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에 진시황의 천하통일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진시황이 어떻게 천하를 통일할 수 있었는가를 언급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번글에는 진 시황이 통일한 그 통일 진나라가 왜 2대만에 무너지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고찰해보고자 합니다.
1. 들어가며
- 진(秦)나라의 멸망에 대하여 한(漢)나라의 가의(賈宜)라는 문인은 진은 폭정과, 무리한 대공사를 벌였으며, 천하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시기에 오히려 천하 백성을 탄압하였으니 멸망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논리를 폈었다.
가의는 원래 좀 과장이 심한 문인이고, 따라서 우리는 그의 말을 다소 에누리해서 들을 필요가 있지만, 어느 정도 문제의 핵심을 찌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진의 폭정이라 해도 진의 법령과 제도,그리고 문화는 한(漢)제국이 그대로 물려받았으며 한은 그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200년간의 통치를 구가하였으니 진의 통치에 구조적인 모순이 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진의 멸망은 말 그대로 궁중암투나, 쿠데타가 아닌 전국적인 민중봉기로 멸망하였으니 진나라 자체에 문제가 없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2. 멸망의 원인
(1) 기본적인 문제 - 순자(旬子)사상의 근본적 문제점.
- 진의 통치사상은 효공(孝公) 시절 상앙의 법가적 개혁이후로 순자와 그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법가사상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잠시 법가사상들의 거두의 주장들을 잠깐 살펴보고 넘어가자면.
순자(旬子)는 유학자이지만, 법가의 비조와도 같은 사람으로 그는 천인불상(天人不相)을 주장하며 당시 군주의 통치권위를 뒷받침하는 동시에, 군주의 전횡을 제어하는 수단이었던 천(天 : 하늘)을 부정하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모습을 보였다.
나아가 순자의 제자인 한비자(韓非子 : 이 사람은 법가의 집대성)의 시기로 나아가면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고,논리적으로도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부정하고(물론 도덕과 예절도 포함된다.) 합리적인 실정법의 체계내에서 합리적인 생활을 영위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한비자는 다수결의 논리(大爲小失)을 주장하며, 공동체에 대한 개인의 희생을 합리화 하기도 하였다.
현대사회라면, 지극히 당연해 보이지만....현대 사회처럼 민중이 교육받고, 힘을 가진 그러한 상황이 아니었기에, 지배층의 논리로 전락해버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순자의 '천인불상'은 결국 군주의 통치에 대한 적절한 제약을 없에는데에 악용되었고, 한비자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주장은 백성들을 하나의 '톱니바퀴'처럼 다루게 하였으며, 동시에 백성들이란 기본적으로 법(法), 술(術 : 다루는 기술,속임수), 세(勢 : 힘과 세력)으로 다스려야 말을 듣는 존재라는 인식을 진나라 지배층에게 심어주는 단초가 되었다.
유가나 묵가의 논리와는 달리 법가의 이렇게 '현실적인' 통치책은 결국전국에 강압적이고 군사적인 통치를 펴게하는 결과를 불러왔다.
교육 받지 않은 당시의 백성이라면 진이 펴고 있는 통일적 정책과 도로와 제도의 정비같은 거시적인 정책보다는, 폭압적인 정책이 더 눈에 잘 들어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따라서 '민중봉기'의 단초가 되는 폭압적 정치의 기반은 법가사상이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으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다른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부연하자면, 한나라 시기의 사상가 동중서(董重舒)는 '하늘과 인간이 서로 교감한다.'면서 다소 비합리적인 주장을 펼쳤으나, 그러한 논리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졌던 것은, 천의 권위는 커녕 존재마저도 부정하며 폭압적인 정책을 펼친 진에 대한 악몽과 반감이 매우 컸을 것이다.
