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儒學思想 및 傳統思想을 硏究, 承繼, 普及하고
現代化, 生活化하여 先賢의 崇高한 理念을 오늘에 되살리며
道德社會를 具現하는 靑壯年들의
2016年 정기 답심(定期 踏尋)
영주(榮州)의 유교(儒敎) 문화
2016年 5月 22日
社團法人 博 約 會
大邱廣域市支會 靑壯年委員會
2015年 5月 定期 踏尋 日程
07:30 황금동 어린이 대공원
07:40 반월당 현대백화점
08:50 용산역 근처 두류해물탕
09:30 연복군 장말손 종택 영주시 장수면화계길 71(영주시 장수면화기리 18-2)
10:15 성오당 이개립 고택, 의산서원, 석종재 영주시 장수면 용주로 342번길 11-20(영주시 장수면 갈산리 876)
11:00 귀암 황효공 종택, 귀암정, 경덕사, 순흥안씨 종택 영주시 안정면 용주로 937-4(영주시 안정면용산리 455)
11:50 줄포, 검암정사, 봉강서당 영주시 줄포길 116-12(영주시상줄동 561)
12:30 점심 식사 풍기읍내 식당
13:30 금계 황준량 유적(욱양서원, 금양정사, 금선정)영주시 풍기읍 금계리 131
14:30 희여골 창원황씨 세거지(송암 황응규와 식암 황성)영주시 풍기읍 백리길 151-번길 8-1(영주시 풍기읍백리 522)
15:30 소고 박승임, 육우당, 소고 2자 세거지 영주시 고현로 146번길 35/고현동 226(영주시 한정로 124번길 48/문정동 63-1)
16:30 한절마 청도김씨 세거지 병산 김난상의 매양정 영주시 대동로 103번길 52-8
17:30 푸실(초곡) 삼우대(죽유 선생) 남악정 영주시 구성로 43번길 81-14(영주시 조암동 1020-2)
18:30~20:30 영주 -> 대구
◆ 연복군(延福君) 장말손(張末孫)
1. 송설헌(松雪軒) 장말손(張末孫)
1431년(세종 13) 경상도 인동에서 태어난 장말손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안색과 풍모로 인해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인물이었다. 6세 무렵부터 학문을 시작하여 11세에 『소학(小學)』과 『효경(孝經)』에 능통하였으므로, 부친은 그가 장차 가문의 희망이 될 것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15세인 1445년(세종 27) 군학(郡學)에 입학한 뒤로는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배웠는데, 이때에도 문장의 암송에 치중하던 다른 학생들과 달리, 글의 뜻을 정밀하게 연구하여 그곳의 선생들로부터 앞으로 크게 될 인물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1447년(세종 29) 17세가 되던 해에 어머니 지씨(池氏) 부인이 세상을 떠나자,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치 장성한 사람처럼 정성을 당해 상을 치러 효자라는 소문이 인근에 널리 퍼졌다.
22세가 되던 1452년(문종 2)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이듬해인 1453년(단종 1)에는 생원·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였다. 점필재 김종직 역시 이때의 시험에 합격하여 장말손과 더불어 동방(同榜)의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이후 두 사람은 평생토록 친분을 잃지 않으며 절친한 친구로 오갔다. 그리고 1459년(세조 5) 또다시 김종직과 함께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영남을 대표하는 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관료로 활동하게 되었다
1462년(세조 8) 고향인 인동을 떠나 한성의 창동(倉洞)으로 이거(移居)한 장말손은 1463년(세조 9) 승문원 박사를 거쳐 한성 참군(漢城參軍)과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 등 조정의 문필 관련 사업을 주관하는 중요한 직책을 두루 역임하였다. 또한 1465(세조 11)에는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로 조정의 천거를 받아 특별히 함길도 병마도사에 부임되어, 도절제사(都節制使) 강순(康純)의 휘하에 들어가 북방의 근심거리였던 나하추(納哈出) 무리의 침공을 격퇴하는데 공로를 세웠다.
1467년(세조 13)에는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예조 좌랑(禮曹佐郞)과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를 겸하던 중, 함길도 길주(吉州)에서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키자 진북장군(鎭北將軍)에 오른 강순을 보좌하여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움으로써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함길도 경차관으로 파견되자 그 곳의 민심을 위로하여 이시애 난의 후유증을 수습하는데 큰 힘을 발휘하였다. 이후 1470년(성종 1) 장악원부정(掌樂院副正)에 오르고 감조관(監造官)으로서 예종의 능역(陵役)을 감독하였다. 1476년(성종 7)에는 공조 참의·이조 참의·예조 참의를 거쳐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의 우부빈객에 올랐다.
47세가 되던 1477년(성종 8) 예천의 화장(花庄)으로 잠시 낙향하였던 장말손은 1481(성종 12)에는 간신 유자광(柳子光)의 무고로 인해 강순과 남이(南怡) 등이 처형되던 가운데 해주 목사(海州牧使)로 보임되었다.
그러나 곧 관직에서 물러나 예천 화장에 송설헌을 짓고서 은둔하며 학문에 힘썼다. 조정에서는 장말손을 연복군(延福君)에 봉하고 비를 세워 그의 공로를 현창하였지만, 별다른 활동을 보이지 않다가 1486년(성종 17) 세상을 떠났다. 성종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시장의 문을 닫게 하고 국사(國師)를 보내어 묘자리를 잡게 하였으며, 안양(安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2. 영주 장말손 종가
▲ 경북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의 영주 장말손 종택.
오랜 세월 동안 선조들이 살아온 고택을 지켜오면서 선조의 뜻과 정신을 이어오고 있는 영주의 인동장씨의 후손. 영주에서는 유일하게 450여년을 12대가 살아온 인동장씨 연복군종택은 장덕필 종손 부부가 지금까지 선조들의 유물과 유적, 사당 등을 관리하면서 생활하고 있어 종친들의 화합과 결속을 다지는데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장말손 종가는 영주 인터체인지에서 장수면 방향으로 내려서면 바로 영주도로공사 표지판을 볼 수 있다. 그 진입로에 경상북도 지정 민속자료 제98호 '장말손유물각'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바깥세상과 단절된 듯한 자연경관이 펼쳐지면서 몇 가구 안 되는 집들이 고풍스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바로 장말손 유물각이자 연복군 인동장씨 종택이다.
인동장씨는 조선 세조 때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올랐던 안양공 송설헌 장말손(張末孫·1431~1486)의 후예다. 영주의 입향조는 장응신(張應臣·1490~1554)으로 초곡에 터를 잡은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의 사위가 되면서부터다. 큰집인 화기리와 전계, 금강, 용강, 순흥 등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형성해 세거하고 있고 응신의 혼인을 계기로 자리한 후 많은 문인과 학자들을 배출했다.
▲ 정덕필 종손.
대표적 인물인 응신의 아들 장수희(張壽禧·1516-1586)는 퇴계의 첫 제자이다. 퇴계가 영주 초곡의 허씨 집안에 장가를 들었을 당시 장수희의 나이는 6살로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직접 책을 가지고 수업하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후 1547년 소수서원에 입원 수학했으며 이산서원 창건의 주된 역할을 했고 그 일을 주관하는 12년 동안에 규모를 키우고 재정을 넉넉히 했다.
음직으로 어모장군을 지냈으며 사후에 형조참의로 추증돼 영주 한천서원에 배향됐다.
인동장씨 16세 장덕필(67) 종손은 "장응신 선조의 맏아들인 장윤희 선조는 '조상을 보존하고 자손을 보전할 수 있는 터전을 찾아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현 화기리에 자리했다"며 "현손인 장언상 선조부터 12대를 이어 4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곳에서 선조들의 뜻과 정신을 지켜나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450여년의 세월을 한 곳에서 지켜 내려온 인동장씨 종택에는 선조들의 유물, 유적과 근대의 물건이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이중 인동장씨 직계 학공파 시조인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직제학공에게 내린 합격증서인 고려 홍패는 보물 501호로 지정되고 조선 단종 1년과 세조 5년에 연복군에게 내려진 백패와 홍패도 보존되고 있어 과거제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종택의 오른쪽 유물각에는 서간문, 과거시험을 위한 백과사전, 송사문서, 주역 등과 현판, 기문, 비문 등은 탁본을 떠 보관하고 있다. 유물각 왼쪽에는 영정각이 있고 그 안에 성종 20년인 1489년 하사한 연복군 안양공의 영정이 보물 502호로 자리하고 있다.
현재 종택에는 보물 5점(5종 28점)이 있다. 고려·조선 초의 고문서(도지정문화재 227호) 등 700~800년 이상 된 귀중한 유물이 100년을 간격으로 보관되고 있고 최근에도 200년이 넘은 호구단자가 발견된 바 있다.
특히 지난 6.25동란 당시 종택이 인민군 본부로 사용됐다고 한다. 인민군이 종가의 유물중 패도를 탐을내 가져가려고 땅속에 묻어두었다. 그러나 갑자기 후퇴하는 바람에 땅속에 묻어둔 패도를 미쳐 챙기지 못하고 떠났다. 그런데 문제는 패도가 어디에 묻혔는지를 알수없는 점이었다. 집안의 귀한 보물을 잃어버렸다는 점 때문에 종손의 부친께서 마음의 고생이 심했다고 한다.
