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우는 70년대 후반을 주름 잡았던 남성 듀오 '하사와 병장'의 리더였다. 최대 히트곡은 '목화밭'. 하지만 이경우에 대한 음악적 평가는 인기가 많았던 '하사와 병장' 때의 음악이 아닌, 솔로로 독립해 발표한 89년 자작곡 앨범 '블루스 맨' 때문. 일시적인 광풍이었지만 그는 김현식, 한영애, 김목경과 더불어 한국 땅에 블루스의 열기를 몰고 왔던 주역이었다.
이경우는 1951년 10월 8일 해군 장교출신으로 수산업을 했던 부친 이영진씨와 일제 식민 치하 당시 금융 조합원이었던 모친 김정자씨의 4남 3녀 중 장남으로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풍류를 즐겼던 보헤미안 같은 분이셨고 모친은 음악 듣기를 좋아했다.
어머니가 틀어 놓은 전축을 통해 흘러 나오는 노래는 음악적 자양분이었다. 부유했던 그의 집안엔 50년대 중반에 이미 피아노가 있었다. 집 앞은 바로 군산항이었다. 외국인들과 부두 노동자들로 늘 분주했던 항구는 놀이터였다.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군산항은 일찌감치 외국 문화를 경험하게 했다.
항구의 선술집에서 흘러나왔던 스윙 풍의 재즈 음악은 어린 이경우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군산초등학교 4학년 때 "명태와 오징어가 많이 잡힌다"는 소문을 듣고 최북단의 항구도시 속초로 이사를 갔다. 불운의 전초일까. 저 유명한 태풍 사라가 밀어 닥쳐 작업을 나간 부친의 배가 사고를 당했다.
작은 아버지 등 모든 선원들이 몰살 당하며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돈을 벌어 군산으로 돌아가려던 그의 집안은 속초에 눌러 앉아 버렸다.
속초초등학교로 전학한 그는 도회풍의 외모 때문에 '서울 내기'로 불렸다. 학급 대표로 학예회에 나가 노래를 불러 상을 탈만큼 노래 잘하는 아이로 통했다. 속초중학에 입학해서도 친구들 사이에 인기를 끌자 막연하게 가수의 꿈을 품기 시작했다. 속초고에 들어 간 어느 날, 옆집의 아저씨가 통기타로 전통 가요를 연주하는 소리가 들렸다. 평범한 솜씨였지만 너무도 아름답게 들려왔다.
옆집 아저씨에게 기본 코드를 배우고 나자 본격적으로 기타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당시 속초에는 음악 학원이 없었다. 그래서 기타 코드 책을 구해 독학을 했다. 서울에서 전학 온 김정현은 음악적 전환기를 제공했던 친구. 청바지를 입고 통기타로 '샹하이 트위스트'를 기막히게 치는 모습에 넋이 나갔다.
이경우가 기본 코드로 따라 붙자, 둘은 절친한 음악 친구가 되었다. 이후 김정현의 자취방에서 매일 기타를 끼고 살았다. 좁은 속초 바닥에 기타 잘 치고 노래 잘하고 잘생긴 속초고교생들로 소문이 나자 여고생들이 몰려 들었다. 이경우는 "속초 여학생들의 우상이었던 그 때가 참 좋았던 시절"이라며 슬쩍 웃음을 흘린다.
고3이 되면서 '봄비'라는 노래를 들었다. 신중현의 변화무쌍한 기타 코드 진행도 놀라웠지만 박인수의 가슴을 때리는 노래는 더욱 숨 막혔다. 박인수는 그의 우상이 되었다. 방학 때 군산에 내려갔다. 미8군 가수가 된 외삼촌이 기타를 치며 팝송을 멋들어지게 부르는 모습을 보니 환상적이었다.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고등학교 졸업을 하자마자 가수가 되기 위해 무조건 상경했다. 우선 이태원 유니버샬을 찾아 가 오디션을 받고 곧 바로 김포 NCO(사병) 클럽 무대에 올라갔다.
당시 미8군 무대는 사양길로 막 접어들고 있던 때.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한 그는 미8군 무대를 그만두고 청계천5가의 한 술집에서 열린 노래경연 대회에 참가했다. DJ 이종환이 심사를 본 그 경연 대회에는 장계현도 참가했다. 결과는 낙방. 참담한 마음으로 허송세월을 보내던 그는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입대를 해 버렸다.
그는 하사관으로 차출되어 논산 훈련소에 배치됐다. 운명의 날. 비지스의 노래를 부르며 드럼통을 밀고 오는 군수과 이동근 병장(당시 일병)을 만났다. 그는 동국대학 통기타 가수라 했다. 2살 많지만 계급은 아래인 성품 좋고 기타도 잘치는 이동근이 마음에 들었다. 친해진 두 사람은 연대 군가 경연 대회에 함께 나가 1등을 했다.
