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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이스라엘 종교가 다신론의 본 고장에서 살아남을 수있었을까? 단지 우상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일까? 한번 생각 해보시요. 단지 신의 뜻이니까 거짓이라고 생각 한다면 할 말이 없소. 나도 계속 말하면서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다른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요.
대제국의 종교들이 지금 자취를 감추어 버렸는데, 약소국의 종교가 살아 남아서 지구의 3대 종교의 하나가 되었다.
왜 그런가 생각해보시요. 계속 거짓술과 사기 때문이라면 할 말이 없소.
그리고 당신이 보여준 석류는 아직 나에게는 없는 자료요. 그래서 그것이 어디에 있는 발굴 자료인지, Herbert Niehr; Kinet 이라는 사람의 책이 어떤 것이지 말해 주시요, 보고 발굴 자료에 나와 있는 것을 내가 번역해보고 말해 주겠소.
인드라
길어서 정빈님의 글을 정리해보죠. <나의>라는 말이 그당시 문법상맞지가 않다. 그런데요? 아세라를 목상이나 제의나 링감(남성의 성기형태의 신앙대상)으로 볼수있는것이 무슨소용일까요? 문법이 틀리담서요? 그럼 그의 제의 그의 링감등으로 해석해도 틀리지나요? 2005/07/26
인드라
결국 님의 주장은 비문에대한 논평일뿐...이고 님의 주장은 왜 기독교가 유일신을 유지했느냐...그래서 결과론적으로 볼때 타당하다는 말이신가본데요..힌두교도 알고보면 유일신이걸랑요.(물론 분파가 다양하지만)또 세계4대종교에는 속할껄요..결과론적으로 보자면 불교는 유일신사상이 아니지만 세계3대종교이니 님은 2005/07/26
인드라
불교에 대해서도 아무말씀못하시겠군요. 결과론적으로 이세상에 존재하는것들이 참은 아니리다. 기독교는 쉬우면서도 아무도 몰라요..그런데 모르게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기독교인 자체입니다. 그럼으로써 존재하는겁니다. 2005/07/26
인드라
도대체 아쉐라가 목상이나 비문같은것일지도 모른다면서 그당시인들이 그것을 섬겼다니...무슨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군요...ㅠㅠ 2005/07/26
유빈정빈
나의 라는 말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의"라고 기록되어 있을텐데, 그만 합시다. 성기 신앙으로 보는 님에게 무슨 말을 하리오. 그렇게 보시요. 항상 하는 말이지만, 유일신이라고 내가 말했소, 일신론이라고 했소. 그만 합시다. 2005/07/26
인드라
성기신앙이 무슨 잘못이라도 했답니까?...모세의 지팡이도 사실은 성기숭배와 무관치는 않을텐데요? 제 이야기는 님의 글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겁니다. 결국은 기독교가 위대하니까 살아남은게 아니냐?라는 논리외에 무엇이 있는겁니까? 2005/07/26
인드라
또한 아쉐라가 당시인들이 믿던 고유명사라면 더이상할말이 없지요..어떻게 고유명사가 일반명사(제의나 기둥상)가 될수있습니까? 차라리 문법이 틀렸음으로 이문장은 날조된것일 가능성이 농후하다면 좀 이야기가 되겠죠?
다른 요소들...
(1) 다윗궁은 부엌도 화장실도 없는 5평짜리 단칸돌집
*** 용어 정리 : 야훼 = 야훼. 主 + 신 (유태) = 狐神(호신). 신 (일반) = 신
Bibel(구약의미 경우) + 구약 = 成書 혹은 호서(狐書).
이스라엘 후손 = 호손. 신의 백성 = 호족
사무엘서에 의하면 다윗은 목동으로 출발한다. 그는 „금발“이고 „형상이 아름다웠고“
하프를 „예쁘게“ 켰다 한다. 어린 영웅으로 돌팔매로 블레셋 거인 골리앗을 죽이고
기원전 997년경 그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공략했다 한다.
