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감나무
다만 김 영 길
설 명절이 지나고 보름날도 지난 날 오후 선물로 들어온 곶감을 가족들과 먹으며 이것은 어디 제품인가 하고 상표를 살펴보았다. 역시 곶감하면 상주요. 감하면 영동이라고 지역 특산물로 대표 된다. 상주 산 곶감으로 말랑말랑 하고 씨도 없고 크고 달고 맛있었다.
어릴 적 60년 전쯤 고향에서 곶감 만들던 생각이 났다. 덜 익은 감을 따다 껍질을 까서 실에 꿰어 처마 및 서까래에 매달아 두었다가 겨울 찬바람이 불면 내려다 먹기 시작 했다. 겉은 새 하얀 분이 밀가루를 묻힌 듯 묻어나고 씨가 많고 이 튼튼한 사람이나 씹을 수 있을 정도로 딱딱했다. 별로 먹을 것이 없던 시절 지금 곶감과 비교도 안 되지만 감나무가 잘되는 우리 고향에는 집안에 몇 그루씩 감나무를 키우고 있었다. 일부는 곶감을 만들었고, 일부는 서리를 맞춰 푹 익은 감을 따서 토기 독에 넣어 집 뒤쪽 장독대에 두었었다. 흰 눈이 쌓이고 찬바람이 씽씽 문풍지를 울리는 추운 겨울 밤 얼은 감을 화로에 녹여 먹곤 했었다. 우리 집 뒷마당에도 2그루의 감나무가 있어 남 주고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감이 달렸다.
열 살쯤 됐을 때 잔설이 가시고 새봄이 와 따듯하던 날 아버지께서 망태기를 주시며 감나무 접붙이러 가자고 하셨다. 망태기 안에는 작은 톱, 창칼, 양초, 실끈, 감나무 작은 토막(접수)이 들어 있었다. 아버지 뒤를 종종 따라서 청광이 양지 골로 갔다. 그곳은 음성군과 괴산군의 경계로, 음성군 원남면과 괴산군 사리면과 도안면 3개면이 맞닿아 높지 않은 산으로 경계를 이루며, 토질은 마사와 황토 섞인 토질로 곡식은 잘 자랐다. 물이 귀하여 음달 양달 두 골로 나뉘어 있어도 두 곳 모두가 비가 오지 않으면 모를 못 심는 계단식 천수답들이다. 너무 작아서 삿갓 속에 들어간다고 하여 삿갓 다랑이, 길기만 하고 폭이 좁아서 뱀 다랑이 논이라 불렀었다.
맑은 물이 고인 도구에는 봄이면 가제와 도롱뇽이 알을 까고 미꾸리도 숨어 있어 가끔은 가제 미꾸리 찌개 맛을 주기도 하며 12마지기(2,400평정도)로 우리 가족의 큰 재산이었다.
논을 일구고 가꾸다 나온 돌들을 모아 놓은 돌 사덕이 논 양 구석에는 웅기종기 쌓아져 있는 전형적인 천수답이다. 돌 사덕 사이에 고욤나무를 키워서 감나무를 접붙이려고 오신 거였다.
고욤나무를 땅에 다일 정도로 짧게 자르고 칼로 쪼개고 접수(감나무 짧고 눈이 2개정도 달린 것)를 양면으로 비켜 잘라 고욤나무에 끼운 후 실끈으로 동여매고 그 위에 양초 물을 접수 위와 실끈으로 맨 부분에 떨어 뜨려 수분 증발을 막고 흙으로 덮고는 새싹이 밖으로 나오면 잘 보호해 주면 감나무로 자라게 되는 것을 배웠다. 삼년 쯤 지나면 몇 개씩 감이달리고 해가 갈수록 크게 자라서 그늘 밑에서 들밥을 먹고 쉼 잠을 자는 큰 나무로 자랐다.
퇴직 후 몇 해 동안 과일 농사를 지으면서 아버지께서 접붙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덕에 많은 사과나무에 접을 붙일 수 있었다.
다락 논에 벼농사를 지으려면 많은 노력과 지혜가 있어야 가능하였다. 초 봄 부터 눈 녹은 물을 가두어야 하고 비가 오면 물꼬를 잘 관리해야 하며, 소나기나 비가 많이 오면 물고를 터놓아야 논둑이 터지지 않고 논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모심기철 늦도록 가뭄이 들면 논바닥이 거북이 등처럼 갈라지고 먼지가 날리고 모판이 말라 버리면 한해 벼농사를 포기하고 콩을 심어야 했다. 모자리가 있는 논은 물이 솟는 옹달샘을 파고 물이 고이면 밤을 새워 두레박으로 물을 펐다. 어느 해 가뭄이 심하여 비를 목 타도록 기다리던 중 많은 비가 쏟아져 대나무삿갓에 도롱이를 두르고 맨발로 논둑작업을 하시던 아버지가 눈에 선하다.
