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였습니다.
<무애지국사 '계응'의 생몰 연대는 불분명한 것 같다. 추론해보자면 이러하다.>
이인로의 『파한집』중권에는 “계응이 어렸을 적에 절에 살면서 독서를 하였는데”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의천(1055~1101)은 47세에 입적하였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 계응을 만났을 것이고, 계응은 그때 어린 나이였다. 의천과 계응이 만나게 된 사찰은 위치가 경기도인 ‘국청사’였을 확률이 높다. 의천은 32세에 송나라에서 돌아왔고, 40세에 해인사에서 주석하였고, 43세 때 국청사에서 은거하였다. 그리고 47세에 입적하였다.
의천은 국청사가 완공(1097)되자 흥왕사 주지를 겸하면서 천태교관을 강의하였다. 의천은 숙종 5년(1100)에 국청사에서 천태교학을 강講하고, 숙종 6년(1101) 2월에는 천태종 승과 대선을 실시해서 40명을 선발하였다. 박용진, <의천義天> (혜안, 2011) 출판사 서평 참조
이때 선발된 학승에 ‘계응’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론해본다.
의천이 입적하기 전까지 대략 5년 정도 국청사에서 주석하였다고 추정한다면, 의천이 계응을 만났을 당시의 계응의 나이는 10세 전후였을 것이다. 의천 역시 14세의 나이로 출가하였으니, 후학들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 하였을지도 모른다.
의천은 고려 문종 때 태어나 숙종 때 입적하였고, 계응은 고려 선종 때 태어나 적어도 고려 인종 때 까지는 생존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인종 때에 숙종의 아들 원명국사 ‘징엄’의 초청으로 개경의 홍교원에 와서 160인의 학도들과 37일 동안 화엄법회를 개최하여 의천 대각국사의 화엄 종품을 드높였다.” 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daum 어학사전 ‘계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의천이 입적했을 때 계응은 14세 전후로 보인다. 의천과 계응이 맨처음 만났을 당시에 계응은 9세~10세 전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략 5년여 기간을 의천과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의천은 승과를 실시하여 학승을 선발하였다. 여기에 계응이 “40여 년 간 왕의 공경을 받았다”라는 기록을 대입하면, 인종이 승하하던 그때의 계응의 나이는 54~55세 전후가 된다. 또한 인종이 승하한 년도(1146)에서 계응의 출생년도를 마이너스하면 그때 계응의 나이를 추론할 수 있다. 하여 그 때의 계응의 나이는 55세 전후로 추정된다.
계응의 ‘출생 년도’는 의천의 입적 년도 ‘1101년 - 10년(대략) = 1091년’일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인종이 승하한 년도 ‘1146년 - 1091년(계응 출생 년도) = 55세’가 된다. 그러므로 계응의 출생 년도는 1091년에서 + 2년 정도일 것이다. 그 이전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게응은 55~60세 전후에는 태백산에 은거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계응과 각화사에서 동문한 ‘교융’(1079~1153)은 인종 승하(1146) 후 7년 후에 입적한다. 그때 교융의 나이가 74세였다. 그때 계응의 나이는 62세 정도. 계응의 생몰연대는 미상이므로, 아마도 은거하며 고요히 살았나보다.
* 더 자세한 자료를 가지고 계신 분은 알려 주세요. 이왕 쓴 것이니 더 정확하면 좋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