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격스런 울음을 위하여. 김정환
우리는 그곳 사람들과 함께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간곡히 권하였다. 그러자 바울은 “왜들 이렇게 울면서 남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 겁니까? 주 예수를 위해서 나는 예루살렘에 가서 묶일 뿐만 아니라 죽을 각오까지도 되어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사도행전 21장 12 ~ 14절
여기는 아직 약소민족의 나라
이별이 쉽고 사랑이 쉽고 미움이 너무 쉽다
추위가 쉽고 철책선이 쉽고 가시철망에 묻은
피 묻은 살점이 너무 쉽다
눈발 펑펑 쏟아지는 사계청소 지뢰 철거 작업을 끝내고
조립식 막사 내무반 화목 페치카에 둘러앉아 졸린 눈으로
그러나 우린 아직도 이 세상의 살벌함에 대해 잡담을 한다
흙 묻은 훈련화로 숯 검댕이 얼굴로 두터운 방한복으로
이 겨울에 우리를 감격시키지 못하는 것은
80원어치 연말연시 대통령 하사특식 국기게양대 밑에
색 바래진 채 버려진 독립유공자의 때 묻은 장갑 역경을
딛고 일어섰다는 신진 재벌의 입지 성공담 그러나
우리는 감격하지 않는다 평행으로 마구 휩쓸려가는 눈발 속에서
이구동성 외칠 것 외치기 위하여
왜 뿌리 없는 감격은 된서리에 이내 시들고
분단이 되고 친일분자가 되고 소시민이 되는가
우리는 베웠다 인천부두에서 이태원 뒷골목에서
워싱턴에서 유엔에서 역사는 다만 되풀이되고 제국주의
프로권투 세계 챔피언이 나와도 그 기쁨이 왜 슬픈가
우린 감격하지 않는다 조간신문을 펼쳐들고 석굴암 신라 정신과
평생을 같이 살고 싶다는 저명한 외국 관광학자
감상문이 실린 문화면 톱기사에 온몸 부르르 떨며
무슨 철천지원수나 되진 것처럼 못내
무슨 한 많은 인생이 비명에 간 것처럼 못내
감격하지 않는다
그런가?
어둠 속에서 시린 발들을 부르는, 부르는 소리 아침 한탄강따라안개, 단풍타는산, 공비전쟁, 조립식막사, 판초우의모포쓰고잠복, 주먹밥, 갈대밭, 야간사격, 보름달, 이마에 핏자국
여기는 아직 약소민족의 나라
세차게 쥐어뜯는 눈발마저 평행으로 마구 흩날리는 철책선
남으로도 못 가고 북으로도 못 가고
가시철망에 묻어 썩은 피 엉긴 살점은 왜 망망바다를 향해 있는가?
손들엇! 뒤로 돌앗! 암구호! 공비...? 아니면...?
이 떨리는 두려운 약소민족의 수하에
이별이 쉽고 사랑이 쉽고 미움이 쉽고 감격이 너무 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