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서조선>은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강연회와 깊이 닿아 있다. 우치무라의 성서 강연회에서 기독교 진리를 경험한 조선인 청년 6인이 도쿄 스기나미촌에서 성서조선연구회를 조직하고 사랑하는 조선에 가장 귀한 것을 주고자 하였으니, 그것이 성서였고, 그래서 간행하기로 한 것이 <성서조선>이었다. 김교신의 창간사를 비롯하여 <성서조선> 곳곳에서 우치무라 간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나는 학창에 있어 학욕에 탐취하였을 때에 종종 자긍하였다. ‘학문엔 국경이 무無하다’고. 장엄한 회당 내에서 열화 같은 설교를 경청할 때에 나는 감사하기가 비일비재이었다. ‘사해가 형제동포라’고 단순히 신수信受하고. 에도江戶성의 내외에 양심에 충忠하고 국國을 애愛함에 절切한 소수자가 제2국민의 훈도에 망식몰두함을 목도할 때에 여余의 계획은 원대에 지至하려 함이 유有하였다. ‘옳은 일을 하는 데야 누가 시비하랴?’고. 과연 학적 야심에는 국경이 보이지 않았다. 애적愛的 충동에는 사해四海가 흉중胸中의 것이었다. 이상理想의 수현遂現에 지至하야는 전도前途가 다만 양양洋洋할 뿐이었다. 때에 들리는 일성一聲은 무엇인고? ‘아무리 한대도 너는 조선인일다!’
<성서조선> 창간호, 1927. 7. 1쪽.
‘장엄한 회당 내에서 열화 같은 설교’를 하던 이, 그는 우치무라 간조였다. 김교신이 우치무라를 처음 만난 것은 1920년 11월 초, 김교신의 나이 스무 살이었고 우치무라는 이순耳順을 앞둔 나이였다. 당시 우치무라는 오테마치大手町 대일본사립위생회 강당에서 성서강연회를 열고 있었다. 우치무라의 자택을 찾아간 김교신은 첫 만남에서 다소 실망하였지만 이후로도 우치무라의 욥기 강연을 두 차례 방청하였고, 1921년 1월 16일부터 새로 시작된 로마서 강연에 ‘비상한 열심’으로 참석하였으며, 그후 1927년 봄 조선으로 돌아올 때까지 7년간 우치무라 간조에게 배우게 된다.
에도성의 소수자가 ‘제2국민 훈도에 망식몰두함을 목도’했다는 것은 아마도 우치무라가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말함일 것이다. 우치무라는 1915년 5월, 1917년 4월, 1922년 3월 등 적어도 세 번 조선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연했는데, 1922년 3월의 강연에 김교신이 참석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세 번째 강연 이후 우치무라는 그의 일기에 조선인들은 신앙문제보다 독립문제에 더 큰 관심을 가진 것 같다고 쓰고 있다(우치무라가 조선인 청년을 대상으로 한 강연에 대해서는 스즈키 노리히사,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 간조>, 소화, 1995, 151쪽 참고). 우치무라가 보기에 조선의 독립은 신앙문제에 비해 주변적인 문제였겠지만, 이 지점에서 김교신은 우치무라와 같을 수 없었다. 김교신은 우치무라가 제2국민인 조선인을 열성적으로 가르치는 데 대해 감동해마지 않았고, 그리하여 보편적 근대인으로서 학문적 이상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그때 김교신을 사로잡은 목소리가 있었으니 그것은 ‘그래봤자 조선인’이라는 내면의 울림이었다.
김교신의 창간사는 <성서조선>이 서 있었던 모순된 자리를 표현하고 있다. 하나는 <성서조선>이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강연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우치무라에게 배우는 자리에서조차 조선인이라는 억눌리고 배제된 자의 정체성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성서조선>은 한편으로는 우치무라를 따라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우치무라와는 다른 곳에 자신을 세워야 했다.
