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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진 시대 풍경
염상섭
이번의 동티는 다른 게 아니라 닭띠 〔酉生〕 와 호랑이띠 〔寅生〕 라는 데서 시작이 된 것이었다. 자기의 아들은 스물아홉, 계유생(癸酉生) 인데, 신부인지 정부인지 하는 것이 스물넷, 무인생 (戊寅生)이라서 상극이니, 그따위년 데려 들이지 말라고, 어머니가 도리질을 한 것이었다. 70이 내일모레인 호랑마님이라, 아들도 꿈쩍을 못하는 것이다. 중년 과부가 뼛골이 빠지게 단남매를 길러낸 생각만 하여도 남에 없는 아들딸이요, 더구나 아들은 이만저만한 년한테 한만히 맡기랴 싶은 생각이다. 한 살이라도 젊었을 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인제는 다 살았거니 하는 생각을 할수록 자식 위하는 마음이 더 간절하다. 또 하나는 저희끼리 너무 좋아 지내는 것도 보기 싫지마는, 무엇보다도 자기의 마음에 드는, 쉽게 말하면 서방만 바치지 말고 시어미 공궤도 잘해주는 그런 고분고분하고 만만한 며느리가 소원이다.
“궁합이 맞구 안 맞구 간에, 그깐년, 내 봐하니 얼굴 파닥지나 반반했지, 길을 막구 물어보렴. 그따위 어디서 굴러먹던 것인지두 모르는 것이 이 집에 들어와서 전실 자식을 둘씩이나 맡아 길러주며 구차한 살림을 해낼 것 같으냐?”
하고 어머니는 방망이 놓은 것이다. 아들도 그는 그렇다는 생각이지마는, 그보다도 어머니의 기승과 누이의 등쌀에 배겨날 년이 없겠다고 원망도 하고 신세타령을 해온 춘식이다.
“어머니, 그럼, 광희 에미는 띠가 안 맞아서, 궁합이 틀려서 그 지경 만들어 놨습디까?”
하고 오금을 박곤 하였다. 춘식이는 여전히 전처 광희 어미를 못잊어 하는 것이다. 전처 경순이는 춘식이가 제 손으로 고른 것도 아니요, 어머니가 연줄 혼인으로 골라잡아서 궁합도 맞추어보고 좋다고 해서 했던 혼인인데, 자식을 둘씩이나 낳고 5년 동안을 정들여 사는 것을 30이 넘도록 시집을 못 보낸 딸과 함께 들볶아서 내쫓고 만 것이다. 경순이도 견디다 못해 자식 남매를 두고 차마돌아서지 않는 발길을 내놓고 말았던 것이요, 그러기에 지금도 서로 못 잊어서 가끔 뒷구멍으로 만나는 터이지마는, 필례의 경우는 또 그와도 다르다.
춘식이는 경순이와 헤어진 지 1년이나 넘어서 요행히 필례와 만났던 것이었다. 춘식이는 어린것 둘은, 큰놈은 저의 할머니가 맡고, 간신히 젖이 떨어진 어린 딸년은 누이가 제 몫으로 맡아 길러주어서, 그 점은 마음이 놓이지마는, 별안간 홀아비 생활을 하자니 불편한 것은 고사하고 허전하고 쓸쓸하여 못 견디겠던 판에 필례와 얼리게 되었으니 이게 웬 떡 이냐고 달려든 것이었다.
술을 못하는 춘식이는 틈틈이 다방 출입이 잦았지마는, 단골로 다니는 ‘따리아’ 다방에서 벌써 1년이나 두고 낯이 익어왔던 필례였다. 말수 없고 언제 보나 깨끗한 몸차림에 깨끗한 춘식이의 외양이, 다른 레지들에게도 호감을 주었지마는, 더욱이 나이 지긋해져가는 필례의 눈에 들었던 것이요, S신문사의 기자라니 저만치 쳐다보였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언젠가 친구끼리 농담으로,
춘식이더러
“생과부두 어렵지만, 자네, 생홀아비 노릇하기에 힘들겠네. 어떻게 장가를 들여줘야 사람구실을 할 텐데!”
하고 껄껄대는 것을 귓전으로 들은 뒤로부터 노처녀 필례가 바짝 달려들게 되었던 것이다. 필례만 하더라도 나이는 차가는데, 언제까지 어리고 예쁜 레지들 틈에 끼어서 하루 진종일 뼛골이 빠지게, 들고나는 손님의 차 시중만 들고 있기가 창피스럽고 인제는 넌더리가 났다. 진득한 성미라, 자리를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고 하기가 싫어서 이때껏 ‘따리아’ 다방에 붙박이로 있었던 것인데, 그래도 그 보람이 있어 춘식 이가 걸려든 것이었다.
춘식이 역시 필례가 까딱대는 위인이거나 사교성 있는 레지라기보다는, 수더분하니 부숭부숭하고 어름새 있는 그 생김새가 살림꾼에 알맞을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무엇보다도 너그럽고 이해성 있는 점으로, 자기 어머니 같은, 동리에 소문난 호랑마님이나, 까다로운 누이의 비위도 곧잘 얼러 맞추어가며 집안을 구순히 만들어줄 듯싶어서, 집 안이 되느라고 실없이 복덩어리를 만났구나 하고 좋아하였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라서, 그놈의 띠인지 궁합인지의 동티로 어머니는 끝끝내 머리를 설레설레 내저으니 딱한 노릇이다. 이 송장이 되어가는 마님이 기를 쓰고 마다는 것은, 자기 눈으로 보고 정한 것이 아니라, 저희끼리 눈이 맞아서 살겠다는 것이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저희끼리만 좋아서 지내는 꼴을 또다시는 보기가 싫다는 것이다.
“그러니 난, 어쩌라는 거예요? 아이, 이놈의 팔자야! 나 목매달아 죽는 꼴을 보구서야 속이 시원하시겠수?”
하고, 어느 날 저녁 밥상머리에서 어쩌다가, 또 그 놀래¹가 나왔을 제, 춘식이는 나이 아깝게 어머니한테 마구 대들었다. 실상은 필례한테 자기가 S신문사 기자라고 허번주그레한 소리를 하여놓았고, ‘따리아’ 다방에 드나드는 친구들도, 공장에 다니는 직공이라기는 싫어서 그런대로 서로 감싸주며 지내왔는데, 그런 것이 나중에 필례에게 알려지는 날에는, 그 결과가 어찌 될지? 또 하나는 자식이 다섯 살짜리 아들 하나가 있다니까,
“그야, 다 길러놓은 거 아네요. 게다가 할머니가 말으셨다죠?”
하고 필례는 아주 마음 턱 놓고 있는데, 모든 것이 속임수만 쓴 것같이 되어서, 어머니가 말을 들어준대도 일이 순순히 엉구어질지가 염려이기는 하였던 것이다.
“네 팔자 한탄할 것만 뭐 있니? 내 팔자두 오죽해야 이 지경이겠니!”
하고 어머니는 말이 70이지 아직도 피등피등한 얼굴을 부르르해 보인다.
“그만하면 다 알겠어요. 짝을 지어주구서두 떼놓지 못해 애를 쓰던 그런 심보들인데, 이번에는 제 맘에 드는 것을 제 눈으로 골라서 들여앉히겠다니 더구나 가만둘 수 없다는 거죠? 그러나 그럴 거 없이, 다시 하나 어머니 맘에 드시는 걸 골라오시구려. 내가 장가를 가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장가를 드시는 셈 치구. 허허허. 기가 막혀! 시대가 거꾸루 돼두 분수가 있지! 우리 집은 이래서 될 것두 안 된단 말야!”
춘식이는 누이가 미워서도 함부로 대들며 혀를 끌끌 찼다.
“이눔이 나중에는 못할 소리 없구나! 무엇에 몸이 달아 그러는 거야? 너두 염치가 있지? 두 번씩이나 네 장가가 급하냐? 네 누이를 생각해봐. 어서 매붓감이나 골라올 생각은 안 하구…… 밤낮 계집에 미치구, 노름에 미쳐서…… 네가 장남 아니냐? 이 집안 어른 아니냐?”
