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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튀링겐의 고타에 가까운 호흐하임에서 태어났다. 15세 때 도미니크회에 가입하고 쾰른의 동회의 학교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게 배웠다. 파리로 가서 프란체스코회와의 논쟁에서 명성을 얻고, 1302년 파리 대학으로부터 마기스테르의 칭호를 허용받았다. 1304년에 작센의 도미니크회 관구장(官區長)이 되었으나 다시 파리로 돌아와 <3부작(三部作)>을 썼다. 1313년 슈트라스부르크로 돌아와 설교에 전념하였으나, 자기 부정의 변증법을 통한 인간-신 합일을 역설하였기에, 프란체스코회로부터 이단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세월이 흘러 1980년, 독일 발버베르크에서 개최된 도미니코회 총회가 마이스터 엑카르트에 대한 판결을 재심해 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하기로 결정하고, 자료 수집을 위해 마이스터 엑카르트 위원회를 구성한 바 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 복권 운동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이상하게 ‘가난’이란 말은 쉽지 않다. 불편하다. 부유하고 싶다. 그냥 종교적인 수사어구로 사용될 수 있지만 일상의 삶에선 쉽지 않다. 가난한 삶을 이야기하는 누군가도 모임에선 자신의 비싼 아파트를 돌려 자랑하기 급하다. 서글픈 듯이 보이지만 이것이 인간사(人間事)다. 어쩌면 나도 그렇다. 나도 인간이다. ‘더’ 멋지게 살고 싶고, ‘더’ 높은 자리에서 ‘더’ 높임을 받고도 싶다. 그런 인간이다. 남들보다 ‘더’ 좋은 것을 먹고 싶고, ‘더’ 좋은 것을 입고 싶고, ‘더’ 좋은 소득을 가지고 싶다. 어쩔 수 없는 나도 그런 인간이다.
에크하르트는 말을 하지 않고, 하느님의 임재를 기다리고 경험하는 관상(觀想)으로부터 출발하여 정적(靜寂)과 무(無)의 경지에 철저하였으며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생각했다. 에크하르트에게 하느님은 이성으로도 감각으로도 파악할 수 없는 무한한 황야같은 분이며 무한 자체이다. 여기에서 하느님은 페르소나(神格)을 초월한 하느님, 곧 '신성(神性)'으로서 모든 특징을 통합 해소한다. 이러한 신에게 몰입할 때 핵심이 되는 것이 인간의 영혼의 '작은 불꽃'이며 영혼의 성(城)이다. 자기를 무(無)로 돌려 하느님의 무와 합일하면 비로소 인간은 완전한 자유에 도달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드디어는 하느님까지도 버리고 최고의 덕을 달성한다.
‘더’ 좋음을 알게 되면, 가지고 싶다. ‘더’ 좋은 것이라 알게 된 것은 쉽사리 머리를 떠나지 않고, ‘더’ 좋은 것이라 가지게 된 곳은 온 힘 다해 잡으려한다. ‘더’ 좋은 것이라 욕심내는 것은 내 삶을 부여잡는다. 나도 그렇다. 조금 자유롭고 싶지만 쉽지 않다. 아마 많은 이들이 그럴 것이다. 남들이 쉴 때 나는 앞서야 하고 앞선 만큼 이겼다 좋아할 것이다. 더 노력했으니 더 가져야하고, 더 가졌으니 마땅히 더 행복해야 한다 생각한다. 나도 그렇다. 아마 다들 이럴 것이다.
‘더’ 좋은 것을 가지고 ‘덜’ 좋은 것을 가진 자들 앞에서 자랑하고 싶다. 부러워하는 시선 앞에서 은근히 승리감을 즐기고 싶다. 나도 그렇다. 그런데 욕심을 내고 살아도 여전히 허무하다. 더 좋은 것에 집착하고 집착해도 돌아오는 것은 허망함뿐이다. 채우는 만큼 비워지는 것도 커진다. 그 불안감이 더 큰 욕심을 만들고, 더 커진 욕심으로 더 커진 불안감을 채워도 그 허망함을 모두 채울 수 없다. 그냥 그렇게 산다.
에크하르트의 존재론적 가난, 하느님 품에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후기 중세 철학자 ‘에크하르트’는 존재론적 ‘가난’을 이야기 한다. ‘버리고 있는 모습’이 진정 우리의 참 모습이라 한다. ‘가난한 존재’ 말이다. 부유한 존재는 더욱 더 힘들게 하는 거짓된 우리의 모습을 참된 것이라 속일 뿐이라 한다. 맞는 말인 것 같다. 우린 무엇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론적 가난의 모습으로 태어난다. 그냥 아무 것도 아닌 존재다. 그런데 타인과 비교하는 것을 배운다. 비교를 통해 ‘더’와 ‘덜’로 세상을 나누는 법을 배운다.
