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해 보이는 소전 제조 기술에는 최첨단 합금기술이 집약돼 있다. 위조를 방지하기 위한 까다로운 기술이 필요한 소전으로, 한국 기업 풍산은 유럽의 콧대를 확실하게 눌렀다.
좀처럼 열리지 않았던 유럽 소전 시장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1999년 1월 1일 유로화가 탄생하면서부터다. 3억 명에 달하는 유럽인이 함께 써야 했으니 1인당 200여 개로 추산되는 어마어마한 소전 시장이 새로 형성된 것이다. ‘세계 최고’를 갈망하던 풍산 입장에서는 사활을 걸고서라도 이 시장을 잡아야 했다.
(주)풍산의 2대 회장에 오른 류진 회장. 그는 풍산을 세계 3大 동(銅)산업 회사로 끌어올렸다. |
그러나 콧대 높은 유럽 중앙은행들, 그중에서도 소전 기술 분야에서 최고라고 자부해 온 프랑스는 아시아의 한 회사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입찰에 참여하기로 한 풍산에겐 걸림돌이 많았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배로 한 달 이상 걸리는 물류의 한계가 악재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럽 시장을 뚫을 수 있는 무기는 ‘품질’뿐이었다. 품질을 인정받으면 모든 우려를 불식시킬 수 있으니까.
그전부터 풍산은 유로화 동전을 위해 비장의 무기를 준비했으니, 그것은 ‘4원 합금’, 즉 구리·아연·알루미늄·주석 등 네 가지의 비철금속을 섞어 만든 제품으로,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시도해 보지 못한 분야였다. 1970년대 초 풍산이 소전을 생산하기 시작할 때부터 현장에서 일해 온 김원헌 가공부장(51세)의 말이다.
“비철금속 4원 합금은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고의 기술 분야로, 의욕을 가지고 덤볐지만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그때 회사의 핵심 기술 인력들은 모두 울산 현장에 내려와 있었습니다. 회사의 사활이 걸려 있는 프로젝트였기 때문이죠. 합금을 만드는 데 성공한 날 모든 관계자들이 얼싸안고 눈물을 쏟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된 것이 ‘노르딕 골드’란 이름이 붙여진, 인류 최초의 4원 합금 소전이었다. 이런 획기적인 기술이 접목된 소전 앞에서 유럽 중앙은행들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스페인,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11개국이 줄줄이 풍산과 계약을 맺었고, 앞으로 계약 체결 국가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아시안 월스트리트 저널> 2002년 1월호에선 ‘풍산이 유로화의 성공적 유통에 큰 공헌을 했다’면서, ‘세계 최대의 동(銅)합금 업체 풍산이 유럽 유수의 업체들을 제쳤다’고 보도했다. 이문원 사장의 설명.
“유럽 중앙은행들과 첫 거래를 튼 후 공급량이 계속 늘고 있습니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신뢰가 더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육로로 하루 이틀이면 올 수 있는 이웃 나라보다 꼬박 한 달간 배를 타고 와야 하는 한국의 한 회사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납기일을 맞추고 있는 것에 유럽 중앙은행들이 감동하고 있다는 소리를 많이 듣고 있어요.”
동판 생산 라인. 주조, 압연, 가공의 원 스톱시스템을 갖춘 소전업체는 전 세계에서 풍산밖에 없다. |
‘풍산’이란 사명(社名)은 창업주인 고(故) 류찬우 회장(1999년 11월 작고)의 본관이 풍산 류씨 라는 데서 따온 것이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12대손인 류찬우 회장은 대구공립직업학교를 졸업하고 1959년 일본에 건너가 무역업으로 성공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968년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로 고국에 돌아와 풍산금속을 설립한 게 이 회사의 시초다.
사업에 뛰어들 때 그는 비철금속에 문외한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겉모습만 보고도 제품 상태를 알아맞힐 정도의 전문가가 됐다.