어머니는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펄필 띈다. 그러나 누이 추자는 고식(姑息)이 말다툼할 때와는 달라서, 섣불리 어머니 편을 들다가는 오라비한테 더 구박이나 맞을까 보아 찍소리도 못하고 있다. 이 노처녀도, “아아 이년의 팔자야…….” 하고 소리 없는 한숨만 땅이 꺼지게 쉴 뿐이다.
“장남두, 집안 어른두, 누가 쓰자는 감투는 아니니까요. 다 싫어요. 맘에 맞는 며느리를 고르시는 솜씨루, 맘에 드는 사위는 왜 못 고르시구, 날더러 안 구해온다구 하시니, 사위도 추자의 마음에 드는 걸 제 손으로 골라잡아선 안 된다는 말씀이겠지만, 이왕이면 어머니 맘에 드는 걸 손수 고르시란 말예요.”
어머니는 한참 기승을 떤 끝이라, 잠자코 씨근거리고만 앉았다. 며느리니 사위니, 언제나 보게 되려는지? 툭하면 논 이기듯 밭 이기듯 입씨름만 해야, 언제 끝장이 날지 모르는 일에, 인제는 에미 자식 간에도 시끄럽고 찜증이 나서 못 견디겠는데, 그것은 고사하고, 계집에 미치고 노름에 미쳤다는 어머니의 말에 춘식이는 또 아웅하였다. 은근히 그리는 아내를 내쫓아서 1년 넘어나 까닭 없이 홀아비로 지내는 신세인데, 계집에 미쳐본 일도 없지마는, 다시 장가를 가겠다는 것마저 헤살을 놓으면서 그게 할 소리야? 하고 뱃심이 드는 것이지마는, 노름에 미쳤다는 말에만은, 실상 미친 것은 아니나 찔끔한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노름이라야 별것이 아니라, ‘섰다’를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가보잡기’를 하는 것 같은 것인데, 공장에서 일하는 틈틈에 심심하니, 그런 것이라도 하여 피로를 푸는 오락이랄까. 바둑을 두자니 공장 속의 날뛰고 휘돌아가는 그 속에서 기분부터가 어울리지 않고, 장기를 뚜닥거린대도 피로한 신경에 아무 흥분제는 못 된다. 그저 손쉬우니 ‘섰다’로 따고 잃고 하는 사리적(私利的) 흥분과 욕기에 끌려서 자연 손을 대게 되는 것이다.
헌데 이상한 일은 요새로 춘식이의 손속²이 통 전만 못하다. 간혹 잃을 때가 없지 않지만, 그래도 잔용푼은 뜯어 써왔던 것이요, 노름이라는 데에 인이 박혀서만 아니라, 용돈 따서 쓰는 데에 맛을 들였던 것인데, 이즈막 두어 달 동안은 열에 한두 번 딴다 해도 셈속이 안 된다. 판판이 손을 털고 일어설 때마다 어쩐지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이다. 으레 노름꾼이 손속을 잃으면 계집 탓을 하는 것이겠지마는, 따져보면 필례와 그렇게 된 뒤부터 차차 재수가 막혀가는 것 같다. 그러니, 이루 뒤를 대는 수가 없어, 한참 동안은 사흘이 멀다고 팔뚝의 시계를 끌러서는 옆의 시계방에 맡기고 오륙천 흰씩 노름 밑천을 장만하곤 하였다. 그러나 몸이 달수록 판이 점점 커가고 보니, 잗단 몇천 환 푼돈을 가지고는 얼러볼 수도 없거니와, 인제는 막다른 골목이 되고 말았다. 노름에 미쳐서 몸이 달면야, 눈에 보이는 것도 없고 염치불구 이기는 판박이 노름꾼이나 다름이 없다. 무어, 생각다 못해서가 아니라, 의당히 할일인 것처럼 필례의 신세를 지기로 하였던 것이다. 얌전히 들여앉혀서 살림을 하여달라는 생각인지라, 찌르렁이³를 대어 한때 빨아먹자는 검은 배짱은 물론 아니었지마는 아쉰 대로 이용하는 것이요, 핑계가 부장을 대접한다느니, 편집국장에게 긴히 보여야 승급이 된다느니, 재주껏 꾸며대서, 처음 몇 번은 이삼만씩 두어 번 얻어 쓴 것이, 나중에는 담이 커져서 한 번에 5만 환씩 끌어내어 썼다. 그래야 필례는 싫은 내색 하나 안 보이고, 입에서 떨어지기가 무섭게 선선히 수응하여주었다. 그러던 것이 지금 와서는 20만 환이 훨씬 넘었다. 그러나 ‘섰다’로 뜯어 갚자니 부지하세월이다. 웬일인지 여전히 손속이 들지 않고 재수가 없다. 그러니, 고작해야 5만 환 월급인데, 무엇무엇 제하고, 곗돈 붓고 해서 겨우 5만 환쯤 수중에 들어오면, 고스란히 어머니한테 갖다 바치고는, 담뱃값은 고사하고 전찻삯이나 매일매일 타서 쓰는 것이 고작이다. 이러한 형편이 되고 보니, 춘식이는 요새 와서는 필례에게 고개를 못 들 지경이다. 그러나 애초부터 떼어먹자는 검은 생각도 아니지마는, 어차피 내 사람 될 바에는 네 것 내 것이 있겠는가, 한주머니 속 세음인데, 그게 그거지 무어냐는 배짱으로 차차 얼굴 가죽이 두꺼워갔다.
한편 필례로서는 그 돈이 어떤 돈이길래 하는 속셈이 없지 않지만 설마하니 그 돈이 노름 밑천이 되었으리라고는 꿈에도 모른다. 그러나 알뜰히 벌어서 푼푼이 모은 것은 시집갈 밑천을 마련하자던 것인데, 신정지초f라 사랑하는 남자를 위하여 한때의 군색을 피하게 해준 것을 좋아하였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노름 밑천을 댔더라는 것을 알면 기절을 할 것이다.
그건 고사하고, 지금 춘식이는 혼자 똥이 타는 조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극성스러운 어머니 등쌀에, 이 혼인이 기어코 빠그러지고 만다면, 사람을 놓치기가 아까운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자그마치 30만 환 가까운 돈을, 당장 무슨 수로 갚겠느냐는 걱정이다. 처음부터 속이자는 것은 아니었다는, 버짓한 대신문의 기자라면서 그 꼴 되고 보면 단단히 욕을 볼 것만 같아서 겁이 덜덜 난다. 필례가, ‘기자인 줄만 알았더니 고작 직공야?’ 하고 입을 비쭉할 것쯤은 약과다. 그렇게 되면 이편에서 파혼을 한다기 전에 속은 것이 분하다고, 돈이나 내놓으라고 멱살을 붙들고 나설 테니 말이다. 다달이 부어가기에도 쩔쩔매는 그놈의 계라야 고작 10만 환짜리가 셋인데, 올 안으로 다 타지도 못하지마는, 다 타기로 그 무서운 어머니 몰래 빚을 갚는달 수도 없다. 그런데 ‘섰다’
는 여전히 날마다 사람을 골탕만 먹인다. 필례와 아주 상관을 말아야 재수가 틔고 손속이 들려는지, 말로 잃고 되〔升〕로 따는 ‘섰다’는 오늘도 몸이 달아한다. 밤일을 마치고 졸린 눈을 비벼가면서.
2
“아니, 그 마님 언제 나를 지내봤다구 머리를 내저으신답디까?”
자리 속에서 하는 베개송사다.
“뭐, 칠십 노인이 체머리를 젓기가 예사지.”
춘식이는 실없게 코웃음만 쳤다. 어머니의 승낙을 아직도 못 얻었느냐, 어서 예식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 필례가 점점 더 몸이 달아하는 것을, 인제는 입을 틀어막을 도리가 없다.
“이거야, 맛두 안 보구 싫다는 생트집이지. 내 솜씨가 어떤 줄두 모르구. 맛을 한번 단단히 봐야 할까?”