봄이면 갈잎을 꺾어 넣고 쟁기로 논을 갈면 우렁이와 가제가 심심찮게 극정이 밥에 나와 새참 들고 간 저에게 구워 주시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천수답을 잘 경작하여 마을 앞 가까운 전답을 사시고 경작지를 넓히시며 5남매를 키워 공부를 가르치셨으며 남의 집에 꾸러가지 않고 재산을 늘리신 부모님이 이 순간도 감사를 드리며 그리워진다.
이른 봄 논갈이를 하시던 날 이웃마을에 사시는 친구 분이 찾아와 옆 산이 급매물로 나왔다고 하신다. 아버님은 결심을 하신 듯 쟁기를 논 가운데 세워 놓으시고 말 잘 듣고 힘 좋아 일 잘하고 새끼도 잘 낳고 공들여 키운 복덩이 암소를 파시려고 증평 장에 가셨다. 오후 늦게 돌아 오셔서, 저녁식사도 하시는 둥 마는 둥 어두운 밤인 대도 친구 분과 같이 밤늦게 계약을 하고 오신 아버지는 피곤해 하셨으며 너무 너무 기분이 좋다고 하셨다.
농토 옆 산에 선조님들을 모시고자 많은 계획을 하시던 중이셨다고 한다. 그 산 능선이 안락의자 뒤 기댐 틀 같이 생겼고 우수 좌출에 좌청룡 우백호 등 어린 나로는 잘 모르는 말을 하시며 기회가 좋았다고 말씀 하셨다. 할아버지 내외분과 형제분으로 형님내외를 아버지께서 이장하여 직접 모시고 그 밑에 본인 신유지도 만드셨으며, 지금은 부모님도 그 선영에 모셔져 있다. 이곳은 이 세상 살면서 즐겁고 좋은 일이 있거나, 슬프고 힘든 일이 있으면 찾아오는 독백과 울음 터로 부모님께서 주신 유일의 풀음 장소이다.
언제인지 음달골에 쓰레기 처리장이 만들어 지면서 옛 다랑이 논 형태가 완전히 없어지고 지금은 포클레인 작업소리 까마귀 까치가 소란하게 싸워대는 시끄런 소리와 쓰레기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황량한 골짜기로 변했다.
내 고향 선영 맞은편 감나무 한그루가 옛날이 아름다웠고, 정서가 있었고, 아버님과 접붙인 감나무라고 말을 하려는 듯 늙어 굵고 큰 나무로 자라서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옆에 옛 추억을 되새기게 하며 서있다.
아버지 돌아가신지 50년이 지난 지금 자식 사랑은 내려 사랑으로 대가 없이 거저 주는 사랑 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 어머님 앞으로 이삼십년 지나면 쓰레기가 다 채워져 공원이 된다고 하니 지금은 누추하고 서럽더라도 아름다운 공원을 내려다보시는 즐거움이 오겠지요?
안개와 사진
다만 김 영 길
핸드폰이 문자가 왔다고 소리를 낸다. 이번 토요일 새벽 4시 출사 갈사람 연락 바랍니다.
나의 취미가 너무 많아 가끔 아내는 “해보고 싶은 것 다 해본 사람이라고” 심하다 싶으면 한 마디씩 한다. 집에 붙어있지 않고 건강하게 잘 돌아 다닌다는 부러움과 반은 속상한 마음으로 하는 말이다. 내가 해본 취미는 돈을 버는 것이 아니며 모두가 쓰는 즉 낭비만 하는 것들뿐이었다. 분재, 양봉, 개 사육, 등산, 사진 찍기, 여러 가지가 있지만 취미 중에 지금까지도 제일 좋아하고 잘하는 것은 사진 찍기와 술 마시는 것을 제일 잘 한다.
출사를 가려면 장소의 특성을 파악하여 그곳의 포인트(관광지에 가면 “사진 찍는 곳” “사진이 잘 찍히는 곳”으로 보면 맞을까?) 등을 미리 알아 구상을 하고 가는 것이 좋은 사진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생각 한다. 그냥 따라가서 어디지 하고 찾아내어 좋은 사진 찍는 장소를 찾기가 쉽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충주호변 옥순대교에서 옥순봉과 구담봉 새 바위, 벼락 맞은 바위 및 장회나루 제비봉(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을 안개 속에 넣고자 새벽 4시부터 서둔 출사이다.
등산로 구분이 어렵다 조심조심하여 촬영 장소를 찾는다. 앞서 가는 이의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만 들린다. 한참을 오르니 숨이 차고 땀이 송굴 거린다. 얼마를 올랐을까 나무나 숲을 지나온 것이 아니고 직접 날아온 공기 맛이 다르게 느껴진다. 직감적으로 이곳이 포인트라 판단하고 삼각대 위에 카메라를 안치고 본격적인 촬영 준비를 한다.
희뿌옇게 산과 하늘이 구분이 잘 안되는데 시험 삿터를 눌 루니 10초도 넘겨 철컥 소리가 난다. 보기 창이 검어서 사물이 안 보인다. “감도를 올려야겠군.”
안개는 힘이 센 심술쟁이다. 눈 뜬 자를 맹인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사람도 기계도 못 가게 하는 큰 심술쟁이다. 이곳에 오면서 속도를 줄여도 갈 수 없어 서다 가다를 승락을 받으며 왔다.
