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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정복자’ 칭기즈칸 [역사에서 배우는 리더십]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105 15.01.03 10:5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역사에서 배우는 리더십]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정복자’ 칭기즈칸

 

10만명 기마군단으로 유라시아 평정

동·서양 연결한 ‘최초의 지구촌’ 건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자랑했던 나라는 어디일까.

중국 혹은 구(舊) 소련일까. 아니면 로마제국이나 알렉산더제국, 나폴레옹제국일까. 정답은 몽골제국이다. 몽골제국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유라시아 대륙의 대부분을 영토로 삼았던 역사상 최대 제국이다.

몽골제국은 13세기에 유라시아 전역을 호령했던 칭기즈칸이 건설한 나라다. 그의 아들과 손자 대(代)에 이르기까지 몽골제국은 약 150년 동안 동양과 서양을 한 손에 움켜쥐고 지배했다.

먹을 것을 찾아 초원을 헤매고 다니던 보잘것없는 일개 유목민 부족의 리더 테무친(칭기즈칸의 본명)이 세계 최고의 정복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비결은 과연 무엇일까.

 

 

Genghis Khan as portrayed in a 14th-century Yuan era album. .From Wikipedia

 

 

#. 미국의 역사 저술가 해럴드 램은 자신의 책 <칭기즈칸> 서문을 이렇게 시작한다.

 

“800년 전 한 사나이가 고비사막의 모래바람 속에 서 있었다. 그는 세계 절반의 땅에서 왕으로 군림했으며, 죽은 뒤에도 그의 말발굽이 지나간 곳은 수백 년 동안 두려움에 떨었다.

세상은 그를 끔찍한 학살자, 신이 내린 재앙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인류 최고의 전사, 왕 중의 왕이라고 불렀다. 그가 바로 칭기즈칸이다. 그는 왜 이렇게 극단적인 역사의 평가를 받는 것일까. (중략)

유럽 중심의 세계사 서술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알렉산더, 카이사르, 나폴레옹이라는 위대한 정복자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앞서 말한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정복자였지만, 그의 실체에 대해 아는 사람은 드물다. 왜 그의 역사는 고비사막의 모래바람 속에 묻혀버렸을까.”

 

끝이 보이지 않는 광대한 고원에 한 마리 늑대가 나타났다. 그 늑대는 일순간 고원의 적들을 평정하고 왕 중의 왕이 됐다. 이 늑대가 출현하기 전의 고원은 평화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세상이었다. 서로 살아남기 위해 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싸움을 벌였다. 그 아수라장의 전쟁터를 깨끗이 쓸어버리고 모든 적들을 하나로 결속시킨 게 바로 그 늑대다.

스스로를 ‘푸른 늑대’의 후손이라 믿었던 몽골족의 수장 테무친이었다. 그는 몽골족의 통일을 이뤘을 뿐 아니라 몽골고원의 여타 부족들도 모두 한 깃발 아래로 흡수했다. 그런 후 ‘칸(Khan: 왕)’에 올라 전대미문의 정복전쟁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한다. 유라시아 대륙 정복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칭기즈칸은 1162년 몽골의 한 유력 부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부족의 세력을 키우려는 야심가였다. 하지만 어느 날 적대적인 부족의 간계로 어이없이 독살되고 말았다. 그날로 열세 살 어린 소년 테무친과 그 가족의 견디기 힘든 시련이 시작됐다. 예수게이를 따르던 부족민은 대부분 테무친의 가족에게 등을 돌렸다. 유목민 부족들은 자신들의 생명과 재산, 삶의 터전을 보호해줄 수 있는 사람만을 리더로 인정하고 따른다. 남편을 잃은 아낙네와 어린아이들만 남은 테무친의 가족이 고립무원의 지경으로 빠진 것은 초원의 세계에서 불가피한 현실이었다.

 

어린 테무친은 이를 악물었다. 그와 가족들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삶을 이어갔다. 간혹 들쥐와 물고기도 잡아 먹으며 어렵사리 영양분을 보충했다. 유목민들은 대개 육식을 한다. 자신들이 기르는 소와 양, 말의 고기를 취해 주된 식량으로 삼는 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아버지를 잃은 어린 테무친과 가족이 얼마나 큰 고초를 겪었는지 금세 짐작된다. 게다가 주변 부족들은 과거 초원의 실력자였던 예수게이의 가족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후환이 두려웠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린 테무친은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열네 살 때는 적에게 포로로 잡혀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다. 그는 시련이 클수록 더욱더 스스로를 단련시켜 나갔다. 겨울 초원의 뼛속 깊이 파고드는 칼바람도, 호시탐탐 자신과 가족을 노리는 주변 부족들의 칼날도 모두 이겨냈다. 그렇게 푸른 늑대의 후예는 어떤 일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차돌 같은 전사로 거듭났다.

 

 

The onon River, Mongolia, in autumn, the region where Tem?jin was born and grew up. .From Wikipedia

 

 

혹독한 시련 거쳐 몽골고원 통일 이뤄내

 

1206년 봄, 몽골고원의 최북단 지역에 위치한 오논 강의 발원지에서 코릴타(쿠릴타이·부족 지도자들의 회의체)가 열렸다. 오논 강 유역은 테무친이 태어난 고향이다. 몽골족의 모든 부족과 씨족, 그리고 몽골고원의 패권을 다투다가 테무친에 무릎을 꿇은 부족의 대표들이 집결했다.

이 자리에서 테무친은 몽골고원의 모든 유목민을 통치하는 가장 높은 자리인 ‘칸’에 즉위했다. 칭기즈칸의 탄생이었다. 새로운 나라의 이름은 ‘예케 몽골 울루스’였다. 몽골어로 ‘큰 몽골 나라’라는 뜻이다.