<성서조선> 동인들이 우치무라 간조의 이름을 말하기 시작한 것은 <성서조선>을 창간한 지 3년이 지나 1930년 우치무라가 서거한 이후부터였다. 류석동의 「내촌감삼 선생을 추억하며」(<성서조선> 17-18호, 1930. 6-7), 송두용의 「은사 내촌감삼 선생」(<성서조선> 18-19호, 1930. 7-8), 김교신의 「내촌감삼론에 답하야」(<성서조선 19-20호, 1930. 8-9) 등이 차례로 발표되었다.
류석동과 송두용의 글에 드러난 목소리는 비슷하다. 우치무라 간조의 삶과 신앙, 그의 가르침을 전하면서 자신이 우치무라에게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회고하고 있다. 두 사람은 양정중학 동창으로 류석동이 1년 선배였고, 스기나미촌에서 같이 하숙을 하면서 우치무라의 강연에 정기적으로 참가하였다. 후에 송두용이 쓴 글에 따르면, 우치무라의 강연에 참석한 류와 송 두 사람이 모임을 마치고 먼저 나가 있다가 조선사람으로 보이는 이들을 찾아 6인의 모임이 결성되었다고 한다. 주로 정상훈이 다니던 신학교 강의실과 기숙사에서 정기적으로 모였다. 반 년 후 이들은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고 <성서조선>을 창간하기로 뜻을 모으게 된다.
1903년생인 류석동이 중학을 마치고 도쿄 유학길에 나선 것은 1920년,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때였다. 그가 어떤 계기로 우치무라의 강연회에 참석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오테마치 강연에 참석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유학 초기부터 우치무라에게 배웠던 것으로 짐작된다. 류석동은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강연에 참석한 일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내가 십팔세 되던 해 조선에서 중학을 마치고 지금 생각하면 우스우나 무슨 큰일이나 할 것 같이 당시 조선 전체에 일어나는 뜨거운 피에 이끌리어 일본으로 뛰어 달려갔다. 무엇보다 지식, 자유, 해방이라 부르짖던 나는 무슨 인연으로 오테마치大手町에서 처음 그의 설교를 듣게 되었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 말이 어린 나의 영혼을 꼭꼭 찌르고 ‘예수 그리스도의 수인囚人이야말로 참 자유인’이라는 말은 더구나 나의 심저心底까지 울리어 들어갔다. 나는 여기에 이적지 듣지 못하던 말을 듣고 보지 못하던 이상한 사람을 보아 나도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나서 이때부터 선생에 대한 존경 사모는 깊어졌다. 매 일요를 손을 꼽아 기다리고 그날이 되면 공책을 가지고 그의 일언일구를 하나 안 빼놓고 필기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그것을 청서淸書하였다. 또 그 잡지를 읽고 그의 저서를 읽어 어떤 때는 밤을 새고 어떤 때는 그 글의 힘에 전령全靈을 빼앗겨 울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가 주는 새 사상에 못이겨 밤중에 혼자 별을 바라보며 쓸쓸한 수풀 속을 돌아다녔다. 선생에 대한 숭배가 시작되었다.
<성서조선> 17호, 1930. 6. 16쪽.
우치무라 간조가 오테마치大手町의 강당에서 강연을 한 것은 1919년부터 1923년, 그의 나이 59세에서 63세에 이르는 시기였다. 원래 YMCA 강당에서 열던 재림 강연회에서 우치무라가 교회 지도자를 불가지론자로 비판하였고 이 때문에 YMCA 강당에서 강연할 수 없게 되자 그의 제자들이 오테마치의 대일본사립위생회 강당을 빌려 성서 강연회를 열었다. 이 무렵 우치무라는 이제 더 이상 교회와의 화해는 불가능해져 있었지만, 오테마치의 강당으로 옮긴 이후 우치무라의 강연은 절정에 이르렀다. 오테마치는 도쿄역에서 천황이 사는 황거에 이르는 지역이었고, 대일본사립위생회 강당은 700-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강당이었다. 욥기 강의와 로마서 강의는 청중들의 대단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강연회는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오테마치 대일본사립위생회관 건물이 무너져 일시 중단되었지만 가시와기栢木로 장소를 옮겨 서거 전까지 이어지게 된다.