구약은 몇 페이지에 걸쳐 다윗을 호신의 기름부음을 받은 선택된 자라 찬양한다. 그가 나라의
주인으로서 죽을 때 까지 그의 영토는 유프라테스 에서 지중해까지 이르렀다고 쓰여 있다. 제국의
건국자인 다윗은 40년을 왕위에 있었다 한다.
그런데 그 찬란하던 나라의 흔적이 어디에도 없다. 예루살렘 성의 동쪽을 따라 걷자면 조용한 비탈에
유적발굴 지역을 만난다. 여기가 „다윗의 市“ 라는 곳이다. 입구엔 군인이MG발사준비한 채로 서있다.
그들은 초라한 폐허를 지키고 있다.
다윗시(궁)의 크기는 16평방미터이고 부엌도 없고 창문도 없다. 음식은 바깥에서 만들었다. 그옆에
편편한 돌이 있는데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다.
이게 „다윗궁의 변소“이다. Hanswulf Bloedhorn( 성지 고고학 개신교 연구회)
다윗의 번영과 찬란함? 열왕기전서10장에 도읍에는 „은이 돌과 같이 많았다“고 했다. 터무니도 없는
소리다. 발굴팀들의 삽아래 청동기의 예루살렘은 하나의 마을로 쭈그러 들었다. 마을은 2천명정도
거주의 지역이였다. 베를린의 이집트 전문학자 Rolf Krauss는 „지방둥우리“라고 말한다.
이런 감정이 한둘이 아니다. 현대적인 성서연구자들은 오래전 부터 구약의 허구를 찾아 낸다. 들어나는
것은 전설의 짜집기이다.
모든 방면에서 공격이 시작되었다. 꽃가루 분석가들은 군사통제구역인 유대아와 사마리아까지 훑었다.
동양학학자들은 설형문자판들을 해독해 내고 있다.
나일강의 오랜 문서에서 히브리인의 근거도 발견되었다.
무엇보다도 바이블의 역사적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최근엔 지금 텔아비브대학의 발굴팀장인 Israel Finkelstein이 일격을 가했다.
그의 저서 „Keine Posaune vor Jericho = 여리고(전쟁) 나팔은 없었다“ 는 바이블의 핵심문장
(주: 소위 모세오경)들은 거짓임을 확인한다.
ㅡ 유태인의 출애굽은 있지도 않았다.
ㅡ 가나안은 여호수아에 쓰여진 것과 달리 무력정복이 아니다.
ㅡ 초기의 다윗과 솔로몬 왕국은 허구이다. 이 두 이스라엘왕들은 아무 의미없는
변두리 계곡이나 지배했었다 (Finkelsrein)
이제 成書나 호신의 말은 동화나 기념비적인 거짓이라 할만하다. 사학자들이 역사적인 예측했던
곳에서 이제 정치적 선전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터지는 댐앞에 서있다“고 Augsburg의 成書언어를 가르치는 Dirk Kinet는 시인한다.
유일신의 전개과정도 成書가 주장하는 것과는 전혀 딴판이다. 신은 영원한 존재라고 成書에선 주장한다.
„태어난 적도 없고 영원히 죽지도 않을 한 존재“라고 했다.
시조 아브라함 ( 소위 기원전 1800년경)도 이 전능자에게 예물을 바쳤다.
불타는 가시덤불 속에 신을 본 후 „ 신은 오직 하나이다“ 라고 모세는 선언한다.
보수성 신학자들만이 너무 쉽게 이스라엘민족을 특수민족이라 인정했었다. 고고학은 이것도 밝혀 냈다.
즉 주신인 호신도 처음엔 작게 시작했다.(신의 발전 전개과정을 의미)
야웨는 처음에 다만 날씨의 신이었다고 Augsburg의 전문가 Kinet는 설명한다.
„그는 결실의 보장이었고 그의 性에 대한 묘사는 서서히 사라져 갔다“
흙과 쇠로 된 우상들이 호지에서 발견됐다. 생기가 넘치는 젖가슴과 엉덩이의 토기로 된 작은
조각들도 발견되었다. 이는 다신의 자궁에서 유일신이 탄생한 것.
