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모데 후서 4:9-16. 필요와 떠남과 감당하는 사람. 2024. 8. 4.
여러분! 목사님들이 만나면 주로 어떤 표현으로 끝을 맺고 헤어질까요?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생각하세요. 너무 잘 하려고 하지 마시고 주께서 주시는 은혜대로 진행하세요. 그런 것 입니다. 왜요? 너무 잘 하려고 하다 보면 쓸데없는 힘이 들어가서 복음이 아닌 것이 더하여지기 때문입니다. 끝까지 잘하고 처음에 헌신 했던 그 심정으로 마지막까지 초지일관의 자세에서 벗어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허탈하고 상심했던 지난 날 들이 있습니다. 그 대상은 거의 사람에 대한 생각입니다. 한 해를 지나갈 때나, 어떤 일이 끝나갈 때나 아니면 죽음을 앞두고 있으면 더더욱 나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떠오릅니다. 좋은 기억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들의 삶의 현장 입니다. 아무리 선을 베풀고 아무리 바르고 원만하게 살았다 하더라도 아픔을 주고, 받는 사람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은 전 생애를 바쳐 복음을 전한 사람입니다. 지중해 일대와 로마를 복음으로 정복해 버린, 바울 같은 위대한 사도가 무슨 그렇게 큰 흠이 있겠습니까? 무엇을 잘 못해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위대한 사도 바울에게도 떠나간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슴을 아프게 한 사람이 있었고, 어떤 순간에는 실망해서 선교의 의욕까지 잃어버린 순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되돌리고 싶은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그의 인생 마지막을 향하면서 자기와 함께 했던 지나간 사람을 하나하나 기억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만 일곱 명의 이름이 나오고, 계속해서 편지의 끝까지 가면 모두 16명의 이름이 거론됩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를 끝으로 사형을 당합니다. 그러니까 이 편지가 바로 사도 바울의 유서이기도 합니다. 본문의 내용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겨울이 되기 전에 꼭 오라는 간곡한 부탁입니다. 지금 디모데는 에베스 교회를 돌보고 있기 때문에 쉽게 올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는데 바울은 디모데에게 속히 와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16절에 있습니다. 요약하면, 여태까지 자기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떠났는데 너라도 와서 나와 같이 이야기 좀 나누자꾸나. 목적도 있지만 너무 외로워서 속내를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 이름을 하나하나 거론하는데 그 16명의 사람들 중에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사람 나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떤 성향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들의 삶의 모습을 보면, 어떤 특별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이 되는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 주인공들은 세 사람으로서 데마, 마가, 그리고 누가 입니다. 이 세 사람 중에, 마가와 누가는 우리에게 익숙하고, 데마도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이름입니다. 과거와 지금에 누구든지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가장 진지하게 대두되는 문제가 바로 헌신입니다. 헌신은 몸을 바치는 것입니다. 한문의 뜻은 자신의 몸의 마디마디를 다 바치는 것이 헌신입니다. 헌신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신앙의 마음과 삶 전체의 표현입니다. 그래서 참된 믿음과 신앙인이라면,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그 생각이 떠나지 않고, 실제로 그렇게 살도록 실천하려고 합니다. 히11:6절을 보면 그 방법과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결과를 말씀 하는데,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먼저 우리의 행동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일까요?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사람에게 반드시 상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우리가 헌신할 수 있는 근거입니다. 결론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주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 속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믿음과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쁘게 자기의 삶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이 열거한 세 사람은 바로 그 헌신의 유형(類型)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헌신을 하되 어떤 모습으로 헌신했느냐의 모델 입니다. 그러니까? 마가는 개과천선(改過遷善)형이고, 누가는 초지일관(初志一貫)형입니다. 데마는 중도 하차 형입니다. 이 세 사람은 오늘 본문에서 뿐 아니라 빌레몬서 24절에서도 똑같이 나옵니다. 디모데서나 빌레몬서는 둘 다 옥중서신으로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바울은 두 차례에 걸쳐 수감되었는데, 1차 때에는 투옥이라기보다는 가택연금 상태 이였고, 2차 때는 차디 찬 지하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했습니다. 