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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2부 5
그는 그다지 젊지 않은, 몹시 거드름을 빼는 거만한 신사로서 조심스럽고 까다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방으로 들어와 노골적으로 불쾌한 놀라움을 보이면서 주위를 둘러보고는 '아니! 이거 내가 어딜 들어왔지?'하고 묻기라도 하는 듯한 표정으로 문간에서 발을 멈추었다. 그는 자기 눈을 의심하듯, 일종의 놀라움과 모욕까지 느낀 눈으로 천장이 낮고 답답한 라스콜니코프의 '선실'을 둘러보았다. 그는 여전히 놀란 표정으로, 옷도 안 입고 흐트러진 머리에 얼굴도 씻지 않은 채 더럽고 초라한 소파 위에 누워서 역시 뚫어지게 이쪽을 쏘아보고 있는 라스콜니코프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는 여전히 느릿느릿한 동작으로, 수염도 안 깎고 머리도 빗지 않은 라주미힌의 초라한 모습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한편 라주미힌은 라주미힌대로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도 하지 않고, 너는 누구냐는 듯이 오만하게 그의 눈을 정통으로 쏘아보았다. 긴장된 침묵이 1분쯤 계속되었으나, 이윽고 예상한 대로 이 장면에 조그마한 변화가 일어났다. 여기서 감도는 몇가지 날카로운 징후로 그 신사는 이 '선실' 안에서는 과장된 엄숙한 태도를 취해보았자 아무 효과도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약간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그렇다고 완전히 누그러진 것은 아니지만 공손히 조시모프를 향하여 한 마디 한 마디 똑똑히 말을 끊으며 묻기 시작했다.
"대학생인, 아니 전에 대학생이었던 로지온 로마느이치 라스콜리코프는 여기 계십니까?"
조시모프는 대답을 하려는 듯 천천히 몸을 움직였으나 이때 전혀 상대하지도 않은 라주미힌이 불쑥 그를 앞질러 나섰다.
"저기 소파에 누워 있어요! 그런데 무슨 용무죠?"
이 허물없이 던져진 '그런데 무슨 용무죠?'라는 말이 의젓한 신사를 당황케 했다. 그는 하마터면 라주미힌에게로 돌아서려다 자제하고는, 다시 얼른 조시모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 사람이 라스콜니코프입니다." 조시모프는 병자를 턱으로 가리키며 입속으로 우물거렸다. 그리고 그는 하품을 했으나, 그때 너무나 크게 입을 벌렸기 때문에 한참 동안 그대로 입을 벌린 채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조끼 주머니로 손을 넣어 굉장히 큰 금시계를 꺼내서 뚜껑을 열어 시간을 보고는 다시 천천히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당사자인 라스콜니코프는 시종 잠자코 드러누운 채 아무런 생각도 없이 들어온 신사를 바라보았다. 방금 벽지의 흥미진진한 꽃무늬에서 돌려진 그의 얼굴은 처참할만큼 창백해서, 이제 막 괴로운 수술을 마쳤거나 또는 고문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한 무서운 고통의 빛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들어온 신사는 차차 그의 주의를 불러일으켜, 그것이 이윽고 의혹이 되고 불신이 되고, 드디어는 공포로까지 변해갔다. 조시모프가 그를 가리키며 '저 사람이 라스콜니코프입니다'하고 말했을 때, 그는 벌떡 일어나 침대 위에 앉았다. 그러고는 마치 덤벼들기라도 할 듯이, 그러나 띄엄띄엄 약한 목소리로 말했따.
"그렇소! 내가 라스콜니코프요! 무슨 일이시죠?"
손님은 유심히 그를 바라보며 위엄 있는 어조로 말했다. "나는 표트르 페트로비치 루쥔입니다. 당신도 내 이름은 이미 생소하지 않으실줄 믿습니다만."
그러나 전혀 다른 것을 기대하고 있던 라스콜니코프는 생각에 잠긴 듯한 흐릇한 눈초리로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볼 뿐, 그런 이름은 금시초문이란 듯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요? 그럼 당신은 아직까지 아무 기별도 받지 않으셨습니까?" 다소 언짢은 태도로 루쥔은 물었다.
라스콜니코프는 대답 대신에 천천히 베개를 베고는 두 손을 머리 밑에 괴고 천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루쥔의 얼굴에 번민의 빛이 감돌았다. 조시모프와 라주미힌이 점점 더 호기심에 끌려 그의 모습을 훑어보기 시작했으므로, 그도 마침내 어색해진 모양이었다.
