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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샌 안토니오에 있는 알라모 요새
[ 영화, 알라모 ]
알라모 요새의 전투는 미국 역사에서, 특히 텍사스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신화적인 이야기입니다. 이 전투는 텍사스의 샌안토니오 지역의 알라모 요새에서 민병대 187명이 멕시코의 산타 아나 장군이 이끄는 수천 명의 병력과 맞서서 13일간의 전투를 벌이고 전원 사망한 전투입니다.
그리고 이들 전투를 지휘한 트래비스 대령, 민병대장 짐 보위, 그리고 테네시 주에서 달려와서 합류한 데이비 크로켓 등 3인은 신화적 인물이 됩니다.
당연히 이들의 이야기가 영화로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무성영화 시절부터 여러편 영화화 되었는데 정작 거물급 감독이나 배우가 만든 메이저급 영화는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서부극의 대스타인 존 웨인이 10여 년간 공을 들이면서 이 알라모 전투의 영화화에 대단한 집착을 보였습니다. 이후 자신이 직접 제작, 감독, 주연까지 맡았는데 1960년에야 비로소 대작영화 <알라모>가 탄생되었습니다.
알라모 소재 영화는 이보다 5년 일찍 만들어진 1955년 <최후의 사투>라는 영화가 우리나라에 먼저 개봉되었는데 스털링 헤이든과 어네스트 보그나인이 출연했습니다.
위에서 열거한 알라모의 3대 영웅 데이비 크로켓,짐 보위, 트래비스 중에서 존 웨인은 크로겟 역으로 출연했고, 짐 보위 역에는 찰톤 헤스톤에게 출연제안을 했지만 결국은 리처드 위드마크에게 돌아갔습니다.
트래비스 대령은 좀 의외의 캐스팅이라고 여겨졌는데 서부극과는 인연이 없는 <로미오와 줄리엣>' 등 셰익스피어 연극 전문인 영국 배우 로렌스 하베이에게 돌아갔습니다. 존 웨인, 리처드 위드마크 등 이미 서부극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배우들과 비교할 때 너무 젊은 영국배우인 것이 의외였는데 나름 트래비스 대령 역할을 무난하게 잘 소화했다는 평이었습니다.
2시간 40분이 넘는 대작인 이 영화는 존 웨인은 제작비조차 미처 확보하지 못한 채 촬영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멕시코를 촬영지로 모색하다가 영화의 상징성 때문에 결국 텍사스의 어느 목장 근처에 세트를 짓고 촬영을 하였습니다. 스튜디오 촬영이 전혀 없이 현지 세트에서만 촬영을 이루어졌습니다.
유명한 알라모 전투가 벌어지는 장면은 2시간이 지난 후에나 나타나고, 존 웨인도 영화시작 20분이나 지나서야 등장합니다. 전투 이전까지는 트래비스 대령, 짐 보위, 데이비드 크로켓 등 알라모 영웅들의 인물위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짐 보위와 크로켓 일행들이 게릴라처럼 공을 세우는 내용과 트래비스와 짐 보위와의 사사건건 대립이 벌어집니다. 나름 전투장면 이전에 흥미로울만한 이야기를 다양하게 삽입하고는 있지만 좀 지루한 면이 없지 않습니다.
후반부에 가면서 영화는 점차 스케일이 커집니다. 지원군이 오지 못하게 되었다는 비보를 들은 요새의 사람들, 민병대에게 지원군이 오는 것이 불투명하다는 것을 숨기던 트래비스 대령은 결국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는 것, 이 병력으로 전투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솔직히 이야기하고 떠날자는 떠나라고 합니다.
이 장면이 아무튼 참으로 비장한데 부하들을 데리고 떠날 듯 싶었던 짐 보위가 말에서 내려 트래비스 대령에게 합류하고 이어서 차례차례 민병대들이 말에서 내려 합류하는 장면은 비장하면서도 인상적입니다.
막대한 제작비로 인하여 어느 정도 흥행에 성공한 영화였음에도 적자를 면치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존 웨인도 재정적으로 꽤 어려움을 겪었다는 후문이었습니다. 아카데미 후보에 7개 부문이나 올랐지만 딱 1개만 수상했고, 그해 <스팔타카스>, <엘머 갠트리>, <아파트의 열쇠를 빌려드립니다> 등 수작영화들과 맞서기는 다소 역부족인 영화가 되었습니다.