(2) 종속적인 문제
- 사기에 보면 '진이 전쟁을 벌여 죽인 삼진(三晉: 魏,韓,趙)의 백성이 수백만에 달한다.'라고 적고 있다. 통일과정에서도 이와 같은 살육과 무력적 방법은 되풀이 되었음이 틀림없었을 것이다.
본시 무력적인 통일이란 어떻게든 아픔이 있는 법이고, 따라서 그러한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승자역시 양보하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앞서의 글에도 고찰하였듯이 진나라 조정이 천하의 추세를 잘 타고 있었고 그에 따른 정책을 폈기 때문에 진은 천하 백성들을 어루만져주고, 내정에 전력하는 정책을 폈으면, 진나라는 통일제국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진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진은 멸망한 국가의 민중들의 감정은 커녕 그들의 생명을 고려할 의사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진은 수많은 백성들을 끌어다가 도로를 정비하고 장성을 쌓으며, 동시에 월(越)과 흉노등을 정벌하고 다녔고, 그러한 부담은 백성들에게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일례로, 사기에 보면 '민월은 전투를 피하고 숲으로 들어가 진나라군을 수만명을 참살하였다. 이에 시황은 죄수들을 보내어 인원을 보충하려 하였으나 무고한 백성이 태반이라 원성이 자자했다.'라고 적고 있으니, 대외원정 또한 진나라에게 부담이 되었고, 또한 진은 그러한 것을 폭압적인 정책으로 보충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사실 그 죄수들이라는 것도 엄격한 법령 때문에 죄인아닌 죄인이 태반이었으리라.)
거기에다가 엄청나게 엄한 법령과 처벌은, 평시의 국민들에게도 반감을 주기 쉬운데, 무력으로 통일되어 기본적으로 굴욕과 아픔을 가지고 살아가는 백성들에게 강요된다면....그 결과가 가히 어떠할 지는 짐작할 수 있다.
3. 결과
- 아무리 진의 정책이 거시적으로는 중국 자체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도, 폭압적인 정책에서 살아가는 데에 대한 반감과 또한 고통은 충분히 민중이 반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민중은 교육을 받지 못해 스스로 자율적인 행동을 취한다기 보다는, 리더쉽 있는 지도자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거기에 호응한 것이 '진승과 오광'이라는 두 비천한 농민들이었다.
말 그대로 이들이 부서진 '도기조각을 창끝으로 삼을'정도로 비천했음에도 수십만의 백성이 호응하였던 것은 진의 통치가 그만큼 폭압적이었다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진승이 진군과의 전투에 패하여 죽자, 백성들이 잠잠해진것이 아니라 멸망한 6국의 왕족들의 밑에서 뭉친 것은 민중의 반감이 '단순한 홧풀이'정도의 수준이 아니었음을 더욱 짐작할 수 있다.
결국 진의 군대가 거록의 싸움에서 제후들의 연합군에 패함으로써 진나라가 마지막에 기대던 기둥인 군사력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그리고 유방(劉邦)이 이끄는 수만의 별동대가 관중의 입구인 무관에 다다렀을때 관중(즉 진나라)의 주민 그 누구도 진나라를 위하여 유방과 싸우려하지 않았고, 결국 진나라 조정은 유방의 앞에 항복하고 만다.
4. 마치며
- 물론 진의 정책이 중국 자체에 도움이 된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진나라의 정책이 고대중국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적으로 백성을 위한 정책이라기보다는, 효율적인 통치를 위한 수단이라는 점을 알아야한다.
따라서 백성들은 그러한 진의 '업적'은 그들에게 고려 가치도 없었을 뿐더러, 그들의 반감을 조금도 경감시켜주지 않았다.
진의 통치체계,제도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소하가 진나라의 궁전에서 진나라의 법문서와 지도를 훔쳐 나중에 통일 한 제국의 승상으로써 한나라의 정책에 반영하였으며, 처음에는 군국제(郡國制)를 쓰던 한나라도 나중에는 전국적인 군현제로 대체해나가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진의 멸망은 기본적으로 법가사상의 문제점.....