 

몽골고원의 유목민 부족들이 통일을 이룬 것은 사실상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전에는 중원을 차지한 중국 왕조가 지속적으로 고원 내의 부족들을 분열시켜 왔다. 유목민들이 중원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이었다. 하지만 칭기즈칸은 고원의 모든 부족을 하나로 묶어냄으로써 중국 왕조가 파놓은 질곡을 마침내 벗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총사령관으로 활약한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은 자신의 저서 <전쟁의 역사>에서 칭기즈칸의 몽골고원 통일을 이렇게 평가했다.

 

“과거 한 부족이 다른 부족에게 승리한다는 것은 보통 파괴와 학살을 의미했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승리를 건설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처음부터 탁월한 사고력을 보여줬다. 즉 그는 파괴나 학살이 아닌 민족통일을 이룩했던 것이다. 그는 정복민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았고, 그러한 리더십 때문에 정복민들은 새로운 신분을 자랑스러워했다. 그는 의지력과 가공할 만한 세력으로 유목민들을 통일했지만, 한편으로는 보다 나은 생활이 뒤따를 것이라는 희망을 정복민들에게 심어줬다.”

 

몽골고원은 역사적으로 유목민의 세계였다. 수많은 부족과 씨족으로 나뉘어 약탈과 복수의 살육이 끊이지 않은 지역이었다. 그곳을 통일한 칭기즈칸은 다음 목표를 세웠다.

기름진 땅에서 풍요와 안정을 누리며 살던 정착민들의 국가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유목민들은 늘 가축을 먹일 초지(草地)를 찾아 이리저리 이동하며 사는 운명을 타고 난 사람들이다. 한곳에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습성이 오래되다 보면 천성이 된다. ‘이동 DNA’를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칭기즈칸은 그 유목민적 에너지를 하나로 모아 외부 세계로 발산하는 웅대한 목표를 세웠다.

 

칭기즈칸은 1207년 중국 서북쪽 변경에 있는 탕구트족의 왕국 서하(西夏)를 공격해 무릎을 꿇렸다. 몽골고원을 벗어나 시도한 최초의 정복전쟁에서 승전고를 울린 것이다. 이것은 신호탄에 불과했다. 칭기즈칸의 기마군단은 파죽지세로 주변 국가들을 정복해나갔다. 1215년 선조들의 숙적인 금나라로 쳐들어가 수도인 중도(中都·오늘날 베이징)에 입성한 데 이어 1218년에는 서요(西遼)를 정벌했다.

 

1219년에는 서아시아 이슬람 지역의 맹주 호라즘(또는 콰레즘) 왕국과 교역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다. 하지만 호라즘 왕국은 칭기즈칸의 사절단을 살해했다. 칭기즈칸의 이슬람 정벌이라는 악몽을 초래한 결정적 패착이었다. 칭기즈칸은 즉각 호라즘 왕국을 응징하러 군사를 일으켰다. 칭기즈칸의 정예 기마군단은 번영을 구가하던 호라즘의 도시들을 잇달아 파괴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칭기즈칸 군대의 노도와 같은 기세에 술탄 무하마드는 멀리 꽁무니를 내뺐다.

 

칭기즈칸이 자랑하는 최정예 병력인 ‘저승사자 군단’은 술탄 무하마드를 잡기 위해 끈질긴 추격전을 벌이면서 유럽을 떨게 했다. 몽골군에 쫓긴 술탄 무하마드는 결국 카스피해의 작은 섬까지 도주했다가 그곳에서 비운의 최후를 맞았다. 그 후 칭기즈칸은 장남 조치의 군대를 보내 러시아와 헝가리를 비롯한 유럽 정복에 성공했다.

 

알렉산더·나폴레옹·히틀러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

 

칭기즈칸이 정복한 지역은 그야말로 광대했다. 세계사에서 ‘정복자’로 이름을 남긴 알렉산더, 나폴레옹, 히틀러가 정복한 면적을 모두 합친 것보다 넓은 땅을 손아귀에 넣었다. 손자인 쿠빌라이칸이 세운 원나라까지 합치면 몽골제국의 최대 면적은 두 배 이상으로 늘어난다.

동쪽으로는 고려, 서쪽으로는 헝가리와 러시아, 남쪽으로는 인도 북부, 북쪽으로는 시베리아 남단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에서 자신들의 말발굽이 닿는 곳은 모두 다 정복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는 ‘푸른 군대’로 불렸던 기마군단을 이끌고 유라시아 대륙을 종횡무진 누비며 자신의 군대와 전쟁을 치른 모든 국가들을 복속시켰다. 정말 놀라운 것은 칭기즈칸의 정복전쟁을 수행한 병력이 약 10만명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가장 많은 군사를 동원했을 때도 그 수가 20만명이 채 되지 않았다는 게 역사가들의 추정이다. 그 정도 병력으로 당시 2억~3억명에 달하는 유라시아 대륙의 인구를 모두 굴복시켰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경이로움 그 자체다.

 

칭기즈칸이 마법을 부렸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 시대 어느 나라 군대보다도 전투력이 뛰어나고 사기가 하늘을 찌른 군대가 바로 칭기즈칸의 푸른 군대였다. 주목할 것은 극소수의 보급부대를 제외하고는 모든 병력이 전투병이었다는 점이다. 그것도 모두 말타기와 활쏘기, 칼싸움에 능한 기마병이었다. 칭기즈칸의 정복군이 본토인 몽골고원으로부터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유럽을 공략할 수 있었던 것도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진군 속도를 자랑한 기마군단 덕분이었다. 물론 정복 국가와 점령 도시에서 식량과 물자를 약탈하면서 보급문제를 해결한 것도 유라시아 대륙 원정을 가능하게 한 요소 중 하나다.