필례는 선웃음을 친다. 그러나 이것은 그 어머님 마님에게 대하여서보다도, 춘식이더러 들어보라는 위협이다. 몸을 허락한 지는 서너 달밖에 안 되지마는, ‘따리아’ 다방에서 사귄! 지가 벌써 1년이 넘는다. 친숙한 품으로야 못할 말이 없지마는, 필례는 어서 그 ‘레지’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고, 시집이 가고 싶어서 기껏 골라잡았다는 것이 이 지경이니 이제는 찜증이 나서 얼러대는 것이다.
“재주껏 하라구. 하하하…….”
춘식이는 역시 웃어넘기는 수밖에 하는 말이 없다.
“이리 나와서 살재두, 그것두 못하겠다 하구…… 그럼 어떡헐 작정이냔 말예요?”
이번에는 가볍게 좀 쏘는 소리를 하였다. 이리 나와 살자는 것은, 필례가 세 들어 있는 이 방에서 둘이만 살림을 하자는 것인데, 춘식이로서는 홀어머니와 과년한 누이에게 자식들을 떼맡기고 빠져나와서 딴살림할 수 없는 것도 인정이 그렇고 어머니 성미에 될 법한 일도 아니다. 필례도 그 사정을 짐작 못하는 바 아니기에, 되도록이면 들어가 살자는 것인데, 처음 이야기와는 점점 딴판이 되어가니, 필례만 해도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딱한 사정이다. 춘식 이는 하느니 어머니 탓뿐이다.
“우리 오빠가 알아보라구, 가만있을 텐가! 이건 무슨 결혼 사기냐구, 당장 들구일어나 야단일 테니까?”
이것도 한 위협이다. 사실 필례의 단 하나 있는 손위오라비가, 시내는 아니지마는 바로 의정부 경찰서의 경위로 있다.
1·4후퇴 때, 부모는 서울 가서 자리 잡는 대로 모셔간다 하고, 단남매끼리 남하하는 피난민 틈에 휩쓸려 왔던 것인데, 고생이야 이루 말할 것 없었지마는, 그래도 똑똑하고 착실한 오라범은 경찰에 발을 들여놓아서, 장가도 들고 벌써 삼 남매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 필례는 거기에 얹혀서 여중까지는 졸업하게 되었던 것이다. 학교를 나와서도 오라비의 주선으로, 어쩌다가 광화문 우편국에 들어가서 여급사로부터 출세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나이 차차 들어가니, 생기는 것도 푼푼치 않은데 허드렛 일이나 하고 있는 것이 창피스러워서, 다시 제 손으로 뚫어 나선 길이 다방 레지였다. 이것도 4, 5년이나 되어, 인제는 이에서 신물이 나지마는, 어쨌든 그 덕에 서로 맞지 않는 올케에게 얹혀살지 않아서 좋고, 혼자몸이라도 제살이를 하여가면서 돈푼 모으는
것이 재미요, 아무 꺼릴 것이 없이 자유스러워 더욱 좋다.
“결혼 사기루 몰려두, 딴은 허는 수 없게는 됐어. 허지만 가만있어, 어머니만 승낙하시면 그만 아닌가.”
처녀를 농락했다는 것뿐 아니라, 돈 조건에만 걸려도 꼭 그렇게 될 듯싶어서 가슴이 선뜻하다.
“그야 그렇지. 아무튼 설마 그 알량한 우리 오빠 세도 믿구 당신을 그렇게야 할라구. 호호호…….”
하고 필례는 남자가 노했을까 겁이 나서 얼른 휘갑을 쳤다.
“아무래두 좋아. 덕분에 경험 삼아, 유치장 구경두 할 거요…….”
춘식이는 픽 웃으면서 토라져서 돌아누워버렸다. 다시는 피차에 말이 없이 잠잠하였다. 그러나 필례는 말이 좀 지나친 것을 후회하였다. 이 남자를 또 놓칠까 보아 겁이 났다. 다방으로 선을 보려 왔을 때, 그 거벽스러운 춘식이 어머니와 앙칼진 누이를 보고, 말썽꾸러기려니 싶어 덜 좋았었고, 게다가 자식이 달렸으니 무어 하나 보잘것은 없으나, 당자만은 마음에 드는 데야 하는 수 없다. 다 산 늙은이, 몇 해나 시어머니로 떠받들겠는가? 시뉘라야 더구나 아랑곳도 없는 존재요, 다 길러놓은 자식은 힘 안 들이고 아쉰 때 부려먹기라도 알맞을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셋방살이로 떠돌아다니면서 매인 데 없고 총찰하는 사람 없이 지내는 동안에, 마음 내키는 대로 몇몇 남자도 알게 되었지마는, 춘식이만큼 술 안 먹고 얌전하고 말 한마디라도 양심적인 사람은 처음 걸려보았다. 그러니 별수 없다는 것이다. 내 얼굴이 남에 없이 예쁘단들 백만장자의 첩으로라도 가서 호강을 할까! 얌전하고 본댁 없는 자리니 좋지 않으냐고, 이리 따지고 저리 따진 뒤에 기를 쓰고 매어달리려는 작정 이다. 게다가 며칠씩 밀린 고단〔疲勞〕을 시원하게 거뜬히 풀어주는 잠자리가 편해서도 더욱 좋다. 짝패로 같이 다니는 김능글이의 말을 들으면, 전 여편네가 쫓겨나갔어도 아직 연을 끊지 않고 틈틈이 만난다는 것도 자식 때문도 있겠지마는, 자기 같은 생각으로 놓치기가 아까워서 그러는가 싶어 그럴듯하다. 그러나 그 전처에게 동정이 간다기보다는 질투를 느낀다. 김능글이의 말을 들으면, 쫓겨난 전처는 전에 간호원 경험이 있던 관계로 다시 어떤 개인병원에 취직하여 있다는 것이다. 김
능글이란, 자기네 친구끼리 농담으로 부르는 별명이요 이때껏 본 이름은 알 수 없으나, 실상은 벌써 오래전부터 필례한테 시릉거리며 능글능글하게 구는 것을, 이 사람이 허풍선이 같고, 처자식이 딸린 사람이라 상대를 아니하여 왔던 것이다.
“왜, 켕겨? 호호호.”
캄캄한 속에서 필례는 남자의 등에다 대고 웃음의 소리를 다시 걸어보았다. 노했을까 보아 풀어주려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 대꾸가 없다. 사실, 아이가 둘인 것을 하나라고 속인 것까지 치면 켕기는 조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요, 고소를 당하면 결혼 사기로 걸리기에 똑 알맞기는 하다고, 춘식이는 눈을 감고 누워서 생각하며 어머니를 어떡하면 다시 설복할까 하는 궁리에 팔려 있다.
‘……하지만, 가만있자, 어머니두 필례 오라범 이 시골 경찰서의 서장이라든가 하는 것을 아시는 모양이니, 이 혼인을 빠그렸다가는, 그 등쌀에 고소를 당하구 붙들려갈 지경이라고 서둘러대면야, 그래두 난 모르겠다구 하시진 않겠지?’
멍청한 춘식이의 머리에도 이런 계교가 떠오르니, 필례가 실없이 좋은 지혜를 일러주었다고 싱긋 웃었다.
“아니 그런데, 당신 어머니는 내가 함부루 굴러먹는 걸 어디서 봤길래, 아랑곳없는 사람한테까지, 신이야넋이야 흉하적을 하신답디까?”
필례는 노했을까 보아 애를 써 곰살맞게 말을 붙여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심사에 틀려서 반발적으로, 이때껏 참아두고 입 밖에 내지 않았던 말을 까내고 말았다.
“뭐? 누가 그따위 소리를 해?”
춘식이는 화를 바락 내며 돌아누웠다. 필례는 즉효가 났구나 하는 생각에 웃음을 참으며,
“누구거나, 그 마님이 오죽 수다를 떨구, 광고를 쳤기에, 집안에서 모자분끼리 한 말까지 내 귀에 들어왔을라구.”
하고 들큰거려주었다.
“미친놈…….”