존 웨인과 특별한 인연을 가진 존 포드 감독이 촬영 현장에 자주 찾아왔다고 하는데 존 웨인은 대선배이자 자신을 유명하게 만든 은인인 존 포드를 많이 어려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촬영장에 찾아와서 떡하니 감독석에 앉아 있어도 뭐라 하지 못했다고 하고, 실제로 존 포드가 몇 장면 직접 촬영을 지휘하기도 했습니다.
기대만큼의 흥행성공이나 호평을 받지 못했지만 <알라모>가 존 웨인의 대표작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 존 웨인 평생 출연한 영화 중에서 특히 공을 들였다고 합니다. 서부영화 음악의 상징적 존재인 디미트리 티옴킨이 직접 음악을 담당했습니다. 2,000마리가 넘는 말이 기마병 장면에서 등장했고, 전투장면 외에도 소떼의 이동장면 등 여러 가지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찰톤 헤스톤이 연기할 뻔한 짐 보위 역의 리처드 위드마크는 특유의 거칠고 힘 있는 연기로 꽤 적역이었다는 느낌을 주었고, 3인의 영웅 중 그가 가장 나중에 죽는 역할을 부여받았습니다. 존 웨인, 리처드 위드마크, 로렌스 하베이 등 주요 배우 3인의 전사 장면이 모두 제각각 장렬합니다. 존 웨인의 아들인 패트릭 웨인도 출연하는데 지원군이 못 오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알리는 장교 역할이었습니다.
[ 간략한 줄거리 ]
영화는 당시 텍사스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나 사건의 전후 설명 없이 바로 알라모 요새의 전투 개시 직전부터 시작합니다. 독립운동을 이끄는 샘 휴스턴 장군이 텍사스 민병대를 재조직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알라모 요새에 집결한 의용병들은 서부 개척의 영웅 데이비드 크로켓을 비롯하여 불과 200여명도 채 안되었습니다.
게다가 젊고 고집 센 트래비스 대령과 능력은 있지만 늘 술에 취해있는 짐 보위는 서로 알력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산타 아나가 이끄는 6,000여 멕시코군과의 전투에서 도저히 살아 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산타 아나의 엄청난 화력(실제로 산타 안나가 이끄는 멕시코군은 영화에서 등장하는 것처럼 중무장한 군대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만약 영화처럼 멕시코군이 많은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알라모는 하루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입니다.)과 병력수 때문에 알라모 요새를 포기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짐 보위와 트래비스 대령 사이에 끊임없이 내분을 불러 일으키며 결별 일보 직전까지 치닫습니다.
이런 와중에 그 중재자로 나서는 것이 데이비드 크로켓(존 웨인)이었습니다. 드디어 알라모 요새 앞에 당도한 멕시코군은 먼저 연락 장교를 보내 알라모 요새 성문 앞에서 그들에게 항복할 것을 권유했고, 항복한다면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전합니다.
* 크로켓은 멕시코 돌싱녀(돌아온 싱글, 이혼녀를 말함)와 약간의 염문을...
트래비스 대령은 대답 대신에 장교의 머리 위로 포탄을 발사합니다. 이로써 전투는 시작되었고, 알라모 수비 대원은 이후 13일간 멕시코군의 발목을 잡아두는데 성공합니다. 요새가 함락되기 직전, 부상당한 짐 보위는 부상자들이 누워있는 예배당 안에서 멕시코군을 상대로 영웅적으로 싸우다가 죽고, 트래비스 역시 칼을 들고 성문으로 밀려드는 멕시코군을 상대로 싸우다 장렬히 산화합니다.
크로켓 대령은 몰려드는 멕시코군들을 화약고로 유인한 뒤 화약고에 불을 붙여 수많은 멕시코 군들과 함께 생을 마감합니다. 마지막에 살아남은 어느 병사의 부인과 어린 딸, 그리고 트래비스 대령의 노예, 이 세 사람이 요새를 떠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합니다.