 

포로로 잡았거나 항복한 이민족 병사들을 자신의 군대로 편입시킨 것도 군사력 강화에 큰 보탬을 줬다. 한 나라를 굴복시켜 그 나라 병사들을 흡수한 다음, 또 그 군대로 다른 나라를 치는 식으로 대륙 정복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정복 국가의 기술자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칭기즈칸은 어떤 나라를 공격하더라도 기술자들은 죽이지 않고 데려갔다. 그들의 기술을 몽골군의 전투력 강화에 이용한 것이다. 일례로 페르시아 지역 정벌에 나섰을 때, 금나라에서 가져온 각종 첨단 전쟁무기를 대대적으로 동원하기도 했다.

 

칭기즈칸은 몽골고원을 통일한 후 국가 시스템을 확 뜯어고쳤다.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대대적인 개혁이었다. 칭기즈칸은 과거의 씨족제와 부족제를 과감하게 버리고 ‘천호제(千戶制)’라는 제도를 새로운 국가의 근간으로 삼았다. 천호제는 십호, 백호, 천호, 만호 단위로 구성되는 군사·행정 조직 시스템이었다. 십호는 10명의 무장 병사를 배출할 수 있는 기본 단위였다. 그 십호가 10개 모이면 백호, 백호가 10개 모이면 천호, 천호가 10개 모이면 만호가 됐다. 10진법에 따른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국가조직이었던 것이다. 이 천호제는 모든 국민을 하나로 묶어내는 총동원 체제의 기능을 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든 개혁은 피로현상을 동반한다. 더욱이 모든 국민을 강제적으로 결집시키는 것은 한계가 있다. 일시적으로는 총동원 체제가 굴러갈 수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내부에서부터 저항세력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칭기즈칸은 어떻게 국민들을 결속시켰을까. 또 고난의 장거리 원정을 떠나야 하는 병사들에게는 어떻게 사기를 불어넣었을까. 칭기즈칸의 강력한 리더십은 어디에서 비롯했을까.

 

 

Reenactment of Mongol battle .From Wikipedia

 

 

‘현대식 성과급제’ 도입해 최강군대 만들어

 

유목민들은 부족간 전쟁에서 이기면 힘세고 빠른 자들이 전리품을 몽땅 챙겨갔다. 서로 굶주리고 가난한 처지인 까닭에 앞뒤 가리지 않고 약탈부터 하고 보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아무리 전쟁에서 이겨도 부족 통합이 이뤄지지 않았다.

 

칭기즈칸은 메스를 댔다. 개인적인 약탈을 금지하는 군율을 도입한 것이다. 대신 전쟁에서 승리하면 전공(戰功)에 따라 전리품을 공평하게 나눠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성과 있는 곳에 보상 있다’는 현대식 성과급제를 도입한 셈이다. 이 군율로 병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게 됐다. ‘나도 열심히 싸워 이기면 잘살 수 있다’라는 생각은 칭기즈칸의 병사들을 더욱 용맹하게 만들었다.

 

칭기즈칸이 ‘예케 몽골 울루스’를 건국할 즈음, 몽골고원의 인구는 약 100만명에 불과했다. 이 적은 인구로 어떻게 거대한 유라시아 대륙을 지배하는 몽골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을까. 칭기즈칸은 정복한 국가의 국민들을 몽골인과 차별하지 않았다. 아무리 민족, 인종, 종교가 달라도 칭기즈칸에게 항복하고 복종을 서약하면 몽골제국의 백성이 될 수 있었다. 포로나 노예도 신분 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물론 칭기즈칸에게 끝까지 저항하는 나라나 도시는 무참하게 파괴되고 살육되기도 했다.

 

칭기즈칸의 피(被)정복민에 대한 포용적 정책 덕분에 ‘몽골 드림’을 이룬 이민족도 적지 않았다. 대표적인 예가 금나라 관료 출신의 야율초재와 야율아해다. 야율초재(耶律楚材)는 금나라의 수도가 몽골군에 함락될 때 포로로 잡혔다. 하지만 그는 칭기즈칸의 총애를 받으며 행정가, 유학자, 점술가로 활약했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야율초재는 칭기즈칸에게 살상을 자제하라는 건의까지 할 정도였다. 또 몽골제국의 행정, 세제 등을 중원식으로 바꾸는 노력도 기울였다. 야율아해는 행정, 법률, 전략 등으로 몽골군의 약점 보완에 큰 기여를 했을 뿐 아니라 호라즘 전쟁에 참가했다가 사마르칸트의 총독까지 지냈다.

 

칭기즈칸의 최측근이었던 천민 출신의 대장군 모칼리도 몽골족이 아니었다. 그의 출신지는 정확하게 전해진 바가 없지만, 고려인이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모칼리는 ‘좌(左) 모칼리, 우(右) 보오르초’라고 불릴 만큼 칭기즈칸의 양대 측근으로 큰 신임을 얻었다. 칭기즈칸은 서역 원정을 떠날 때 모칼리에게 금나라의 통치를 맡길 정도로 그를 아꼈다.