더 많은 것을 얻어야한다. 덜 공부해도 안 되고 덜 노력해도 안 된다. 남들보다 더 공부하고 더 노력해야한다. 공부도 노력도 결국은 더 좋은 것을 먼저 얻기 위한 방법이다. 어찌 보면 인생이란 치열하게 남을 이기고 ‘더’ 좋은 것을 소유하려는 싸움이다. 그 싸움으로 우린 행복을 누리려 한다. 항상 더 좋은 것은 차지해야하고, 덜 가지게 될 것을 두려워하며 불안해해야한다. 그 불안감에 더 집착하며 더욱 더 욕심을 내게 된다. 하지만 에크하르트는 그냥 내려두라 한다. 가난하자 소리친다. 이제 제발 좀 가난하자 한다.
쉽지 않다. 더 좋아지고 싶다. 그것이 자신의 본모습이라 믿는다. 하지만 우리 모두의 존재론적 본모습은 가난이다. ‘대통령으로 있음’도 ‘공장 노동자로 있음’도 결국은 ‘있음’이다. 그것이 가장 근본적인 참모습이다. 그 참된 근본에 충실하자 한다. 우린 원래 무엇으로 있는 존재가 아닌 그냥 있는 존재다. 그것이 가장 분명한 우리의 참 모습이다.
‘대통령으로 있음’에서 그 대통령이 가지는 찰라의 권력을 본 모습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을 소유하고 유지하기 위해 참으로 추한 일을 하게 될지 모른다. 불법을 저지르며, 그 찰라의 모습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이미 독재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대통령’이란 그 찰라의 이름이 참된 있음은 아니다.
참존재의 얼굴은 ‘있음’이다. 그 ‘있다’이란 사실에서 ‘대통령’도 ‘노숙자’도 그리고 ‘해고 노동자’도 모두 ‘하나’다 하나의 ‘있음’으로 뿐이다. 에크하르트에게 그 ‘있음’의 유일한 근거는 하느님이며, 그의 품이다. 하느님이 품지 않은 존재는 처음부터 없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품속에 있다. 하느님의 품속에 권력을 가진 대통령이 있는 것이 아니고, 자본을 가진 재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있음’이 있다. 오직 ‘있음’이란 그 가난한 모습으로 있다.
무엇으로 있으려 노력하는 아집에 찬 모습은 순수한 우리 존재의 본모습이 아니다. 오히려 가린다. 우리가 아집으로 유지하려는 그 아집이 하느님 품속에 있는 우리를 가리고 불안하게 만든다. 무엇인가 더 소유해야한다는 불안감을 심어준다. 이미 충분히 평화로운 하느님의 품인데 말이다.
신성한 그 '가난한 있음'을 '개돼지'라 부르면 안 돼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1260년경에 고다(Gotha) 근처인 호크하임(Hocheim)에서 태어났다. 그는 에르푸르트(Erfurt)에 있는 도미니칸(Dominican) 수도원에 입단하여 콜로뉴에 있는 수도회의 스투디움(studium)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그는 에르푸르트 도미니코 수도회의 원장(prior)이 되었으며 동시에 투린지아(Thuringia) 도미니크 수도회의 대리 주교(vicar)이기도 했다. 1302년에 파리에서 미스터(Master) 학위를 받고 1303년에는 삭소니(Saxony) 지방의 지역 관구장, 1307년에 보헤미아(Bohemia) 지방 교구장, 1312에 전 독일 도미니크 수도원 감독 관장직을 역임하였다. 1313년에는 스트라스부르그(Strassburg)에서 설교자와 수도원장으로 돌아온 그는 1313년에서 죽기까지 콜로뉴에 있으면서 가장 유명한 시대를 이루었고 수준 높은 설교를 하였으나 말년에 이단 시비로 휘말려 고통을 겪기도 하였으며 또한 그의 교리적 견실성에 대한 많은 중상을 받았으나 이에 대항하여 옹호하였다. 1327년에 그가 죽은 이후 이단 혐의로 조사되어 1329년 교황 요한 22세는 그의 저작 중 28개의 명제를 정죄하였고 그중 이단적인 것으로 17개를 선포하였으며 11개는 경솔하고 편협한 것으로 판결하였다.