이 세 명은 1차 투옥 때 바울과 함께 있으면서 고생했던 사람들이고, 2차 투옥 때도 특별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세 사람 모두 아주 충성된 제자들 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교정제도(矯政制度)중에는 발달된 제도가 있었는데,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하인을 데리고 감옥에서 수형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인들은 자기 주인의 감옥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노예 제도가 보편화 된 영향과 로마시민의 신분에 따라 감옥까지 이어진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은 수시로 자기 선생님과 애기를 나눴고, 또 바울은 이들을 통해서 바깥 사정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어떤 사람일까요?
1. 데마입니다. 데마라는 이름의 뜻은 인기가 있다는 뜻입니다. 데마는 인기와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데마의 생애를 보면 그 이름과 일치합니다. 세상의 인기를 너무 좋아하다가 그만 좋지 않게 끝이 납니다. 여러분, 인기가 우리의 곁을 늘 떠날 수 없지만 또한 인기는 거품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꺼칠 거품을 생각하면 늘 불안하고, 늘 공포에 시달립니다. 자기의 내면의 모습 때문 입니다. 여러분, 인기는 무슨 연예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도 인기를 추구하면서, 그 인기에 살고 인기에 죽는지도 모릅니다. 데마는 처음에 바울을 통하여 예수를 믿었습니다. 화끈하게 믿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데마는 예수를 믿은 그 즉시부터 바울 곁에서 열심히 선생님을 섬겼습니다. 데가 1차, 2차 투옥 때 바울과 같이 있었던 것은 결코 일시적인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감옥까지 함께 동행을 하고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차 투옥 때는 바울이 석방될 가능성이 많아 보였습니다. 그러나 2차 투옥이 되었을 때는 석방 가능성이 점점 없어졌습니다. 왜요? 네로 황제가 등극하면서 환경이 많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데마는 점점 심적인 변화를 겪게 되고, 그러다가 어느 날 느닷없이 바울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자기 고향 데살로니가로 떠났습니다. 어떤 구실로 떠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바울이 그에 대해서 코멘트 한 것을 보면 데마의 상태는 심각한 모습이었습니다. 10절.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이 표현이 무엇을 말하나요? 데마는 세상을 사랑해서 예수 믿는 것을 포기했다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보다 더 치욕적인 표현이 어디 있을까요? 모든 예배에 가장 열심히 나오고, 가장 열심히 봉사하던 한 형제나 자매가 어느 날, 세상의 좋은 것을 잊지 못해서 예수 믿기를 포기하고 교회를 떠났다면, 그래서 다른 형제자매들로부터 그 사람은 세상을 너무 좋아해서 떠났어. 그런 얘기를 듣게 된다면 그보다 더 큰 치욕이 어디 있습니까? 바울은 데마에 대하여 신앙인격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최악의 모욕입니다. 여러분, 선교사나 목사가 그 사람은 세상이 좋아서 세상으로 돌아갔다고 하는 것은 악평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데마에게 이런 언사를 사용한 것은 하루 이틀 지켜보고 한 표현이 아닙니다. 바울은 참을 줄도 알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입니다. 데마에게 세상 사랑하는 마음이 들어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이리저리 말해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슬그머니 들어 간 세상은 데마의 마음에서 떠날 줄을 모르고 날마다 신앙보다는 세상 쪽을 향하여 마음을 기울게 했습니다. 바울로서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무엇일까요? 믿음이 약하여지면서 세상을 사랑하는 본능이 되살아나고 그 본능 앞에 데마는 결국 굴복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디도도 달마디아로 갔고, 알렉산더는 해를 많이 입히고 떠났습니다. 완전히 변신했습니다. 여러분, 헌신을 하다가 힘들다고 그 헌신을 포기한 사람의 대표적 유형이 바로 데마 입니다. 가다 곧 중지하면서 간 것만큼 유익한 경우도 있지만 데마는 안 간 것만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요? 인기를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데마를 통하여 얻을 교훈이 무엇일까요? 헌신하려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주님께 늘 맞추어야 합니다. 비교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과 주님을 사랑하는 이중 사랑은 존재하기 어렵습니다. 우선순위가 주님입니다. 두 마리 토끼는 뒤로하고 하나도 못 잡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떤 존재입니까? 예수님을 사랑하고 세상을 다스려야 하는 존귀한 존재입니다. 빌4:13. 내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 하늘에 둔 다함이 없는 보물을 간직한 믿음의 사람으로 디자인 되었고 그런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먼저 사랑하면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사랑하면서 세상을 다스리고 관리하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요구이고,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러데 데마와 같은 갈등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왜요? 