춘식이는, 캐어보지 않아도, 김능글이란 놈이 입을 놀렸을 것이기에 하는 소리다. 그놈이 전부터 필례에게 엎드러졌던 줄을 알지마는, 일이 이렇게 되니 뺏긴 것이 분해서 은근히 헐뜯고 다니는구나 하는 짐작도 든다.
“왜 남만 미친놈이래요? 내, 언제든지 그 마님께 한번 가서 따지구 말결!”
“주책없는 소리!”
춘식이는 소리를 꽥 질렀다. 요 꼴에 이것두 연애란 건가? 삼각관계 비슷한 양념도 곁들였으니 본치가 나는구나 하고 춘식이는 혼자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필례의 입에서 또 무슨 말이든지 나오려니 하였더니, 잠자코 마는 것을 보고 겨우 마음이 놓였다.
그런데 그렇게 큰소리는 내지 않았어도 속으로 으르렁대며 하룻밤을 새고 헤어진 뒤로는, 춘식이는 일체 발을 끊고 말았다. 벌써 보름이나 못 만났다. 그렇게까지 토라졌을까 싶어 얘도 씌고, 전화라도 걸어보려 했으나, 웬 까닭인지 전부터 전화는 걸지 말라 했고, 전화도 걸지 말라는데 찾아갔다가 다른 기자들의 눈에 띄면 재미없을 듯하기에, 꾹 참고 하회만 기다리고 있었다. 또 한
편에는 너 그러면 그랬지, 내가 비릿비릿하게 쫓아다니며 빌붙을 거야 무어 있으랴 싶어서 내버려두고 보자는 버티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하루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김능글씨가 스르를 들렀다.
“웬일들이세요? 뭐 노하셨나 했지.”
하고 필례는 반겨했다.
“그거야 날더러 물을 게 있나! 허허허.”
하고 능글씨가 의미심장한 소리를 하였다. 필례는 거기에는 모른 척 하고 넌지시 춘식이의 소식을 물어보니,
“응, 요새 그 사람 맘 잡았지. 인제는 ‘섰다’두 손을 떼구, 제시간만 되면 온다 간다 말 없이 어느 틈에 후딱 새어빠지구…… 흐흐흐…… 이게 또 하나 생긴 거지. 이번엔 그 자당이 골라 맬겼는가 봐. 허허허…….”
하고 김 능글이는 새끼손가락을 뾰족이 들어 보이며 낄낄대다가,
“또 모르지. 애어머니하구 다시 얼리는지. 원체 신관이 구관만 못한데다가, 그 구관이 현부인이거든…….”
하고 남 속상하는 소리만 하는 것이었다. 필례는 심사가 틀려서 뾰로통하여 졌 다.
그러나 사실 요새 춘식이는 무엇에 번민을 해서 그런지, ‘섰다’도 아주 물려버리고, 낮일인 날이면 손만 떼면 달아나고, 밤일인 때도 틈이 있는 대로 쿨쿨 코를 골다가도 눈만 뜨면 후딱 달아나곤 하였다. 번민이라야 묻지 않아도 다른 것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봐야 어며니만 마음을 살짝 돌리면 다 필 일이기에 필례 집에서 자고 가던 날 섣불리 말을 꺼내보았던 것이다.
“어머니, 아무래두 그 애를 데려 들여야 하겠는데요?”
하고 우선 전초전을 걸었다.
“그 애라니? 누구 말이냐?”
어머니의 말눈치가 좀 의외이기에,
“누구 말이라니요? 그럼 필례가 싫으시면, 애에미를 다시 데려와두 좋단 말씀인가요?”
하고 다져보았다.
“무슨 객설! 넌 왜 이리 어림이 없니?”
결국 핀둥이만 맞았다.
“자, 그러니 말씀예요. 기위 몇 달을 두고 얘기가 돼오던 터에, 남의 사람을 체면이 있지, 어떻게 그대루 따돝려셉니까?……”
“따돌려세다니? 혼인 이르다가 궁합이 안 맞어 퇴짜하기가 예사지, 이건 무슨 얼뜬 소리냐?”
어머니는 코웃음만 치며, 오히려 아들을 들큰거리는 말눈치다.
“그런데요, 어머니…….”
하고 아들은 빌붙어보았다.
“섰다 아시죠?”
“그래, 어쨌어?”
어머니는 자애라기보다도, 아들을 저만치 내려다보며 냉연히 대꾸를 하였다.
“그게, 처음에는 장난삼아 한 건데, 점점 커져서, 빚이 20만 환 넘어 근 50만 환 됐습니다그려.”
춘식이는 죽여라 하고 실토를 하고 말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망설이지도 않고, 대번에 쏘는 소리가,
“하마터면 집 팔아먹을 뻔하였구나! 그래 어쨌단 말이냐?”
하고 눈을 까뒤집으며 흘긴다.
“허는 수 있에요! 어머니껜 말을 못해두 그 애한텐 사정을 할 수 있어 말을 비쳤더니, 이렇다 저렇다 군소리 없이 뒷구멍으루 싹 갚아주었군요. 이런 고마울 데가 어디 있겠에요.”
“이 덜 돼 떨어진 놈아! 대관절 네 나이는 몇 살인데, 뜨내기 계집 잘 만나서 덕 봤다는 자랑이냐? 노름빚 뒤치다꺼리해주는, 너만치나 덜된 년은 며느리루 데려올 수 없어.”
머리가 허연 어머니는 펄펄 뛴다.
“그런데, 어머니두 그 애 큰오라비가 경찰서장인 거 아시죠?”
“그러니 어쨌단 말야? 계집애 돈 빨아먹었다구 붙들어갈까 봐 걱정이냐? 흐흥, 붙들려가렴. 눈 하나 깜짝 안 한다. 그년두 서방질하느라구, 저 좋아서 돈푼 썼지, 날더러 그년의 서방질한 값 치르라는 거냐? 집문서라두 잡혀서 갚아달라는 거냐?”
어머니는 얼마 동안 속에 뭉켜 서렸던 기승과 울화가 함께 폭발하는 듯싶다.
“어머니는 모르는 소리 마세요. 사기 결혼이라구 명목을 붙여 고소를 하는 날엔, 당장 유치장 신센데…….”
춘식이는 어설피 서둘러보았다.
“글쎄, 그런 어림없는 소리 말라니까. 그년두 저 좋아 놀았으면 그만 돈 써두 좋지 않으냔 말야. 남정네 오입쟁이면 그 열 갑절은 썼을 거라. 뭐 억울한 거 있다던? 남녀동등, 동권 시대라면서, 여기는 좀 다르다는 거냐? 저를 바라구 오는 놈헌테 몇 갑절이구 뜯어내서, 이번에는 제가 좋아하는 놈헌테 조금쯤 바쳤다기루, 그것이 빚이 될 게 뭐냐? 넌 어수룩두 하다.”
춘식이는 어이가 없어 입을 닥치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머니는 젊었을 때나 홀로 되어서 남자와의 교제를 어떻게 하여왔었는지 알 까닭이 없지마는, 따지고 보면 그럴듯하기도 하다.
“하지만, 어머니. 그렇게까지 심하게 하시면 난 내대루 할 테예요. 법률상으로두 우리 나이만 되면 부모의 허락이 없어두 자유로 결혼할 수 있으니까요.“
이번에는 어머니한테 대어들었다.
“잘은 한다. 이제는 헐 말 없으니까 법률루 따지기냐? 넌 법률하구 사니? 에미, 동생하구 살 수는 없어두 법률하구 계집년이나 끼구 살면 고만이란 말이지? 너, 젖 먹구, 똥오줌 쌀 적에두 그 법률이나 그 계집년이 치다꺼리를 해주던?”