그런데 27년후에 패도를 찾을 수 있었다. 당시 부친께서 추원사 건립문제로 걱정하고 계셨는데 부친의 꿈에 연복군 어른이 현몽해서 패도가 있는 위치를 알려줘서 귀한 보물 패도를 찾을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아마도 선조께서 부친의 간절한 심정을 읽었던 때문인게 아닐까. 그러나 패도를 다시 찾기는 했지만 땅속에 오래 묻혀있던 탓에 칼집의 일부가 부식돼 당초의 원형이 훼손된 것이 아쉽다고 했다.
종택의 정자인 송설헌은 꽃계마을 뒤편 나즈막한 야산 산록에 터를 잡고 전방의 꽃계들과 마주하고 있다. 이 정자의 기문(記文)은 봉화 닭실의 권세연(1836~1899)이 썼다. 또한 지평(持平)은 김흥락(1827~1899)의 이건기가 있다.
종손 장덕필씨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선조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예들을 깨뜨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부친상을 당했을 때도 3년 시묘는 못했지만,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산소를 찾았다. 산소를 찾을 때는 굴건제복을 갖춰 입고 하루종일 산소에 머물렀다고 한다.
전통에 대한 종손의 생각은 그대로 자식들에 대한 교육으로 이어진다.
▲ 보물 제502호 장말손 영정.
그는 차종부가 될 맏며느리를 맞을 때 시집 오기 전 먼저 시댁을 방문토록 했다. 그 자리에서 종가의 예법이나 해야 할 일을 설명하면서 종가에 올 때는 반드시 치마저고리를 입도록 당부했다는 것이다.
종가의 살림살이를 거의 혼자 힘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다시피 한 종손에게는 근검함이 몸에 배어 있는 듯하다. 이 사랑채에서 종손은 그의 손자가 3살이 될 때까지 함께 데리고 있었다고 한다.
"종손의 대를 이어야 할 아이니 예절교육을 시켜야겠다 싶어 처음에는 손자를 데리고 있었지만 부모와 떨어져 있는 것도 그러려니와, 요즘 아이들 교육을 시키려면 시골에서 제대로 시킬 수 있겠습니까"라며 결국 서울로 올려보냈고 한다. 그렇지만 대신 서울에서도 일주일에 한번씩 꼭 전화로 종손교육을 시켰으며 올해 손자가 육군사관학교에 입교 했다고 전했다.
▲ 종가의 중요 유물인 패도.
불천위를 모시며 끈끈하고 변함없이 보존되는 연복군 종택. 이 종택을 지키는 종손은 선조의 뜻을 제대로 실천하며 살고 있다. 전통을 고수하고 종손으로서의 소임에 열심인 그를 보며 종손은 종가가 특별히 내린 제목이 아닌가 싶다. 종가를 지키기 위해 고향을 떠나지 못하고 조상 섬기는 일에 보람을 느끼고, 종손을 숙명으로 느낀다는 말에서 큰 자긍심을 엿볼 수 있다.
연복군 종택의 패도
<ⓒ 경북일보 & kyongbuk.co.kr, (2016년 03월 07일 월요일 제15면) 권진한 기자
3. 영주 화기리에 터를 잡은 인동장씨
인동장씨가 영주지역에 정착한 것은 조선 중종 때 장응신(張應臣) 형제에서 비롯되었는데, 장응신은 연복군 장말손의 손자이다. 연복군 장말손은 조선 세조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慨功臣) 2등에 책록, 연복군에 봉해지고, 예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51세 되던 해 외직인 해주 목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에 사임하고 물러났다. 퇴임 후 인동(仁洞)에서 경기도 창동(倉洞)에 옮겨 살다가, 다시 미리 보아 두었던 예천(醴泉) 화장(花莊 : 지금의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에 낙향하여 터전을 마련했다.
장말손은 당시 대학자인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과 청백리로 유명한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 등과 교류한 바 있는데, 김종직과는 사마양시 및 문과에 함께 급제하였으며, 홍귀달과는 이시애의 난을 함께 평정한 바 있다. 그래서 장말손이 예천, 즉 당시 문경 땅을 은거지로 택하여 정착하게 된 것은 문경 사람인 홍귀달과의 우의로 말미암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한다. 선생이 은둔생활을 하다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임금께서는 예관을 보내 애도하고, 안양(安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장말손의 손자 장응신이 영주에 터를 잡게 된 것은 순탄치 못했던 어린 시절과 유관하다. 장말손의 장남 장맹우(張孟羽)는 황해도 도사로 나가 있던 중 46세로 병사하여, 그 아들 장응신이 12세 어린 나이에 갈 곳 없이 되었다. 그 재주를 가상히 여긴 남평문씨(南平文氏) 집안에서 데릴사위로 맞아들이면서 영주지방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러나 장응신마저 31세로 일찍이 세상을 떠나게 되자, 그의 후손들에게는 “어지러운 정국에 휘말리지 않고 자손이 번성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조용히 은둔하여 지내며 남 앞에 나서지 말라.”고 유언을 하여, 그 후로 그의 후손들은 지금의 꽃게에 터를 잡고 400여 년을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장응신의 손자인 장언상(張彦祥)이 명종 때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는, 영주 장수면 꽃게[花岐]에 터전을 열어 지금까지 종택에는 그 후손이 살고 있다. 원래 예천 화장에 있던 송설헌은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로 옮겨 중건하여 보존되어 있다.
◆ 성오당 이개립(省吾堂 李介立)
1. 성오당 이개립(省吾堂 李介立)
성오당(1546~1625)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활약한 의병장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대중(大中 혹은 大仲), 호는 성오당(省吾堂)·역봉(櫟峰). 대호군(大護軍) 이욱(李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 이선동(李善童)이고, 아버지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이준(李竣)이며, 어머니는 예천권씨(醴泉權氏)로 권공례(權公禮)의 딸이다.
김성일(金誠一)의 문인이다. 1567년(명종 2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1586년(선조 19)에 효행으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하여 사퇴하고, 1591년장현광(張顯光)과 함께 유일(遺逸 : 학문과 덕행이 높아서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중요한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선비)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활약하였는데 부족한 식량과 군량의 조달에 공이 컸다. 이러한 공에 의하여 수령을 감당할 인재 30명이 천거된 중에 그도 포함되어 1594년에 자여찰방(自如察訪)에 임명되고, 다음해에 낭천현감(狼川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6년 산은현감(山隱縣監)에 임명되고, 다음해 정유재란 때 체찰사종사관(體察使從事官) 황여일(黃汝一)의 천거로 향병대장(鄕兵大將)이 되었으나 병마절도사 김경서(金景瑞)가 의병을 자기 휘하에 속하게 하지 않은 데에 사감을 품자 고향에 돌아가 오로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조경(趙絅)이 묘갈명을 지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개립 [李介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의산서원(義山書院)
1) 문화재로 지정된 의산서원
영주시 장수면 갈산리 의산서원(義山書院)과 이산면 신암리 구은고택(九隱古宅)이 최근 경북도 지정기념물(172호)과 문화재자료(640호)로 지정 고시됐다. 의산서원은 영주지역에서 네 번째로 설립된 서원으로, 서원의 사당인 절효사(경덕사)에 배향된 이개립과 김응조는 역임한 관직이나 학문적 성취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현재는 서원, 누정, 재사, 묘소가 한 곳에 모여 있는 경주이씨 성오당 문중의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구은고택은 ‘ㅁ’자형 정침과 아래채, 대문간채의 거주영역과 연당, 연당채, 연당 문간채로 구성된 정자 영역의 주택이다. 구은고택은 건립 이후 줄곧 주생활(住生活)이 이어져 오고 있어 상류주택 및 주거생활사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김제덕기자 jedeog@yeongnam.com. 2016.03.28.기사
2) 의산서원의 건축 배경과 구성
① 건축 이야기
영주에서 예천으로 통하는 큰길을 따라 반두들을 거쳐 지나가다가 성곡(城谷)으로 들어서 5리쯤 들어가면 나지막한 야산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동네가 나타나는데 이곳이 경주이씨가 400여 년을 세거해 온 갈미마을이다. 갈미마을은 용암산에서 떨어진 줄기가 동남으로 뻗어 내려오다가 매봉산을 일으키고 남으로 틀어 마을의 진산을 이루고, 동으로는 멀리 연화산이, 남으로는 주마산이 마치 성곽처럼 에워싼 가운데 남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갈미마을은 성오당 이개립이 마을에 터를 잡으면서 형성되었다.
② 건축 배경
성오당(省吾堂) 이개립(李介立, 1544~1625)을 모신 서원으로 1610년(광해군 2) 마을 사림들이 군수에게 주청하여 의산서당을 창건하였다. 1664년 묘우를 건립하여 성오당 이개립의 위패를 봉안하고 절효사(節孝祀)라고 하였다. 1679년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를 배향하고 서원으로 승격시켰다. 고종 때 철폐되었다가 근래에 다시 중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③ 건축 구성
의산서원은 동으로 문수산과 청량산, 남으로 학가산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마을 산자락 끝에 남서향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토석담장을 돌린 장방형 일곽 안에 양졸당·의산서당·내삼문·사당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으며, 각 건물은 조금씩 비켜 앉아 있다. 의산서원 좌측에는 계림군(鷄林君) 이흥상(李興商)과 성오당 이개립의 묘를 수호하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재사인 석종재(石宗齋)가 있다.