세상이 보이는데요? 바로 이것이 저와 여러분의 문제이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언제든지 갈등의 상황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어떻게 해야 하나요? 기도하면 그 모든 기도의 응답을 받았던 죠지 뮬러는 자기는 예수를 믿고 일 년이 지난 다음에야 우선순위에서 세상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졌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 년이 걸릴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결정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왜 이렇게 될까요?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직 주님과 성령을 의지해야 합니다. 내 자신을 영적인 전투에 밀어 넣어야 합니다. 우는 사자와 같이 달려드는 마귀와 인기 있는 세상의 전쟁에서 싸워야 이중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부터 비로소 헌신이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마음을 굳게 하고 결심만 한다면 조명하시고 인도하시는 주의 거룩한 성령이 앞길을 평탄하게 해 주실 것이고 광야 같은 길에서 시온의 대로로 안내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에 대하여 헌신하십니까? 결코 중도에 포기하시면 아니 됩니다. 중도에 하차하면 또 하나의 데마가 되고 디도가 되고, 알렉산더가 됩니다. 하나님의 생명책과 상급자 명단에 기록이 되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여 떠났다는 설명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과 감당하는 사람이었다는 기록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의 마음을 굳게 하시고 지금 드리는 헌신을 끝까지 유지하시는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마가 요한입니다. 마가라는 이름은 로마 이름입니다. 그의 히브리어 이름은 요한입니다. 그래서 그를 부를 때 흔히 두개를 붙여 마가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 이름의 뜻은 예의가 바르다는 뜻인데, 그는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생애에 몇 번의 실수를 했지만, 더 이상의 실수는 없었습니다. 마가요한은 실패를 딛고 일어난 헌신자의 모범입니다. 마가 요한의 모습은 신약성경 여러 곳 에서 발견이 됩니다. 막14장을 보면, 예수님이 체포되어 갈 때, 벗은 몸에 베 홑이불을 두르고 쫓아가다가 잡히게 되었는데 그것을 벗어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갔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버려두고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마가요한은 선교여행을 갔다가 힘들다고 원위치한 사람이었습니다. 1차전도 여행 때, 사도바울과 자기 외삼촌인 바나바와 함께 전도여행을 하는데 노숙의 고통을 못 견디어서 그만 중도에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이 행동을 사도 바울이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바울의 2차 전도여행 때, 마가 때문에 위대한 두 선교사인 바나바와 바울이 큰 싸움을 합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고, 사도 바울은 1차 전도여행 때의 일 때문에 절대 반대이었습니다. 결국 사도바울과 바나바가 이 일로 싸우고 완전히 갈라섭니다. 그 위대한 선교사 두 사람을 싸우게 만들었던 장본인이 바로 마가요한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헌신자로서 자격이 없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1절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을 합니다.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사도 바울은 마가요한을 잊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때에 필요하고, 감당할 수 있는 헌신자로 변화 되었습니다. 여러분, 누구에게나 실패와 실수는 있습니다. 문제는 헌신자로서 일어설 수 있는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마가는 넘어진 문지방에서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헌신의 일꾼이 되었습니다. 필요한 사람이 되었고 감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마가요한은 자기의 다락방을 바쳐서 주님의 교회가 되게 했습니다. 성만찬도 여기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에 약속을 기다리면서 120명의 성도가 기도해서 성령을 받은 곳이 어디이었습니까? 바로 마가요한의 다락방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선가 다시 바울을 만나 1차 투옥때 바울의 옥중수발까지 들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마가요한은 사도 베드로의 수행자가 되어서, 베드로로부터 예수님의 복음을 생생하게 전해 듣고 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여러분, 마가복음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두 복음서는 마가복음을 기초로 기록 되었습니다. 복음서 뒤에는 마가가 있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마가는 소아시아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순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마가요한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무엇일까요? 마음이 뜨거울 때 헌신하기로 뛰어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헌신이 쉬운 일인가요? 