이는 새로 얻어진 인식이다.
ㅡ 예루살렘에서는 신전창음이 번창했다.
ㅡ 신에겐 처음 벌거벗은 동반녀가 있었다.(아쉐라 = asherah)
ㅡ 기원전 100년만 해도 주위의 농민들은 이방신의 예식을 치렀다.
예루살렘북쪽으로 400km 떨어져 있는 Ugarit 에는 „이스라엘종교의 어두운 과거가
표출된다“ (프랑스의 고고학자 Andre Capuot) 여기서 제문과 금상들이 출토되었다.
한 출토품중 수염달린 작은 남자 조각이 있다.
이것이 현명한 노인이며 하늘의 아비 „엘 = El “이다. 초창기 형태의 신이다.
신이 한 이방인종교의 우상에서 나왔다는 인식은 독실한 기독에겐 마음아플 일이다.
그러나 이미 기정사실이다. 망원경속으로 들여다 보듯 전문가들은 전능한 신이 출산한
저 구름속을 들여다 보고 있다. 연구는 점점 더 환하게 유일신이 생겨나고 키워져가는
작업장의 과정을 더듬어 보고 있다.
학자들은 때로는 감동적인 통찰력으로 아직도 어둡고 신비적인 요새에 박혀 있는 옛날의
신앙작품을 과학의 빛으로 끌어 내어 해부하고 있다.
독실한 成書 주석가들만이 히브리인에게 역사적 특수성을 부여한다.
„숭고한 이념과 완전한 의식속에서 이세상의 모든 물질을 바쳤고 고난을 견뎌냈고 생명도
바쳤다“고, Simon Dubnow는 그의 열권에 달하는 <유대 민족의 세계사>에 쓰고 있다.
(2) 야훼의 보좌는 없었다. 토라는 기원후 50년경 까지 손질됐다.
많은 굴욕들이 호서속에 나타난다. 좌절과 분노속에서 전능의 공상이 쌓여간다.
극작가들은 붓 하나로 바벨탑을 폐허로 만든다.
실은90m 높이의 바벨탑은 이 당시 완공된 상태였다.
에스겔에서 호신은 파라오에게 성난 짐승처럼 달려 든다.
„내가 너의 땅을 산꼭대기 까지 너의 피로 적시겠다“
2천년이 지난 이제서야 이 모든 종교적인 신화들에 대한 냉정한 검토가 시작되었다.
연구가들은 호서의 뿌리까지 도끼를 가지고 파고 들어 갔다.
점점더 분명해지는 것은 „책중의 책“ 이란 호신의 말은 사기로 가득차 있다는
(voller Mogeleien) 것이다.
<신명기파>라 불리는 위조가들의 한 무리가 실제사를 조작했다.
그들은 불쾌한 자료들을 없애고 헐리우드의 각본처럼 약속된 땅의 역사를 지어냈다.
그 작업이 일일이 어떻게 진행됐는지 자세히 알수는 없다.
성서검열반은 교활하게 작업했다. 주변의 실제역사에다 가공인물을 넣어 꾸몄다.
작업장은 확실하다. 지금의 알앜사 회교사원과 바위사원이 있는 곳에 예루살렘 신전
유태인의 중앙성소가 있었다. 여기서 모든 일이 통제되었다.
(야웨)신전을 길이로 따라 가면 최고 성소 „Debir“라는 곳에 닿는다.
여기에 희미한 불빛속에 금으로 씌운 두개의 Kerubim 이 있었다.
케루빔은 사람의 얼굴에 사자몸매의 날개가 달린 조각으로 야웨의 보좌를 지킨다.
야웨의 보좌? 이런 것은 애초에 없었다. 無 즉 부정 그 자체다. 다른 곳곳에선 우상 조각을
섬기며 떠들석할 때 유태들은 우상숭배를 금하고 유일신 전능자의 왕국을 창안했다.
그러나 이런게 맞기는 맞냐? 지금은 유대인이 유일신의 제창자란 것도 의심을 받는다.
