 말씀들을 가장 많이 담고 있으며, 공자가 왜 성인인가를 살필 수 있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공자가 위정편(爲政篇) 제10장에서 말했던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을 다시금 헤아려보게 한다. 그리고 공자의 호학(好學)에 담긴 뜻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게 한다. 그 뜻은 곧 인문정신(人文精神)의 확대이며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선대의 문물제도를 본받아(述而) 현재에 알맞도록 하라는 것이 공자의 부작(不作)인 셈이다. 이는 곧 군자의 소명이요 사명이다. 군자는 인문정신의 확대와 그 실천을 몸소 하는 당사자이다. 왜 군자는 그렇게 하는가? 인도(仁道)룰 구체적으로 실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장(章)은 동양의 학문정신을 간명하게 드러내 준다고 보아도 된다.
술(述)은 속(續), 계(繼), 순(循), 진(陳) 등을 한데 묶은 회의(會意)로 새겨야 한다. 그래서 술이(述而)의 술(述)은 ‘이어서(繼) 좇아(續) 밝힌다(陳)’는 뜻으로 넓게 보아야 한다. 무엇을 이어서 쫓아 밝힌다 하는가? 공자가 왜 호학(好學)울 강조하는지 짐작해보면 도움이 되리라. 왜냐하면 호학의 학(學) 다음에 올 목적어와 술이(述而)의 술(述) 다음에 올 목적어의 내용은 같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목적어는 선대의 문물제도, 즉 문화유산으로서 전반적인 전통일 것이다.
부작(不作)의 작(作)은 조(造), 성(成), 시(始), 사(事), 흥(興), 위(爲) 등을 한데 묶은 회의(會意)로 새겨야 한다, 그러니 부작(不作)의 작(作)은 ‘짓고(造), 이루고(成), 비록하고(始), 일하고(事), 일어나고(興), 한다(爲)’는 뜻으로 넓게 새겨야 한다. 작(作)은 지을 작(作) 또는 만들 주(作)로 읽고, 주(做)와 같다. 따라서 부작(不作)의 작(作)을 주(做)와 같다고 보아도 된다. 내 멋대로 짓고 만들지 않았다(不作).
공자는 만년에 육경(六經)을 다듬고 고쳐 만들었다. 수찬(修撰), 서경(書經, 尙書)과 예기(禮記)를 서술했고, 시경(詩經)을 선집으로 폈으며, 악경(樂經)을 풀이했으며, 춘추(春秋)를 지었다. 그러니 공자의 호학은 곧 육경을 배우라는 당부로 볼 수 있다. 여기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을 공자가 선대의 문물제도를 잘 살펴 본 받아(監) 육경을 이루어냈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된다. 동시에 생존의 흐름인 시공(時空)은 단절될 수 없다는 인문정신을 새겨보게 한다.
참고로 원문에서의 신이호고(信而好古)는 신고(信古)와 호고(好古)로 보면 된다. 고(古)는 선대의 문물제도 내지 육경의 정신이라고 보아도 좋고, 그냥 아언(雅言)의 세계라고 보아도 된다. 그러한 옛 것(古)을 믿고(信) 좋아했다(好)고 술회하는 공자는 요샛말로 전통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것을 그대로 물려받자고 하는 수구주의자(守舊主義者)는 결코 아니다. 신고(信古)는 호고(好古)이지 집고(執告)는 아니기 때문이다.
술이부작(述而不作)
술이(述而)에선 여러 가지 주제가 등장해 구성이 산만하다는 느낌이 든다. 도(道)와 인(仁)의 실천, 공자의 수신(修身)과 처신, 공자 스스로에 대한 평과 공자에 대한 다른 사람의 평, 그리고 정치에 관한 공자의 견해 등 다양한 주제가 등장한다. 그렇더라도 술이(述而)가 주로 다루는 내용이 공자의 가르침과 배움, 그리고 학문하는 태도이므로 이것을 술이(述而)의 주제로 보는 게 타당하다. 그리고 이를 통해서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밝힌다. 먼저 공자의 학문하는 태도에 대해 알아보자.