"나는 그렇게 믿고 또 기대하고 있었는데요." 그는 입속으로 우물우물 말했다. "벌써 열흘 전에, 아니 이럭저럭 두 주일은 될 겁니다. 편지를 낸 것이......"
"여보시오, 그렇게 문간에만 서 있을 건 없지 않소?" 라주미힌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할 얘기가 있다면 앉으시는 게 어때요! 거긴 나스타시야와 둘이 좁을 겁니다. 나스타슈쉬카, 좀 비켜드려요! 어서 이리로, 자, 여기 의자가 있습니다. 이리 들어와 앉으세요!"
그는 자기 의자를 탁자에서 조금 밀어내어 탁자와 자기 무릎 사이에 약간의 빈자리를 만들고, 좀 거북스러운 자세로 손님이 이 틈바구니에 끼어들기를 기다렸다. 너무나 적절한 기회를 포착했기 때문에 손님도 전혀 거절할 수가 없어서, 허둥지둥 비틀거리며 그 빈틈에 와서 앉고는 미심쩍은 눈으로 라주미힌을 바라보았다.
"뭐, 조금도 난처해하실 건 없습니다." 라주미힌은 내뱉는 듯이 말했다. "로쟈는 벌써 닷새째나 병으로 누워 있어요. 사흘 동안은 헛소리만 해ㅉ지요. 그러나 이젠 겨우 정신이 들고 식욕도 나서 잘 먹습니다. 여기 이 사람은 의사인데 지금 막 진찰을 마쳤을 뿐입니다. 나는 로쟈의 친구로 역시 전직 대학생, 지금은 보시다시피 환자를 간호하고 있죠. 그러니 우리는 염려마시고 말씀을 하세요, 무슨 일로 오셨는지."
"고맙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기 앉아 얘기를 하면 환자에게 지장이 없을까요?"하고 루쥔은 조시모프에게 말했다.
"아, 아닙니다"하고 조시모프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도리어 기분 전환이 될지 모릅니다"하며 그는 또 하품을 했다.
"그렇고말고, 벌써 아침부터 죽 제정신인걸!"하고 라주미힌이 말을 계속했다. 그의 친절에는 꾸밈이 없는 순박함이 엿보였으므로 루쥔은 잠깐 생각하고 차차 원기를 내기 시작했다. 이 거지 차림의 뻔뻔스러운 사내가 집싸게 대학생이라고 자기소개를 한 것이 어느정도 도움을 주었는지 모른다.
"당신 어머니께서는...."하고 루쥔은 말을 시작했다.
"흠!"하고 라주미힌이 큰 소리를 냈다. 루쥔은 의아스러운 듯이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괜찮아요. 나는 그저, 어서 계속하세요......"
루쥔은 어깨를 한 번 움츠렸다.
"당신 어머니께서는 내가 그곳에 있을 때 당신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여기 온 후에도 일부러 며칠 동안 방문을 늦추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에게 알려진 후에 찾아뵙는 것이 좋으리라고 생각해서지요. 그런데 지금 찾아뵙고 보니 뜻밖에도....."
"알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갑자기 라스콜니코프는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을 드러내며 입을 열었다. "그럼 당신이군요. 당신이 약혼자군요? 알고 있어요!.....자, 이젠 됐어요!"
루쥔은 몹시 화가 난 모양이었으나 잠자코 있었다. 그는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재빨리 알아보려고 애썼다. 1분쯤 침묵이 흘렀다.