구리를 판판하게 펴는 ‘신동(伸銅)산업’으로 자리를 굳혀 가던 풍산이 소전 분야에 뛰어든 것은 1973년 한국조폐공사에 소전용 판재를 납품하면서부터였다. 1965년까지 전량 미국에서 소전을 수입해 동전을 만들어 왔는데 이후 조폐공사에서 소규모로 제작하던 것을 풍산이 이어받은 것이다. 김원헌 가공부장의 회고.
“소전의 관건은 합금기술입니다. 1970년대 초 처음 소전을 만들 때 가공 과정에서 자꾸 기포가 들어가 불량률이 70%에 달했어요. 그때 ‘숯’을 생각해 냈습니다. 숯을 넣으니까 산소가 숯의 탄소와 결합해 이산화탄소가 돼 날아가 버리면서 기포가 없어졌습니다.”
이게 그 유명한 ‘숯의 신화’다. 어느 정도 품질에 자신감을 얻은 풍산은 해외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첫 관문은 타이완의 동전 국제입찰이었다. 류찬우 회장이 직접 타이완 중앙은행에 찾아가 조선시대 상평통보를 내보이며 따온 수주량은 소전 2억 개, 1,200톤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당시 풍산의 설비 기준으로 전 직원이 24시간 쉬지 않고 일해도 5년이나 걸리는 큰 사업이었다.
타이완 프로젝트 이후 풍산은 아시아 시장에서 승승장구했다. 수십 종에 달하던 필리핀 동전을 하나로 바꾸는 전대미문의 화폐개혁을 이끌기도 했고, 자존심 강한 영국 회사를 밀어내고 인도 시장을 장악했으며, 동전이 상대적으로 많이 유통되는 중동 시장까지 석권했다.
아시아 시장에 이어 아르헨티나를 중심으로 남미 국가들에 소전을 공급하기 시작했고, 1992년엔 미국 현지에 ‘PMX’란 이름으로 현지 공장을 지어 북미 지역을 공략했다. 5년여 노력 끝에 1999년엔 미국 최대의 소전공급업체 ‘올린’(Olin)을 누르고 북미 시장 제일의 소전 가공업체로 미국 조폐국으로부터 ‘플래티넘 승인’을 받기도 했다.
류찬우 창업주에 이어 2대 회장 자리에 오른 류진 회장은 세계 시장 개척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미국, 태국, 중국, 일본, 말레이시아에 현지 법인과 공장을 마련했으며, 앞으로 더 많은 해외 법인을 설립할 계획이다. 류진 회장의 설명.
“우리가 세계 최고라고 생각하고, 모든 일을 세계 최고 수준에서 처리해야 합니다. 그런 자부심이 우리를 세계 최고로 이끌 수 있습니다.”
한우물 정신
부시 미국 전 대통령 내외가 풍산을 방문할 당시의 모습(위). 풍산에서 만든 금속은 탄약의 기초 소재로 쓰인다(아래). |
류진 회장의 세계 시장 개척 노력이 실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요즘 풍산의 성적표는 2004년 7월부터 2005년 6월까지 1년간 수출액이 4억 6,867만 달러로 역대 최고 성적. 소전을 포함한 세계 동(銅)산업 회사 중 빅 3에 꼽힌다.
주조, 압연, 가공의 ‘원 스톱 시스템’을 갖춘 소전업체는 전 세계에서 풍산이 유일하다. 납기일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고, 필리핀 화폐개혁을 이끌 만큼 현지 환경에 발 빠르게 대응한 것도 강점으로 작용했다. 세계 최초로 4원 합금에 성공한 최첨단 기술력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공 요인이다.
그러나 풍산의 진정한 성공 요인은 창업주 류찬우 회장의 ‘한 우물 정신’이다. 회장은 소전 외에 방위산업(소총에 들어가는 각종 탄약과 대포들을 생산한다)의 매출 수익이 만만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건설이나 부동산 쪽에 한눈을 판 적이 없다. 수익이 생기면 새로운 설비를 들여오는 데 쓰고, 그래도 남으면 사원들에게 돌려주는 게 류찬우 회장의 한 우물 정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