그러자 음악을 좋아했던 중대장은 이동근을 스카우트해 왔다. 두 사람은 듀엣을 결성, 이경우는 멜로디, 이동근은 화음을 맡았다. 논산훈련소의 인기가수가 된 두 사람은 제대 후 듀엣을 하기로 약속했다. 4개월 먼저 제대를 해 속초에 머물던 이경우를 이동근이 찾아갔다.
속초 청학동에 위치했던 대한다방에서 팀 이름도 없이 콘서트를 열었다. 시골 음악다방에서 통기타 가수의 공연은 화제였다. 용기를 얻은 두 사람은 대전을 거쳐 라이브 무대가 많은 대구로 내려갔다.
첫 무대는 동성로의 '해바라기 살롱'. 낮에는 통기타 가수, 밤에는 록 그룹들이 활동했던 대구 최고의 클럽이었다. 듀엣 이름은 '더벅머리'로 정했다. 이때가 1975년쯤. 이곳에서 듀엣활동을 하던 전인권을 만났다. 영향력이 막강했던 대구 기독교방송의 김원상 PD는 평생의 은인. 무작정 그를 찾아가 “키워 달라”고 부탁해 '6시에 만나요'에 출연했다.
첫 방송이었다. 라이브로 사이몬&가펑클의 '코닥크롬'등 어려운 노래를 불러보았다. 깜짝 놀란 김원상 PD는 더블 DJ로 영입했다. 1년 후 어느 날, 김PD가 "서울 지구레코드에 가보라"고 해 새벽 열차를 타고 상경해 스카라 극장 앞 지구레코드로 갔다. 지구 임사장은 작곡가 원희명등의 좋은 평가를 듣고는 정동 MBC의 차재형 PD에게 이들을 데리고 갔다. “내가 키울 최고 실력의 통기타 듀엣”이라는 소개를 듣고 "이제 고생은 끝났구나"하는 착각에 빠졌다.
'목화밭'으로 인기 만개 의리의 음악인생 이어가
지구레코드 상무의 권유를 받아 팀 이름을 '더벅버리'에서 '하사와 병장'으로 바꾸어 5곡을 수록한 데뷔음반 <하사와 병장-그리움.지구.76년 6월>을 발표했다. 하지만 음반사의 무관심으로 대구에서 음반 발매 기념 '하사와 병장' 첫 리사이틀을 열었다. 게스트로 이정선과 해바라기 등 포크 가수들을 초청해 앨범 홍보에 나섰지만 반응은 그저 그랬다. 기대가 컸던 탓에 실망도 컸다.
이에 대구 기독교방송 김원상 PD는 달구벌 음악 학원을 운영했던 작곡가 진남성을 소개해주었다. 바로 '목화밭'의 작곡가다. 원래 '목화밭'은 단순하고 느릿한 컨트리 풍의 곡이었다. 자꾸 들어보니 멜로디만은 좋게 느껴져 스윙 풍으로 편곡했다. 라이브 무대에서 불러 보자 제법 반응이 좋아 청계천 오아시스로 재상경했다.
마장동 스튜디오에서 3시간 반 동안 14곡을 녹음했다. 하지만 단돈 2,000원을 받고 장욱조가 편곡을 떠 맡아 녹음은 성의 없이 진행되었다. 대구에서 반응을 얻자 그들은 부산 서면의 '조약돌' 레스토랑으로 내려갔다. 오디션에서 '목화밭'과 팝송을 불러 대구 시절의 6배가 넘는 23만원에 계약을 했다.
부산 나이트 클럽 무대에는 당시에는 무명에 가깝던 조용필, 최백호, 이택림, 장재남, 최진희, 박은옥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부산 시절 이병장의 결혼 문제로 팀이 깨질 뻔했다.
당시 이경우는 서면 대아호텔 커피숍에서 노래를 하다 검은 피를 쏟았다. 오랜 무명 가수 생활동안 라면으로 연명을 해 영양 실조에 걸렸던 것. 부모님이 계시는 속초로 갔다. 진찰 결과 다행히 혈관에만 균이 있어 요양 후 서울 MBC로 무작정 올라갔다.