한편 대답할 때 잠깐 그에게로 몸을 돌렸던 라스콜니코프는 다시 뭔가 특별한 호기심 빛을 띠면서 뚫어지게 상대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아까는 볼 틈이 없었거나, 그렇잖으면 뭔가 놀랄 만한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그것을 위해 일부러 베개에서 몸을 일으켰을 정도다. 사실 루쥔의 풍채에는 전체로 보아 뭔가 특별히 사람의 눈을 끄는 데가 있었다. 말하자면 방금 무례하게 던져진 '약혼자'라는 명칭을 뒷받침할 만한 것이었다. 우선 첫째로 루쥔이 수도에 머무는 며칠간을 열심히 이용하여, 신부를 맞이할 날을 눈앞에 두고 자기 몸을 가꾸고 아름답게 하려고 애쓴 것이 금방 눈에 띄었다. 아니, 지나치게 눈에 띌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것은 조금도 나무랄 필요가 없는, 얼마든지 허용될 수 있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자기는 전보다 아름다워졌다는 흐믓한 변화를 염두에 둔 데서 오는 자만심조차 이런 경우엔 허용될 일인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루쥔은 지금 약혼자 위치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목작은 모두가 새로 만든 훌륭한 것뿐이었다. 단지 흠을 든다면, 모두가 지나치게 새것이어서 쉽사리 그의 목적을 폭로하고 있다는 정도일 것이다. 둥근 모야으이 멋진 새 모자 역시 그 목적을 증명하고 있었다. 루쥔은 그 모자를 지나칠 정도로 소중히 다루면서 아주 조심스럽게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진짜 제네바제인 라일락 빛깔 멋진 장갑도 손에 끼려고는 하지 않고 그저 장식인 양 들고 있었다. 이것 하나만을 보아도 역시 그 목적이 증명되었다. 루쥔의 옷차림은 밝고 젊은 빛깔이 지배적이었다. 그가 입고 있는 것은 엷은 갈색 여름 윗옷과 옆ㅂ은 빛깔 바지, 같은 빛 조끼와 새 셔츠, 그리고 장미 빛깔 줄무늬가 든 거벼운 넥타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행한 점은 그것이 모두 루쥔의 얼굴에 잘 어울린다는 것이었다. 그의 얼굴은 아직 싱싱하고 아름답다고 해도 좋을 정도여서, 마흔다섯이라는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새까만 구레나룻은 마치 커틀릿 두 개처럼 얼굴 양쪽에 기분 좋은 그늘을 던져주고, 매끄럽게 면도를 한 반지르르한 아래턱 근처에서 한층 더 아름답게 검은빛을 더해주었다. 흰머리가 약간 섞인 머리털도 이발사의 손길로 깨끗이 빗겨지고 지지기까지 했지만, 그 때문에 얼빠진 듯 보이거나 우스꽝스럽게 보이지는 않았다. 지진 머리는 흔히 결혼식에 나가는 독일인 같은 인상을 주는 법이다. 그래서 만약 이 아름답고 훌륭한 용모 가운데 뭔가 불쾌한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다른 데서 기인하는 것이었다. 루쥔의 모습을 무례할 정도로 관찰하고 난 라스콜니코프는 짓궂은 조소를 띠고 다시 베개 위에 누워 전과 같이 천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루쥔은 꾹 참았다. 그리고 이러한 괴이한 태도에 어느 시기까지는 신경을 쓰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당신이 이런 상태에 있는 것을 매우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는 침묵을 깨뜨리려고 애쓰면서 다시 입을 열었다. "편찮으시다는 것을 알았더라면 좀 더 빨리 찾아뵈었을 겁니다. 그러나 너무 바빠서....게다가 변호 사무로 대법원에 아주 중대한 사건을 맡고 있기 때문에, 당신도 잘 아실 그 여러 가지 심려에 대해서는 새삼스레 여기서 말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래서 자당과 매씨께서 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중입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약간 몸을 움직이며 뭔가 말하려 했다. 그 얼굴엔 다소 흥분의 빛이 감돌았다. 루쥔은 말을 멈추고 잠시 기다렸으나 아무 말도 없었기 때문에 다시 말을 이었다.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요. 두 분을 위해서 숙소를 하나 정해놓았습니다......"
"어디다?"하고 약한 목소리로 라스콜니코프는 물었다.
"여기서 아주 가깝습니다. 바칼레예프네 집인데......."
"아, 그건 보즈네센스키 거리야." 라주미힌이 말을 가로챘다. "셋방이 전문인 2층집이지. 유신이라는 상인이 경영하고 있어. 나도 더러 가본 일이 있지."
"예, 그래요. 셋방입니다......."
"그야말로 지독한 집이야. 더럽고, 냄새나고, 더구나 수상한 집이지. 때때로 이상한 사건이 벌어지거든. 가지각색의 사람들이 살고 있지. 하긴 이렇게 말하는 나도 추잡한 사건 때문에 드나들긴 했지만 말이야. 아무튼 싸긴 싸더군."
"나는 이곳 사정에 어두워서, 물론 그렇게까지 자세히 조사해보진 못했습니다만." 루쥔은 정중히 대꾸했다. "그렇지만 아주 깨끗한 방을 두 개 잡아두었습니다. 아주 잠시 동안일 테니까요....그리고 나는 우리가 살 정말 집, 우리가 앞으로 살 집도 봐놓았습니다"하고 그는 라스콜니코프를 보았다. "그런데 그 집은 지금 수리중이라서, 나도 그동안만은 셋방에서 고생하고 있지요. 여기서 아주 가까운 리페베흐젤 부인의 집입니다. 나의 젊은 친구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챠트니코프의 집에 방을 빌리고 있어요. 바칼레예프의 집도 실은 그가 가르쳐주어서....."