 

칭기즈칸은 유라시아 대륙을 정복한 후 명실상부한 제국에 걸맞은 통치 시스템을 갖춰 나갔다. 첫 번째가 법치 제도 확립이었다. 그는 몽골제국의 헌법에 해당하는 ‘대자사크’를 만들었다. 대자사크는 몽골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成文法)이다. 대자사크는 몽골어로 ‘큰 법’이라는 뜻이다. 몽골제국 전체에 적용되는 법이라는 의미가 담겼다. 대자사크는 불과 36개의 조항으로 구성됐다. 하지만 인간사회에서 지켜야 할 규범은 대부분 포함돼 있었다. 최소한의 법률로 대제국을 통치한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칭기즈칸은 정복전쟁을 펼치면서 때로는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 무소불위의 제왕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균형 감각과 합리적인 판단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중대사를 결정할 때는 반드시 회의를 열어 합의를 도출하도록 한 것이 단적인 예다. 특히 전쟁 개시나 후계자 선정과 같은 국가적 사안은 지도자들의 회의체인 코릴타에서 결정했다. 코릴타에는 국가의 원로들과 칭기즈칸 가문의 일원인 ‘황금씨족’, 천호장들이 참가했다. 어떤 사안의 경우에는 최종 결론이 나기까지 몇 달이 걸리기도 했다. 그만큼 합의를 중시했다는 뜻이다.

 

‘대자사크’로 법치, ‘코릴타’로 합의제 실천

 

칭기즈칸은 탕구트 원정을 떠났던 1227년에 세상을 떠났다. 원정 도중 낙마를 당해 입은 부상이 악화된 탓이었다. 그의 나이 65세였다. 칭기즈칸은 죽음을 몇 시간 앞두고 탕구트 주둔지의 병석에 누워 ‘칸’으로서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적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절대로 울거나 한탄하지 말라. 그리고 약속한 날에 탕구트의 왕과 백성들이 성을 떠났을 때 그들을 전멸시켜라.”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정복자는 그렇게 운명처럼 원정길에 이승과 작별했다. 그가 죽은 후에도 몽골제국은 150여년 동안 지속됐다. 원나라가 명나라에 밀려 ‘말 타고 양 치던 고향’ 몽골고원으로 퇴각하면서 몽골제국의 신화는 끝을 맺었다. 하지만 칭기즈칸 제국의 뿌리에서 파생돼 나온 무굴제국, 오스만투르크제국, 크림칸국 등 후계국가의 명맥은 19세기 중반까지 이어졌다. 유라시아 대륙 전역에 드리운 칭기즈칸의 그림자가 500년 이상 지워지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지는 1995년 ‘지난 1000년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칭기즈칸을 선정한 바 있다. 그 선정 이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은 역사는 짧았지만 세상을 바꿔놓았다. 콜럼버스처럼 칭기즈칸은 지구를 축소시킨 주인공이다. 그와 그의 후손들은 유라시아를 넘어 동(東)과 서(西)의 문명이 연결될 수 있도록 광대한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었다. 우리가 선택한 ‘1000년의 인물’은 박애주의자도, 뛰어난 사상가도, 위대한 해방가도 아니었다. 사실 그는 깡패였다. 그러나 역사는 때때로 깡패에 의해 만들어진다. 역사는 성인이나 천재, 해방가들의 이야기로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참고 문헌 : <밀레니엄맨 칭기스칸>, , <헤럴드 램의 칭기즈칸>

 

/ Economyplus.Cchosun

 

 

 

During the battle of Indus .From Wikipedia

 

 

 

 

 

징기스칸 군대는 왜 無敵이었나?

 

野性에서 우러나온 간편성, 신속성, 자신감

 

글 | 조갑제 조갑제닷컴대표

 

 

 

 

기자는 1996년에 몽골에서 헝가리까지 유라시아의 이른바 몽골 벨트 지역 15개국을 약60일에 걸쳐 취재한 적이 있었다.

 

13세기 초 징기스칸의 몽골 기마군단이 高麗에서 헝가리에 이르는 문명세계의 거의 전부를 정복했을 때 몽골 본토의 인구는 1백만에 불과했으나 점령지의 인구는 약1억이었다. 이런 '1당 백'의 정복과 통치가 어떻게 가능했느냐 하는 데 대해서 서양 학자들은 많은 연구를 하고 있다.

1927년에 영국의 전략사상가 리델 하트가 쓴 '위대한 지휘관들을 벗긴다(Great Captains Unveiled)'라는 책을 읽어보았다.

 

그 첫 장이 징기스칸과 그의 휘하 장군 스부데이를 다루고 있었다.

스부데이는 징기스칸의 손자인 바투를 모시고 러시아와 유럽을 원정했던 勇將이다. 이 章의 결론에서 著者는 몽골 기마 군단 조직의 간편성(Simplicity)을 승리의 근본으로 꼽았다.

몽골 군단은 보급부대가 따로 없는 전원 기병이었다. 기병 한 사람이 말을 4∼5마리씩 몰고 다니면서 짐을 나르는 데뿐 아니라 비상식량이나 물통(사막을 건너갈 때는 말의 피를 빨아마셨다)으로 활용했다. 느린 보급부대가 따라 다니지 않으면 전투부대의 이동속도는 엄청 빨라진다.

나폴레옹의 유명한 공식에 따르면 <전투력=무장력x기동성>이다. 몽골군단은 全員기병체제 덕분에 농경민족 군대보다 4∼5배나 빨랐다. 기동성을 높이기 위해서 몽골군단은 갑옷도 가볍게 만들었다.

 

몽골 군단은 지금도 깨어지지 않는 기록을 두 개 갖고 있다. 그들은 1237∼1238년 겨울, 그리고 1240∼1241년 겨울 두 차례 러시아로 쳐들어가 겨울 작전을 성공시켰다. 수 백년 뒤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굴복시켰던 러시아의 冬장군도 몽골 기마군단의 지구력을 꺾지 못했던 것이다.

몽골 기마군단은 1241년 초에는 헝가리 정복전에서 하루 평균 1백km를 주파했다. 이 속도는 2차세계대전에서 기록된 독일 기갑군단의 돌파속도보다 더 빠른 것이었다.

 

 

2000년 4월 1일에 개봉한 영화 '징기스칸'의 한장면'.