출처 - 다음 블로그 수산(사람의 근본양식)http://blog.daum.net/kil0930/355
◆ 구암(龜巖) 황효공(黃孝恭)
1. 구암(龜巖) 황효공(黃孝恭) 1496년 ~ 1553년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경보(敬甫), 호는 구암(龜巖). 영천(塋川 :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생. 아버지는 군자판관(軍資判官) 진(璡)이며, 어머니는 고성이씨(固城李氏)로 현감 평(泙)의 딸이다.
1521년(중종 16) 문과에 병과로 급제, 1522년 승문원부정자가 된 뒤 1525년 성균전적, 1526년 형조좌랑을 거쳐 형조정랑·황해도사·교리·지평 등을 지내고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1532년 금산군수, 1534년 한성부서윤·종부시첨정을 거쳐 사간원사간이 되었다.
이때 생질이 권신들의 미움을 받아 함께 탄핵, 파직되자 영천으로 낙향하여 정사(精舍)를 짓고 ‘구암’이라 자호하여 독서와 후진양성에 전심하였다.
1537년 복작되었으나 벼슬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서 독서로 일생을 보내며, 『역학계몽(易學啓蒙)』·『황극경세(皇極經世)』·『태극도(太極圖)』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이황(李滉)과도 교유하였으며, 도상학(圖象學)과 역학에 밝았다. 영주의 사계서원(泗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구암일고』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효공 [黃孝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불의에 타협하지 않았던 황효공 가문
대룡산 창원황씨종택은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는 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중심에는 이현 황지헌이 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켜 황보인·김종서와 그의 형 황의헌이 순절하자 이에 연루되어 영주로 귀양 갔다. 1468년(세조 14) 귀양에서 풀려났으나 세조의 부름은 거절했다. 황지헌은 영주의 창보에 자리 잡고 살면서 자신이 살던 서울 옛 동네 이현동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을 배고개로 고쳤다. 그는 세상을 외면하며 문을 닫고 지냈는데, 당시 절의를 함께 한 많은 사람들이 황의헌·황지헌 형제를 일컬어 “백현(白峴) 선생(황의헌), 이현(梨峴) 선생(황지헌)은 생육신과 사육신과 같다.”고 추앙했다.
황의헌의 2남 황무소(黃茂蘇)는 황지헌이 길렀는데, 부사정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손자 황진(黃璡, 1451~1506)은 1478년(성종 9) 음보로 사포서 별제·주부·사헌부 감찰, 1499년(연산 35) 진해 현감을 지냈다. 당시 진해는 수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떠나올 정도로 어려움을 겪은 지가 30여 년이나 되었다. 그는 수령으로 재직하면서 위엄을 세우고 밝은 다스림을 펴 백성과 아전을 함께 편안하게 했다. 군자감 판관에 승진되어 떠나올 때 고을 사람들이 비석을 세워 그의 덕을 기렸다.
귀암 황효공(黃孝恭, 1496~1553)은 황언주의 조부로 1521년(중종 16)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 전적·예조 좌랑·한성 서윤·사헌부 지평·사헌부 장령·사복 시정·사간원 사간에 춘추관 편수관을 겸했다. 한창 왕성하게 일할 시기인 40세에 은퇴하여 18년 동안을 향리인 영주에 있으면서 학문연구에 몰두했다. 『역범도』라는 저술을 남겼다. 퇴계 이황은 그의 묘명에서 “당시 세상이 그가 크게 쓰일 것을 기대했으나 진출이 순탄치 못했고, 하늘이 수(壽)에 인색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랴?”고 하면서 안타까워했다. 사계서원에 제향되었다.
황효공의 아들 황흠(黃欽, 1512~1590)은 유일로 천거되어 여러 벼슬을 거쳐 세자시강원 세마와 상주 목사를 지냈다. 황흠의 아들 황언수(黃彦樹)는 중추부사를 지냈다.
출처 - 다음 블로그 수산(사람의 근본양식)http://blog.daum.net/kil0930/355
3. 대룡산 창원황씨종택(大龍山 昌原黃氏宗宅)
대룡산 창원황씨종택은 경상북도 영주시 안정면 용산 2리 대룡산마을에 위치하고 있다. 남역마을 후면의 산록에 口자형 종택과 귀암정·경덕사(별묘)·오산정이 나란히 동남향하고 있다.
대룡산 갈림길에서 경상북도 풍기인삼시험장길을 택해 20여 m 가다가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용산강당(龍山講堂)이 눈에 들어오고, 그 뒤로 대룡산 창원황씨 종택이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종택의 솟을대문인 상례문 앞에는 수령이 오래 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하늘을 찌를 듯 높이 솟아 있다.
현 거주자의 19대조인 황지헌은 단종복위사건에 연루되자 화를 피해 서울 동대문구 이현동에서 지금의 영주시 가흥 2동 배고개로 피신해 살았다. 대룡산 창원황씨종택은 귀암 황효공(黃孝恭, 1493~1553)의 손자 황언주(黃彦柱, 1553~1632)가 영주 배고개에서 살다가 처가마을인 이곳 남역마을로 오면서 건립하였다. 남역마을 뒤 산록에 口자형 살림집이다. 그 후 1964년에 중수한 바 있다.
귀암정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 사간을 역임하고, 역학을 연구하여 역범도를 지은 귀암 황효공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건립하였다.
별사(경덕사)는 귀암 황효공을 향사하기 위해 1623년에 건립하였다. 또한 경덕사 좌측에는 현 소유자의 부친과 다섯 형제의 뜻을 기린 오산정이 한켠을 차지하고 있다.
오산정은 주산(住汕) 황종락(黃鍾樂), 동산 황시락(黃時樂), 한산 황성락(黃聖樂), 농산 황흥락(黃興樂), 하산(何汕) 황필락(黃必樂)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정자이다. 오산정에는 이수성 전국무총리의 ‘오산정기’와 다섯 사람의 호를 새긴 편액이 걸려 있다.
대룡산 창원황씨종택은 매우 높은 기단 위에 좁은 안마당 뒤쪽으로 대청을 가운데 두고, 우측에 안방·정지를 두었고, 좌측으로는 마루방·사랑방을 배치하였다. 특히 평면구성상 안방과 사랑방을 한 공간 내에 갖춘 점, 마루 공간의 축소와 온돌방의 확대라는 미묘한 역학관계를 잘 엿볼 수 있다. 중문칸 4칸 중 중문을 중심으로 좌측에 온돌방 2통 칸(원래 두지 1칸), 우측에 고방 1칸을 두었다.
기단은 시멘트 마감 위에 막돌초석을 놓아 네모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홑처마 팔작지붕에 골기와를 이었다. 별사(경덕사)는 높은 축대 위에 정면 3칸, 측면 툇칸을 가진 익공계 건물이다. 전면 툇칸에는 두리기둥을 세우고, 내부는 통 칸에 우물마루를 깔았다. 지붕은 홑처마 맞배에 골기와를 이었다. 귀암정은 정면 3칸, 측면 칸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택으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용산강당이 서 있는데, 지암(止庵) 황영조(黃永祖)가 독서와 강학을 하던 곳으로 약 80년 전에 건립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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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과 관련 유적
1. 황준량(黃俊良, 1517~156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로 임명되었으며,성주훈도(星州訓導),양현고봉사(養賢庫奉事)를 거치고, 1544년 학정(學正), 1547년(명종 2)에는 박사가 되었고, 이어 전적(典籍)에 올랐다.
1550년(명종 5) 호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고, 이해 다시 병조좌랑으로 전직, 경상도 신녕현감(新寧縣監),단양군수(丹陽郡守)를 거쳐 1560년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냄
본관은 평해(平海)이고 자는 중거(仲擧), 호는 금계(錦溪)이다.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豊基邑)에서 태어났다. 이황(李滉)의 문인(門人)으로,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손서(孫壻)이다. 어려서부터 문명(文名)이 자자하였다. 1537년(중종 32) 생원이 되었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성주훈도(星州訓導)로 차출되었다. 1542년 성균관학유가 되고, 이듬해 학록(學錄)으로 승진되었으며, 양현고봉사(養賢庫奉事)를 겸하였다. 1544년 학정(學正), 1547년(명종 2)에는 박사가 되었고, 이어 전적(典籍)에 올랐다.
1550년(명종 5) 호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고,《중종실록》《인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해 다시 병조좌랑으로 전직되어서는 불교를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이듬해 지평으로 있을 때 인사 청탁을 거절한 일이 있는 언관(言官)에게 모함을 당하자, 외직을 자청하여 경상도 신녕현감(新寧縣監)으로 나갔다가 1556년 신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단양군수(丹陽郡守)를 거쳐 1560년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지내다가 1563년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도중 예천(醴泉)에서 죽었다.
지방 수령(守令)으로 있으면서 민생과 교육 문제에 관심이 많아 부세(賦稅) 경감과 흥학(興學)을 위해 힘썼다. 특히 빈부의 격차를 줄이고 부호(富豪)의 토지 겸병(兼倂)과 백성의 유리(流離)를 막기 위해 정전제(井田制)를, 이 제도를 시행하기 어려우면 한전제(限田制)를 시행할 것을 주장하였다.