공자가 말했다. "나는 옛 성현의 설을 정리해서 닦을 뿐 내 생각을 보태지 않고, 또 옛날의 도를 의심하지 않고 좋아한다. 그래서 나를 상나라의 현인 노팽(老彭)에게 사사로이 견줘 본다(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
논어의 유명한 구절인 술이부작(述而不作), 즉 '옛 성현의 설을 정리해서 닦을 뿐 내 생각을 보태지 않는다'가 여기서 등장한다. 이 구절에서 공자의 학문하는 태도와 관련해 중요한 점을 포착할 수 있다. 우리는 공자를 유가(儒家) 사상의 원조쯤으로 알아 그가 말한 내용을 과거에 없었던 매우 독창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공자는 여기서 이 점을 완강히 부인한다. 자신은 옛 성현들의 설을 정리했을 뿐 자기 생각을 보태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공자가 옛 성현의 설을 정리해서 닦을 뿐 자기 생각을 보태지 않았다는 건 옛 성현의 설을 절대적이라고 믿어서다. 이 점이 다른 사상가나 도학자와 다른 점이다. 우리는 주위에 새로운 도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상가나 도학자가 적지 않다는 사실에 놀란다. 흥미로운 사실은 영국을 대표하는 서양철학자 화이트헤드(A. N. Whitehead)는 서양철학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에 불과하다고 말한 바 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오래전에 서양철학이 말해 왔던 진리를 다 언급해서다. 공자도 이런 점을 간파했던 게 아닐까?
또 공자는 옛날의 도를 의심하지 않고 좋아한다는 점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밝힌다. 이 또한 자신이 신봉하는 건 옛날의 도임을 밝히려는 시도라고 보인다. 그렇다면 공자가 언급하는 옛날의 도란 무엇일까? 가까이는 주(周)나라 예법(禮法)일 수 있고, 멀리는 요순 임금의 생각일 수 있다. 논어에 공자가 요순과 주례(周禮)를 자신의 모범으로 삼는다는 말이 자주 등장해서다. 여기선 요순 임금의 생각으로 제한된다. 공자가 자신을 상(商)나라 현인 팽조(彭祖)와 비교하는데 팽조가 살았을 때 주나라는 아직 역사에 등장하지 않아서다. 그러니 팽조를 기준으로 보면 주나라 예법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공자는 이처럼 자신의 이상을 미래에서 찾지 않고 주례나 요순의 생각처럼 과거에서 찾으려고 한다. 이런 점은 노장사상도 마찬가지다. 노자는 공자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요순시대 이전인 황제 시대에서 이상을 찾는다. 중국에선 정치가 혼란스러울 때 황건적이 자주 등장하는데 황건적은 노자사상과 관련이 깊다. 황건적(黃巾賊)의 황과 황제(黃帝)의 '황'이 같은 누런색인데 황건적은 노자를 받들고, 노자는 황제를 받들어서다. 장자는 더 거슬러 올라가 자연스러웠던 시대를 이상으로 삼는다. 장자사상의 핵심어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에 비해 인의(人義)의 구현을 으뜸으로 삼는 공자사상은 왠지 유위부자연(有爲不自然) 하다.
그런데 팽조는 어떤 사람인가? 그는 8백 살을 살았다고 해서 중국 역사에서 유명하다. 그래서 '장자'를 비롯해서 여러 동아시아 고전들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으로 등장한다. 또 상나라는 하(夏)나라에 이어 세워진 나라로 은(殷)나라를 의미한다. 은나라가 있었다는 역사적 근거는 지난 세기 하남성(河南省)에서 발견된 거북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통해서다. 그런데 이는 은나라가 존재했다는 근거로는 충분해도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인지 알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니 은 왕조에서 팽조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 수 없다. 공자가 여기서 팽조를 현인으로 여기므로 이를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다.
공자가 팽조를 노팽(老彭)이라 칭한 건 그에 대한 찬양이다. '노(老)'란 단순히 나이 많이 먹은 사람만 뜻하는 게 아니다. 나이를 많이 먹어도 원숙한 경지에 이르지 않으면 '노'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는다. 그러니 노팽은 원숙한 경지에 이른 팽조를 의미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노'가 나이 기준으로만 해석돼 부정적으로 인식되는 게 안타깝다.