에크하르트의 설교
아집에서 벗어나 서로의 참된 존재론적 본모습을 볼 때, 에트하르트에게 모든 존재는 그저 하느님의 품속에 있는 작은 몸짓이다. 하느님의 모습을 품고 있는 하느님의 품속에 있는 거룩하고 신성한 존재들이다. 지금 길거리를 보자. 무엇인가 물건을 파는 이의 있음도 하느님의 품속이다. 청소하는 이의 있음도, 아이와 웃으며 놀고 있는 어린 어머니의 있음도 마찬가지다. 뜨거운 햇살 아래 농삿일을 하는 일꾼의 있음도 다르지 않다. 해고노동자의 있음도 외롭게 아파하는 모든 사회적 약자의 있음도 모두가 하느님의 품안에 있다.
그 모두가 존재론적으로 하느님 품안에 한 가족이다. 하느님의 품안에 ‘있음’으로 하나 된 가족이다. 에크하르트는 수도원이나 대학의 강의실도 아닌 민중들이 공간으로 찾아가 그들에서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귀에 알맞은 설교를 했다. 알아듣지 못하는 가진 자들의 언어인 라틴어가 아닌 민중의 언어로 민중에게 다가갔다. 진정 신성한 곳은 아집으로 자신의 신성함을 고집하는 곳이 아니라, 그저 일상 속 작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 있음들 가득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에크하르트는 「첫 번째 파리문집」(First Parisian Question)에서 존재(being)가 신의 속성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 존재가 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고 피조물의 속성으로서 보이는 한 신은 가장 순수한 존재이시다. “한 처음 말씀이 이었다.” 는 것은 존재의 모퉁이 돌로서 지성을 자리 잡게 하다. 따라서 에크하르트는 한 처음에 말씀(Word)이 있었지 존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요한복음 기자의 말대로 태초에 존재보다 말씀이 있었는데, 이 말씀은 ‘인식’을 뜻하기 때문이다. 즉, “말씀”과 “진리”는 앎과 관련된 것이지 존재와 관계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신은 일자이고 그의 속성은 일치이다. 신이 전적으로 지성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신을 일자(One)라고 말하는 것과 동등하다. 에크하르트의 존재론의 절정이 기독교 삼위일체에서 찾아진다고 할지라도 그 신비적 철학의 절정은 신적 존재의 근원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신적 존재는 그의 실재보다 차라리 일치이다. 신적 존재는 모든 존재의 손수 또는 존재의 충만으로 묘사된다. 피조물이 존재라면, 신은 존재를 초월하시고 존재의 순수이시다. 왜냐하면, 신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신을 존재라 부른다면 우리는 피조물을 무(nothing)라고 불러야 한다. 즉 피조물은 순수 없음(pure nothing)이다. 그러나 신과 일치된 것으로서 피조물은 영원히 존재하고 불변한다.
그러므로 피조물의 본성은 두 개의 본성을 갖는다. 즉 무(nothing)와 무한한 신성(Deity) 사이의 긴장 속에 놓이는 것이다. 즉, 피조물들을 신(God)과 무(nothing) 사이에 놓인 분리의 대상으로 이해하는 것보다 신과 무로부터 자신의 실재를 끌어오는 대상으로 이해한다. 즉, 인간은 지적 이해(지성)를 통하여 일자(One)로 돌아온다. 따라서 에크하르트는 신의 모든 존재는 지성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에크하르트가 플라톤 전통(특히 플로티누스)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 이유는 신을 존재보다는 이해(지성)로 부르기를 더 원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에크하르트는 모든 피조물의 근원을 無로 보지만 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고 신과 관여되는 것은 영혼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유한 자인 피조물은 신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가? 에크하르트는 영혼의 불꽃(the spark of the soul)을 통하여 인간이 신과 관계를 맺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영적 본질로서 영혼을 간주한다. 그러나 이것은 영혼의 여러 기능 - 예를 들면 보는 기능, 인식하는 기능 등 - 과는 구별된다. 이것이 바로 영혼 안에 있는 능력(faculties)이다.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에크하르트는 여러 가지 다른 어휘(영혼의 능력, 영혼의 성, 영혼의 빛 등 )를 사용한다.
피조물로부터 분리된 활동과 실존은 지성이기 때문에 인간이 신성과 하나게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인식능력, 즉 “우월한 이성적 능력” 또는 “영혼의 불꽃” 안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인간의 참 지성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신과 구별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지성은 창조되지 않으며, 창조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과 하나인 인간의 지성은 사물을 신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 진정한 신적 연합이 발생하기 때문에 인간은 신이 아닌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야 한다. 이것은 전적인 단순성과 일치 안에서 신적인 지성과 닮은 영혼이 깃든 육체로 진실하게 들어가는 것이다. 영혼은 신성만이 소유하는 자유와 순수성을 안다. 신은 영혼 깊은 곳에 거주하기 때문에 지성(intellect)은 심층에서 그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크하르트는 사람의 삶이 순결하고 가난할수록 신께 더욱 가까이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가장 고귀한 것은 자신을 비우는 것이다. 그는 무심(Disinterest)을 사랑보다 더욱 고귀한 것으로 평가한다.