성리학에서는 이황의 설을 그대로 계승하여 스승이 기대승(奇大升)과 사칠논변(四七論辨)을 벌일 때, 사단(四端)은 이(理)가 발(發)하여 기(氣)가 따르며, 칠정(七情)은 기가 발하여 이가 따른다는 설을 옹호하였다.
그가 죽었을 때, 수의마저 갖추지 못해서 베를 빌려서 염을 했으며, 관에 의복도 다 채우지 못할 만큼 청빈했다. 또 퇴계는 애석히 여긴 나머지 제문(祭文)을 두 번이나 쓰고 특별히 행장(行狀)도 썼다. 풍기의 우곡서원(遇谷書院), 신녕의 백학서원(白鶴書院)에 배향되었다. 시문집에《금계집》이 있다.
그가 만년에 공부하던 금양정사(지유 388)와 금선정이 지금도 풍기 금계리에 남아있다.
금선정
2. 신선들이 노니는 곳, 금선정(錦仙亭)
소 재 지 :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금계 2리(장생이마을)
건 축 주 :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의 후손
건축시기 : 1781년(정조 5)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에서 북쪽으로 소백산의 주봉 비로봉 가는 길로 읍을 막 벗어나 1.5Km 쯤에 있는 장생이마을 가운데로 금계(錦溪)의 깊은 여울목에 절벽이 드리워져 있고, 그 위에 우뚝 솟은 사각 정자가 있다. 바로 금선정이다.
금선정이라 이름을 지은 사람은 이곳이 신선들이 노닐만한 절경이라 여겼을 것이다. 신선들이 노니는 곳이라면 다음 몇 가지를 연상할 수 있다. 우선 절벽이나 험난한 산속 동굴처럼 세속과 단절된 장소이다. 다음은 노송(老松)이다. 늙은 소나무에게는 세월의 여러 겹을 바싹 마른 등껍질에 새기고 기댈 곳 없어 보이는 허공인데도 편안하게 기대어 있는 의연함이 있다. 계곡이 더 깊어 보이는 것은 기실 양 옆으로 노송 숲이 울창하게 드리워진 까닭도 있다. 그래선지 절벽 위에 우뚝 서 있는 정자에는 속된 기운이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의연함이 있어 경외와 동경을 가질만한 풍격이 배어 있다.
여기에다가 이곳이 『정감록』에서 말한 몸을 보존할 수 있는 땅, 곧 십승지(十勝地)의 으뜸이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에 따르면 ‘풍기 금계촌 북쪽 소백산 아래에 있는 두 강 사이’를 말한다. 동일한 지역임에 틀림없는데 ‘금계’의 한자가 다르다. 황준량(黃俊良)의 호를 보아서는 ‘錦溪(금계 : 비단계곡)’인데, 『정감록』 등의 비기(秘記)에는 ‘金鷄(금계 : 황금 닭)’로 쓰고 있다. 서로 무슨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밝히기 어렵다.
금선정 역시 금양정사처럼 금계 황준량과 관계가 깊다. 소백산 자락에서 비롯한 금계의 비단결처럼 흐르는 물살과 군데군데서 깊어지는 여울, 그 물속에 검거나 희게 오랜 세월을 서 있는 크고 작은 바위들, 양 옆에 간혹 드리워진 절벽, 사시사철 의연하게 서 있는 수백 년 묵은 노송 숲의 경계가 비단처럼 고상하고 아름답게 여겨 즐겨 찾았고, 마침내 이 계곡의 이름 금계를 자신의 호로 삼았던 것이다.
금계의 물줄기가 한차례 깊어진 여울목 위에 널찍한 바위가 있어 황준량이 ‘금선대(錦仙臺)’라 이름 지었고, 훗날 1756년(영조 32) 군수로 부임한 송징계(宋徵啓)가 정자 아래 바위벽에 ‘금선대’ 세 글자를 커다랗게 새겨 두었다. 정자는 바로 그 위에 있다.
금계의 주인이 가고, 즐겨 찾던 이들의 발걸음이 잦아진 후에야 1781년(정조 5)에 군수 이한일(李漢一)이 부임해 있던 당시, 황준량의 후손이 정자를 세우고 금선정(錦仙亭)이라 이름지었다. 그리고 1785년(정조 9) 이대영(李大永) 군수 때, 목사 조윤형(曹允亨)의 글씨로 금선정이라는 세 글자를 새겨 현판(懸板)을 올렸다.
3. 비로봉 중턱의 금양정사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에서 북쪽 소백산의 주봉 비로봉 가는 길로 가다보면 읍을 막 벗어날 즈음에 갈림길이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마을을 표시하는 바위에 장생이마을이라고 새겨져 있다. 넓지 않은 포장길 좌우로 가옥이 있고, 금방 시원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시냇물 소리를 따라 오른쪽으로 가면 금선정이 있고, 그 왼편 서쪽으로 나직한 산이 있다. 그 산 아래 밭 사이로 작은 길이 있고 그 입구에는 ‘욱양단소(郁陽壇所)’라는 팻말이 있는데, 이 길을 따라 산길을 몇 구비 돌아 중턱에 오르면 소담한 연못을 저 아래에 두고 금양정사가 들어 앉아 있다.
산 남쪽에 기대어 실팍하게 자리를 잡아 저 산 아래 먼지 세상의 소식은 아예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을 뿐 아니라 어지간한 비바람도 타지 않을 듯하고, 하늘에서 내리 쬐는 햇살만 그저 가득 받아 놓았다. 서책을 앞에 놓고 고인의 가르침을 천천히 헤아리거나 조용히 사색하며 옛 성현들의 말씀을 깊이 음미하기에 좋은 자리다. 거기에 속세에서 돌아앉은 고적함은 여름날이면 매미 소리 장단에 잠깐 졸음이라도 쏟아질 것만 같아 여유를 더해준다.
금계(錦溪)의 주인인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이 늘그막에 학문수양도 하고 후학도 가르치고자 냇물을 안고 돌아 흐르는 이 산 언덕에 터를 골랐다. 마을이 멀지 않으나 한적하고 경치가 아름다워 글 읽고 소요하기에 좋은 자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해 입신양명의 길이 열렸지만 청빈한 선비의 삶이었다. 그래서 공부에 몰두할 아담한 집을 평생 동안 꿈꾸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황준량 사후에 그 꿈이 이루어졌으니 금선대 위의 금선정과 산 속의 금양정사가 바로 그곳이다.
이황과 유운룡이 각각 지은 글을 보면 황준량은 천신만고 끝에 정자 건축을 시작해 완공을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성주 목사직을 그만두고 귀향을 결심한 배경에는 정자 완성과도 관련이 있었다고 한다.
이황은 당시 풍기 군수 조완벽(趙完璧)에게 부탁해 이 정자에 대해 면역의 혜택을 주고 아울러 이곳을 후학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러한 이황 스승의 교시를 이어받은 후임 풍기 군수 유운룡은 “이 정자를 황폐하게 만든다면 이는 수령은 물론 온 고을 사군자(士君子)들의 수치이다.”라고 전제한 뒤 이황 선생의 기문과 군수 조완벽의 결정문을 지역의 향사당(鄕射堂) 벽에 걸어 영구히 따를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오늘날의 금양정사는 영조 때의 건물이다. 병자호란 때 원래의 건물이 화재로 무너져 없어지고 집터만 방치된 지 60년이 흐르자, 이를 안타까이 생각한 황준량의 손자 황성(黃垶)이 중건하였던 까닭이다.
이제, 여전히 마을에서 살짝 돌아앉은 금양정사는 황씨 문중 사람이 이를 관리하고 매년 3월 조상에게 제사를 올린다.
4. 욱양서원(郁陽書院)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욱금리에 있었던 서원. 1662년(현종 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황(李滉)과 황준량(黃俊良)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욱양서원 [郁陽書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송간(松澗) 황응규(黃應奎)
1. 송간(松澗) 황응규(黃應奎)
황응규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1569년(선조 2) 과거에 급제하여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를 비롯하여, 여러 벼슬을 두루 역임하였다. 고향에 은거하던 중 임진왜란을 만나 양곡을 내어 병사를 돕고, 향병 대장에 추대되어 의병을 모집하는 등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중문(仲文), 호는 송간(松澗). 할아버지는 황희성(黃希星)이고, 아버지는 우찬성 황사우(黃士祐)이며, 어머니는 영일 오씨(迎日吳氏)로, 오수정(吳壽楨)의 딸이다. 부인은 여흥 이씨(驪興李氏)로, 15세에 시집와 3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황고(黃杲)이고, 둘째는 승정원 도승지를 지낸 황섬(黃暹)이며, 막내는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를 지낸 황시(黃是)이다.
황응규(黃應奎)[1518∼1598]는 1543년(중종 38)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후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재주를 아낀 태학(太學)의 추천으로 전함사 별제(典艦司別提)에 제수되었고, 이어 장흥고 직장(長興庫直長)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569년(선조 2) 52세로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에 임용되었고, 호조·형조·공조의 정랑과 좌랑 등 여러 벼슬을 역임하였다.