공자가 자신을 노팽처럼 역사 속의 특정 인물과 비교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공자는 어째서 역사 속의 특정 인물과 자신을 비교했을까? 그것은 공자가 이런 시도를 하지 않으면 제자들은 물론이고, 후세사람들도 공자를 신성시하거나 그의 사상을 절대시할 가능성이 커서라고 본다. 이런 이유로 공자는 자신이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완벽한 사람이 아님을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논어에서도 공자는 완성된 인간이 아니라 그것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으로 되도록 그려진다.
공자가 말했다.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창작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많이 듣고 그 가운데 좋은 걸 가려서 따른다. 또 많이 보고 그 가운데 좋은 걸 기억하는 데 이는 그다음으로 아는 일이다(蓋有不知而作之者, 我無是也. 多聞, 擇其善者而從之. 多見而識之, 知之次)."
술이(述而) 28장에서 공자는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창작하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했다. 또 '많이 듣고 그 가운데서 좋은 것을 가려서 따르거나 많이 보고 그 가운데서 좋은 것을 기억한다'라고 한다. 이는 가능하면 많이 듣고, 보려 하는데 듣는 것 가운데 좋은 건 따르고, 보는 것 가운데 좋은 건 기억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공자는 듣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보는 것을 그다음으로 한다. 견문(見聞) 중에 견(見)보다 문(聞)을 중요시해서다.
공자가 말했다. "나는 태어나면서 세상의 도리를 안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해 이를 힘써 구해 세상의 도리를 안 사람이다(我非生而知之者, 好古, 敏以求之者也)."
공자가 미래가 아닌 과거에서 도를 찾으려는 태도는 술이(述而)에서 계속된다. 술이(述而) 20장에서 공자는 도를 추구하는 것과 관련해서 자신을 다음과 같이 평한다. 즉 태어나면서 세상의 도리를 안 사람이 아니라 옛것을 좋아해서 이를 힘써 구해 세상의 도리를 안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이 문장은 술이(述而) 1장에서 언급한 바 있는 '옛 성현의 설을 정리해 닦을 뿐 내 생각을 보태지 않고, 또 옛날의 도를 의심하지 않고 좋아한다'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여기서 '힘써 구해'는 공자가 강조한 학습(學習), 즉 배우고 익힘을 통해서라고 본다. 그러니 공자는 학습을 통해서 세상의 도리를 깨달은 셈이다.
술이부작(述而不作)
서술하는 것이 창작보다 중요한 것이란 의미로 공자가 스승의 역할을 강조한 말이다. 원문은 이렇다. "서술하되 짓지는 않고 믿어서 옛것을 좋아하니, 남몰래 나를 노팽과 비교해 본다(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 논어 술이편)."
여기서 '술'이란 선현의 말을 천술(闡述)한다는 의미로 황간(皇侃)의 주석을 보충하면 옛 문장에 전해오는 것(傳於舊章)을 뜻한다. '작(作)'은 새로운 것을 저술(著述)한다는 의미로 주희 역시 이 글자를 '창시(創始)'의 의미로 보았다. 그러니 '不作'이란 잘 알지 못하면서 지어낸다는 의미를 갖고 있으니 공자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노팽은 팽조(彭祖)를 가리킨다. 더러는 노자와 팽조라는 설도 있는데 타당성이 부족하다. '대대례'에 '옛날 상나라의 노팽 및 중훼(昔商老彭及仲虺)'라는 말이 있는 것이 그 근거다. 이 문장은 "아마도 알지 못하면서도 창작하는 자가 있겠지만, 나는 그런 적이 없다(蓋有不知而作之者, 我無是也/ 논어 술이편)"라는 문장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하면 좋다.
논어 위정편에서도 "옛것을 익히고 새로운 것을 알면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라고 하여 '온고지신'을 스승의 자격으로 보았던 공자는 복고(復古)정신에 입각한 자신의 학문 방향을 분명히 드러내면서 학문에 있어서 선현의 학문을 존중하고 창작보다는 서술에 무게중심을 두었던 것이다.