成書의 나이와 쓰인 연대에 대해 세무리가 엉켜 싸우고 있다.
*** 전통파 : 成書 중심부가 기원전 1000년경에 쓰여 졌다.
*** 중도파 : ……………… 기원전 600 년경에 쓰여 졌다.(바빌론 포로시대)
*** 최소파 : 헬레니즘의 소산으로 본다. 최고 기원전 330년이라 하며 이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죽음 후가 된다.
*** 극단파?: 한술 더 뜨는 사람이 있다. Bernd Jörg Diebner 는 기원후라 주장한다.
그는 30년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쳤고 해 초(2002년)에 신교신학
교수에 임명되었다. (주:독일에선 박사는 교수가 아니다. 박사는 Promotion이란 과정을
거치며 교수는 박사를 거쳐 다시 Habilitation을 마쳐야 교수라 칭함을 받는다)
그는 교수임명후 첫 강의에서 „이스라엘은 신비적 규모“라 말하고 토라는
„외교적 합의문서“라 평하며 기원후 50년도 까지 조절되었다고 주장한다.
Diebner는 成書를 종파적 세력다툼의 소산, 문화정치적인 범죄소설로 본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은 역사적 사실들을 위조했고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희망을
과거 역사에 만들어 넣었다.
(3) 아브라함때 낙타는 집짐승이 아니었다. 이때 동전도 없었다.
지금까지 성서는 2300개 언어로 출판되었다. 루터판은 7십7만3천단어로 엮어 졌다.구석구석 호서는
긴장감 넘치는 사건들로 가득차 있다.
강간, 형제 살인, 소금기둥, 장자권을 죽한 그릇에 팔고, 욥같이 진창으로 얼굴이 짓뭉개 지기도 하고,
20여명의 선자자가 등장하고, 아가서 같이 사랑시도 있고, 철학을 논하는 듯한 글도 있다.
구약은 열왕기에서 기원전 10세기경에 이르는 사건들이 거론된다. 다른 편들은 훨씬 그후에 작성되었다.
최후의 완성은 기원후가 아닐까 한다.
구약은 거의 전체가 히브리어로 쓰여졌다. 카톨릭호서는 기원전 300년경 알렉산드리아에서 희랍어로
번역된 Septuaginta(=70인역)에서 번역된 것으로 교황 Damasus 1세의 명으로 교부 Hieronymus가
390년경에 라틴어로 옮겼다.(Vulgata)
루터는 히브리본에서 독어로 번역했다. 히브리본에는 70인역 보다 적은 수의 편들이 들어 있다.
구약엔 주역도 가끔씩 뒤바뀐다. 때로는 야훼이고 때로는 엘 혹은 엘로힘이다.
어떤 때는 호신은 구름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그러다가 불기둥을 뒤집어 쓰고 길을 안내하기도 한다.
누가 이런 대서사극을 창작했을까?
지금까지 발견된 서류중 가장 오래된 것이 쿰란에서 발견된 것이다.(1947년 이후)
몇몇 쪼가리의 탄소측정결과가 최고가 기원전 240년의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호서의 탄생을 훨씬 이전으로 추정한다.
쿰란의 서류 두루마리는 옮겨 쓴 것에서 또, 또 옮겨 쓴 것이다.
호서에 나타나는 수십개의 지명과 인명으로 연대표가 만들어 졌고
이것을 보수파는 오늘도 역사를 재는 잣대로 쓰고 있다.
이에 의하면 기원전 1800경에 원조들이 살았고 기원전 1250경에 모세의 출애굽이 있었다고 한다.
이스라엘의 自作史는 청동기 선사시대에 아브라함이란 목자를 우르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출발시킨다.
„너를 통하여 이땅의 모든 백성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호신은 장담한다.
아브라함은 최선을 다하고 베델과 시겜에서 제단을 쌓는다.
애굽에서 마누라 사라를 팔아요에게 판 댓가로 갑부가 되어 팔레스티나로
돌아온 그는 175살이 될때 까지 „실컷 살다가“ 죽었다.