1576년(선조 9) 8월에 청도 군수로 부임하였다가 1579년(선조 12) 2월에 이임하였다. 황응규는 하인들을 다스릴 때는 매로 다그치지 않았고 부역을 공정히 해서 백성들이 즐거워하였다. 청도 향현(鄕賢) 김대유·박하담 등과 어울렸고, 부임 이듬해 동창에 세워졌던 선암 향현사(仙巖鄕賢祠)를 선암 서원이 있는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면서 기문(記文)을 남겼고, 동시에 운수정(雲水亭)이라 불렀다.
1588년(선조 21) 서울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늙음을 핑계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곡을 군량으로 바쳐 절충 장군(折衝將軍)에 올랐으며, 1594년 동지돈녕부사가 되었다. 또한 향병 대장(鄕兵大將)으로 추대되어 마을 사람들에게 의기를 고취시키고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모으다가 1598년(선조 31) 병환으로 별세하였다.
학문과 저술
주세붕(周世鵬)과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초서(草書)를 잘 썼다. 시(詩)는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를, 필법(筆法)은 김생(金生)의 글씨를 좋아했다. 저서로는 『송간고(松澗稿)』가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응규 [黃應奎]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 식암(息庵) 황섬(黃暹) 1544 ~ 1616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자는 경명(景明), 호는 식암(息庵)·돈암(遯庵)이다. 서울에서 태어났다. 중종 때 우찬성을 지낸 사우(士祐)의 손자로, 선조 때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낸 응규(應奎)의 아들이며, 정탁(鄭琢)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 성균관유생이 되었고, 1570년(선조 3)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호조좌랑·사간원사간·사헌부집의·서천군수(舒川郡守)·성주목사(星州牧使) 등을 거쳐 도승지에 올랐다. 이어 병조참지에 임명되었고,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선조를 호종(扈從)하여 평양까지 갔으며, 거기에서 모운사(募運使)에 제수되어 군량 수송에 공을 세웠다.
1593년 호조참의, 이듬해 안동부사를 거쳐 대사성·이조참의·예조참판·대사헌·지제교(知製敎) 등을 지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처남인 유영경(柳永慶)이 선조의 고명(誥命)을 받들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다가 광해군이 즉위함으로써 화를 입자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그 후 낙향하여 양몽재(養蒙齋)를 짓고 학문과 후진 양성으로 여생을 보냈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豊基邑)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정익(貞翼)이고, 묘는 영주시 안정면(安定面) 묵리(墨里)에 있다. 저서에《식암집》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섬 [黃暹] (두산백과)
3. 창원 황씨의 연혁과 인물
창원 황씨의 주요 인물을 살펴보면 시중공계와 공희공계, 호장공계에서 고르게 인물을 배출하였다.
시중공계에서는 문하시중을 지낸 시조 황신의 아들 황거정이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면서 가문의 기틀을 닦았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황재(黃梓)·황인검(黃仁儉)·황인점(黃仁點) 3부자가 유명한데, 아버지인 황재는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부제학과 대사헌을 역임하고 영조 때 진주사 서장관과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기행문인 ‘갑인연행록’과 ‘경오연행록’을 편찬하였다. 큰아들 황인검은 형조판서를 지냈고, 둘째 아들 황인점은 영조의 딸 화유옹주와 결혼하여 부마(창성위)가 되었으며, 정조 때 동지 겸 사은사가 되어 일곱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호장공계에서는 황사우(黃士祐)·황응규(黃應奎)·황섬(黃暹)의 3대가 유명하다. 황사우는 중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호조·예조·이조 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역임하였으며, 그의 아들 황응규는 퇴계 이황의 문하생으로 임진왜란 때 절충장군에 오르고 지돈녕부사를 지냈다. 또 황응규의 아들 황섬은 소북파의 영수였으며,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의 처남으로 부제학과 대사헌을 지냈다. 하지만 계축옥사 이후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공희공계에서는 파조인 황석기의 아들 황상(黃裳)은 공민왕 때 홍건적의 난과 왜구를 토평하여 여러번 공신에 올랐으며, 문하찬성사와 서강도원수를 지냈다. 황석기의 현손인 황형(黃衡)은 성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평안도와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를 역임하였으며, 황형의 아들 황기(黃琦)는 중종 때 직제학과 대사간을 거쳐 도승지와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또 황형의 증손인 황신(黃愼)은 율곡(栗谷) 이이의 문하생으로 정여립의 옥사(1589) 때 대신들을 논박하다가 좌천되었으나, 후에 공조와 호조판서를 지냈다. 황신의 아들 황일호는 병자호란 후 인조가 명나라와 모의하여 청나라를 복수하려던 계획이 탄로나자 끝까지 자신이 주도했다며 참수를 당했다. 그 외 조선 중기에 학자로 유명했던 황근중(黃謹中)과 황경중(黃敬中) 형제도 가문을 빛냈다.
이 밖에 영조 때 노론의 중진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황구하(黃龜河),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황사영(黃嗣永)이 있다. 순조 때의 명문장, 명필로 이름을 떨친 황기천(黃基天), 고종 때의 학자 황재영(黃在英)과 명의(名醫)였던 황필수(黃必秀) 등도 공희공계 인물들이다.
창원 황씨의 현대 인물로는 정관계에서는 김영삼 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황인성(전 국무총리)씨를 비롯해 황우여(국회의원·새누리당 대표) 황성수 황명수 황철수 황성균 황은환 황산성(이상 국회의원)씨와 황영시(전 감사원장) 황인수(국방부차관) 황인성(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등이 있으며, 학계와 언론계에서는 황우석 박사를 비롯하여 황병준(중앙대 부총장) 황수영(동국대 총장) 황대석(한양대 상경대 교수), 황선필(MBC 사장)씨 등이 있다. 또 재계에서는 황래성(태창기업 대표회장) 황경로(동부제강 사장) 황설(신원산업 사장) 황창기(수출입은행장), 황창익(전 충북은행장)씨가 있다. 그 외 소설 ‘소나기’로 유명한 소설가 황순원과 북한 최고위층 탈북자로 유명한 황장엽씨는 창원 황씨에서 분관된 제안 황씨이다.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1517~1586)
1. 소고(嘯皐) 박승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낸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조좌랑 등을 거쳐 정언(正言)을 지냄. 예조정랑,현풍현감,풍기군수·판교(判校) 등을 거쳐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다.1569년(선조 2) 동지부사(冬至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황해도 관찰사·도승지(都承旨)·춘천부사(春川府使) 등을 지내고 1583년 대사간이 되었음
본관 반남, 자 중포(重圃), 호 소고(嘯皐),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낸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조좌랑 등을 거쳐 정언(正言)을 지내고, 소윤(小尹)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1547년(명종 2) 예조정랑에 임명되고, 그뒤 현풍현감이 되어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데 힘썼다. 1557년 윤원형(尹元衡)의 세도가 더욱 심하자 벼슬을 사직하고 학문에 힘썼다.
이후 풍기군수·판교(判校) 등을 거쳐 진주목사(晉州牧使)에 이르렀다. 1569년(선조 2) 동지부사(冬至副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황해도 관찰사·도승지(都承旨)·춘천부사(春川府使) 등을 지냈다. 1583년 대사간이 되었으나, 선조의 미움을 사 창원부사로 좌천되었다. 얼마 뒤 중앙에 소환되었다가 병사하였다. 심학(心學)·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영주(榮州) 구산정사(龜山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성리유선(性理類選)》 《공문심법유취(孔門心法類聚)》 《강목심법(綱目心法)》과 문집 《소고집》이 있다.
고향에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출처: 푸르미의 꿈(http://blog.daum.net/ansmo7/77)
2. 소고종택(嘯皐宗宅)·삼락당(三樂堂)
영주시 고현동에 있는 소고종택은 종택으로는 드물게 양옥 2층 건물이다. 물론 처음부터 양옥은 아니었다. 지금의 종택은 근래에 지은 건물이다. 기존의 한옥 종택이 너무 오래되어 양옥으로 새로 지었다. 종가에서 한옥의 경우 오래가지 못한다고 생각해 양옥으로 건물을 올렸다고 한다. 종택 바로 옆에는 소고의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사당은 한옥이다. 인근의 다른 곳에 있었지만 수해로 터가 훼손되면서, 광복 이후 현재 위치로 옮겨왔다.
삼락당은 소고종택에서 8㎞ 정도 떨어진 문정동 한정마을에 있다. 소고의 손자 삼락당 박종무를 기리는 곳이지만, 원래는 소고의 아들 취수헌 박록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소고가 번잡한 곳을 피해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여름에도 시원한 곳’이라고 해서 ‘하한정(夏寒亭)’이라 했다. 너무 청렴결백해 제대로 먹을 것조차 없자 아들의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소고는 삼락당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락당 앞에는 소고가 심은 것으로 알려진 수령 400년의 향나무도 볼 수 있다.