 

 

세계사를 바꾼 간편성의 전략사상

 

당시 유럽의 기마전법은 중무장이었을 뿐 아니라 보병과 연계된 조직이었다. 성격이 다른 이런 두 조직을 지휘하는 것은 기병 單一 조직보다도 복잡하다. 인간이든 조직이든 복잡하면 기동성이 떨어지게 돼 있다.

기자가 헝가리에 가서 확인 한 바에 따르면 중세 유럽 기사들의 갑옷 무게는 약40kg이었고 말에 덮어씌운 甲胄까지 보태면 1백kg을 넘었다. 이런 말은 넘어지면 혼자서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영화에선 근사하게 보이지만 이런 로보캅 같은 중무장은 결국 죽기 싫다는 방어적인 심리를 반영한다. 이는 복잡한 규정을 많이 만들어 철갑처럼 자신을 둘러싸고는 무사안일을 추구하는 관료조직에 비유할 수 있다. 유럽 기사들은 창과 칼을 主무기로 썼다.

 

그들은 활이 비겁한 무기라 하여 법으로 금지시키기도 했고 하층민의 무기로 제한했다.

세종대왕이 野人들에 대한 간첩작전을 지시하니까 '오랑캐를 상대로 어찌 속임수를 쓸 수 있겠습니까'하고 들고 일어났던 주자학 선비들의 僞善을 연상시킨다. 도덕을 아무데나 갖다대면 결과는 가끔 非도덕으로 나타난다.

 

중무장한 유럽기사들에 대하여 몽골기만군단의 고전적 전법은 200∼300m 쯤의 거리를 두고 활로써 집중사격을 하여 혼란에 빠뜨린 다음 돌격하여 요절을 내는 것이었다. 몽골 군단은 또 퇴각을 위장하여 유럽기병들을 유도, 분산시킨 다음 삽시간에 재집결하여 분산된 敵을 각개 격파하는 戰法도 즐겼다. 이것은 기동성에서 앞섰기 때문에 가능했다. 리델 하트는 몽골군단의 全員기병제를 참고하여 영국도 보병에서 독립된 순수한 기갑군단을 만들어야 한다고 이 책을 통해서 주장했다.

 

그의 주장에 귀를 기울인 것은 히틀러의 장군들이었다. 독일 기갑군단의 아버지로 불리는 구데리안은 '나는 리델 하트의 제자다'고 말한 적이 있다. 프랑스의 드골 대령도 독립기갑군단의 창설을 주장했던 사람이다. 2차 세계 대전의 초장에서 독일이 전격전으로써 연전연승한 것은 탱크들을 보병사단에 분산시켜 놓지 않고 단일한 기갑군단 조직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편 손가락이 아닌 불끈 쥔 주먹을 만들었다는 얘기이다. 이 발상의 근본이 간편성(Simplicity)인 것이다. 리델 하트에 따르면 기동성은 간편성에서 나오고 기동성은 중무장보다도 더 안전한 방법이란 것이다. 즉, 빠르면 산다는 뜻이다.

 

간편성은 자신감에서

 

놀랍게도 미국의 가장 성공한 최고경영자 잭 웰치가 몽골 기마군단의 성공 원리와 꼭 같은 내용을 경영의 원리로 삼고 있다. 그는 GE의 회장일 때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신속하려면 (조직이나 경영지침이) 간편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複문장의 脚注가 붙은 경영지침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간편하지 않으면 빨라질 수 없고 빨라지지 않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엔지니어에게 간편성이란 간결하면서도 기능이 우수한 디자인을 뜻합니다. 영업인들에게는 이 간편성의 원칙이 투명한 거래를 의미합니다. 생산현장에서는 모든 작업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상식적인 작업과정을,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쉽게 말하고 솔직하고 정직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는 또 '자신 없는 경영자들일수록 복잡한 것을 만들어낸다'면서 '겁이 많고 불안한 관리자들은 두꺼운 계획서와 슬라이드가 있어야 안심을 하는데 그 내용은 하나마나한 것들뿐이다'고 했다. 잭 웰치는 그러면서 '신속성(Speed)은 간편성(Simplicity)에서 우러나오지만 이 간편성은 자신감(Self-Confidence)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결론내렸다.

 

'그런 자신감은 관료주의의 충복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다. 직위가 아니라 진정한 성취에서 보람을 찾으려 하는 사람, 정보를 공유하고 자신의 주변, 상하 사람들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사람, 그런 다음 대담하게 행동하는 사람들, 이들이 바로 (조직과 인간관계의) 간편성을 창조하는 자신있는 사람들이다.'

 

몽골인종의 오기

 

그러면 웰치는 이런 성공의 3S 조건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조직경영에 적용하는가.

 

<능력의 한계를 벗어날 정도로 과중한 업무를 맡은 경영진은 가장 능률적이다. 자질구레한 데 신경 쓰고 참견하여 부하들을 귀찮게 할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사무실 근무자는 현장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현장으로부터 보고를 받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보고는 사무실에서 현장으로 향해야지 거꾸로가 돼서는 안된다. 우리는 옛날에는 몇년 걸리던 투자결정을 이제는 며칠만에 해치우고 있다.>

 

자신감(Self-Confidence)-간편성(Simplicity)-신속성(Speed)의 3S 공식에서 몽골인종과 자신감의 문제는 어떻게 연결되는가. 기자가 하바드 옌칭 도서관의 어두침침한 서고에서 찾아낸 '위험한 변경(The Perilous Frontier)'이 그 해답을 안고 있었다. 북방 유목민족 전문학자 토마스 J.바필드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기마유목민족들은 가장 발달된 정착문명인 중국과 인접하여 살면서도 중화적 문화와 이념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속으로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경멸했다. 돔의 천장 같은 광활한 하늘 아래에서 말젖과 말고기를 먹으면서 천막에서 나고 죽고 전쟁과 모험을 동경하는 자신들의 삶이 농경민족보다도 더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목축생활이 유지될 수 있었고 이에 기초한 기만군단의 우세도 계속될 수 있었다.>

 

高麗史에는 몽골장군 흔도가 고려 장군 金方慶에게 한 이런 말이 실려 있다.