공자의 관점은 현재 역시 과거의 연장선이며 미래 사회 역시 현재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이해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스승 역시 미래에 펼쳐질 일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것에 대처할 능력을 구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술이부작'이란 과거에 함몰되라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시대변화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섣부른 예측이나 어설픈 독창성을 내세운 독단적인 학문 태도나 아집은 좋지 못한 결과로 이어진다는 경고의 메시지로 보아야 한다. 이 말이 '신이호고'라는 말과 함께 거론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술이부작(述而不作)과 가짜 뉴스의 합리화
사실대로 보도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그 사실이란 매우 단편적인 것뿐이지요. 조각난 단편으로는 서사가 만들어지지 않지요. 가령 어떤 사람이 한강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명확한 사실처럼 보이나, 그것도 실은 꽤 복잡한 이야기가 될 수 있어요.
스스로 떨어졌는지, 누군가 떨어뜨렸는지를 확인해야 하고요. 만약 스스로 떨어졌더라도 그 일이 실수였는지, 계획된 것인지도 알아야지요. 계획된 것이라면 그 배경은 무엇인지도 밝혀야지요. 누군가 밀어뜨린 것이었다면 문제는 더 복잡합니다. 한 마디로, 누군가 한강 다리에서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고 할 때 그 사건을 간추려서 글이나 말로 기록하는 것은 매우 복잡하고 성가신 일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날마다 접하는 굵직한 정치적 사건이나 경제 변화에 관한 이야기는 어떠하겠습니까. 전문 지식이 없이는 판단도 할 수 없고, 관련된 모든 정보에 접근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럼 옛날에 일어난 사건을 다루는 역사는 또 어떠하겠습니까. 역사 속 인물은 모두 사라지고 없지요. 궁금한 일은 많아도 그 일에 직접 간접으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을 호출할 방법이 하나도 없지요. 게다가 남겨진 기록도 대개는 어떤 목적으론가 왜곡된, 즉 '오염된 기록'뿐입니다.
조선왕조실록도 승정원일기도 난중일기도 징비록도 고려사도 대학자의 문집도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조작되고 오염된 것입니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면 정말 불행한 일이지만, 남아 있는 기록이라고 해서 무조건 믿을 수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역사를 쓰는 작업은 단순히 일어난 사실을 꼬박꼬박 적어내는 단순한 작업이 아닙니다.
역사를 쓰는 작업은 창작입니다. 경제나 정치에 관한 논문을 쓰는 일도 사실은 다르지 않습니다. 신문 방송에 나가는 보도기사를 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심하게 들리겠으나 자연과학에 관한 논문이나 책을 쓰는 일도 큰 틀에서 보면 비슷합니다.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장면도 누가 찍느냐에 따라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셔터를 누르는가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 그림이 나오는 것입니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누구나 잊어버리기 쉬운 사실입니다. '내가 겪어서 다 안다!' 이런 간단한 주장으로는 다른 사람을 제대로 설득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지배 권력은 사실의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라는 구호를 앞세웁니다. 이런 구호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주류 언론의 보도만을 믿으라고 강요하기 위해 지어낸 것에 불과합니다. 최근에는 집권층에게 불리한 보도를 아예 인용조차 하지 못하게 막고 있습니다. 과연 '가짜 뉴스'란 무엇일지를,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할 때입니다.
20년쯤 전에 저는 '술이부작(述而不作; 사실대로 서술하고 멋대로 자기 생각을 쓰지 않는다)'이라는 억지에서 벗어나 술이작(述而作)을 하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어차피 창작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보다 책임감 있고 양심적인 태도로 글을 쓰자는 것입니다. 헌법에도 명시된 이른바 언론의 자유란 술이작(述而作)의 세계관을 허용하는 것으로 읽는 것이 당연합니다.