방송국PD들은 납작 모자(도리구치)를 쓴 건장한 두 청년의 모습이 눈에 박혀 왔다. 다음은 TBC 신광철PD를 만나 김만수의 청소년 음악 프로에 출연했다. CBS에서는 김진성PD를 만나 양희은이 진행한 '우리들'에 나갔다. 또한 최백호의 소개로 이용복, 홍민, 남궁옥분, 노사연, 이동기가 출연하는 명동 '오라오라' 생맥주 집에 나가 노래를 하게 되었다.
효과가 있었다. 갑자기 '목화밭'이 라디오 가요차트에 오르는 인기를 얻자 오비스 캐빈과 무교동 '꽃잎'등 에서 출연제의가 왔다. 이때 서판석을 매니저로 삼고 서유석의 주선으로 남산 리라초등학교 근처에 있던 킹레코드의 킹박을 만났다. 킹박은 "얼마를 원하냐"며 백지 수표를 꺼냈다. 순진했던 그들은 “키워만 주세요”하고 떨리는 목소리도 대답했다. 킹으로 둥지를 옮겼다.
당시는 75년 가요 정화 사건 이후 포크와 록이 통제 받던 시기. 최헌, 최병걸, 조경수, 윤수일 등 록커들이 이 시기에 대거 트로트 가수로 전향했다. 목포MBC에 출연하기 위해 해남으로 가는 도중 이병장이 트로트 곡 '해남 아가씨'를 만들었다.
이 음반은 5만장 이상 나가고 가요차트 베스트10에 드는 대박이 터졌다. 하사와 병장도 트로트 부르는 포크 가수로 변신을 꾀했다. 한꺼번에 여러 방송을 탈 만큼 반응은 대단했다. 대부분 앉아서 노래하는 통기타 가수들과는 달리 서서 율동을 곁들여 노래한 것이 적중했다. 하사와 병장은 절정기를 구가했다.
해남에서는 그곳 출신 가수인 박우철도 하사와 병장의 인기에는 못 미쳤다. 지금도 하사와 병장의 '해남아가씨'는 해남군가처럼 대접받고 있다.
이후 음악적인 발전이 없어 83년 해체되었다. 속초로 내려간 이경우는 카페 '목화밭'을 운영하며 84년 은행원 김희정과 중매 결혼을 했다. 속초 생활에 적응해 가던 중 유니버샬에서 음반 제작을 제안해 와, 트로트 솔로 앨범 '인생은 바람이라며'를 냈다. 결과는 참담했다. 내친 김에 86년 이동근과 재결합을 시도, 몇 장의 음반을 발표했지만 예전의 인기를 회복하지는 못했다.
89년 발표한 자작곡 '블루스맨'은 비로소 음악성을 갖춘 아티스트로 변신을 꾀하게 해준 모멘트였다. 박중훈 주연의 SF '바이오맨'의 영화 음악을 만들면서 낸 음반이 '블루스맨'이었다. 사실 '블루스 맨'은 화장실에서 갑자기 악상이 떠올라 3분만에 작곡한 노래였다.
MBC 라디오 '2시의 데이트'의 DJ 김기덕은 이례적으로 한 달에 세 번씩이나 팝송이 아닌 가요 곡 '블루스맨'을 틀어주었다. 시나리오 작가 최성호가 연극을 제의해 와 손창호와 함께 모노형식의 연극을 신촌 뼝캬耐蔓恙【?50일간 열며 대단한 반응을 몰고 왔다.
당시 이경우는 신촌블루스와 함께 블루스 열풍을 몰고 온 총아로 떠올랐다. 그 바람에 음악 영웅 박인수와 함께 KBS TV <연예가 중계>에 함께 출연하는 운명적인 만남도 가졌다. 하지만 그를 지지해 주던 PD들이 뇌물 사건에 연루되면서 딜레마에 빠졌다. "내 음악인생에 있어 가장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다시 속초에 내려가 부친의 수산물 가공 사업과 함께 재즈카페 블루노트를 운영했다. 사업에 싫증이 날 즈음 미사리 포크 붐을 타고 다시 상경해 쉘브루에서 통기타 노래를 잠시 했다. 이후 원래의 음악고향인 재즈 가수로 돌아갔다. 작년엔 일산에 <하사와 병장>음치 클리닉을 오픈했다.
"노래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에게 나의 작은 재주가 큰 도움을 주고 있는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 그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병색이 짙었던 선배 박인수를 위해 자선 콘서트를 마련해 수술비 마련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스타 기질보다는, 남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과 의리를 잊지 않는 사람이다. 89년 이후 오랜 기간 음반을 내지 못하고 있는 이경우가 언제쯤 '블루스맨'을 능가하는 자신의 진짜 음악을 다시 내놓을까?
<최규성 가요탈럼니스트 kschoi@hk.co.kr>
[ 출처 : 주간한국 2003.10.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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