* 마지막 장면, 요새를 떠나는 모녀
[ 알라모 전투의 배경 및 전개과정 ]
< 전투의 배경 >
미국은 오랫동안 멕시코 땅인 텍사스에 눈독을 들여왔습니다. 애덤스와 잭슨 대통령은 멕시코에 대하여 텍사스 매입을 제안하기까지 했지만 거절당하기도 했습니다. 멕시코는 한심하게도 이런 미국의 꿍심을 알았으면 미국인들이 아예 텍사스에 발을 못붙이게 했어야 하는데...
거꾸로 멕시코는 미국인들의 이주를 허용하고 장려하는 정책을 폈으니 문제는 이때부터 잉태되기 시작했던 겁니다. 1821년부터 미국인들은 오늘날 ‘텍사스 개척’의 아버지라 불리는 스티븐 오스틴의 주도 아래 텍사스에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 때도 멕시코 당국의 묵인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텍사스 주도는 오스틴이라고 불리웁니다. 첫 이주 때엔 300여 가족이었지만 1830년 경에는 백인 2만여 명, 흑인 노예 2천여 명으로 불어났습니다. 곧 미국인들의 수가 멕시코인들의 수를 앞지르기 시작했습니다.
* 텍사스의 아버지 오스틴
이 때 오스틴은 체포 구금을 당하면서까지 멕시코 당국에 텍사스를 분리해 달라고 요구를 하기도 했습니다. 드디어 1836년 3월 1일 텍사스 미국인들은 텍사스를 분리 독립한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그들은 “텍사스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승리하면 땅을 주겠다”라고 공포하자 뉴욕,조지아,미시시피,플로리다 등 미국 각 곳에서 미국인들이 몰려왔습니다.
멕시코를 다시 집어 삼키려는 스페인의 시도를 잘 막아낸 당시 멕시코 대통령 산타 아나 장군은 이런 사태를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 6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해 텍사스의 미국인들을 응징하려고 출정에 나서게 됩니다.
* 산타 아나
< 알라모 전투 >
원래 알라모는 전체가 두꺼운 성벽으로 둘러싸인 예배당, 수도원, 수녀원으로 구성된 일종의 전도소였습니다. 1718년 샌안토니오에 건설되었습니다. 19세기 초반 스페인군 기병대가 주둔하여 이 요새를 스페인어로 미루나무라는 뜻인 알라모라고 불렀습니다.
독립 선언서를 발표하기 전 1835년 12월에 이미 텍사스 의용군 부대는 알라모를 점령합니니다. 그러나 산타 아나가 군을 이끌고 리오 그란데 강을 건너오자 샘 휴스턴을 위시해 텍사스군을 지도하는 몇 사람은 전투 경험이 전혀 없는 소수 초보 민병대를 이끌고 멕시코군을 이기기는 불가능하다가 판단하고 샌안토니오를 포기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알라모에 진을 치고 있던 의용군들은 후퇴하기를 거부하고 산타 아나가 이끄는 멕시코 군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리오그란데 강을 건너 남측에서 접근해 요새 알라모를 포위해 공격하기 시작한 멕시코군은 6000명이었으나 요새 알라모를 지키는 텍사스 의용군은 소수 부대인데다가 텍사스 주민과 나중에 보강된 증원군 약간을 합해 불과 187명이었습니다.
제임스 보위와 윌리엄 B. 트래비스 대령이 텍사스 의용군을 지도했고 변경 개척자로 유명한 데이빗 크로켓도 멀리 테네시 주에서 의용군을 이끌고 참여했습니다.
* 제임스 보위
제임스 보위는 당시 40세. 칼싸움의 명수였습니다. 그의 이름을 딴 '보위의 칼'은 지금도 샌안토니오에서 유명한 관광상품입니다. 텍사스 개척의 전설적인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아무튼 보위 칼이 유명해지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제임스 보위가 결투 상대방으로부터 무려 권총을 6발이나 맞고도 허리춤의 나이프로 상대를 썰어버리는 사건이 난 것이었습니다.
그 후 이 보위나이프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유행은 들불처럼 번져, 카우보이들은 물론 남부의 신사들은 보위나이프를 허리에 차지 않으면 복장이 적절하지 못하다고까지 생각하게 됩니다.