시간을 들여야지요? 정성과 물질을 들여야지요? 욕먹어야지요? 감당해야지요?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상을 받는 일인데 그렇게 쉬울까요? 헌신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며 좁은 길과 고통과 눈물의 길입니다. 쓰라림과 이런저런 상처를 받습니다.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때문에 때로는 나의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세상의 동료들이 보기에 참 초라해 보이는 길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에라! 헌신이고 뭐고 그냥 편하게 신앙생활 하자! 그러면서 수월하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실패는 한번이면 족합니다. 한 번의 실수를 딛고 다시금 일어나서 믿음과 신앙으로 헌신한 마가처럼 끝까지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누가입니다. 누가에 대하여 인터넷의 검색 싸이트에 들어가면 누가에 대한 정보가 누가 사랑을 아름답다 했는가? 누가 이 사람을 아십니까? 누가, 누가 잘하나? 웃어넘기면서도 한 가지 생각한 것은, 누가는 어디를 가도 누가 특유의 매력을 알게 해 주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누가는 빛도 없이 이름도 없이 헌신한 가장 아름다운 소명 자이었습니다. 누가의 이름은 빛이 난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까 정말 살아서는 빛이 안 나게 살았지만, 죽어서는 가장 빛나는 헌신 자가 되었습니다. 누가는 의사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의사는 배운 게 많고,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직업이었습니다. 누가 봐도 많은 사람들에게 부러움을 살 수 있는 처지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이후의 누가는 더 이상 옛날의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직업과 지식과 재산과 젊음과 생에 전부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위하여 사용 했습니다. 삶을 바쳤습니다. 다 바울을 향하여 던졌습니다. 바울의 동역 자와 주치의로서 바울 곁에 끝까지 남았습니다. 오늘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고 나서, 사도바울은 디모데가 오기 전에 사형을 당합니다. 참수형을 당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 목베임을 당하는 현장 마지막까지 따라간 사람이 바로 누가이었습니다. 죽음의 자리까지 충성을 했습니다. 처음과 끝이 한결같습니다. 복음사역에 필요한 사람이고 감당한 사람이었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연구열이 대단했습니다. 틈만 있으면 자비로 여기저기 여행을 하면서 예수님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고, 예수님을 만났던 여인들을 만났습니다. 그것이 누가 복음입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을 일생 동안 따라 다니면서 그 선교현장을 자세하게 의학적 개념으로 기록을 했습니다. 사도행전입니다. 누가를 통해서 배울 수 있는 헌신의 모습은, 시종일관한 헌신 입니다. 한 번 마음을 결정한 후에는 데마처럼 중도에 포기하지도 않고, 마가요한처럼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끝까지 동행을 했습니다. 자신을 위하여 희생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그 구원에 감격하면서, 상 주실 주님을 믿으면서 헌신을 각오하고는 그 마음이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퇴색되거나 변질되기 보다는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헌신자로서 더 빛을 발하면서 고귀한 생애를 마쳤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의미가 더해집니다. 누가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헌신한 사람의 전형입니다. 항상 사도 바울과 같이 있었지만 한 번도 자기를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자기 이름을 한 번도 삽입한 적이 없습니다. 기록자로서 자기 이름을 밝혀야 될 필요가 있었을 텐데 그는 결코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상황 때문에 자기를 밝혀야 할 때가 있었는데, 그 때도 그냥 우리라고 했지 누가라고 쓴 적이 없습니다. 에베소 근처의 무명 같은 누가의 무덤이 말을 해 줍니다. 여러분! 헌신하기는 쉬워도 누가처럼 숨어서 헌신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드러내지 않는 헌신은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상주시는 분입니다. 이 믿음 전제하고 주님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이런 복을 주십니다. 사도 바울은 8절에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 뿐 아니라 주의 나타내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니라. 사도바울 뿐 아니라 주의 나타내심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그러면 주의 나타내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가 무엇입니까? 바로 나를 통하여 드려지는 헌신입니다. 크던 작던 나로 인해서 주의 이름이 영광스럽게 된다면 그것은 그 크기나 규모에 관계없이 모두 헌신이고, 바로 그렇게 헌신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 하늘의 상이 주어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헌신하면 할수록 누가처럼 겸손하고, 빛도, 이름도 없이 헌신하시는 그래서 주님이 예비하신 상급을 크게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