 

<내가 보건대 고려 사람들은 모두 글도 알고 불교를 믿는 것이 漢族과 유사한데 매양 우리를 멸시하면서 '몽골 사람들은 살륙만 일삼으니 하늘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다'라고들 한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에게 살륙하는 풍속을 준 것이기 때문에 하늘의 뜻에 따라서 그렇게 하는 것에 불과하니 하늘은 그것을 죄로 삼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그대들이 몽골 사람들에게 굴복하게 된 까닭이다.>

 

먹물 먹은 사람들에 대한 武士들의 경멸과 '우리식'에 대한 자부심을 담고 있는 흔도의 이 오기서린 일갈은 몽골기마군단의 파괴력이 자라난 정신적 토양을 보여주고 있다.

 

간편성이 선진국의 브랜드

 

기자는 해외 여행을 여러 번 한 뒤에 이런 원리를 발견했다. '선진국은 제도와 사람이 간편한 곳이다'는 원리가 그것이다. 예컨대 선진국 사람들은 넥타이를 안 매는 경우가 많다. 기자가 지난 봄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여행했을 때 종일 돌아다녀도 넥타이 맨 사람을 세 사람 보았을 뿐이다. 이 나라는 국왕도 공식석상에 나와 넥타이를 풀어버린다고 한다. 제도가 간편하고 사람들이 소박하면 살기가 편리한 것이다. 허례허식과 후진국이 친하고 편리함은 선진국의 브랜드이다.

 

속도-간편함-자신감의 3S 성공 방정식이 시대를 뛰어넘어 군대와 기업에 적용될 수가 있다면 기자 사회에서도 응용될 소지가 있는 것이 아닐까. 군대 이상으로 속도를 중시하는 것이 기자와 언론 조직의 생리가 아닌가.

 

<특종이 역사를 바꾸고 역사를 만든다는 기자로서의 자부심(Self-Confidence)과 간편, 정직, 질박한 생활 자세(Simplicity)를 갖춘다면 速報(Speed)는 저절로 되는 것이다>

 

이런 해석과 응용에서 핵심되는 단어는 간편성일 것이다. 이 복잡한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간편하게 살 것인가. 간편해지려면 일과표의 많은 부분을 잘라내야 하므로 이것은 결단이다. 冠婚喪祭의 문제, 소비성향, 인간관계, 복장, 話法, 예절,회의, 업무처리 방식 등등 많은 부분에서 무엇을 줄이고 없애야 본연의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최대한도로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하루에 해야 하는 일들의 가지수를 줄이는 대신에 좁은 주제를 붙들고 깊게 파고들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것인가. 당당한 정신을 가지고 간편하게 살면서 기민하게 일하는 3S型인간! 하나의 話頭로서 던져보았다.

 

주체세력

 

징기스칸은 세계제국을 만들어 진정한 의미의 세계사를 연 사람이란 평을 듣는다. 몽골을 통일한 뒤 50년 동안 그와 자손들이 정복하여 세운 몽골제국의 영역은 고려, 중국, 중앙 아시아, 이란, 이라크, 러시아, 인도 북부에 걸쳤다. 약3000만 평방킬로미터로서 지금 중국의 세 배 규모였다. 유교, 불교, 이슬람, 기독교 문명권을 다 통합했다. 비로소 서양과 동양이 하나의 역사 단위로 등장한 것이다. 징기스칸과 후손들은 유럽에서 고려까지의 유라시아 지역에 평화와 질서를 가져왔다. 팍스 몽골리카의 시대였다. 평화와 질서 속에서 동서양의 교류와 무역이 꽃피었다.

 

몽골은 전쟁은 무자비하게 했지만 통치는 너그럽게 했다. 그들은 종교나 언어의 차별을 금지했다. 피정복지 사람들은 세금을 잘 내고 반란만 일으키지 않으면 많은 자율권을 누릴 수 있었다. 인류역사상 가장 생산성이 높았던 징기스칸의 세계 정복은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조직 운영 시스템의 각도에서 더 연구해보기로 하자.

 

징기스칸은 몽골을 통일한 뒤 수많은 부족들의 집단적 이기주의를 누르고 중앙으로 집중된 권력을 만들기 위하여 친위대를 조직하였다. '케식'이라 불린 이 친위대는 약 1만명의 장병들로 구성되었다.

친위대원은 몽골의 모든 부족을 다 망라하였고 특히 부족장이나 귀족 아들들 중에서 많이 뽑았다. 부족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지 않고 오로지 징기스칸과 국가를 위해서만 충성하는 정예 부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징기스칸은 귀족들의 아들들을 이 부대로 끌어들임으로서 부족장들이 반란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일종의 인질로 삼았다. 친위대는 통일과 정복 시대의 지도세력을 배출했다.

 

이는 통일신라의 화랑도와 같은 조직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몽골 군대는 이 1만명의 친위 사단 출신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일종의 몽골판 '하나회'가 된 것이다. 민주 국가에서는 군대 내의 私조직이 역기능을 하지만 '힘이 곧 正義'이던 시절의 하나회는 정권을 안정시키고 권력을 지도자로 모이게 하여 전쟁 지휘에 일사불란하게 만드는 중심세력이 되었던 것이다.

 

징기스칸은 이 친위대를 하나의 손잡이로 삼아 20만명의 몽골 기마 군단을 아주 간편하게 부릴 수 있었다. 큰 기계를 돌리려면 작은 톱니바퀴가 연결고리 역할을 해주어야 하듯 친위 그룹은 지도자와 多衆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작은 톱니바퀴였던 것이다.

