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일본천황가는 온조.구태.비류.근초고왕.성왕 등 백제대왕들에게 제사를 지내는가?
일본열도는 근초고대왕의 아들 근구수대왕이 태자시절에 마한연방을 정벌할 때 마한연방에 속했던 일본열도를 점유한 후에 야마토(해땅) 왕조를 세우고 자신의 할아버지 근초고대왕에게 백제제후라는 명문을 새긴 칠지도를 받은 근구수대왕의 아들(인덕천황)에게 천황자리를 맡겼고, 백제대왕의 자리를 신라귀족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침류대왕에게 물려 주고 일본열도로 건너와 일본천황에 오르게 되니 오사카 지역의 대형 고분인 응신천황릉이다.
백제 제14대 근구수대왕은 375~384년간 재위기간 9년이고, 일본의 오진應神(응신천황)은 백제인으로 390-400년간 제위한 인물로 백제 근구수대왕의 연대와 딱 맞아 떨어 진다.
오진大津신사의 기록: 特に百濟の貴須王の子孫と言われる葛井氏、船氏、津氏の三氏族が勢力を扶植していった。葛井氏は藤井寺市藤井寺の辛國神社、船氏は柏原市國分市場の國分神社、津氏は当社(=大津神社)とそれぞれ祖霊を祭っているようだが、明治以後であろうか素盞嗚尊や牛頭天王を祭る形になっている。
현재 일본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일본문자를 만든 인물은 전남 영암출신의 백제 박사 왕인이다. 일본왕실의 요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한자를 보급하고 한자의 핵심부수만 빼서 문자를 개발하여 보급하니 현재 일본인들이 사용하는 일본문자인 것이다. 일본인들은 왕인박사를 일본어의 아버지라 칭하고 있다.
▲ 근구수대왕릉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응신천황릉(오사카)
근구수대왕과 신공황후가 왜 일본인들에게 나란히 불상으로 섬김을 받고 있으며, 일본지폐에 신공황후를 새겨서 일본을 대표하는 시왕모인양 떠 받들어 대는 것일까? 그것은 근초고대왕 시기에 단행한 마한.가야.신라를 정벌한 근구수대왕의 후비가 왜왕의 왕후로 왜여인 출신인 신공황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근초고대왕 시기에 실현한 마한.가야.신라정벌을 마치 당시 연대기에 맞추어 신공황후가 정벌하여 백제에게 준 것 처럼 한반도와 인연을 단절한[일본서기]에 기록하여 혼란을 준 것이다. 당시 왜의 군사력으로는 마한.가야.신라를 정벌한 능력자체가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백제 근구수대왕은 태자 시절에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열도를 통일하고 야마토왕조를 세워 362년에 응신천황이 되고 왜 여인인 야가하에히메를 취하여 신공황후로 삼고, 야가하에히메가 근구수대왕의 아들을 임신하니 인덕천황으로 태중에서 삼한왕, 즉 대마도왕으로 임명하고 5세에는 왜왕(인덕천황)으로 임명한다.
근초고대왕 시기에 칠지도를 만들어서 보낸 대상은 바로 신공왕후가 낳은 근구수대왕의 아들인 셈이다. 즉, 자신의 손자에게 보낸 예물이 칠지도인 것이다. 이렇게 일본열도는 백제의 담로지역이 된 것이다.
근구수대왕은 태자시절에 마한의 영향권에 있던 일본열도를 통일하고 백제로 돌아 가서 고구려의 침략에 맞서 고구려 남평양성(북한 평양성)에 달려가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고 마침내 백제대왕이 되었고, 혼인한 신라 이벌찬의 딸이였던 아이부인(왕후)으로부터 낳은 침류왕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 383년에 다시 일본으로 가서 일본열도를 통일하고 세운 야마토 왕조의 개국시조로서 응신천황이 되었다.
근구수대왕이 백제로 돌아가 백제대왕 직을 수행하고 있을 때 신공황후는 아마 아들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근구수대왕을 대신해서 섭정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사에서 신공황후의 위상이 높아진 이유일 것이다.
근구수(응신)천황 아들인 인덕천황릉
이후 백제대왕들이 태자시절에서 왕(천황)노릇하다가 백제의 왕위에 즉위하게 되니 일본열도에서 본국 백제가 되는 한반도로 건너와 왕위에 즉위한 동성대왕이나 무녕대왕이 그런 사례다. 백제 성왕의 경우에는 백제대왕과 함께 긴메이 천황이라 불리우는 일본왕을 겸직하기도 하였다.
일본국보. 호류사 백제 관음상(동양의 비너스)-백제 성왕의 얼굴을 조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