영남일보 기사(2014.09.23.) 글쓴이 소설가 성석제
소고 사당과 종택
3. 반남인 소고 박승임과 영주 삼락당 향나무[이정웅의 노거수와 사람들]
경북 북부지방의 소도시 영주가 뜨고 있다. 아름다운 국립공원 소백산과 풍부한 선비문화자산, 인삼과 사과 등 우수한 농산물을 조화롭게 활용하여 국민적 관심을 끌고 있기 때문이다. 잘 조성된 소백산 자락 길은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활력을 주고, 자기 극복을 통해 인격을 완성하고자 하는 선비정신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도 필요한 덕목이기에 그렇다.
영주시의 이러한 노력은 한국관광공사로부터 2년 연속 한국 관광의 별로 ‘소백산 자락길’(2011)과 ‘선비촌’(2012)이 선정되는 영예를 가져오게 했다. 우리나라 주자학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영주는 안향 등 많은 선비를 배출했는데 조선 전기의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1517~1586)도 그중 한분이다.
공의 본관은 반남(潘南`전남 나주시 반남면)이다. 시조 박응주 이후 조선조에 들어와서 215명의 문과 급제자, 정승 7명, 대제학 2명, 공신 5명, 호당에 뽑힌 분 6명, 문묘에 배향된 분 1명을 배출한 명문이다.
주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그들이 영주에 자리 잡은 것은 소고의 할아버지 박숙이 고모부인 이중(李重)이 안동부사로 올 때 같이 내려와서 능성 구씨 집안에 장가들어 처의 고향인 안동에 정착했다가 아버지 박형(朴珩)이 영주의 예안 김씨와 혼인하여 그 역시 처의 고향인 영주에 자리 잡음으로써 비롯되었다. 이때가 1500년대이다.
공은 퇴계의 제자로 1540년(중종 35년) 24세로 셋째형 승간(承侃)과 함께 문과에 급제했다. 홍문관 등에서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스승인 퇴계와 함께 호당에 들어가 사가독서를 했다. 왕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충언을 담은 1만여 자나 되는 상소를 올려 정책결정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명망이 세상을 떨치자 세도가인 윤원형이 심복을 보내 만나보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으며, 그 뒤 그들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1547년(명종 2년) 예조정랑에 다시 임명되고, 이듬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다시 귀향, 복(服)을 벗은 뒤 현풍현감이 되어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썼다.
1557년(명종 12년) 윤원형의 세도가 더욱 심하여지자 벼슬에서 은퇴, 두문불출하며 독서에 힘썼다. 그 이듬해 풍기군수로 임명되어 소수서원에 있는 안향의 낡은 영정을 새로 그리게 하고, 호조에 건의해 재정을 충실히 했다.
1565년(명종 20년) 병조참의에 승진되고, 얼마 뒤 진주목사로 나아갔다. 1569년(선조 2년) 동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571년(선조 4년) 황해도관찰사, 1573년(선조 6년) 도승지에 승진되었으며, 다음해 경주부윤이 되었다. 묵은 땅을 개간하여 곡식을 심고 나오는 수입으로 관비를 충당하는 한편, 조세를 감면하고 부역을 줄이는 등 선정을 펼쳤다.
1576년(선조 9년) 도승지에 재임명되었고, 강화부유수`여주목사를 거쳐 1581년(선조 14년) 춘천부사에 나아갔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귀향하였다. 1583년(선조 16년) 공조참의를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무고로 창원부사로 좌천, 얼마 뒤 소환되었다가 병사하였다.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리고 많은 서적을 읽었으며, 특히 ‘논어’와 주자서를 탐독하여 스승인 퇴계에게 크게 인정받았다. 시문에 능하고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는 한편, 저술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김륵 등 60여 명의 후학을 배출했으며 그중 9명이 문과에 급제했다. 영주의 구산정사(龜山精舍`구강서원으로 승격되었으나 그 후 훼철되었다)에 제향되었다.
영주시 문정동 한정마을에는 삼락당(三樂堂)이 있다. 소고의 손자 삼락당 박종무를 기리는 곳이나 원래는 소고의 아들 취수헌 박록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소고가 번잡한 곳을 피해 이곳에서 만년을 보내며 여름에도 시원한 곳이라고 하여 하한정(夏寒亭)이라 했다.
그 앞에는 공이 심고 때론 타고 다니던 말을 매어두기도 했다는 향나무가 있다. 수령 400여 년이라고 하니 춘천부사로 나갔다가 건강이 좋지 못하여 사직하고 귀향한 그때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후예 박찬우(전 대구동성로번영회장) 님의 이야기를 듣고 현장을 찾았으나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나무 위를 지나가는 전선을 보호하기 위해 윗부분을 계속 잘랐던 것 같다. 생명문화유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imaeil@msnet.co.kr ⓒ매일신문사(2013-04-04 14:38:48)
◆ 영주가 낳은 인물, 금계와 소고
1. 영주에서 같은 해 태어난 동갑내기 선비
1517년(중종 12), 지금의 영주 땅에 두 아이가 태어났다. 동갑내기인 두 사람은 훗날 퇴계 이황이 ‘영주에는 소고 박승임이 있고, 풍기에는 금계 황준량이 있다(榮有嘯皐 豊有錦溪)’는 말을 할 정도로 인품과 학문에서 쌍벽을 이루었다. 두 사람은 같은 해에 태어난 것 말고도 공통점이 많았다.
황준량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비상하여 ‘기동(奇童)’으로 불렸다. 박승임은 타고난 성품이 빼어나고 특이하여 주위 사람들이 어릴 때 장난하는 모습에서조차 ‘장차 큰 인물이 될 기상이 느껴진다’고 말할 정도였다. 13세에 대학과 논어를 읽고 15세에 서경을 독파했으며 15세에 향시를 볼 수 있을 정도였으나 아버지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황준량은 약관에 생원시에 합격함으로써 학문적 재능을 드러내 보였다. 박승임 또한 20대 초반에 소과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모두 20세를 전후해 퇴계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쌓았다. 퇴계는 특히 재능이 출중한 두 제자를 사랑했다. 황준량이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몸소 그의 생애에 관한 전기인 행장을 지었다. 또한 황준량이 남긴 글을 교열해서 문집을 만들었다. 특히 명정에 제자의 이름 뒤에 ‘선생(先生)’이라는 호칭을 붙임으로써 같은 유학자로서의 존중을 표시했다.
그런가하면 박승임은 소싯적부터 ‘논어’나 ‘주자대전’을 읽고 의문점이 있으면 기록해 두었다가 스승에게 질문을 함으로써 시원하게 알려고 했는데 그때마다 스승은 그의 남다른 열성과 이해력을 인정해 주었다. 퇴계의 저서 ‘계몽전의’는 난해하기로 유명했으나 박승임은 하나하나 연구해 그 뜻을 환히 꿰뚫어 알아냈다. 스승으로부터 맑고 깨끗함을 인정 받아 ‘청백전가(淸白傳家)’라는 글씨를 받았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또 있다. 바로 생김새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는 것이다.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던 사람들이니만큼 옷차림이나 장식이 화려할 리는 없었다. 황준량은 누가 봐도 잘생겼다 할 정도로 남다른 풍채에 박식함, 엄격함을 갖췄다. 박승임에게도 ‘준수하다’ ‘풍채가 뛰어나다’ ‘태도가 단정하고 말이 적다’는 말이 늘 따라다녔다.
두 사람은 1540년(중종 35) 식년문과에 나란히 급제했다. 식년, 곧 자·묘·오·유(子·卯·午·酉)의 해에 한 번씩 전국에서 33명을 뽑는 시험에 동갑내기에 같은 스승을 모신, 가까운 지역에 사는 두 선비가 동시에 합격한 것이다. 15세기 전반 문과 평균 합격 연령인 28.1세에 훨씬 못 미치는 24세였다. 게다가 일곱형제의 여섯째 아들이던 박승임은 셋째형 박승간과 같은 시험에서 급제함으로써 과거 역사상 전례가 없는 진기록을 세웠다.
두 사람은 특히 문장이 뛰어나고 문학에 재능이 있었다. 황준량과 박승임은 나란히 ‘문장에 재기가 뛰어나다’는 평과 ‘문학(詞章)으로 당대의 일가를 이루었다’는 평을 들으면서 숱한 글 청탁을 받았다. 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성균관, 예문관, 홍문관처럼 문장과 책에 관련된 기관에 근무했다. 박승임은 호당의 사가독서를 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재능을 자랑하지 않았다. 문장이 현란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기보다는 도도하고 단단하고 진실했다.
여러 가지로 다재다능한 두 사람을 가까이 하려는 사람은 많았다. 당대의 권력자나 그의 심복은 어떻게 해서든 두 사람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 획책했다. 이들이 활동했던 시절은 윤원형 같은 외척과 권신들이 국정을 농단하던 시기였고, 이들에게 희생 당한 관료와 선비로 사화가 잇따랐다. 두 사람은 ‘우리와 합세해 부와 권력을 나누자’는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럼으로써 평탄한 인생, 벼슬길에 지장이 생길 것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었지만 불의와 타협을 하는 것은 두 사람의 기질과 성정에 맞지 않았다.