하느님의 품속 소중하고 신성한 그 가난한 있음을 향해 누군가는 '개돼지'라고 했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존재론적 참모습인 ‘가난한 있음’이 아니다. 그 있음이 잠시 입게 되는 옷을 본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남에게 어찌 보이는가이다. 더 많은 것을 누리는 사람으로 보여야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보인다면, 적당히 작은 일상의 존재들을 무시하며, 그 무시의 밖에 자신이 있음을 즐기려한다. 그러나 기억하자. 그것이 우리의 본 모습이 아니다. 그가 보는 모습은 우리의 참된 본모습이 아니다. 그가 노력하는 그 모습도 그의 참된 본모습이 아니다. 모든 아집에서 벗어난 아무 것도 아닌 순수한 있음, 그 가난한 있음으로 있는 우리가 가장 참된 본 모습이다.
무엇이 되기 위하여 집착하고 욕심내며 살아가는 것이 참된 행복을 주지 못한다. 참된 행복은 바로 가난하게 있는 우리의 본 모습으로 가능하다. 에크하르트의 이런 존재론은 이후 많은 여성 신비가들에게 영감을 준다. 무시 받고 소외받는 여성들도 하느님 품안에 ‘가난한 있음’이다. 절대 무시 받고 소외받아야할 존재가 아니다. 그런 존재는 없다.
에크하르트는 자유로운 마음으로 우리 주님께 나아가기를 원하는 사람은 세 가지 자세와 태도를 보여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양심에 비난받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두 번째로, 그런 사람은 자기 뜻이 신을 향하게끔 해야 하며, 신께 뜻을 집중시킴으로써 신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서도 기쁨을 얻어서는 안 된다. 세 번째 규칙은 우리 주님에 대한 그의 사랑이 매번 반복되는 성찬에의 참여와 함께 성장해야 한다는 것과 성체에 익숙해짐에 따라 그에 대한 존경심이 감소하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사람 속에서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심으로 기쁨을 누린다. 우리가 지치고 우울하고 분해서 주님께로 나아갈 용기가 없을 때 에크하르트는 신께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즉, 그와 결합하라 하나가 된다면 우리는 의롭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신체적 힘들은 우리 주님의 몸의 현존이라는 최상의 힘으로 하나의 초점으로 볼일 것이며 분산되었던 감각들 역시 일치되어 조화를 이룰 것이며 신께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과 그분의 마음은 하나가 될 것이며 우리의 몸과 그분의 몸도 하나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감각과 의지, 생각, 신체의 여러 기능이나 기관들도 그렇게 될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우리가 모든 결함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고, 덕성과 은총으로 덧입기 원하며, 우리의 존재의 근원을 향해 기쁘게 인도되기를 원한다면 주님의 몸을 받을 만한 준비를 하고 자주 성체를 받도록 하여 우리 주님과 결함이 됨으로써 그분의 몸을 통해 고귀하게 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한다.
에크하르트의 이러한 존재론은 높고 낮은 위계의 질서 속에서 기쁨을 누리는 가진 자들에게 강한 반발을 샀다. 그러나 그의 철학을 많은 이들을 통하여 쉼 없이 이어졌다. 지금 여기 작고 작은 사람도 하느님의 품안에 있는 귀중한 사람을 알려주며 쉼 없이 이어졌다. 가난한 있음, 그 소중함을 이야기하며 쉼 없이 이어졌다. 쉼 없이 말이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가 다른 종교의 신비주의와 깊은 관련성을 맺고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는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가 자신의 삶 가운데서 신비체험을 깊이 체험한 것과 이러한 자신의 체험을 신앙적인 사색과 사변(思辨)을 통하여 총체적으로 융합시켰다고 볼 수 있다. 즉 자신이 직면한 구체적인 그리스도교 신비체험을 종교의 보편성 영역으로 깊이 심화, 확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신앙과 이성의 종합을 구현하는 신학이 아니라 감정과 이성을 뛰어넘는 신학적 작업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첫댓글 에트하르트에게 모든 존재는 그저 하느님의 품속에 있는 작은 몸짓이다. 하느님의 모습을 품고 있는 하느님의 품속에 있는 거룩하고 신성한 존재들이다.
가난마저도 사치로 여기며 물러나 초탈할 후 있는가? 영혼 마저도 돌파하여 무에서 자신의 신성을 드러낼 수 있는가? 영혼의 근저에서 신을 만나 일치한다는 허구를 벗어야 비로소 내안에 이미 비이원적으로 구족한 신성이 드러난다. 깊히 깊히 고요히 침잠해 보라 거기에서 빛이 되리라!
Tat Tvam As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