류석동이 오테마치 강연을 듣기 시작하여 1929년 봄 그가 조선으로 돌아오기까지 우치무라에게 배웠다면 그 기간은 김교신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더 길었을 수도 있다. 류석동은 우치무라에 대한 존경과 사모가 깊어지는 데 그치지 않고 그를 숭배했다고 표현할 만큼 심대한 영향을 받고 있었다.
한편 1904년생인 송두용이 유학길에 나선 것은 1925년 봄이었다.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강연이 송두용을 유학으로 이끌었다. 먼저 유학하고 있던 류석동을 통해 몇 번 우치무라의 강연을 들었던 송두용은 유학 전 극도의 신경쇠약으로 인해 절망 상태에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도망치듯 유학길에 올랐다. 그해 6월 1일 우치무라의 성서연구회에 입회하였고, 1927년 10월 학업을 중도에 그만두고 조선으로 돌아올 때까지 약 2년반 동안 우치무라에게 배웠다. 김교신과 류석동에 비해 그 기간은 짧았지만 열성은 뒤지지 않았다. 우치무라의 가르침을 통해 몸과 영혼이 소생하게 되고 이후 그의 삶은 극적으로 바뀌게 된다. 삼 년 동안의 도쿄 생활의 목적이 공부가 아니라 우치무라의 강연이었다고 할 만큼 그에게서 받은 영향은 큰 것이었다. 송두용은 우치무라 간조의 사람됨과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촌 선생은 신앙의 인人인 동시에 독립의 인人이었다. 저의 표어는 「하나님에게는 절대 신뢰 사람에게서는 절대 독립」이었다. 저의 생활은 저의 표어의 실현이었다. (중략) 참 신자에게는 공통한 것처럼 내촌 선생도 한 예언자이었다. 예언자의 특징은 결단코 사람을 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명령만을 지킨다는 것이다. 예언자는 세인을 경계하며 질책하며 지도한다. 그래서 조그마한 불의와 죄악도 용서 없이 지적하여 그에 대한 형벌을 말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에게서 증오와 반대 받는 것이 보통이다. (중략) 내촌 선생은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현대에 있어서는 찾기 어려운 애국자였다. 선생은 누구보다도 저의 조국을 몹시 사랑하였다. 그래서 선생은 자기의 최선을 일본에 바쳤다. 자기의 사복私服을 채우려는 야심에서 혹은 지위와 명예를 얻으려고 헤끗으로만 또는 이론으로만 충군애국을 운운하는 현대정치가들이나 소위 학자를 자부하는 배輩들의 애국과 선생의 그것과는 스스로 구별이 판연判然하다. (중략) 내촌감삼! 저는 일본인 중의 일본인이었다. 저의 마음은 잠시도 두 J에서 떠나지 못하였으니 Jesus and Japan이 곧 그것이었다. 저는 첫째 J로 인하여 영원의 생명을 얻었고 둘째 J의 품속에서 자라난 자이다. 그래서 첫째 J에게 일체를 바쳤고 둘째 J를 위하여 전투 생애를 보낸 자이다.
<성서조선> 18호, 1930. 7.
<성서조선>을 창간할 당시 송두용의 나이는 스물셋, 동인들 중 가장 어렸다. <성서조선> 창간호에 「인류의 구원은 하처何處로부터」, 「신과 신앙」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동인 체제가 끝나고 김교신 1인 편집으로 된 이후까지 지속적으로 글을 발표했다. 가끔 김교신을 대신해 교열을 맡기도 했다. 1930년 오류동에 자리를 잡은 후 농촌운동과 교육운동에 투신하였고,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김교신, 함석헌과 더불어 1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 후에도 무교회주의 잡지 <성서신애>를 펴내는 등 무교회주의자로 활동했다. 김교신과 함석헌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대단히 실천적, 행동적인 신앙인으로 평생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나님에게 절대 신뢰, 사람에게서는 절대 독립'으로 요약되는 우치무라의 가르침은 <성서조선> 곳곳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일본 근대의 기린아 우치무라 간조는 마지막 열정을 성서 강연에 쏟아붓고 있었는데, 그의 가슴 속 뜨거운 불이 그 자리에 있던 조선인 청년들에게 옮겨붙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