기가 부풀어난 어머니는 점점 더 뛴다. 어머니의 말이 이쯤 나가고 보니, 춘식이는 더 사정을 하여본대야 별도리 없을 것 같아서 아주 단념해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보기 좋게 마지막 실패를 하고 난 춘식이는, 다시 필례를 만나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돈이나 안 끌어 썼더라면 몰라도, 그놈의 ‘섰다’ 때문에 필례 앞에 고개를 못 들게 되고 말았다. 모든 것이 신산하고 귀찮고, 내용을 짐작하는 친구들의 얼굴을 대하기가 뜨뜻해서, 우선 ‘섰다’부터 집어치우고 혼자 빙빙 돌았었다. 그러던 판인데 하루는 경순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필례에게는 까닭이 있어서 전화를 못 걸게 하였지마는, 경순이야 전에 같이 살 때부터 툭하면 남편을 불러내던 전화다. 하여간 급히 의논할 일이 있으니, 오늘 저녁에 꼭 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춘식이는 이 전화가 얼마나 반가웠던지 몰랐다. 한참 뒤숭숭한 머릿속이 금세 깨끗이 개는 듯싶기도 하였지마는, 이 궁지에서 활불(活佛)의 소리를 듣는 듯싶었다. 오랫동안 자기도 모르게 숨어 있던 뼈에 맺힌 그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힘이, 자기를 끌어 잡아당기어주는 것만 같았다. 어째서 헤어졌든지 간에, 남 된 남편을 찾아다니는 경순이었고, 급한 때면 언제나 와달라고 부르는 경순이다. 두고두고 끝끝내 못 잊어 하는 그 마음씨가 고맙고 가련도 하다.
그런데, 춘식이가 경순이를 때때로 찾아가는 데는, 을지로 입구 근처에 있는 영어 강습소였다. 언제나 만나면, 반갑고, 반가워하는 사이지마는, 조강지처로서 얌전히 살림을 하던 전날의 경순이의 모습을 생각하면, 새삼스럽게 영어를 배우러 다니다니 세상이 바뀐 것을 여기에서 보는 듯싶고, 온종일 간호원으로 지친 몸을 이끌고 와서 기를 쓰고 배우겠다는 경순이가 보기에 가엾고 미안도 하다.
그러나 둘이 만나자면, 어째 하필 여기에서 만나야만 하겠는가? 어엿한 옛날 처가도 있지마는 의절한 장인 장모를 볼 낯이 없고, 실상은 저희끼리 뒷구멍으로 만나는 것조차 두 집 부모에게는 숨기고 있다. 누가 무서워서가 아니다. 전에 병원으로 보러 갈 때도, 애인끼리 밀회나 하듯이 남의 눈을 기워 숨어 만난 것은, 어엿한 남편이 병신구실하는 것을 알까 보아 창피스러워서였다.
그러던 것이 경순이가 야학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하게 되니까, 학교로 마음 놓고 찾아가고, 하학하기를 기다려서 밤거리를 거닐다가는, 춘식이가 친구에게 배워서 알아두었던 ‘무허가 하숙집’이라는 데로, 어느 편이 끌고 말고 없이 같이 들어가 자고 나오곤 하는 것이었다. 어엇한 제 집, 제 방을 두고 창피스럽고 추잡하게 이건 무슨 꼴인가 하는 생각을 피차에 할 때도 있었지마는, 인제는 예사가 되었고 결혼 전에 못해본 연애를 새판으로 하는가도 싶어서 야릇한 기쁨을 맛보는 것이기도 하였다.
경순이가 영어 야학을 시작하여 열심히 회화를 공부하는 것은 ‘커다란 야심’이 있어서였다. 1년에 몇 차례씩 혼혈아를 모아서 미국으로 데려갈 때마다 따라가는 보모나 간호원이 수가 난다는 말을 듣고서 부랴부랴 시작한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급히 의논할 일이 있다니, 정녕 가게 된 것이로구나 하고 일변 반가우며 일변 섭섭한 생각으로, 춘식이는 부리나케 강습소로 시간을 대어갔다.
경순이는 노냥⁵ 귀를 밖에 대고 있다시피 기다리다가, 춘식이가 온 기척에 공부는 집어치우고 살짝 빠져나왔다. 그저 눈웃음만 쳐 보이고, 아무 소리 없이 팔에 매어달리듯이 달라붙어서 걷기 시작하였다. 언제나 그랬지마는 오늘은 유난히 따른다. 춘식이 역시, 전에는 필례가 있느니만치, 만나면 반갑기는 하였어도, 오늘같이 마음이 쏠리기는 처음이다.
“어떻게 됐어? 가게 된 모양이지?”
“가서, 얘기해요.”
경순이는 마치 집으로나 가는 길같이 그 ‘무허가 하숙집’을 생각하며 좀 숨이 가쁜 소리로 속삭인다. 춘식이도 그 뜻을 알고 ‘예전 아내’의 어깨를 꼭 껴안았다. 역시 한집에서 살던 예전 아내와 같지 않게, 귀엽고 새로운 정에 흐뭇하였다.
“그래, 뭐야? 급한 이야기란?”
단골집이라, 뒷방 아늑한 데 들어앉으며 춘식이는 말을 꺼냈다. 전에 자기네 건넌방에 마주 앉은 것 같다. 그러나 경순이는 무심코 아이들 생각이 나서, 이때껏 홍분하고 자극적이던 기분이 스러져갔다. 얼굴빛이 달라지며 잠자코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는 것을 보고, 춘식 이도 그 감정에 끌려들어서 한참은 말이 없었다. 마음을 가라앉힌 뒤에 비로소 경순이는 입을 벌렸다.
“가게 됐는데, 수고 좀 해주셔야 하겠에요.”
가게 됐다는 말에 반색을 하면서도, 춘식 이는 수고해달라는 말이 남남끼리 같아서 설면하게 들렸다.
“수고구 말구 뭐야? 그래 언제 떠나게 됐어?”
춘식이는 경순이가 설면히 말하는 것이 싫기도 하고, 인제는 아주 헤어지는구나 하는 서운한 생각에, 공연히 휘뿌리는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경순이는, 전에 남편이 못마땅해할 때처럼 자기를 무관히 다루어주는 것이 좋았다. 전에 살림할 제, 말다툼을 하다가는 남편에게 쥐어박히면, 또 그것이 분해서 맞붙들고 물어뜯고 걷어차이고 하던 크 시절이 도리어 그리운 듯이 퍼뜩 생각난다.
“모두 60명 보내는데, 따라가는 사람이 여남은 되는지? 여권에 비자만 얻으면 내월 초순께서는 떠나게 된다는데, 어서 서둘러야는 하겠구, 난 어디 가서 어떻게 하는지 뭘 알아야 말이지. 병원에서두 잠시를 빠져나올 수 없구…….”
결국 미군이 씨를 뿌려놓고 간 전쟁고아를 깨끗이 거두어가는 것인데, 말하자면 미국의 독지가 가정으로 입양시키는 사회사업이요 자선사업이다. 경순이는 정작 에미 떨어진 자기 자식은 내버려두고, 이 사업에 봉사를 하게 되어 언짢기도 하고 좋기도 하거니와, 그 사품에 미국 구경도 하고 운수 좋으면 거기에 떨어져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게도 될 것이요, 장래에는 영주권을 얻어서, 아주 그 땅에 뼈가 묻혀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조국을 배반하는 생각이지마는, 자기 개인의 생활을 위하여서는 입신의 웅지(雄志)를 품고 큰 희망에 타고 떠나려는 먼 길이다.
“알겠어, 그건 염려 말아요. 내 어떻게든지 길을 뚫어 해줄 테니.”
경순이는 좋아라 하고 그동안 무진 애를 써서 꾸민, 실상은 사이에 들어준 친구의 덕으로 꾸며다가 준 서류를 내어주면서, 한 때 위로의 말로서인지, 생글 웃으며 불쑥 이러한 소리를 한다.
“염려 말아요. 나만 가게 되면, 다 길이 있으니까. 한 1년 고생하구 나서, 당신두 오게 될 거구, 아이들 데려다가 같이 살게 마련해놀 거니까.”
춘식이는 귀가 번쩍하여 경순이를 힐끗 쳐다보다가 픽 웃었다. 경순이는 마주 생글하여 아주 자신만만한 듯이,
“왜? 거짓말 같은감!”