술이부작(述而不作)이란 저술한 것이지 창작한 것이 아니라는 말로, 저술에 대한 겸양을 나타내기 위해 쓰는 말이다. 논어의 술이편(述而扁)에 나오는 말로, 공자는 자신의 저술에 대해 “나는 옛사람의 설을 저술했을 뿐 창작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창작’이 오히려 문제가 되는 역사연구에서는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으며, 어느 정도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미시사 연구에서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한국 미시사 연구의 제1세대 선두주자인 백승종은 역사서술에서 술이부작(述而不作; 사실을 기록하되 지어내서 쓰지는 않는다)은 사실상 불가능한 만큼 차라리 술이작(述而作; 기록하되 제 생각대로 쓰는 것)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동원하는 허구조차도 근거 없이 '날조'해선 안된다는 걸 전제로 한 입장이다.
▶️ 述(펼 술)은 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책받침(辶=辵; 쉬엄쉬엄 가다)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글자 朮(출, 술)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朮(출)은 차조, 짝 달라붙는 일, 발음이 관계가 깊은 循(순), 順(순)과 결부되어 뒤따라 간다는 뜻을 나타낸다. 述(술)은 예로부터의 습관에 따르는 일을 말한다. 그래서 述(술)은 ①펴다, (글을)짓다 ②서술(敍述)하다 ③말하다 ④따르다, 잇다, 계승(繼承)하다 ⑤닦다, 전술(傳述)하다 ⑥밝히다 ⑦기록(記錄) ⑧언설(言舌), 변설(辯舌) ⑨저술(著述) ⑩도(道), 정도(正道) ⑪관(冠)의 이름,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재주 기(技), 지을 찬(撰)이다. 용례로는 글을 지어 책을 만듦을 술작(述作), 마음에 품은 생각을 말함을 술회(述懷), 구두로 자세히 말함을 진술(陳述), 어떤 내용을 차례로 좇아 말하거나 적음을 서술(敍述), 사물의 특질을 객관적 조직적 학문적으로 적음을 기술(記述), 어떤 사물을 논하여 말하거나 적음을 논술(論述), 논문이나 책 등 글을 써서 책을 만듦을 저술(著述), 말로써 베풀어 아룀을 구술(口述), 학문이나 문예 등에 관한 책이나 글을 씀을 찬술(撰述), 자세하게 진술함을 상술(詳述), 간략하게 논술함을 약술(略述), 시문이나 글을 지음을 제술(製述), 생각하는 바를 글로 나타냄을 필술(筆述), 대강의 진술이나 논술을 개술(槪述), 자세히 자기 의견을 말함을 누술(樓述), 성인의 말을 전하고 자기의 설을 지어내지 않는다는 말을 술이부작(述而不作), 문장의 잘되고 못 됨은 그 문장을 지은 사람의 능력에 딸렸다는 말로 일의 잘되고 못 되는 것은 그 사람의 수단이 좋고 나쁜 데에 달렸다는 말을 술자지능(述者之能), 선인의 뜻을 잘 계승하고 선대의 사업을 잘 발전시켜 나가는 것을 이르는 말을 계지술사(繼志述事) 등에 쓰인다.
▶️ 而(말 이을 이, 능히 능)는 ❶상형문자로 턱 수염의 모양으로, 구레나룻 즉, 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을 말한다. 음(音)을 빌어 어조사로도 쓰인다. ❷상형문자로 而자는 ‘말을 잇다’나 ‘자네’, ‘~로서’와 같은 뜻으로 쓰이는 글자이다. 而자의 갑골문을 보면 턱 아래에 길게 드리워진 수염이 그려져 있었다. 그래서 而자는 본래 ‘턱수염’이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그러나 지금의 而자는 ‘자네’나 ‘그대’처럼 인칭대명사로 쓰이거나 ‘~로써’나 ‘~하면서’와 같은 접속사로 가차(假借)되어 있다. 하지만 而자가 부수 역할을 할 때는 여전히 ‘턱수염’과 관련된 의미를 전달한다. 그래서 而(이, 능)는 ①말을 잇다 ②같다 ③너, 자네, 그대 ④구레나룻(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 ⑤만약(萬若), 만일 ⑥뿐, 따름 ⑦그리고 ⑧~로서, ~에 ⑨~하면서 ⑩그러나, 그런데도, 그리고 ⓐ능(能)히(능) ⓑ재능(才能), 능력(能力)(능)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30세를 일컬는 이립(而立), 이제 와서를 이금(而今), 지금부터를 이후(而後), 그러나 또는 그러고 나서를 연이(然而), 이로부터 앞으로 차후라는 이금이후(而今以後), 온화한 낯빛을 이강지색(而康之色) 등에 쓰인다.
