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기쁨으로
(요 2:1-1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운동경기에서 가장 극적인 상황은 질 것 같은 경기를 역전시켜 승리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경기를 잘해서 승리하면 기쁘기는 하지만 당연한 듯 생각하게 되어 기쁨이 크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질 수밖에 없는 경기를 이긴다면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기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물론 경기를 역전시키려면 행운도 있어야겠지만 그만큼 실력도 따라야 합니다. 실력은 갖추지 않은 채 이기기만 바란다면 그것은 요행을 바라는 것이고,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못합니다. 새해가 되면서 인생 역전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더 좋은 날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인생 역전을 꿈꾸는 사람은 차근차근 준비하고 실력을 키워갈 때 기대하는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
신앙은 크게 보면 한편의 인생 역전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새롭게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말고 새 사람이 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하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믿음은 새로운 인생의 시작입니다. 믿음의 결실만 바라지 말고 믿음의 열매를 맺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때 주님은 우리의 삶 속에 기적을 행하시며 우리 인생의 역전 드라마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어머니와 함께 혼인 잔치에 초대받아 참석했을 때 잔칫집에 포도주가 떨어져 주인이 근심하게 됩니다. 요즘 같으면 주문하면 금방 배달되겠지만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일 년 전부터 잔치를 준비하기 때문이 낭패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내년에 집안에 혼인이 계획되면 미리 포도주를 많이 준비하는데 예상보다 손님이 많았던가 봅니다. 잔치의 흥을 돋울 포도주가 떨어졌으니 손님들은 격려와 칭찬의 말 대신 불평과 비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기쁨의 잔치가 슬픔의 잔치로 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엉망이 된 잔치를 기쁨과 칭찬의 잔치로 바꾸십니다. 술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을 통해 주인의 슬픔을 기쁨으로, 손님들의 원망과 불평을 즐거움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께 청을 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포도주가 떨어졌습니다.’ 아마 혼인 잔칫집은 예수님의 가까운 친척 집일 수도 있습니다. 상황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어머니의 마음과는 다르게 모질게 대답합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나하고 상관없는 일이니 이 일에 대해 나는 아무 상관도 하지 않겠다고 대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머니의 청을 아들의 자격으로 거절한 것은 아닙니다.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거절한 것은 ‘하나님의 때’를 예수님은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돕고 싶지만 도울 수 없다는 뜻으로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거절에도 어머니 마리아의 믿음은 단호합니다. 하인들을 불러서 지시합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광고에 나오는 표현처럼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지시하는 대로 따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각자 저마다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있는데 주님 말씀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시키는 대로 따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어려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마음을 돌려 하인들에게 지시합니다. 돌 항아리 여섯에 물을 가득 채우라고 하십니다. 집집마다 밖에서 부정한 것을 만졌을 수도 있기 때문에 정결례를 위해 손을 씻는 돌 항아리가 있는데 거기에 물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항아리 하나에 100L 정도 된다고 합니다. 많은 양입니다. 물을 채우자 예수님은 그것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다주라고 하십니다. 연회장은 잔치를 주관하는 사람입니다. 연회장은 포도주 맛을 보고 크게 칭찬합니다. 좋은 포도주를 남겨두었다가 내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잔치는 흥겹게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청을 거절했다가 왜 청을 들어주었을까요? ‘아직 내 때가 아니다’라고 거절했는데 때가 된 것입니까? 믿음은 하나님의 때를 바꿀 수도 있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가 있지만, 믿음은 그때를 미룰 수도 있고, 앞당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때는 백성들의 기쁨을 위한 때이기 때문입니다. 간절하게 청을 하면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시어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행한 예수님의 기적을 ‘첫 표적’이라고 표현합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신 첫 번째 장면을 다르게 기록합니다. 마태복음은 5-7장의 산상설교를 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마가복음은 1:14-15에서 갈릴리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복음을 선포하신 것으로 나오고, 누가복음은 4장에 나사렛 회당에서 첫 설교를 하신 것으로 기록합니다.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낸 첫 번째 사건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왜 다른 사건을 첫 번째 사건으로 소개할까요? 그것은 복음서 저자들이 속한 공동체의 상황과 관계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많은 마태 공동체에는 율법의 새로운 해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 공동체는 율법에 대한 지식이나, 전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단순하고 직접적인 표현의 복음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누가 공동체에는 이방인 신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희년의 기쁨을 먼저 선포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 공동체는 생명, 기쁨, 진리를 아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가나의 혼인 잔치의 기적을 첫 번째로 소개하였을 것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를 통해서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풀어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이 가나의 혼인 잔치 기적에서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요? 왜 하필 물로 술을 만드는 사건을 가장 먼저 소개할까요? 술꾼들이 들으면 가장 좋아할 복음일 수 있을 것입니다.
술은 잔치에서 빠지지 않습니다. 잔치의 기쁨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잔치라고 한다면, 인생에서 기쁨이 빠진다면 괴롭기 그지 없습니다. 기쁨은 생명의 충만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기쁨이 없는 인생은 살아있으나 살아있는 것이 아닌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죽기를 기다리는 인생이지요. 이런 슬픔과 괴로움, 고통에 빠져 있는 인생에게 기쁨을 주려고 주님은 오십니다. 절망과 좌절 속에 울부짖으며, 원망과 불평으로 날을 보내는 세상에 생명의 기쁨과 즐거움을 주려고 주님이 오십니다. 그렇다고 낙심하고 주저앉아 있으면 주님이 알아서 물로 포도주를 만들지는 않습니다. 어머니가 청을 했을 때도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고 매몰차게 거절하던 예수님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우리에게는 포도주가 필요하다, 기쁨이 필요하다, 생명이 필요하다’며 믿음을 잃지 않습니다. 거절할수록 더 강한 믿음으로 청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인간의 믿음에 굴복하시어 청을 들어주십니다.
가끔 사람들은 포기할 때 말합니다. ‘나는 할 만큼 했다.’ 힘들게 매달렸지만 이루지 못할 때 포기하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믿음에서는 ‘나는 할 만큼 했다’는 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구하기를 포기하는 것은 믿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달라지기를 포기하는 것 역시 믿음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포기한다면 어떤 기적도 바랄 수 없습니다. 생명의 기쁨과 즐거움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11절에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셔서 기쁨을 주신 것을 보고 제자들이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기쁨을 주려고 오신 분이심을 믿은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는 생명과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누구나 인생 역전을 꿈꿉니다. 지금보다 나은 삶을 꿈꾸는 것입니다. 돈 많고, 건강하고, 하는 일마다 잘 되는 것이 인생 역전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우리에게 근심을 더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진짜 인생 역전이라면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는 것,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 낙심하던 우리가 희망을 갖게 되는 것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 술을 풍족하게 마련해주신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이들에게 기쁨을 돌려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 인생에도 가나의 혼인 잔치와 같은 기적을 행하셔서 우리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돌려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물론 이 세상에서 기쁨과 즐거움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이 기적을 ‘표징’이라고 표현한 것은 ‘영원한 것의 증거’라는 뜻입니다. 장차 우리가 믿음으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의 기쁨의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영원한 기쁨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믿음의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청을 거절하는 듯 보여도,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행하는 믿음’으로 순종할 때, 주님은 때를 바꾸고, 방법을 바꿔서라도 우리의 청을 들으시고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실 것입니다.
어떤 일이 닥치더라도 믿음을 포기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믿음을 포기한다는 것은 생명과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우리 슬픔과 괴로움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꾸는 기적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빕니다.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