산 준령이 보이는 듯하다 사라지고 없다 다시 보인다. 바위 형태가 보이다 다시없어진다. 계곡 바람이 분다. 안개가 피여 흘러간다. 떠내려간다. 빛이 보이더니 살아지고 다시 태양의 붉은 빛이 보인다. 안개 사진은 카메라 감도를 적정하게 높여 기다리다 순간을 찍는 것이다.
마음에 드는 한 컷을 잡으려면 기다림의 순간을 위해 장비 맞춤이 주요하지만 사람의 감각과 감성이 총 동원되어 순간을 잡는 것이 좋은 작품이 탄생 된다.
돈 드는 것도 아니고 순간순간을 수 십장 찍어 고르면 된다는 초보 의식으로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없다고 본다.
기다려도 해가 보이지 않는다. 보통의 안개사진 밖에 더 기대 할 수가 없어 혼자서 옥순대교 밑 물가로 장소를 옮겨 갔다. 장비를 재점검하고 시험촬영도 하며 릴리즈를 잡고 기다리는 동안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라는 누구의 말인지는 몰라도 떠올랐다.
인간이 영리하고 최상위의 지배자라면서도 숨었다, 보이 다를 습관처럼 안개를 닮아 사는 것 같다. 저 안개 속 같이 보일 때가 있고 도저히 가늠도 할 수 없고 소용돌이를 당하다 태양에 저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살아지는 것은 안개나 인간이 같은 것 같다.
사람들은 흔적을 남기며 오늘도 저들의 삶 속에서 스스로가 최고 이며 최선을 다했으며 최대로 노력을 하며 살고 있다고 잘 난체 하면서 허물을 숨기기며 산다.
다리 위로 가끔 지나는 차량들을 보며 옛 사연들이 생각난다.
멀리 희미한 버스 불빛이 보인다. 서너 명의 중학생은 옛날 할아버지가 화전민 이었는데 지금은 때기골에서 자리를 잡고 자식에 희망을 걸고 열심히 성실하게 사는 부부의 자녀들이며, 그중 한 명은 운전수의 큰 아들이다.
운전석 뒤에는 밤새도록 남편의 병치레 수발로 잠 못 잔 노파가 약 사려고 가는 중에 졸고 있다.
오래된 1톤 트럭이 터덜거리며 천천히 지나간다. 운전석 옆에는 아내가 타고 있다. 고향에 홀로 계신 고령의 어머니가 위중하다는 연락을 이웃집 아저씨에게 받고 가는 중이다. 돌아가시면 집에서 장례를 모실까? 시내 병원 영안실로 모실까? 가막골 논과 밭은 누구에게 주실까? 아니야 어머님 마음대로 주시고 싶은 자식에게 주시게 우리는 욕심 부리지 말자는 효자 부부가 운전 중이다.
별로 좋지도 못한 승용차가 새벽안개 길을 중년 남녀를 싣고 지나간다. 부부는 아닌 것 같고 친구나 초상집 핑계 대고 놀다 집으로 가는듯하다.
고급 승용차 뒷좌석에는 골프채를 트렁크에는 낚싯대를 옆 좌석에는 짙게 화장한 여인과 같이 놀러 간다며 지나간다.
지금 이 시간이면 해가 산 위로 떴을 터인데 하는 순간 옥순봉 봉우리에 걸친 해가 얼굴을 보인다. 물이 붉은 양탄자를 깔고 요동치며, 안개 흐르는 춤이 모자라 폭포가 되어 변화무상으로 바뀌어 채우다 떠나고 다시 채운다.
절벽의 굴곡모습과 수십 세월을 벼랑에 매달려 만고풍상을 버틴 소나무도 의연한 모습으로 인사를 한다.
구도를 변경하며 손가락이 아프도록 릴리즈를 눌러댔다. 이 순간을 잡으려 얼마를 기다리고 큰 기대를 했던가?
훗날리던 안개 바다가 요동의 포구를 지나 사라지고, 솔잎 끝에 자리를 잡은 영롱한 구슬 되어 하루를 여는 아침이 열려진다.
“좋습니까?” 소리에 처다 보니 웃으며 나 같은 사진 장이가 서있다. 글쎄요! (그 속에는 왜 이제 오느냐는 야유가 담겼다) 장비를 챙겨 자리를 내어주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주차장 하천부지 작은 밭에는 늙은 내외가 묵묵히 허리 숙여 서리태 콩을 뽑는다.
안개가 걷히고 맑은 태양 아래 보통의 아침을 여는 상쾌한 풍경이다.
사진을 어떤 이는 종합예술이란 말을 하지만 나는 예측을 맞추는 순간예술이라 부르고 싶다
조금 전의 격동과 혼동의 모습은 판이하게 틀린다.
오늘 찍은 사진은 성공작이라 자평하며, 전쟁에서 돌아온 승자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피곤을 잊고 산행과 같이하는 제비봉 다음 촬영지로 어떻게 찍을까를 구상하며 장소를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