2. 백성을 근본으로 삼은 목민관 황준량
20대 중반에 벼슬길에 들어선 이후 두 사람의 행로는 조금씩 달라진다. 황준량은 청요직인 성균관 학유, 학록, 양현고 봉사를 지내고 박사에 이어 성균관 전적에 올랐다. 공조, 호조, 병조의 좌랑을 지냈으며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다. 이때 미움을 받던 언관의 모함을 받자 외직을 자청해 신녕현감으로 나갔다. 목민관이 되고 나서 황준량은 ‘백성이 관의 근본이고 관이 피폐한 백성을 위해 아무것도 못하고 있을 바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실천해 나갔다. 이어 단양군수를 지내고 성주목사에 임명되었다.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곳마다 가난한 백성의 어려움을 보살폈고 교육시설을 확충하고 ‘주자서절요’를 간행하는 등 교육에 힘써서 많은 학자를 배출했다.
명종 12년(1557) 5월7일, 단양군수 황준량이 민폐 10조의 상소문을 올렸다.
“세도(世道)가 변하여 민생의 피해가 더욱 심해져가고 있습니다. 당파는 수도 없이 많아서 어느 것을 따라야 할지 알 수가 없고 법률은 범과 같이 사나워서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습니다. 노역에 시달린 백성이 한탄하며 울부짖느라 길쌈할 짬도 없으며 흉년과 부역으로 백성들이 차라리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게 낫겠다고 한탄합니다. 천재지변과 괴변이 잇따라 나타나고 정치가 잘못되어 백성이 흩어져 장차 나라를 다스릴 수가 없게 되었으니 임금이 그 폐단이 발생한 근원을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팔짱을 끼고 눈을 감고 앉아서 대책을 세우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까? 지금대로 하여 제도를 변경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성군(聖君)과 좋은 재상이라 하더라도 장차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 상소가 오늘날에도 큰 울림을 가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피폐한 민생 현장에서 눈으로 직접 보고 몸으로 겪은 것을 바탕으로 절박하게 개선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권세를 나눠가지는 위정자는 예나 지금이나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끼리의 권력, 당파, 부의 세습은 백성이며 국민의 삶과 살림에 여전히 우선한다. 그러기에 460여년 전의 상소가 지금 이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어진 마음이 있는 자로 하여금 이 글을 다 읽기도 전에 목이 메이게 만든다’.(당시 사관의 논평)
황준량은 20년간 벼슬을 지낸 사람임에도 숨을 거두고 나서 시신을 염습할 천이 없었고 관에 함께 넣을 옷이 없었다. 47세의 나이였다. 애제자를 먼저 보낸 퇴계는 슬픔을 가슴 끓는 시 한 구절로 토로했다.
‘시냇가에서 그대를 만나 의심하던 것 토론했네/ 막걸리 한 사발 그대 위해 마련했다네.’
3. 평생을 청렴결백하게 산 박승임
박승임은 ‘시월의 비(十月雨)’라는 시를 통해 자신의 평상시 모습을 카메라로 찍듯 그려냈다.
‘궁한 선비 가난하여 단벌 옷뿐이라/ 한 해가 저물어 가니 마음은 더욱 시리다/ 반 칸 방에 불 못 때니 얼음장 같고/ 깨진 잔에 거미줄 친 것 민망스레 본다/ 아내는 내가 생계에 소홀함을 꾸짖으니/ 헛되이 밝은 창을 향해 좀 먹은 책 펼친다.’
가난한 중에도 꿋꿋하고 불행 중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유머의 코드마저 느껴지는 시다. 박승임은 40년의 벼슬살이를 하는 동안 서울에서만 30년을 살았으나 자신의 집조차 사지 못하고 셋방을 전전했다. 사람들이 그의 집을 재상댁인 줄 모를 정도로 문 앞이 항상 조용했다. 그는 평생을 세력이 있는 사람들과 교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시사에 함부로 논평하지 않았으며 공무가 끝나면 바로 집으로 돌아와 문을 닫아걸고 학문에 온 마음을 기울였다.
중앙의 요직에 있을 때보다는 외직에 나갔을 때 그의 청렴성과 능력이 더 잘 드러난다. 현풍현감일 때 전염병과 흉년으로 백성이 죽어가자 시신 속을 드나들면서 많은 사람을 살렸다. 풍기군수를 지냈을 때 전임자가 재정을 탕진해서 창고가 빈 것을 보고는 ‘축난 것을 전임자에게 징수해야 한다’는 주변의 권유를 뿌리치고 자신의 생활을 검소하게 하고 쓸데없는 경비를 줄이도록 해서 창고를 채운 뒤에 관련 문건을 태워 버렸다. 굳이 데려다 곤장을 치지 않고 정사를 청정하고 정의롭게 처결하는 것만으로도 호족들이며 교활한 사람을 제어했다. 교육을 확충해서 유교문화를 진작했다. 박승임이 어느 고을에서 이임하거나 귀향하려 할 때 백성들은 그가 가는 길을 막고서 눈물을 흘리며 전송했다.
두 사람은 영주와 풍기에서 퇴계의 학통을 이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더욱 중요한 것은 편안한 출세길을 마다하고 평생 79번이나 사직서를 썼던 스승 퇴계의 개결함과 진정성을 물려받은 게 아닐까.
글=성석제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 병산(缾山) 김난상(金鸞祥)
1. 병산(缾山) 김난상(金鸞祥)
1507(중종 2)∼1570(선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도(淸道). 자는 계응(季應), 호는 병산(缾山). 좌참찬 점(漸)의 현손으로, 할아버지는 영우(靈雨)이고, 아버지는 현(俔)이며, 어머니는 전윤서(全允序)의 딸이다.
1528년이황(李滉)과 함께 사마시에 합격하고, 1537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검열을 지냈다.
1545년(인종 1) 8월에 윤원형(尹元衡)이 왕의 명이라 하여 양사(兩司)를 협박, 윤임(尹任)·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을 탄핵하려 하자 대사간 김광준(金光準)과 대사헌 민제인(閔齊仁)이 윤임 등을 대역으로 논하려 하여 집의 송희규(宋希奎), 지평 민기문(閔起文), 사간 박광우(朴光佑) 등과 함께 이를 반대하다가 모두 파직되었다.
1547년(명종 2)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으로 이기(李芑)·윤원형 등의 청에 의하여 남해로 유배되었고, 1565년에 감형되어 단양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선조초에 이준경(李浚慶)의 청으로 풀려나와 기대승(奇大升)의 주장으로 학행이 출중한 선비로 추천되어 집의·응교·직제학 등을 지내고 대사성에 이르렀으나, 1569년 사류망담(士類妄談)의 잘못을 논하다가 파직되었다. 영주오산사(梧山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병산유집』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난상 [金鸞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오산서원(梧山書院)
1) 경상북도 영주시 가흥동에 있었던 서원.1834년(순조 34)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난상(金鸞祥)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경 훼철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산서원 [梧山書院]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 순조 34년(1834) 오산서원을 창건 하고 김난상의 위패를 오천서원(梧川書院)에서 갈라 나와 봉안하고 묘호를 경현사(景賢祠) 강당을 명교당(明敎堂)이라 하였다. 기문(記文)은 이휘녕(李彙寧)이 짓고 봉안문(奉安文)은 유태좌(柳台左)가 짓고 상향문(常享文)은 이광정(李光靖)이 짓고 서원 승격할때 고유문(告由文) 김희주(金熙周)가 지었다. 지금은 서원자리에 김난상의 정자인 매양정과 김난상의 신도비, 사당이 세워져 있으며 사당안에는 오산이사, 경현사, 오산서원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산서원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 죽유(竹牖) 오운(吳澐)
1. 죽유(竹牖) 오운(吳澐)
오운[1540~1617]은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서 태어났다. 6세 때부터 할아버지 오언의에게 글을 배웠는데, 문재(文才)가 탁월하였다. 1558년(명종 13) 19세에 경상남도 김해 산해정(山海亭)으로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찾아 제자가 되었다. 이때 남명은 삼가(三嘉) 토동(兎洞)에서 강학하던 시기였지만, 산해정에서도 가끔 강학하였다. 25세 때 도산서당(陶山書堂)으로 이황을 찾아 제자가 되었는데, 인재로 인정받았다.
27세 때인 1566년(명종 21)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에 제수되어 출사하기 시작하였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개암(開巖) 김우굉(金宇宏) 등 퇴계 문하의 동문들과 함께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4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성균관학록(成均館學錄)까지 승진하고 31세에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지냈다. 그사이에 이황과 조식 두 선생의 상을 만났고, 또 조모상과 부친상 등으로 상중에 있었다. 37세 때 탈상하고 다시 성균관박사로 부름을 받아 관직에 복귀하였다. 그 이듬해 성균관전적으로 승진하였고, 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옮겼다. 겨울에 휴가를 받아 귀향하다가 고령에 이르러 쾌빈루(快賓樓)에 올라 진외증조부(陳外曾祖父)[아버지의 외조부]가 되는 송재 이우의 시에 차운(次韻)하였다.
오운이 고령 땅을 밟은 기록으로는 이때가 처음이다. 이해 겨울에 명천현감으로 나갔다가, 그 이듬해 체직(遞職)되어 의령으로 돌아와 가거(家居)하였다. 부인의 고향인 가례동촌은 이황이 쓴 ‘가례동천(嘉禮洞天)’이라는 글씨가 남아 있는 곳으로 산수가 빼어났다. 오운은 백암대(白巖臺)를 쌓고 참된 산수의 정취를 즐겼다.