애비처럼 유목민인 아들 이삭은 야곱이란 아들을 낳았고 야곱은 12명의
자식들을 낳아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이룬다.
열두아들 중 가장 어린 요셉은 형제들의 꾀임에 빠져 상인행렬에 팔려 이집트로 갔다.
창세기는 요셉이 해몽가로 장관의 자리까지 오르는 과정을 감명깊게 기술한다.
곧 이어 가나안에서는 기근이 생기고 요셉의 형제들은 이집트에 구걸을 청하고
창고를 가득 채운 요셉은 환성을 지른다.
사태는 다시 바뀐다. 새 파라오가 등극하고 유대들은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람제스의 시에서도 노역을 해야 했다. 람제스의 건축은 기원전 1270년경에 있었다.
이스라엘의 고역은 견딜수 없는 지경으로 심해졌다. 언제나 처럼 호서의 저자들은
호손들의 고통을 목록으로 열거한다. 그들의 고통을 더 참혹하게 그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모세가 있다. 히브리의 주운 아이는 궁전에서 자라 호신의 연장이 된다.
모세는 자신의 백성을 „종의 집“에서 끌어 낸다. 처음엔 가족드라마가 역사의 대사건으로 확대된다.
ㅡ 6십만명의 남자가 모세와 함께 탈출한다.
ㅡ 야훼는 홍해를 갈라 호족의 행로를 열어 준다.
ㅡ 시내산에서 야훼는 손가락으로 직접 돌에 글을 쓴다.
ㅡ 모세는 이 돌을 후에 언약궤( „유태의 가장 중요한 상징“=Finkelstein) 에 넣었다.
ㅡ 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둘러싸고 예배하는 것을 보고 진노한다.
ㅡ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군사적인 진출했다.
ㅡ 여리고는 공격나팔과 함께 함락되었다.
ㅡ 언제나 호신이 엄호사격을 한다.
ㅡ 호신은 돌우박도 내리고 원수를 밝을 때 쳐 죽이라 태양을 붙들고 있기도 한다.
웅장한 건국사!
호족은 전능자가 친히 보증하는 소유권을 가지고 원수의 땅을 장악했다.
이 역사의 배경은 청동기시대를 가름케 한다.
그러기에 과거의 고고학자들은 청동기시대로 방향을 잡았다.
여리고에서 무너진 도시를 발굴할때는 여호수아의 공격나팔을 원인으로 보았다.
부서진 벽돌조각은 여호수아군대의 전투흔적으로 평가했다.
최근에 들면서 成書의 기존 해독방법이 위기를 맞았다.
ㅡ 아불함은 항상 낙타를 타고 다녔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낙타는 기원전 1000년경에 최초로 운반용 짐승으로 등장한다.
ㅡ 곧 모세도 „동화의 인물“로 의문의 대상이 되었다.
처음의 견해로는 아불함은 기원전 950년경 다윗궁의 사관이라 짐작했다.
그런데 창세기 42장에서 곡식을 동전(돈)을 주고 샀나?
중동의 가장 오래된 동전은 기원전 7세기에 발명되었다.
(4) 솔로몬의 구라궁녀+ 구라신전 + 구라궁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모세오경이라 하는 Pentateuch, 유대인이 토라(법)라 특별히 섬기는
이 작품은 청동기 시대의 작품이 아니다.
역사를 잘아는 „위조가“(= Krauss의 말) 들이 가공물들을 삽입했다.
여호수아서는 실제사를 통째 뒤엎는다.
이 여호수아란 살인마는 진노의 주의 채찍을 받으며 신속공격으로 요르단 일대의
원주민을 몰살해 다신숭배를 제거한다.
지금 이스라엘의 고고학관청의 지휘하에 드러나는 새로운 발굴들이
이 사기극의 전모( das ganze Ausmass des Schwindels)를 보여준다.
„가나안의 정착은 사실은 평화롭게 그리고 천천히 진행됐다“(Finkelstein)
맞는 사실은 기원전 1200년경에 셈족이 서요르단 산간의 사막에 이주해 정착했다.