즉 사람을 사람이 아닌 하나의 톱니바퀴로 보고, 일방적으로 명령을 듣는 존재로 취급한다는 진나라 정책이념의 문제점에다가, 무력적 통일에 대한 6국 국민들의 반감이 합쳐지고, 거기에 불을 지른 것이 대공사와 대외원정과 같은 출혈을 강요하는 조치였다고 생각하고 싶다.
에구...두서없이 이상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의나 문제점이 잇으면 지적해주시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꾸뻑~ (__)
첫댓글통일 진 제국이 묵가사사의 제국이라는 설이 있는데... 묵가에서는 몹시 전쟁을 싫어 했습니다. 그러한 사상의 연장선에서 전쟁을 그치고 평화를 가져오려면 천하를 통일해야 했고 통일과 평화를 위해 불가피하게 통일전쟁을 수행했던 것이지요. 법가사상은 통일 역량을 키우기 위한 원동력이었다고 할까?
또한 묵가는 논리적이고 비판적이기는 하지만, 공자와 노자의 주장을 일면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측면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법가는 한비자가 말한 '선비는 붓으로 세상을 어지럽힌다.'면서 비판의 여지를 없에고 획일성을 강요합니다. 그러한 법가의 논리에서 나온 것이 바로 분서갱유입니다.
마지막으로 묵자의 비전사상은 천하를 통일해서 전쟁을 없에기보다는, 나라간의 평화를 힘으로 수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의 나라를 나의 나라와 같이 사랑하라 - 묵자'의 논리는 바로 강한 나라가 약한나라를 점령하여 평화를 가져오자는 것이 아니라, 강한나라가 약한 나라를 존중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첫댓글 통일 진 제국이 묵가사사의 제국이라는 설이 있는데... 묵가에서는 몹시 전쟁을 싫어 했습니다. 그러한 사상의 연장선에서 전쟁을 그치고 평화를 가져오려면 천하를 통일해야 했고 통일과 평화를 위해 불가피하게 통일전쟁을 수행했던 것이지요. 법가사상은 통일 역량을 키우기 위한 원동력이었다고 할까?
묵가의 제국이었다면 기본적으로 통치기술에 있어서 사람을 하나의 명령을 듣는 개체보다는 사랑해주고 받는 인격체로 보아야 했을 것입니다. 또한 천하 통일이후의 정책을 폄에 있어서 겸애(兼愛)를 중심으로 백성들을 위무하는 정책을 폈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묵가는 논리적이고 비판적이기는 하지만, 공자와 노자의 주장을 일면 받아들이는 개방적인 측면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법가는 한비자가 말한 '선비는 붓으로 세상을 어지럽힌다.'면서 비판의 여지를 없에고 획일성을 강요합니다. 그러한 법가의 논리에서 나온 것이 바로 분서갱유입니다.
또한 묵가는 '자신의 아버지조차도 장례를 치루지 않고 땅에 그대로 묻는다.' - 맹자,공손추 상(上)에 나온것 처럼 검소한 생활을 중요시 했습니다. 그런데 아방궁과 여러 궁실을 개축하고 보수한 진의 조치는 이러한 검소와는 거리가 멉니다.
마지막으로 묵자의 비전사상은 천하를 통일해서 전쟁을 없에기보다는, 나라간의 평화를 힘으로 수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의 나라를 나의 나라와 같이 사랑하라 - 묵자'의 논리는 바로 강한 나라가 약한나라를 점령하여 평화를 가져오자는 것이 아니라, 강한나라가 약한 나라를 존중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하를 통일하여 오히려 전쟁을 없엔다는 것은 묵가의 논리에서는 궤변이며, 동시에 묵가가 실제로 보인 행동과는 너무나도 상반됩니다. 만일 그러하였다면 강대국 초(楚)와 약소국 송(宋)의 싸움에서 묵가는 송이 아닌 초의 편을 들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