 

동원력

 

징기스칸이 친위대를 주체 세력으로 하여 몽골을 통합했다는 것은 국가 동원력이 증강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인구 100만명이 20만명의 기마군단을 편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는 인구 4800만명의 한국에서 1000만명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 징기스칸은 군대와 사회를 밀접하게 연결하는 편성을 했다. 분대(10명)와 소대(1백명)는 부족 단위로 조직되었다. 그들은 親族이자 戰友이기도 했다. 그 대신 연대(1천명)와 사단(1만명)은 반드시 각기 다른 부족 출신의 분대와 소대들로 복합 구성이 되도록 했다. 부족적 분열성을 군대를 통해 융화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런 부대는 동고동락하는 집단이 되어 전우애를 바탕으로 전투력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同苦同樂

 

몽골이 통일된 뒤 반포되었던 일종의 율법인 '야사'에는 '징기스칸께서는 다른 사람이 있는 데서 혼자 음식을 먹는 것을 금하셨다. 먹으려면 다른 사람과 같이 먹어야 한다. 또 전우보다도 많이 먹는 것을 금지한다'고 적혀 있다. 이들의 軍律은 엄했다. 보초를 서다 잠이 든 두 기병이 붙잡혀 왔는데 솔직히 잘못을 인정하고 처형되는 것을 본 한 페르시아인이 놀랐다. 몽골 지휘관은 '너희들은 그런 경우에 거짓말을 한다. 우리 몽골인은 1000명의 목숨이 달려 있다고 해도 거짓말을 할 바에야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고 일갈했다.

 

敵에서 배운다

 

몽골 기마 군단은 초원에서는 잘 싸웠지만 농경 민족군대가 성문을 닫고 지구전을 시작하면 어떻게 할 줄을 모르고 당황하는 것이었다. 북방 유목 민족 군대는 중국을 칠 때 항상 큰 성의 주변만 노략질하다가 돌아가곤 했다. 징기스칸도 북중국의 금나라와 서하(西夏)를 공격할 대 애를 먹었다. 그는 금나라로부터 기술자들을 잡아가서는 공성(攻城) 무기를 개발하여 이슬람권을 칠 때부터 써먹기 시작했다. 징기스칸 군대가 이란에 있던 니샤푸르라는 도시를 공격할 때 동원한 무기 목록을 보면 굉장하다.

 

창을 쏘는 기계 3000, 노포(弩砲) 즉 화살을 쏘는 일종의 대포 300, 석유에 불을 붙여 던지는 장치 700, 사닥다리 4000, 돌을 던지는 장치 2500개로 되어 있다.

 

이런 장비를 갖춘 몽골군단은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포병 공병 기갑 보병의 복합 편성이었다. 몽골 기마 군단이 기병 전술에만 의존했더라면 중앙아시아나 중국의 성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의식화

 

징기스칸과 몽골인들은 샤머니즘적 세계관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세계를 정복하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확신했다. 기독교 신도들이 이 세상을 악의 구렁텅이로부터 구원하라는 사명을 받았다고 믿은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몽골에 저항하는 세력은 악이며 이들을 학살하는 것은 선이 된다.

징기스칸이 반포한 '야사'는 징기스칸의 지배적 위치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를 모두 역적으로 규정했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聖戰 사상과 비슷하다. 전쟁에서는 도덕적 명분이 큰 전투력이다.

 

몽골은 여러 나라들 중 한 나라가 아니고 모든 나라 위에 군림하는 세계 제국이었다. 야사는 다른 나라에 서신이나 使者를 보낼 때에는 몽골 군대의 위세를 자랑하여 협박하지 말고 이렇게만 쓰도록 하라고 문틀을 아예 정해놓았다.

 

<당신네들이 순순히 복속하고 나오면 좋은 대우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만약 저항한다면 영원한 하느님께서는 당신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알고 계신다.>

 

종교적 사명감과 도덕적 우월감을 가진 군대는 강력하다. 전쟁에 대한 자기 정당성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적의 사령탑을 마비시켜라

 

몽골 군대는 적의 지휘부를 끝까지 추격하여 말살하는 것을 정책으로 삼았다. 징기스칸은 호레즘 황제를 추격하기 위해 맹장 체베를 장수로 삼아 2만명의 별동대를 파견하였다. 이 체포조는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를 무대로 약 2만㎞의 추격전을 전개하였다. 호레즘 황제(술탄)는 카스피해 섬에 숨어 들어가서 죽었다.

몽골군이 1241년 유럽을 쳐들어갔을 때는 헝가리의 벨라 왕이 패전한 뒤 지금의 크로아티아(舊 유고연방)로 도망가자 몽골군이 기나긴 추격적을 벌였다. 벨라왕은 아드리아海의 섬으로 도피하였다. 몽골 추격대가 오고타이 황제의 사망으로 회군하는 바람에 그는 살았다. 몽골 군대는 승전의 지름길은 지휘부를 마비시키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창조성

 

몽골 군대의 전법은 그때까지 문명 국가에서 통용되던 보병 중심의 일차원적 전법을, 기병 포병 보병을 배합한 입체적 전술로 발전시킨 혁명적인 것이었다. 여기에다가 스파이망(網)에 의한 정보 수집, 몽골 군대가 가기 전에 敵地에 공포를 먼저 확산시키는 심리전, 연막을 이용한 교란 작전, 위장과 매복, 회피와 반격의 되풀이, 포로를 화살받이로 이용하고.

