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흔 살 노파로 변해버린 소녀
정신없이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소리처럼 뜨거운 일본 언론의 반응을 뒤로하고, 도쿄 유락쵸 내의 도호 시사실에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관람했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원작자인 J.R.R. 톨킨의 제자로 수학한 다이애나 윈 존슨의 동명 판타지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19세기 말 어느 유럽의 가상 국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판타지 드라마다. 마법과 과학이 공존하는 기이한 시대, 18살의 소녀 소피는 죽은 아버지가 남겨준 모자 상점을 운영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아버지의 가업을 잇기 위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뒤로 미루고 살아가던 장녀 소피는 그저 묵묵하게 일하는 것에만 전념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에게 일생일대의 사건이 벌어진다. 동생을 만나러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나게 된 청년 하울에게 그만 마음을 빼앗기고 만 것이다. 움직이는 성에 사는 하울은 알고 보니 미녀의 심장을 훔쳐 간다는 소문의 꽃미남 마법사다. 여기에 설상가상 늘 하울의 뒤를 쫓으며 그를 짝사랑하는 황무지 마녀가 질투심에 소피를 90살의 노파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황무지 마녀의 저주로 90살의 노파가 되어버린 소피. 그녀는 외모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을 것을 걱정한 나머지, 집과 멀리 떨어진 황야로 정처 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길의 여정에서 그는 땅 밑에 거꾸러져 있던 허수아비 카부를 도와주면서 그의 도움으로 네 발로 움직이는 하울의 기괴한 성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가정부를 자청한 소피는 하울과 ‘불의 악마’ 캘시퍼, 하울의 견습생인 마르크와 기묘한 동거를 시작하게 된다.
신기하게도 90살의 노파가 된 소피는 전에는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했던 자신에 관한 성찰도 하게 되고, 살면서 결코 느껴보지 못했던 삶의 평온함을 느끼게도 된다. 그러나 그 사이 유럽을 감싸는 전쟁의 화염은 더욱 짙어져만 가고, 하울의 비밀을 조금씩 알게 된 소피는 그 비밀을 알게되는 깊이만큼 하울과 점점 더 가까워지게 된다.
# 친숙한 미야자키식 판타지, 그리고 뜻밖의 사랑이야기
마야자키 하야오의 신작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노장 감독이 그동안 보여줬던 주옥같은 애니메이션 각각의 요소들을 절묘하게 섞어 넣은 듯한 작품이다. 여주인공인 소피는 외양은 90살의 노파지만, 정신적으로는 18살의 소녀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치히로처럼 마법의 세계에 들어오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다지는 인물로 묘사된다. 마법의 강력한 힘으로 변신하여, 결국 세상을 파괴하는 전쟁과 당당히 맞서는 마법사 청년 하울의 캐릭터를 통해서는 그간 미야자키 감독이 꾸준히 주창해왔던 인간과 자연의 친화문제와 반전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하울은 <모노노케 히메>의 여주인공처럼 선과 악, 자연과 인간 사이에서 부유하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강건해진다. 한편, 하울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각종 전투신은 <붉은 돼지>의 전투신을 떠올리게 만들고, 아기자기하고 신기한 하울의 성 내부는 <마녀 배달부 키키>의 공간을 연상시킨다. 새로운 정체성을 찾게 된 아이의 성장 드라마, 자연 친화에 관련한 환경 문제, 반전의 메시지까지, 그간 미야자키 감독이 줄곧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말해왔던 모든 주제들이 이 신작 애니메이션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그런데 여기에 새롭게 눈에 띄는 점은 남녀주인공의 본격적인 사랑이야기가 처음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전시를 배경으로 애틋하게 펼쳐지는 소피와 하울의 사랑이야기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하쿠와 센(혹은 치히로) 사이에서 슬며시 보여주다 말았던 ‘설렘의 감정’을 확실하게 ‘애틋한 사랑’으로 증폭시켰다. 극중 소피와 하울은 서로 사랑한다고 수줍은 고백을 하기도 하고, 미야자키 감독 애니메이션 최초로 뜨거운 키스를 관객들에게 선보이기도 한다.
그것도 무려 두 번씩이나! 사랑의 힘으로 운명까지 극복한 두 주인공의 끈끈한 사랑은 영화음악가 히사이시 죠의 서글프면서도 웅장한 OST 안에서 슬프도록 아름답게 완결된다. 소피 역을 맡은 바이쇼 치에코가 부르는 구슬픈 주제곡(‘세계의 약속’)으로 끝을 맺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감동적인 엔딩을 국내에서 만나려면 12월 말까지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 <하울의 움직이는 성> 캐릭터 소개
소피(바이쇼 치에코)해터 모자점의 장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를 대신해서 모자점을 지키며 살아간다. 어느 날 문득 만난 하울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바람에, 황무지 마녀의 저주에 걸려 90살의 노파가 되어버린다. 그 후, 집을 떠나 방황하던 중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들어가 가정부로 살아가게 된다.
하울(기무라 타쿠야)움직이는 성의 주인이자 젊고 매력적인 젊은 마법사. 강력한 마법의 힘을 가졌지만 매번 왕국의 초청에 응하지 않고 매일 여자나 꼬시고 무위도식하며 살아가는 미스터리 청년. 바람둥이처럼 보이지만, 베일에 가려진 강력한 힘의 비밀 때문에 그는 스스로도 원치 않는 바람둥이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황무지 마녀(미와 아키히로)하울에게 반해 늘 하울의 뒤를 쫓는 마녀. 한 때는 킹스베리 왕실의 마법사였으나, 5년 전에 왕실에서 쫓겨나 황무지에 몸을 숨기며 살아가고 있다. 탐욕의 마녀에서 쭈글쭈글한 정체가 드러난 후부터는 모든 것을 귀엽게만 바라보는 긍정적인 일면의 소유자.
캘시퍼(가슈인 타츠야)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벽난로에 사는 불. 스스로를 ‘악마’라고 칭하는 캘시퍼는 소피에게 자신의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려준다면, 소피의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협상을 한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지만, 하울과 어떤 계약으로 인해 성을 떠나지 못하고 난로에 붙어있는 듯하다.
마이클(가미키 류노스케)하울의 마법사 견습생. 주로 하울에게 도움을 청하는 시민이나 왕실에서 온 전령들을 접대하는 일을 한다. 처음에는 움직이는 성에 함께 살게된 소피에게 약간의 적대적인 감정을 내보이나 곧 그녀의 가장 친한 동거인이 된다.
설리만(카토우 하루)킹스베리의 왕실 마법사. 하울의 옛 스승이자, 강력한 마법의 힘을 가지고 있다. 왕실의 실권을 지닌 그녀는 하울에게 자신의 권력을 양도하고 싶어하나, 하울이 이를 거절하자 그를 무섭게 공격한다. 하울의 이면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 함.
카브(오이즈미 요우)소피가 방황하다 구해준 허수아비. 카브도 알고 보니 누군가의 저주에 의해 다른 형태의 존재로 변하게 된 것. 소피의 은혜에 보은하고 싶은지 늘 소피의 뒤를 따르며 그녀를 보살펴준다. 영화의 마지막 저주에서 풀려난 카브의 아름다운 실체를 기대해 보실 것.
힌처음에는 하울이 변신한 개로 오인된다. 그러나 결국 힌은 설리만의 애견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러나 그 이후로 힌은 왠지 모르게 소피를 따르고, 힌도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함께 동거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