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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주신 최대의 약속(눅15:11-24)
2013.10.6(김상수목사)
“〔11〕 또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12〕 그 둘째가 아비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비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13〕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산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허비하더니 〔14〕 다 없이한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저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15〕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하나에게 붙여 사니 그가 저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16〕 저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17〕 이에 스스로 돌이켜 가로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고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8〕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 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눅15:11-24)
몇 년 전 네팔 선교여행을 가면서 중간에 태국 방콕공항에 잠시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 공항 청사 안에서 있는 어느 대형 광고판에 어린아이가 아빠의 품에 안겨서 자고 있는 사진과 함께 "feel at home"(편하다, 집처럼 편안하다)이라는 큰 글씨가 쓰여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여행 중에 그 문구를 보면서 내가 속해 있고, 내가 돌아갈 수 있는 따뜻한 집과 교회가 있다는 것이 참 감사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러한 느낌이 특정한 여행자나 특별한 상황 가운데 처한 사람에게만 해당되겠는가? 모든 인간은 자신이 어딘가에 소속되고 그 영역 안에서 보호받을 때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낀다. 또 그러한 것을 꿈꾸고 그리워한다.
이처럼 사람이 안정감을 느끼는 곳에 소속되어야 평안함을 느끼는 이유는 하나님이 본래 사람을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사람을 만드실 때, 하나님의 가슴 깊은 속에 있는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넣으셨다. 그래서 사람은 본래부터 영혼을 갖게 되었고, 하나님의 성품들을 간직한 존재로 창조되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그렇기에 사람은 하나님 품에 머물러 있을 때 가장 행복감을 느낀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은 어떤가? 교회 안팎에서 법적으로 소속된 곳이 많고 다양한 직함으로 불리지만, 정작 고단한 마음의 날개를 접을 곳이 없는 사람들이 많다. 모레알같고 나그네 같은 가족관계, 한순간만 방심해도 외줄을 타는 광대처럼 위태위태한 학교생활, 간신히 움켜쥔 고깃덩어리를 뺏기지 않기 위해서 충혈된 눈으로 이리저리 경계하는 짐승과 또 그것을 가로채려는 맹수들로 가득한 사회생활... 이런 모습들이 안타깝지만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또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네 삶의 모습들이다.
왜 이러한 고통 속에 사람은 빠지게 되었을까?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아서 그렇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보고만 계시는가?’고 큰소리치기도 한다. 그러나 그 이유는 하나님이 안계셔서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이 고통과 죄악 가운데 빠진 이유는 하나님의 품을 떠난데 그 원인이 있다. 부모가 권면하는 말을 잔소리쯤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품을 떠나면 그 순간부터 고생이다. 부모의 품을 떠나서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면 그곳에 새로운 행복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 옛말에 ‘집떠나면 고생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집을 떠난 그 순간부터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온갖 맹수와 굶주린 들짐승들이 쏜살같이 달려와서 등을 할퀴고 다리를 물고 마침내는 목을 물어뜯으려고 덤벼든다. 그 맹수가 바로 영적으로 마귀 사단인 것이다. 마귀는 집 밖 창문 옆에서 속삭이듯이 거짓 메시지로 사람을 미혹해서 끌어내고, 집 밖으로 나온 그 순간에 달려들어서 목을 잡아 달아난다.
오늘 본문 말씀인 누가복음 15장에 보면, 이러한 마귀 사단의 거짓 메시지에 속아서 아버지의 품을 떠났다가 세상적인 거친 표현으로 말하면 그야말로 ‘개고생’을 했던 사람이 나온다. 바로 아버지의 집을 나갔던 둘째아들(보통 탕자라고 표현)이다. 본문 내용을 보면 탕자는 아버지를 졸라서 자기 몫으로 예비된 재산을 미리 상속받고, 그것을 들고 먼 나라로 떠나버렸다. 그 돈을 갖고 집을 나설 때 아마도 그는 무지갯빛 꿈을 꾸며 신기루 같은 행복이 눈에 잡히는 듯했을 것이다. 그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면 행복할 것이라고 착각했던 사람이다.
그러나 착각은 자유라는 말도 있듯이 탕자의 이러한 생각은 글자 그대로 착각이었다. 그는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면서 가진 돈을 몽땅 허비하였고, 그 땅에 심한 흉년이 들어서 궁핍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부잣집 아들에서 졸지에 종으로 신분이 전락했고, 돼지 먹이통에서 돼지와 함께 겸상하면서 쥐엄나무열매를 함께 건져먹는 그야말로 돼지 같은 인생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것이 바로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난 사람의 모습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품을 떠난 사람들의 실존에 대해서 시편 107편 10-12절에서는 이렇게 기록한다.