▶️ 不(아닐 부, 아닐 불)은 ❶상형문자로 꽃의 씨방의 모양인데 씨방이란 암술 밑의 불룩한 곳으로 과실이 되는 부분으로 나중에 ~하지 않다, ~은 아니다 라는 말을 나타내게 되었다. 그 때문에 새가 날아 올라가서 내려오지 않음을 본뜬 글자라고 설명하게 되었다. ❷상형문자로 不자는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不자는 땅속으로 뿌리를 내린 씨앗을 그린 것이다. 그래서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 ‘아니다’나 ‘못하다’, ‘없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참고로 不자는 ‘부’나 ‘불’ 두 가지 발음이 서로 혼용되기도 한다. 그래서 不(부/불)는 (1)한자로 된 말 위에 붙어 부정(否定)의 뜻을 나타내는 작용을 하는 말 (2)과거(科擧)를 볼 때 강경과(講經科)의 성적(成績)을 표시하는 등급의 하나. 순(純),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의 다섯 가지 등급(等級) 가운데 최하등(最下等)으로 불합격(不合格)을 뜻함 (3)활을 쏠 때 살 다섯 대에서 한 대도 맞히지 못한 성적(成績) 등의 뜻으로 ①아니다 ②아니하다 ③못하다 ④없다 ⑤말라 ⑥아니하냐 ⑦이르지 아니하다 ⑧크다 ⑨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 그리고 ⓐ아니다(불) ⓑ아니하다(불) ⓒ못하다(불) ⓓ없다(불) ⓔ말라(불) ⓕ아니하냐(불) ⓖ이르지 아니하다(불) ⓗ크다(불) ⓘ불통(不通: 과거에서 불합격의 등급)(불) ⓙ꽃받침, 꽃자루(불)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아닐 부(否), 아닐 불(弗), 아닐 미(未), 아닐 비(非)이고,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옳을 가(可), 옳을 시(是)이다. 용례로는 움직이지 않음을 부동(不動),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일정하지 않음을 부정(不定), 몸이 튼튼하지 못하거나 기운이 없음을 부실(不實), 덕이 부족함을 부덕(不德), 필요한 양이나 한계에 미치지 못하고 모자람을 부족(不足), 안심이 되지 않아 마음이 조마조마함을 불안(不安), 법이나 도리 따위에 어긋남을 불법(不法), 어떠한 수량을 표하는 말 위에 붙어서 많지 않다고 생각되는 그 수량에 지나지 못함을 가리키는 말을 불과(不過), 마음에 차지 않아 언짢음을 불만(不滿), 편리하지 않음을 불편(不便), 행복하지 못함을 불행(不幸), 옳지 않음 또는 정당하지 아니함을 부정(不正), 그곳에 있지 아니함을 부재(不在), 속까지 비치게 환하지 못함을 불투명(不透明), 할 수 없거나 또는 그러한 것을 불가능(不可能), 적절하지 않음을 부적절(不適切), 부당한 일을 부당지사(不當之事), 생활이 바르지 못하고 썩을 대로 썩음을 부정부패(不正腐敗), 그 수를 알지 못한다는 부지기수(不知其數), 시대의 흐름에 따르지 못한다는 부달시변(不達時變) 등에 쓰인다.