이런 기상 천외하고 변화무쌍한 창조적 발상이 가능했던 것은 야수와 같은 몽골인들이 어떤 이념의 포로가 되지 않고 오로지 '전쟁은 이기기 위하여 하는 것'이란 실용정신에 충실하였기 때문이다.

 

유럽 기사단의 도덕주의

 

반면에 유럽 기사들은 전쟁에 기독교적 명분론을 개입시켰다. 전쟁도 스포츠처럼 당당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매복·회피·우회 전술은 비겁한 것으로 매도당하였다. 영국을 제외하고는 많은 나라에서 활은 멀리서 상대를 쏘아 쓰러뜨리는 비겁한 무기라 하여 배척당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 기사들은 '로보캅'같은 무거운 갑옷을 입고 나왔다. 말에게도 갑주를 뒤집어 씌웠다. 이런 방어적, 패배적, 위선적 전쟁 개념은 자기들끼리의 싸움에서는 통했지만 '전쟁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하는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야수 같은 몽골군의 공격적, 창조적, 실용적 전략 앞에서는 웃음거리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용병의 한계

 

이슬람 군대는 8세기 중반 고려인 高仙芝가 이끄는 唐軍을 중앙아시아의 탈라스 강변에서 격파한 다음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잡았다. 그 이후 이슬람 군대는 지하드(聖戰) 의식으로 무장하여 기독교 문명권을 위협하고 스페인을 수백년간 지배하였다. 징기스칸 시대에 들어와서는 이슬람 세계도 여러 나라로 쪼개져 있었다. 호레즘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몽골족과는 인종적으로 가까운 투르크족을 용병으로 쓰고 있었다. 투르크족은 문화적으로 친근한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집단적으로 투항해버렸다.

 

징기스칸 원정 군대는 그 뒤 몽골·투르크 혼성 부대로 변질된다. 장교단은 물론 몽골족이었으나 병사들 중에서는 투르크족이 더 많아 전체 인원수에서는 몽골족이 소수였다.

 

징기스칸은 부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적을 추격해 쓰러뜨리고 그들 소유물을 독차지하여 그 여자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것이야. 그들의 말을 빼앗아 타고다니고 그 여자들의 몸을 침대와 베개 삼아 노는 것, 이것이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일세.'

 

나는 야만인이다

 

징기스칸을 생전에 목격한 사람들의 증언에 다르면 그는 키가 크고 몸집이 탄탄하게 생겼으며 눈은 고양이 눈이고 노년에도 흰 머리가 없었으며 성욕이 대단했다고 한다. 몽골 기마 군단의 말발굽에 짓밟힌 농경 및 도시 문명권의 사람들에게는 악마 같았던 징기스칸이지만 그는 부하들을 골육지정으로 사랑한 사람이었다. 부하들은 이렇게 평했다.

 

<그는 자신의 옷으로 부하들을 입히고 자신의 말에 부하들을 태운다.>

 

징기스칸은 아주 검소한 생활을 한 사람이다. 징기스칸은 말년에 도교에 호기심을 가졌다. 그래서 중국 금나라의 장춘진인(長春眞人)이란 道人을 중앙아시아의 軍營으로 초청하여 말씀을 듣기도 했다. 징기스칸은 귀국길의 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하느님께서는 중국의 오만과 사치에 싫증이 났습니다. 나는 북방의 야만인입니다. 나는 소와 말을 치는 사람과 같이 옷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습니다. 우리는 같이 희생하고 같이 노획물을 나눕니다. 나는 우리나라를 마치 갓난 아기처럼 보살피고 나의 병사들을 형제처럼 대합니다.>

 

野性이 부른다

 

적에게는 무자비하고 부하들에게는 너그럽다. 이 단순 명쾌한 彼我 구분이 징기스칸 리더십의 핵심이고 戰場과 시장에서 통용되는 불멸의 승리 제1조인 것이다.

 

몽골인들은 목축과 수렵을 통해서 동물의 생리를 잘 파악한 민족이었다. 몽골인들의 시력은 평균 4.0 이상이고 수십리 밖에서 짓는 밥의 증기를 냄새 맡을 수 있다. 날씨의 변화를 기가 막히게 感知할 수 있었고 추위와 더위를 견디는 데에 초인적이었다. 몽골인들은 체력과 생리뿐 아니라 사고방식도 동물화되어 있었다.

 

그들은 권력 투쟁이나 전쟁에도 이 동물 세계 법칙을 적용하려고 했다. 弱肉强食, 適者生存의 무한 경쟁이 자연의 법칙이고 이것이 바로 野性의 본질인 것이다. 이런 야성을 소유한 사람이 투쟁에서 강한 것은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승부에 철저한, 정직한 정신 자세 덕분이다.

 

몽골인들의 이 체력과 정신력은 수많은 전쟁을 통해서 프로로 단련되고 조직이란 그릇에 담기면서 엄청난 폭발력을 비축하게 되었다. 야성의 본질은 경쟁과 자연스러움이다. 인공적 환경에서 살다보면 이 야성을 잃게 된다. 검소한 생활 태도가 중요한 것은 인간을 人工에서 벗어나게 하여 투지 직관력 본능 등 野性을 되찾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등산, 낚시, 골프 등을 통해서 자연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도 野性의 회복을 위한 본능의 부름 때문이 아닐까.

 

몽골인처럼 지배민족으로 태어난 또 다른 민족은 바이킹이다. 지금 몽골족 국가로 가장 크게 성공한 나라는 일본과 한국이고 바이킹 국가는 거의가 일류이다.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영국, 아이슬란드 등. 몽골족 가운데 유교나 기독교와 만난 나라는 발전하고, 바이킹도 10세기를 전후하여 기독교화하면서 유럽 문명의 일원으로 들어왔다. 민족이 어떤 종교와 만나는가도 중요하다.

 

/ 조선 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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