1580년(선조 13) 41세 때 다시 성균관전적으로 나아가 정선군수를 거쳐 충주목사 겸 춘추관편수관에 제수되었다. 팔봉서원(八峰書院)을 세워 그 지역 출신인 음애(陰崖) 이자(李耔),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을 향사(享祀)하였다. 서원을 세워 선현을 향사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운동을 크게 일으킨 이황의 뒤를 이어 오운도 서원 창설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던 것이다.
45세 겨울에 파면되어 의령으로 돌아왔다. 당시 충주목(忠州牧)에는 감사(監司) 일가와 관련이 있어 여러 전임 목사가 해결하지 못한 송사가 있었는데, 오운이 원칙대로 판결하면서 감사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파면되었다. 1588년(선조 21) 49세에 성균관사성으로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광주목사로 나갔으나 2년 만에 파면되어 돌아왔다. 이처럼 자주 파면을 당한 이유는 정의를 지켜 시속에 영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격은 스승인 조식으로부터 물려받은 바가 많았다고 하겠다.
1592년(선조 25) 53세에 의령의 집에 있다가 임진왜란을 맞았다. 단시일에 여러 고을이 와해되고 고을원이나 병사들은 대부분 도망가 숨어 버렸으며, 왜적들은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왔다. 이때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과 남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왜적을 격멸하였다.
그리고 경상도 초유사(招諭使)로 부임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맞이하여 인도하였다. 학봉과는 퇴계 문하의 동문일 뿐 아니라, 학봉의 아들 김집(金潗)은 둘째아들 오여벌(吳汝橃)의 장인이었으므로 오운과는 사돈 관계가 되었다. 경상우도에 대한 정보가 없었던 김성일에게 오운이 큰 도움을 주었다. 김성일은 오운을 소모관(召募官)으로 임명하여 흩어진 병사들을 불러 모아 재편성하도록 하였다.
1593년 4월 김성일이 병들어 위독해지자 진주성으로 들어가 문병하였고, 투병 끝에 별세하자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송암(松巖) 이로(李魯) 등과 함께 시신을 수습하여 가매장하였다. 이해 상주목사로 임명되었으나, 얼마 있지 않아 병으로 사직하고 경상북도 영주 초곡(草谷)으로 돌아왔다. 허사렴의 아버지 진사 허찬(許瓚)은 영주에 살던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의 맏사위였다. 문경동에게는 아들이 없고 딸만 둘 있어 집과 전장을 허찬이 물려받게 되었는데, 허찬의 재산도 자연히 맏아들인 허사렴에게 상속되었다. 허사렴의 재산이 다시 오운에게 상속되어 영주에도 집과 많은 전장이 있게 되었다.
1595년(선조 28) 56세에 합천군수에 제수되어 부임하였다. 합천은 전란 초기에 전투가 치열하여 극도로 잔폐하였는데, 오운은 부임하여 고을을 복구하고 백성들을 위무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해 4월에 춘추관편수관을 겸임하였다. 사재(史才)를 인정받아 외직에 나가서도 사관(史官)을 겸임하였다. 임진왜란 이후로는 영주에 거주하면서 백암(柏巖) 김륵(金玏)과 함께 이황을 향사한 이산서원(伊山書院)의 일을 주도하였고, 따로 산천서당(山泉書堂)을 지어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산천서당은 오운의 사후 영주의 사림들이 산천서원으로 확대하여 그를 향사하였다. 1600년(선조 33) 61세에 문집고성제(文集告成祭)에 참여하여 여러 동문과 퇴계의 학문을 강론하였다.
77세 되던 해 6월에 공조참의에 제수되었지만, 병을 들어 사양하며 부임하지 않고 사직소(辭職疏)를 올렸다. 77세 때 청송부사에 제수되었다. 78세에 재임 중 위병이 점점 심해져 2월에 사임하고 집으로 돌아와 3월 3일 영주의 본가 정침에서 별세하였다.
2. 죽유(竹牖) 오운(吳澐) 의 가계
본관은 고창(高敞). 자는 대원(大源), 호는 죽유(竹牖)·죽계(竹溪)·백암노인(白巖老人)·율계(栗溪) 등이다. 고려 중기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낸 오학린(吳學麟)[1009~?]을 시조로 삼는다. 10대조 오세문(吳世文)은 동각학사(東閣學士)를 지냈는데, 고려 무신란 직후 해좌칠현(海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활동한 오세재(吳世才)의 형이다. 증조할아버지 삼우대(三友臺) 오석복(吳碩福)이 만년에 의령현감을 지낸 뒤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에 정착하게 되어 함안 사람이 되었다. 함안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부인 선산김씨(善山金氏)의 외가가 함안에 있었고, 아들 오언의(吳彦毅)의 동서 조효연(曹孝淵)이 창원에 살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전의현감을 지낸 오언의이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숙부인 송재(松齋) 이우(李堣)[1469~1517]의 사위가 되어 퇴계와 어릴 때부터 교유하였고, 두 집안이 서로 관계가 깊었다. 아버지는 병으로 벼슬살이를 하지 못하고 조행(操行)에만 힘쓰며 집에서 지냈다. 어머니는 취우정(聚友亭) 안관(安灌)의 딸로, 안관은 고려 말 문신 근재(謹齋) 안축(安軸)의 후손으로 기묘사화 이후 서울에서 낙향하여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서 기반을 넓혀 갔다. 처숙부 죽당(竹堂) 허윤렴(許允廉)은 안관과 동서 관계이다.
장인은 몽재(蒙齋) 허사렴(許士廉)이다. 허사렴은 퇴계 이황의 맏처남으로 퇴계를 따라 배워 생원과 진사 양시에 모두 합격하였고, 시문에도 능하였다. 의령 가례동천에 살았는데, 많은 전장(田莊)과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다. 아들이 없고 딸만 둘 있어 오운(吳澐)이 집과 전장을 상속받았다. 그 때문에 오운의 집이 가례에 있게 되었다. 그의 일호인 백암(白巖)은 가례동천이 있는 마을 이름이다. 오운은 퇴계 처남의 사위가 되므로, 퇴계에게는 처조카 사위가 된다. 아들로 오여은(吳汝檼)을 두었다.
3. 죽유(竹牖) 오운(吳澐)의 사상과 저술
오운은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있은 지 51년이나 되었지만, 현달하지 못하고 주로 지방관으로 전전하면서 청요직(淸要職)에는 들지 못하였다. 마지막 관직인 청송부사는 44세 때 역임한 목사보다 한 단계 낮은 직책이었다. 대북파(大北派)가 집권한 광해군 대에도 관직은 청송부사로 재직한 4개월이 전부였다. 더구나 대북파의 영수로 광해군의 신임을 독점한 정인홍(鄭仁弘)이 그의 아들 오여은과 사돈지간이었기 때문에 조금만 신경을 썼다면 높은 벼슬을 얻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를 통하여 오운이 현달하기에 급급하지 않았고, 또 성격이 강직하여 시세에 영합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45세 때 『송재시집(松齋詩集)』을 간행하였다. 이우의 시 원고를 이황이 편집하여 친필로 정사(淨寫)하여 두었는데, 오운이 자신의 녹봉을 들여 친필 그대로 판각(板刻)하여 간행하였다. 그리고 45세 때 함안군수로 재임중이던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함께 『함주지(咸州誌)』를 편찬하였다. 『함주지』는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방지이다. 영주에 머물면서는 임진년과 계사년의 전쟁 상황을 정리하여 『용사난리록(龍蛇亂離錄)』을 저술하였다.
1600년에는 『퇴계문집(退溪文集)』 간행에 참여하여 퇴계 연보를 교정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72세 때 『주자문록(朱子文錄)』을 완성하였다. 주자의 시문은 지부해함(地負海涵)인 탓에 일독하는 데도 한량없는 시간과 노력이 든다. 이런 까닭에 이황이 일찍이 서간 가운데서 긴요한 것을 가려 뽑아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하였으나, 다른 문체(文體)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오운이 이황의 뜻을 이어 주자가 지은 봉사(封事), 소차(疏箚), 잡저(雜著), 서(序), 기(記) 가운데서 학자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글을 가려 뽑아 편찬하였다.
1614년(광해군 6) 10여 년 전에 때 편찬한 『동사찬요(東史纂要)』를 개찬(改撰)하여 완성하였다. 『동사찬요』는 단군 조선에서 고려 말까지를 기록한 우리나라의 역사서인데, 편년체와 기전체를 절충한 독특한 서술 방식을 취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오운 [吳澐]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 답심 자료집 자료 출처
1. 인터넷 경북일보(2016년 03월 07일 월요일 제15면), 권진한 기자
2. 인터넷 매일신문(2013-04-04 14:38:48)
3. 인터넷 영남일보(2016.03.28.), 김제덕기자
4. 다음 블로그 수산(http://blog.daum.net/kil0930/355)
5.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6.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7. 성석제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8. 푸르미의 꿈(http://blog.daum.net/ansmo7/77)
※ 해당 자료의 하단에도 출처를 표기하여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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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봣읍니다
잘 다녀오십시요
같이 가지 못하여 많이 아쉽습니다.
@배종찬 다음 답사때 여석있으면 함께하도록 하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