▶️ 作(지을 작, 저주 저, 만들 주)은 ❶형성문자이나 회의문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㑅(작)의 본자(本字), 做(주)는 통자(通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사람인변(亻=人; 사람)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乍(사, 작)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❷회의문자로 作자는 ‘짓다’나 ‘만들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作자는 人(사람 인)자와 乍(잠깐 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乍자는 옷깃에 바느질하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짓다’나 ‘만들다’라는 뜻으로 쓰였었다. 옷깃에 바느질하는 것은 다른 어떤 부분보다도 작업하기가 쉬웠었는지 乍자는 후에 ‘잠깐’이라는 뜻으로 가차(假借)되었다. 그래서 소전에서는 여기에 人자를 더한 作자가 ‘만들다’라는 뜻을 대신하고 있다. 그래서 作(작)은 (1)작품(作品) 제작(製作), 저작(著作)의 뜻을 나타내는 말 (2)작황(作況)이나 또는 농사(農事)의 뜻으로 나타내는 말 (3)작전(作戰) 등의 뜻으로 ①짓다, 만들다 ②창작(創作)하다 ③일하다, 노동(勞動)하다 ④행하다, 행동하다 ⑤부리다, ~하게 하다 ⑥일어나다 ⑦일으키다 ⑧이르다(어떤 정도나 범위에 미치다), 미치다(영향이나 작용 따위가 대상에 가하여지다) ⑨비롯하다 ⑩삼다, 임명하다 ⑪닮다 ⑫농사(農事) ⑬일, 사업(事業), 공사(工事) ⑭저작(著作), 작품(作品) 그리고 저주 저의 경우는 ⓐ저주(詛呪)(저) ⓑ저주하다(저) 그리고 만들 주의 경우는 ㉠만들다(=做)(주)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지을 찬(撰), 지을 조(造), 지을 제(製)이다. 용례로는 기계의 운동 부분의 움직임을 작동(作動), 사물 또는 사람의 이름을 지음을 작명(作名), 서로 헤어짐을 작별(作別), 만든 물품을 작품(作品), 문학이나 예술의 창작 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작가(作家), 일을 결정함을 작정(作定), 마음을 단단히 먹음을 작심(作心), 싸움을 진행하는 방법을 세움을 작전(作戰), 악곡을 창작함을 작곡(作曲), 글을 지음 또는 그 글을 작문(作文), 일터에서 연장이나 기계를 가지고 일을 함을 작업(作業), 농작의 잘 되고 잘못된 상황을 작황(作況), 움직이게 되는 힘을 작용(作用), 무리를 이룸을 작당(作黨), 처음으로 함을 시작(始作), 재료를 가지고 물건을 만듦을 제작(製作), 물건을 지어서 만듦이나 일부러 무엇과 비슷하게 만듦을 조작(造作), 기계 등을 움직이어 작업함을 조작(操作), 떨쳐서 일으킴 또는 일어남을 진작(振作),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몸을 움직이는 일 또는 그 움직임을 동작(動作), 토지를 갈아서 농작물을 심음을 경작(耕作), 썩 잘된 글이나 작품을 걸작(傑作), 처음으로 만듦을 창작(創作), 사람은 마음을 먹기에 따라 광인도 될 수 있고 성인도 될 수 있음을 이르는 말을 작광작성(作狂作聖), 의견이 서로 달라서 일을 결정하지 못함을 일컫는 말을 작사도방(作舍道傍), 의리로써 형제 관계를 맺음 또는 그 형제를 일컫는 말을 작의형제(作義兄弟), 마음 먹은 지 삼일이 못간다는 뜻으로 결심이 얼마 되지 않아 흐지부지 된다는 말을 작심삼일(作心三日), 끊임없이 힘써 함을 이르는 말을 작지불이(作之不已),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는 뜻으로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끈기 있게 노력하면 이룰 수 있음을 비유하는 말을 마부작침(磨斧作針), 자기가 저지른 일의 과보를 자기가 받음을 일컫는 말을 자작자수(自作自受), 낡은 것을 바꾸어 새 것으로 만듦을 일컫는 말을 환부작신(換腐作新),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하게 뒤에서 일을 꾸밈을 일컫는 말을 이면공작(裏面工作), 옛일에 구애됨이 없이 모범이 될 만한 일을 자기부터 처음으로 만들어 냄을 이르는 말을 자아작고(自我作古), 남의 의견이나 주장을 제쳐놓고 제 마음대로 처리하거나 방자하게 행동함을 이르는 말을 회빈작주(回賓作主) 등에 쓰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