* 보위 나이프
데이비드 크로켓은 알라모 전투 당시 50세였습니다. 테네시주 출신의 사냥꾼, 개척자, 하원의원을 지냈습니다. 당시 그는 미국에서 가방 인기있는 정치인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1835년 하원에 재선되기 위해 출마하였다가 낙선했는데, 무엇보다도 무식하다는 게 주요 패인이었습니다.
그가 백 마리 이상의 곰을 쏴 죽였다고 말했을 때 친구들은 웃으면서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믿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크로켓이 그 정도로 많은 수는 세지 못하는 사람이어서 그랬다고 합니다.
* 데이비드 크로켓
알라모의 비장한 신화는 트래비스에 의해 더욱 보태졌습니다. 전투에 임박해서 트래비스는 모든 사람들을 집합시켰습니다. 이제 탈출을 시도하든지, 아니면 여기에 남아 싸우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칼로 모래 위에 선을 그었습니다.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사람은 줄을 넘으라고 말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줄을 넘었습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알라모 사수를 결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신화는 20세기에 들어와 조작됐다는 시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 트래비스
알라모에 남은 사람들은 1836년 3월 6일까지 13일에 걸쳐 멕시코 군에 대항했고 막바지에는 탄약이 떨어져 총을 막대기로서 쓰면서까지 저항했습니다. 그러나 1836년 3월 6일 멕시코군은 안마당 외벽의 무너진 틈으로 마침내 물밀듯 들어왔고 텍사스 의용군 187명은 전멸당합니니다. 이들 의용군들의 시체는 모두 기름에 적셔 불태워졌습니다.
멕시코군도 1000명에서 1600명이 사상했습니다. 이 알라모 전투는 13일간의 포위 끝에 3월 6일 끝났습니다. 병사들은 전멸했지만, 한 병사의 아내 수잔나 디킨슨, 그녀의 15개월 된 아기, 지휘관 윌리엄 트래비스 대령의 노예 조까지 세 명은 살아남았습니다. 오늘날 미국인 대부분은 알라모 전투에서 미군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믿지만, 일부 병사는 붙잡혀서 처형됐다고 합니니다.
* 알라모를 기억하라! 샌 자신토 전투(Battle of San Jacinto)
알라모 전투 후, 즉시 산타 아나는 텍사스 동쪽으로 깊숙이 군대를 이끌고 진격해 갑니다. 그 목적은 샘 휴스턴 장군이 이끄는 텍사스 의용군군과 결정적인 전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 반란군들의 뿌리를 아예 뽑아버리겠다는 심산이었습니다.
멕시코 군의 동향을 보고 받은 휴스턴은 열세의 자기편 군대가 산타 아나와 싸워 이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빨리 깨달았습니다. 경험이 풍부하고, 공포스런 멕시코 기병대를 텍사스 군이 쉽게 물리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 휴스턴에게 항복하는 산타 아나
* 샌 자신토 전투 삽화
그의 유일한 선택은 좋은 입지를 찾아서 유리한 위치에서 싸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휴스턴은 미국과의 경계까지 철수를 명령했고 많은 정착민들도 같이 이동했습니다. 휴스턴이 고려한 한 가지 시나리오는 텍사스 의용군을 미국령인 루이지애나까지 철수시켜, 그곳에서 멕시코군을 뉴올리언즈 요새의 미국군과 함께 기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산타 아나는 반역자 지도자들을 하루 빨리 체포하여 막대한 비용을 들게 한 긴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었습니다. 산타 아나는 자만했습니다. 알라모 전투부터 6주 후 휴스턴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왔습니다.
* 샘 휴스턴
산타 아나가 주력군과 떨어져 이동을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산타 아나의 군대는 750명으로 휴스턴 군대 820명 보다 적었습니다. 4월 20일 양군은 현재 휴스턴 외항인 갤버스턴이 위치해 있는 샌 자신토 강에서 대치했습니다.
휴스턴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멕시코군은 긴장을 늦추고 있었고 방비도 허술했습니다. 다음날 멕시코 군대는 낮잠을 즐기고 있었고 일부는 음식을 먹고 있었습니다. 텍사스 의용군은 “알라모를 기억하라!(Remember the Alamo!)"라고 외치며 달려들었습니다.
* 영화에서...알라모 요새
멕시코군은 형편없이 무너졌고 단 20분간의 전투 끝에 멕시코 군은 수백 명이 사망한 반면 텍사수 의용군의 사망자수는 9명에 불과할 정도로 전투는 일방적으로 끝나 버렸습니다.