하고 정답게 얼러주면서, 곧 몸을 쏠리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흥! 말만이라두 고맙군! 사람이 살다가 별일두 다 있는 거야. 이러다간 죽어서까지 ‘우리 마누라’ 따라 천당 가려나 보다.”
춘식이는 손에 든 서류를 뒤적거리며 껄껄 웃었다. 한때 마음의 요기라도 되니 말만 들어도 좋았다.
“내 원체 처덕(妻德)이 있다긴 해!”
하고, 춘식이는 너무 좋아서, 어리보기 같은 소리를 하고는 입을 함박같이 벌리고 웃었다.
3
“아, 여기군! 얘, 쥔아저씨 계시지? 잠깐 나오시래라.”
꼭 닫힌 대문을 밀어 열치고, 좁다란 마당을 격해서 빤히 건너다보이는 부엌에다 대고 말을 거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지금 주무세요.”
부엌 속에서 꼬물거리던 어린 식모아이가 문턱을 나서며 대꾸를 한다.
“거, 누구냐?”
하는 안방에서 주인마님의 괄괄한 목소리와 함께 영창 미닫이가 와락 열렸다.손바닥만 한 뜰이라, 서로 코가 맞닿을 지경이다. 피차에 알 만한 얼굴들이다.
“엉, 어째 왔어?”
핀잔을 주듯 못마땅해하는 마님의 목소리에, 필례는 인사를 하려다 말고 말뚱히 쳐다만 보고 섰다. 사람이 찾아왔는데, 알아보았거나 말았거나 들어오라는 인사는 없이, 이런 말본새도 있더람? 하는 토라진 생각에, 그러지 않아도 여차직하면 한번 해낼 작정으로 온 터이라, 점점 매서운 눈이 되었다.
“응? 누구야?”
그러자 마침 건넌방에서 낮잠을 자던 춘식이가 소스라쳐 깨어 마루로 뛰어나온다. 그러나 춘식이 역시, 뜰 안으로 들어서는 필례를 보고 주춤하며, 마치 말문이 열리지 않아서 잠에 취한 눈으로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다. 너무나 의외의 진객이 달려든 데에 놀라서 정신 다 나간 모양이다.
“웬일이세요? 소문 없이, 돌아가신 줄 알았더니, 그래두 살아계시군.”
필례는 콧날을 째긋하며 냉소를 하였다. 네 따위도 사내 축에 드느냐고 깔보는 것 같아서, 춘식이는 그저 당황한 김에 픽 웃으며 그제야 올라오라고 권하였다. 그러나 그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영창 밑에 지키고 앉아서, 저희 하는 꼴만 노려보고 있던 어머니의 또 한마디 뒤틀어진 말참견이 나왔다. 그 때문에, 정세(情勢)는 다시 일전 (一轉)하였다.
“아니, 뉘 집 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따위로서 염체가, 약혼하구 결혼식하구, 남 하는 것 다 해보구, 누구를 못살게 굴려고 시집살이를 하겠다는 거 야?”
하고 머리가 허연 귀신 같은 마나님이 혀를 끌끌 차니까, 필례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눈을 춘식이에게서 돌려서, 한참 쏘아보다가 깔깔 웃어버리면서,
“누가 할 소린지 모르겠군요. 그러지 않아두 그렇게 하려 했더니, 당신 아드님을 하두 잘 낳아놔서, 속은 게 분해서라두 다방 레지루 한평생 늙히기루 마음을 고쳐먹었답니다.”
하고는 그 어머니더러 좀 보라는 듯이,
“어서 돈이나 내놔요.”
하고 춘식이를 마구 얼러대었다.
“잠깐 기다려, 같이 나가자구.”
춘식이는 어머니와 맞붙었다가는 무슨 창피한 꼴을 당할지 몰라서, 데리고 나가는 게 수라고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흥! 알구 보니 빚쟁이로구먼. 아니, 몸값 내라는 거야? 남의 자식 꼬여내다가 저 실컷 호강하구, 되레 돈을 달라구? 몸 축가게 해놓은 것만 해두, 돈은 제가 내야지. 썩 물러가. 요새 계집년들은 모두 이따위야?”
그동안을 못 참고 춘식이 어머니의 입에서는, 이런 더러운 소리가 볼이 메어 쏟아져 나오면서 눈을 부라린다. 필례는 어이가 없어 채 대거리할 말도 나오지를 않는데, 앞뒷집 여인들이 부리나케들 들어서는 바람에, 창피해서 얼른 피해 나와버렸다. 문밖에 나서니, 고기 붙고 고기 붙고 한 이 동리 풍경이겠지마는, 큰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구경난 듯이 어른 아이들이 우우 몰려들어 서서 나갈 길을 틔워주지를 않는다.
필례는 큰길로 빠져나오면서 뒤에서 춘식이가 따라오지나 않나? 하고 몇 번이고 돌아보았으나, 버스를 잡아탈 때까지 그림자도 눈에 띄지 않았다. 얼른 배송을 내자는 것인데, 이편에서 앞질러 피해 나왔으니 주저앉은 게로구나고 생각하였다. 어디 가서, 사기꾼, 더러운 데도 걸려들었구나 하고 필례는 올 수가 사나웠다고 가볍게 코웃음을 치고 말았다. 그러나 돈만은 받아내야 할 텐데 별도리가 없어 걱정이다.
뒤미처 허둥지둥 쫓아 나온 춘식이도, 벌써 앞차로 가버렸는지 필례가 눈에 안 띄기에 잘되었다고 생각하였다. 아주 안 만날 사람 아니요, 언제나 만나서 귀정을 지어야는 하겠지마는, 우선은 방도를 세우고 나서 말인데, 요 며칠 동안은 아이들이 둘이나 한꺼번에 홍역을 앓고, 정신살이 없다. 어젯밤도 신문사는 결근을 하고 두 아이를 데리고, 누이와 번갈아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한 끝이라, 잠이 부족해서 죽을 지경이다. 춘식이는 이왕 나선 길이니, 집에 들어가서 보채는 아이들을 데리고 어머니의 그 머리가 빠질 잔소리를 듣는 것보다는, 경순이에게나 가보겠다고 하여튼 버스에 올라탔다.
경순이의 여권은 그동안 2주일이나 분주히 돌아다니며 ‘운동’을 한 결과 곧 나오게 되었다. 다른 것과 달라서 전쟁고아를 데리고 가는 간호원이니, 속히 된 것이요 다시 뒤틀릴 리도 없다. 경순이는 떠날 채비를 차리기에 분주하지마는, 춘식이도 ‘남편’답게 생색을 보여주게 되어 좋고, 무슨 이민(移民)의 선발대나 보내는 듯싶어, 앞으로의 희망과 공상이 많다. 이즈막에 와서는 피차에 맞보는 것이 전보다도 더 반갑고 생기가 돌아서 좋다.
오늘은 낮이니 병원으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얀 간호원 옷에, 머리에는 테두리를 두른 흰 모자를 비딱이 젖혀 쓴 모양이, 아직 스물다섯밖에 안 되기는 하나, 누가 두 아이의 어머니랄까, 좀 더 앳되어 보인다. 언제나 병원으로 찾아오면, 어엿이 응접실 같은 데에 들어가 만나는 것도 아니요, 남의 눈에 띄는 것이 싫어서 사환의 방에 들어가서 불러내다가 만나는 것이다.
“아, 잘 오셨에요. 아이들이 어 때요?”
한참을 기다려서 나온 경순이는, 궁금하던 끝에 반색을 하면서도 아이들 걱정에 얼굴이 흐려졌다. 불시에 낮에 병원으로 찾아온 것을 보고는 불길한 예감도 들어섰다.
“응, 그만들 한데, 간밤엔 작은년이 보채서 밤을 꼬박 새웠어.”
그 말에 그만 경순이는 눈물이 쭈르륵 두 줄기 흘러내렸다. 씻지도 않으려 한다.
“나, 좀 가보겠어요. 지금 같이 가세요.”