그들은 나무침대에 자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들 움막은 4~5명정도 수용.
ㅡ 갈릴리 북부에서 이주자들은 포도와 올리브를 재배했다.
ㅡ 남쪽으로 예루살렘과 헤브론 사이에는 매말라 가시덤굴이 자라고 물이 귀했다.
기원전 1000년경 가나안에는 전부 5만명 정도의 인구가 살았다.
남쪽은 특히나 살 환경이 아니었고 그래도 매우 드물게 살았다.
이웃과도 항상 충돌했다. 에돔인과 모압인이 옆에 살았다. 기름진 지중해변으로는
크레타에서 온듯한 Philister(블레셋?)들이 큰 도시들를 이루고 살았고 그들의 북쪽에는
아이를 제물로 바치는 페니키아란 해상무역을 하던 족이 살았다.
절대권을 갖은 주인은 이집트의 파라오였다. 파라오는 팔레스티나에서 광산을 만들어
구리를 캐어 냈다. 기원전 1250년경 람제스는 연쇄 방어성과 물길을 곳곳에 설치했고
애굽군대의 신속한 출동을 위해 태양신로(太陽神路)를 만들었다.
모세같은 „천막지기“가 당시 중무장한 애굽대군을 상대로 반역을 꾀했다는건 상상할수 없는 일이다.
기원전 1207년 파라오 Merenptah의 기록에 이스라엘 이름이 언급되어 있긴 하다.
그러나 내용은 애굽군의 우악스런 정벌기사이다. „너의 씨, 이스라엘, 진멸하다“
파라오는 백성에게서 땀을 짜 내었다. 노역을 피하려고 산속으로 들어가 살았다.
산속에 도피자와 발랑자들이 살았다.
많은 학자들이 히브리라는 용어를 hapiru ( = 떠돌이)에서 왔다고 본다.
호서는 하필 가난하고 삭막한 가나안에 휘황찬란한 왕조를 지어냈다.
수염기른 양가죽을 걸친 양치기 다윗의 슈퍼제국이 여기서 펼처 진다.
다윗의 후계 솔로몬때는 과장은 터무니가 없다.
ㅡ 그가 700명의 궁녀와 300명의 후궁을 두었다 한다.
ㅡ 그의 궁은 거대하고 우아하며 양탄자가 깔려 있다고 한다.
ㅡ 보물창고는 넘친다. 호서엔 솔로몬이 „지상의 모든 왕들보다 더 부했다“한다.
ㅡ 제사정치에 있어서도 대단하다. 호교교조 모세는 천막에서 호신을 섬겼었다.
솔로몬은 돌로 호신의 집을 지었다. „신전을 완전히 금으로 입혔다“ 한다.
안에는 레바논의 상나무를 썼다 한다. „가장 성스런 곳에 언약궤를 두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솔로몬의 신전을 증거하려는 모든 고고학적 시도는 실패했다.
„우리는 신전의 기초도 찾지 못했다“ (Bloedhorn)
의심할 여지가 없다. 호서는 터무니 없는 소설이다.
ㅡ 움막은 궁궐로 과장치장했다.
ㅡ 가나안의 정복은 넌센스이다.
ㅡ 모세가 살았는지도 의문스럽다.
ㅡ 솔로몬의 기사는 역사상 근거없는 „이상시대“(= Idealzeit)이다.
스위스 구약학자 Othmar Keel.
첫댓글 그리고 당신이 보여준 석류는 아직 나에게는 없는 자료요. 그래서 그것이 어디에 있는 발굴 자료인지, Herbert Niehr; Kinet 이라는 사람의 책이 어떤 것이지 말해 주시요, 보고 발굴 자료에 나와 있는 것을 내가 번역해보고 말해 주겠소. 이거 아니요, 계속 내가 당신에게 말한것!
그리고 인드라님의 글을 같이 보냈는데, 당신 생각도 같다는 것이요 뭐요.
DER SPIEGEL 지 기자에게 물어보면 될걸 나한테 내놓으라고 하면 되나? 스피겔지 게제물이라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