산타 아나는 붉은색 치장의 화려한 군복을 병사에게 입히고 사병 복장으로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발각이 되면서 포로로 잡혔습니다. 리더를 잃은 나머지 멕시코군은 우왕좌왕하다가 꽁지 빠지게 리오그란데 강 너머로 달아나 버렸습니다.
휴스턴 장군은 산타 아나에게 텍사스의 독립을 약속하면 풀어주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휴스턴은 이 제안을 받아들인 산타 아나를 워싱턴으로 보냈고, 앤드루 잭슨 대통령은 텍사스 독립을 약속받은 뒤 그를 멕시코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이후 5월 14일 체결된 벨라스코 조약으로 텍사스는 독립공화국이 됩니다.
* 텍사스 국기
독립 직후 텍사스 인들은 미합중국에 합병되고자 하는 그들의 갈망을 표시하기 위해 텍사스 깃발에 큰 별 하나를 그려 넣었습니다. 오늘날에도 텍사스를 론스타 공화국(Lone Star Republic)으로 불리우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텍사스 주민들은 곧바로 자신들의 헌법을 제정하고, 휴스턴을 텍사스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선출합니다. 휴스턴은 앤드류 잭슨 대통령의 오랜 친구였으며 사람들이 스스로 추종할 만한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휴스턴 외항 갤버스턴 인근의 샌 자신토 전투 기념비
이후 텍사스는 10년간 독립공화국으로 유지되다가 이후 미합중국에 합병됩니다. 지금도 텍사스인들은 이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자기네들이 미국에서 유일하게 독립공화국이었음을...
그러나 사실 텍사스 독립공화국이 10년간 유지된 것은 고질적인 노예제 때문이었습니다. 노예제를 지지하는 텍사스가 미합중국에 편입되면 초미의 중대사인 노예문제에 기름을 붓게 되기 때문에 워싱턴 정치인들이 텍사스의 병합을 망설였기 때문입니다.
* 영화에서...알라모 전투
이렇게 알라모 전투는 미국의 영웅 신화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샌안토니오 중심에 있는 알라모 유적지에는 ‘관광객들이라기 보다는 참배자라는 말이 더 어울릴 듯한 사람들이 줄을 잇고 있다’라고 프랑스의 어느 역사학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알라모를 찾은 대다수 미국 관광객들은 열광합니다. 어떤 미국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알라모의 영웅담은 일부 가공되었을 거다. 그러나 한가지는 분명하다. 그들은 악조건 속에서, 승산없는 싸움을 벌였고 희생적 저항을 했다. 그 사실은 외면할 수 없다."
샌 안토니오에 살고 있는 어느 멕시코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텍사스 독립의 당위성을 강조한 나머지 산타 아나의 멕시코군을 너무 폄하하고 있다. 멕시코 땅에서 벌어진 분리 운동을 막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 텍사스 독립운동은 국제적 배신행위다. 알라모의 묵음은 너무 과장되고 그 신화는 나중에 조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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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40 년 전에 Alamo 에서 무엇 때문에 이것이 이렇게 유명한가 고개를 갸우뚱한 기억이 납니다. 더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것은 분명 American History 시간에 ( 미국 대학 졸업에 필수 과목) Alamo 에 대해서 배웠을 터인데 고박사님의 이야기가 전혀 새로우니 신기하네요. 잘 보았습니다.
LA 최거사님, 오랫만입니다. 가끔 여기 홈피를 통해 소식을 접하고 있지만...지난번 불난리에
얼마나...미국에서 가장 살기좋은 캘리포니아도 이런 난리가 벌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알라모는 본인이 휴스턴에 있을 때 가끔 가보곤 하면서 한번 자초지종을 정리해 보아야 하겠다
하고 생각하던 테마였는데 이번에...알라모가 있는 샌 안토니오에 있는 <리버워크>가 생각나네
요. 구불구불 수로가 멋지게 흐르는 명소...물가의 식당들도 군침이 돌게하는...언젠가 다시 가면 꼭
그곳에 가서 멕시칸 음식을 시켜 먹으며, 그곳에서의 추억을 반추해보는 시간을...건강하고 즐거운
나날이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