전에 없이 맹연한 기세다. 두 자식이 한꺼번에 홍역을 한다는 말을 듣고 며칠을 두고 애절한 끝이다. 인제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곧 미국에를 떠날 테니 한번은 가보고 떠나겠다고 벼르던 터이라, 더구나 애틋한 정이 치미는 것이었다.
“글세, 그래두 좋기는 한데…….”
춘식이는 병구완에 지친 끝이라, 와서 도와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고 반색은 하면서도, 어머니의 의사를 몰라서 선뜻 대답을 못한다.
“왜요? 어머니가 뭐라실까 무서워서? 간호원 돈 주구 데려가는 셈만 치시라구려. 당장 자식들이 죽을 둥 살 둥 하는 판에 안 가보는 에미가 어디 있답디까? 당신 어머니는 자식 안 길러봤답디까? 당신은 그 어머니 뱃속에서 안 나오길 다행이지!”
하고 경순이는 마구 비꼬아가며 푸념이다.
“그래! 가요 가.”
춘식이도 더 망설일 것 없이 응낙을 하였다. 경순이는 당장으로 수유⁶를 받고 짐을 꾸려가지고 ‘남편’을 따라나섰다. 아이들이 완쾌할 때까지 며칠이고 묵어가며 간병을 할 작정이다.
자식을 보러 왔고, 간호원으로서 불려온 것이지, 남 된 시어머니 보러 왔던가? 하는 생각에, 경순이는 안방을 들여다보고도 그저 인사성으로 늙은이 대접하여, 여학생처럼 입은 봉한 채 고개만 꼬박하여 보였다. 마나님도 다른 때 같으면 기승을 떨고, 발을 못 들여놓는다고 큰소리를 냈으련마는, 잠깐 거들떠보기만 하고 아무 말이 없다. 앓는 아이들을 데리고 지친 끝이라, 어쨌든 당장
아쉬워서인지, 그렇게 옹추로 지내던 시뉘까지 “어서 오우” 하고 알은체를 한다. 미국이라면 천당같이 여기는 세상이라, 오라비한테 미국 간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지, 금세 대단한 출세나 한 듯싶어 저만치 치어다보는 것이요, 뒷길을 생각해서 그러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경순이는 큰 소리 안 내고, 조금만 해도 동리 아낙네들이 꼬여드는 이 동리에서 아무도 모르게, 동네가 다 알기로 잘되었다고 반겨들 하겠지마는, 어쨌든 다섯 해 동안 정이 들었던 이 집 건넌방에를 들어왔다. 나란히 누워 앓는 아이들을 보고는 눈물이 평펑 쏟아져서, 쌍둥이 에미처럼 둘을 한꺼번에 끌어올려 무르팍에 앉히고 번갈아가며 어루만지며 어느 때까지 눈물에 젖었었다. 어미의 잘못은 아니지마는, 1년 넘는 동안이나 못하였던 어미 노릇을 한몫에 하느라고 이날 밤부터, 밤새도록 두 아이를 차례차례 끼고 앉아서 졸아가며 땀을 내어 뉘고는 간신히 변소에나 빠져나갔다가 들어오곤 하니, 안방 식구와는 아랑곳도 없고, 안방에서는, 그동안 아이 병구완에 지쳐서 곤드라졌던지, 역시 미국 간다는 위엄에 기가 눌려서 그럴까마는, 찍소리가 없어 어제오늘은 집안이 조용하다.
아이들은 어미의 손길이 가서 그런지, 경순이가 온 지 이틀이 못 가서 벌써 큰 고비는 넘기고, 어른들도 제대로 잠을 자게 되었다.
“여보, 그만하니 인젠 내일은 가봐야 하겠어.”
경순이가 사흘 밤이나 자면서, 병원 일이 궁금하여 하는 말이었다.
“그럼 가봐야지. 이젠 여기 일은 염려 말어.”
경순이는 떨어져 가기가 싫건마는, 하는 수 없이, 이렇게 구슬픈 의논을 하면서 자고 난, 그 이튿날 신새벽이었다. 누가 문을 찌걱 하기에, 아이들 보살피느라고 일찍 일어난 춘식이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나가서 문을 열고 보니, ‘따리아’ 다방에서 늘 보던 낯이 익은 송사리 깡패가 둘이 앞장서고, 뒤에는 필례가 멀뚱히 쳐다보며 있다. 춘식이는 벌써 물계를 알아차릴 수가 있었다.
“아저씨, 좀 나오세요.”
한 놈이 핏대를 올리며 소리를 죽여 하는 말이 춘식 이에게 선뜩하였다.
“할 말 있거든 예서 하라구.”
춘식이는 이 자식들에게 끌려가서 얻어맞는구나 하는 겁도 났지마는, 뒤에 섰는 필례가 더 괘씸하여 흘겨보았다. 필례도 마주 쏘아보고 섰다. 네게 속은 보복이라는 것이요, 일전에 너 어머니한테 옥을 본 앙갚음이라는 뜻일 거라.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죽 분해야 계집 년이 신새벽부터 깡패를 몰아가지고 습격을 왔겠느냐는 가엾은 생각도 든다. 어쩌면 제 자신이, 이 송사리 깡패의 두
목인지도 모르겠고, 혹은 이놈들의 두목이 필례의 또 하나의 정부라서, 부하를 안동해 보냈는지도 모르기는 하지마는.
“이리 나와.”
어린 놈이 형사처럼 기세가 당당하다.
“나갈 게 아니라, 이리 들어와 이야기를 해보자. 대관절 너희들은 누구냐?”
춘식이는 필례의 앞에서 기가 죽은 꼴은 보이기 창피하여 한번 뽐내 보였다.
새벽잠이 없어서 벌써부터 깨어 앉았던 안방의 어머니는 유리 구멍으로 물계만 내다보다가 이때껏 목소리도 내지 않던 ‘원피스’를 입은 필례가 눈에 띄자, 그만 거기에 격해서,
“저년이, 얼굴이 꽹과리지, 여기를 낯 찾아먹자구, 또 왔어? 새벽까지 털러 다니는 도둑년놈들은 처음 보겠다.”
하고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마루 끝으로 나섰다.
‘저 마님이 성미 값을 하느라구, 또 일을 그르쳐놓는 게로군!’
건넌방에서 귀를 기울이고 앉았던 경순이는 혀를 찼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으나, 새벽 같이 달려든 거라든지 두둑년놈들이라고 개 꾸짖듯 하는 것을 보면 심상치가 않은 것 같은데 그놈들이 애아버지에게 손찌검이나 하지 않을까 애가 씐다.
“이 도둑년놈들아, 되레 누구더러 도둑년놈들이라는 거야?…….”
하는 소리와 함께 문밖에 섰던 두 젊은 아이가, 발을 맞추어 후닥닥 튀어들면서,
“이 늙은이, 나이 떠세하구, 말이라면 다하는 거야?”
하고 또 하나 젊은 애는 마루 앞으로 축대 위를 뛰어오르며, 춘식이 어머니한테 삿대질을 한다. 건넌방에서는 경순이가 참다못해 와락 나섰다. 설마 늙은이야 어쩌랴마는, 애아버지와 맞붙을까봐서다.
“이눔들, 너흰 에미 없니?”
삿대질이, 자기의 뺨을 건드리는 바람에, 이 늙은이는 기고만장을 하여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며 펄펄 뛴다.
“이눔들아, 그래두 어른은 알아봐야지? 아무리 무법천지기루 이눔들이 남의 집엘 신새벽에 내정돌입을 하구.”
하고 춘식이도 팔팔 뛰며 덤벼들었다.
“이 자식아, 딴소리 말구, 돈이나 어서 내놔.”
하고 젊은 애 하나가 보기 좋게 춘식이의 뺨을 철썩 갈겼다.
“에그 이게 무슨 짓이야.”
하고 경순이가 질겁을 하여 맨발로 뛰어내리면서 가로막았다.
“돈이 무슨 돈야? 언제 빚 줬던? 젊은 년이. 저 좋아서 남의 집 자식 꼬여내다가 실컷 놀구, 제 흥에 겨워서 돈푼 썼으면 썼지, 이 늙은 년더러 뭘 무리꾸럭⁷을 하라는 거야?”