“10 사람이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으며 곤고와 쇠사슬에 매임은 1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며 지존자의 뜻을 멸시함이라 12 그러므로 수고로 저희 마음을 낮추셨으니 저희가 엎드러져도 돕는 자가 없었도다”(시107:10-12)
이 말씀처럼 사람이 흑암, 사망의 그늘, 곤고함, 쇠사슬에 매인 힘든 사람을 살아가는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 지존자의 뜻을 멸시한데 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탕자가 그랬고,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난 모든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다. 사실 영적으로 볼 때 그 땅에 흉년이 든 것은 탕자가 거기에 갔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그 땅에 흉년이 나고 온갖 고통을 받게 하신 것은 결국 탕자라는 사람을 돌아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던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반면 탕자의 아버지는 동네어귀까지 나와서 집떠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탕자의 아버지의 마음이 곧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동일하다. 본문에서 깨달을 수 있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다 용서해 놓고 기다리는 사랑이다. 탕자의 아버지는 아들을 이미 다 용서해 놓고 기다렸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이다. 과거 우리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불신자, 죄악중에 헤멜 때)에도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용서해 놓으시고 기다리고 계셨다. ‘내가 아버지께 가면 나같은 사람을 용서해 주실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생각일 뿐이다.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다.
우리나라 옛말에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다. 예전에 어느교회에서 사역을 할 때, 가출한 아들을 문열어 놓고 기다리시던 권사님이 계셨다. 그분의 집에서 교회까지는 꾀 먼거리였지만, 아들이 돌아왔다가 실망할까봐서 이사를 하지 않으셨다. 이사는 둘째치고 출타할때도 문을 잠그지 않으신다는 말을 들었다. 주님께서 그 간절한 기도를 응답하셔서 몇 년후에 그 아들이 다시 돌아왔다.
그때 그 모습을 보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이 이와 같다고 느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가슴에 뭍으셨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통을 감수하시면서까지 모든 것을 용서하시고 문열고 기다리신다. 지금도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용서해 놓고 기다리고 계신다. 이 자비와 사랑으로 우리가 다시 살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해 놓고 기다리는 사랑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이다. 성경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수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을 끊임없이 주셨다. 성경에서의 최대의 약속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를(예컨대 돈, 지위 등) 얼마나 주시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는 약속이다. 십자가는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이요,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약속은 가장 큰 약속이다.
수많은 약속의 말씀 중에서 몇 곳만 보자.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나는 네 아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으로 번성케 하리라 하신지라”(창26:24) - 브엘세바로 올라온 이삭에게 주신 약속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창28:15) - 벧엘에서 야곱에게 주신 약속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창39:2-3) -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 할 때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출3:12) - 모세가 바로에게 가기를 주저할 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20)
놀라운 것은 이 약속들은 성경 속의 인물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멘(Amen)으로 받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신 약속이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이런 약속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시는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바로 우리들이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본문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의 사랑은 변치 않는 사랑이다. 품에 있을 때에나 품을 떠났을 때에나 여전히 그 사랑은 변함없었다. 오히려 품에 있을 때보다 품을 떠나 있을 때에 그 마음이 더 불붙는 듯 하였을 것이다.
바로 불붙는 아버지의 사랑이 탕자를 기다리게 만들었고, 지금도 동일한 마음으로 수많은 잃어버린 영혼을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래서 돌아오는 탕자를 봤을 때, 그 아버지는 달려가서 입을 맞추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살찐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였다. 돼지하고 겸상하던 그 입술, 몇 날인지 모를 씻지 않아서 노숙자 냄새가 펄펄 나는 그 몸을 아버지는 붙들고 입을 맞췄다. 우리로서는 정말 힘든 일이다. 그러나 아버지이기에 가능하다. 생각해보면 우리들의 영혼에 뭍은 죄악의 때국물이 어디 이만 못하겠는가? 더 추하고 냄새나고 더러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마다하지 않고, 십자가의 피로 씻어주시고 정결케 해주시고, 신분을 회복시켜 주셨다. 이것이 은혜다. 우리가 한 것은 없다. 모두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앞에서 우리가 할 일은 다른 것이 아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주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아직 주님을 떠나 있는 자들은 그 사랑의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와 온몸을 피로 씻어야 하고, 이미 돌아왔으나 그 사이에 손발이 더러워진 사람이 있다면, 주님의 보혈로 늘 그것들을 씻어내야 한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진심으로 참회하고 나오면 주님은 우리를 십자가의 피로 씻어주신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변찮는 주님의 사랑과 거룩한 보혈의 공로를 우리 다 찬양을 합시다”라는 찬송가사처럼, 우리 주님의 사랑은 변찮는 사랑이다. 십자가에서 이미 다 용서해 놓고 기다리는 사랑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그 안에서 소속감과 안정감과 평안함을 누리자. 생명의 포도나무 되신 주님께 붙어서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생명의 열매를 주렁주렁 맺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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