춘식이 어머니는 또 길길이 뛴다. 벌써 앞뒷집에서는 아낙네들이 자리 속에서 빠져나온, 파발이 된 머리를 쓰다듬을 새도 없이 꾸역꾸역 모여든다. 별안간 벌어진 이 혼란 통에, 문밖에 섰던 필례는 그대로 달아나버릴까도 하였지마는, 일은, 버르집어놓고 혼자만 달아나서는 두 젊은 아이들에게 의리가 틀리겠기에 급한 대로 마당 한구석에 들어섰다. 실상은 동리가 창피스럽게 이런 큰소리를 내지 않자고 일찍 동하였던 것이었다.
“이것두 늙은이가 점잖지 않게 말이라구 하는 거야? 자식 역성두 분수가 있지, 결혼한다고 속여서 남의 집 처녀 버려놓구, 시집갈 때 쓰겠다구 죽어죽어 벌어논 돈까지 몽탕 뺏어간 이따위 결혼 사기꾼을 뭐 어쨌다구?…… 아무리 이런 에미에 이런 얌체 빠진 자식이겠지만, 여러분 들어보세요. 자식을 낳아서 50이 되두룩 그래 남창(男娼)으루 내놓아서 벌어들이게 했단 말이지, 아무리 세상이 이 꼴이기루 창피스러워서두 그런 말은 안 나올 거요…….”
아무리 애송이 깡패라도 전문이 그것이라, 말수도 좋게 척척 해내는 것이었다. 마당에 가뜩 들어선 그 ‘여러분’도 구경이나 하자는 것이지, 이 마님의 편을 들고 나설 생각도 없거니와 젊은 애들의 기세에 질려서 아무 소리도 없이, 변소 문께로 고개를 떨어뜨리고 섰던 필례와, 애아버지를 가로막고 버선도 안 신은 맨발로 울상이 되어서 떨고 섰던 경순이를 번갈아 볼 뿐이다.
“이 망할 자식들아! 네 말대루 아무리 세상이 이렇게 됐기루, 그것두 네 에미 애비한테서 배워서 말이라구 하는 게냐?”
춘식이 어머니는 말이 막혔으니, 아무 성검도 안 서는 소리를 꽥꽥 질렀다.
“아니, 그 돈이란 게 어떻게 된 셈 조건인지는 모르지만…….”
하고 경순이가 선뜻 나섰다. 날뛰던 젊은애들도 의외의 등장인물에 눈이 번하였지마는, 뜰에 가득한 여인들도 눈이 번쩍 띄어 가만히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축도 있다. 다만 변소 문 앞에 섰는 필례가 잠깐 흘겨보고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결국 이 여자에게 한 수 졌구나 하는 생각에 그까짓 돈이야 받든 말든 그대로 피해 가버리고 싶었으나, 그래도 끝장을 보리라고 가만히 서 있었다.’
“얼마예요? 내 드릴게! 어디루 가져오시라면 이따 갖다 드리죠.”
경순이는 속생각으로 설마 몇 백만 환이야 되랴. 고작 몇 십만 환쯤 될 거니, 얼른 내놓아 갚아버리고 춘식이의 이 창피를 면해주고 싶었다.
“돈이 누렁머리를 앓던? 가만 내버려둬. 그런 돈 있건 날 주렴.”
늙은이의 거벽에 젊은 애들에게 지기는 싫고, 또 역시 늙은이 욕심에 뉘 돈이든 간에 내어주기는 아깝다.
두 젊은 애들은, 의외의 젊은 여자가 나서서 선선히 가로맡아주는 것이 시원스럽고, 앞에 섰는 밉지 않은 젊은 여자에게 호기심도 없지 않았지마는, 원체 춘식이가 미워서 시달려주자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고, 다만 직업적으로 돈 받아주고 구문B만 먹었으면 그만이니, 이편에서도 선선히 나서서 생색이나 내어주고 싶다.
“그럼 긴말할 것 없이, ‘따리아’ 다방으루 30만 환만 가져오세요. 이자를 따지면 좀더 우수리가 있다지만…….”
저희끼리 의논도 할 것 없이 한 아이가 도맡아서 타협을 지었다. 오후 5시까지 가져가기로 약속이 되고 보니, 구경꾼들에게는 헤식은 싸움판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경순이에 대한 동리 아낙네들의 뒷공론과 칭찬은 사흘 전에 아이들 병구완하러 왔을 때보다도 대단하였다.
경순이가 큰마음 먹고 선선히 내놓겠다는 30만 환은, 제가 무슨 여투어둔 천량⁹이 있을까? 이 집에서 나가서 1년 남짓 두고 간호원 생활을 하면서 벌어 모은 것이다. 숙식은 병원 속에서 하는 것이요, 월급 2만 환인데 그 외에 환자에게 물건으로 선사가 들어오는 것은 말고라도, 큰 자국에서는 환자의 부모가 돈봉투깨나 대어미는 것이 있어서, 별로 씀씀이가 헤프지 않은 경순이는 그것을 알뜰히 모으는 것도 한 재미였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 의외로 미국에를 가게 되니까, 달러로 바꾸어가지고 가려던 것이지마는, 일이 급하니 아까운 생각 없이 내어놓겠다는 것이요, 또 인제야 안 일이지마는 벌써 눈치가 그 계집년 때문인 모양이니 활수하게 써도 좋다는 것이다. 이삼십만 환쯤 미국에 가지고 간다고 오라버니더러 달래도 군말없이 줄 것이요, 빚을 내어 쓰고 가서 나중에 갚기로 그만 아니냐는 배포 유한 생각이다.
한 풍파 치르고 나서, 춘식이는 울화가 치미는 것을 참고 방에 들어와 앉아서도, 경순이를 쳐다보기가 낯이 뜨뜻하고 미안하여, 속에서 볶이는 분을 내색해 보이지 않으려 하였다.
“염려 말아요, 돈 걱정은. 그깟 돈 아무려면 못 돌릴까. 미국에 가지구 가려던 것이지만, 한 푼 없이 가기루 내 한 몸뚱이 굶을라구!”
경순이가 가려고 옷을 갈아입으면서, 춘식이를 위로 삼아 이런 소리를 하는 것도 고맙고 가슴에 못을 박는 것 같았다.
“그눔의 ‘섰다’ 만 아니더라면…….”
하고 또 후회도 하였다.
낮에 아이들이 쌕쌕 자는 틈을 타서 경순이는 도망꾼이 빠져나가는 듯하면서도 눈물이 글썽하였다. 춘식 이는 그것도 보기에 안 되어서 같이 눈물이 났다. 춘식이가 경순이를 버스 타는 데까지 데려다주고 들어오니까, 그동안 이틀 사흘 에미가 와서 보아줄 때에는 앓는 아이를 들여다보지도 않던 어머니가, 아들의 방으로 건너와서, 아이들은 젖혀놓고,
“얘, 그 애가 미국엘 가면 언제 온다던?”
하고 매우 긴한 듯이 묻는다.
“모르죠, 거기 가서 간호학교에를 들어가게 되면 1년 후에 졸업한다니까요.”
“졸업 하구서 온다던?”
“그것두 모르죠. 저 살기 편하면 무얼 바라구 애를 써 오겠습니까.”
하고 아들은 거의 코웃음이 나올 뻔하였다. 어머니의 그 묻는 뜻이 뻔히 짐작되니 반감만 새로웠다.
“얘, 거기서 눌러 있게 된다면, 우리두 데려가라지!”
어머니는 건망증이 있어 모든 것을 잊어버렸는지, 염치없는 소리도 하는구나 하고 아들은 외면을 하였다.
그러면서도 화딱지가 나서 늙은 어머니의 속을 태워주자는 것은 아니지마는 한마디 곁들였다.
“어쩌면 저의 식구는 불러갈 듯한데, 그렇게 되면 어머니 생활비는 저 희가 버는 대루 보내드리죠.”
마나님은 눈만 껌벅껌벅하고 앉았다.
-끝-
2016년 6월 27일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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