"레베챠트니코프?" 무엇인가 기억을 더듬기라도 하는 듯이 라스콜니코프는 천천히 말했다.
"그래요, 안드레이 세묘느이치 레베쟈트니코프, 모 성(省)에 근무하는 관리요....아십니까?"
"예....아니...."하고 라스콜니코프는 대답했다.
"실례했습니다. 나는 당신이 질문하기에 아시는 줄 알고 그만. 나는 언젠가 그 사내의 후견인 노릇을 한 일이 있어요...아주 사랑스러운 청년이지요....연구열도 있고 나는 대체로 젊은 사람과 접촉하기를 좋아합니다. 젊은 사람들을 통해 새로운 사상을 알 수 있거든요." 루쥔은 어떤 기대를 품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건 어떤 점에서죠?"하고 라주미힌이 물었다.
"가장 진지한, 이를테면 가장 본질적인 점이라고나 할까요." 루쥔은 질문을 받은 것이 사뭇 기쁜 듯이 얼른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페테르부르크에 온 것은 10년 만입니다. 여러 가지 새로운 경향과 개혁이라든가 신사상이라든가 하는 것은 시골에 살고 있는 우리도 접촉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확실히 보려면, 모든 것을 속속들이 보려면 아무래도 페테르부르크에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내 의견은 이렇습니다. 많은 것을 인식하고 배우려면 무엇보다도 우리나라의 젊은 세대를 관찰하는 것이 제일이라고요. 그래서 사실 나는 매우 기뻤던 겁니다......"
"무엇을요?"
"당신의 질문은 범위가 넓군요. 아니면 내 생각이 잘못되었는지도 모르지만, 젊은 사람에게는 좀 더 명석한 견해, 말하자면 보다 많은 비판 정신이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보다 많은 실행 능력......."
"그건 사실입니다." 조시모프가 중얼거렸다.
"거짓말 말아, 실행 능력을 갖기란 힘든 거야, 하늘에서 거저 떨어지는 건 아니니까. 그런데 우리는 일체의 활동에서 물러선 후 이럭저럭 200년이 되거든....하긴 여러 가지 사상은 여기저기서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르죠"하고 라주미힌은 루쥔을 보고 말했다. "그러나 유치하긴 하지만 선(善)에 대한 염원도 있고, 사기꾼 같은 무리가 득실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정직이란 미덕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실행 능력만은 역시 없어요! 실행능력이 그렇게 흔한 건 아닙니다."
"당신의 의견에는 아무래도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자못 즐거운 듯이 루쥔은 대꾸했다. "물론 일시적인 장난에서 나온 경박한 열중도 있고, 잘못도 있겠지요. 그러나 너그럽게 봐줄 필요도 있습니다. 열중한다는 것은 일에 대한 열의와, 일을 둘러싸고 있는 외적 상황의 부정을 증명하는 것이니까요. 만약 일이 아직 조금밖에 되어 있지 않다면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어느 정도 사업은 이루어졌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라고 봅니다. 우선 새롭고도 유익한 사상이 보급되고 있고, 이전의 공상적인 로멘틱한 것 대신에 여러가지 새롭고도 유익한 저술이 보급되고 있습니다. 문학은 더욱 성숙한 음영을 띠게 되었고, 많은 유해한 편견은 제거되고 조소를 받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완전히 과거와 절연되어버린 겁니다. 이것은 내 생각으로 이미 하나의 사업입니다."
"외고 있군! 자기소개를 하고 있어." 갑자기 라스콜니코프가 말했다.
"뭐라고요?" 루쥔은 제대로 듣지 못했기 때문에 반문했으나 대답은 없었다.
"모두 지당한 말씀입니다." 조시모프가 재빨리 말했다.
"안 그렇습니까?" 유쾌한 듯이 루쥔은 조시모프를 바라보고 말을 이었다. "당신도 동의하시겠지요." 이번에는 라주미힌을 보고 이렇게 말했으나 그 어조에는 벌써 다소나마 득의양양한 우월감이 엿보여서, 이제라도 '여보, 젊은이'라고 덧붙일 것 같은 기세였다. "이 번영, 또는 요새 말로 해서 이 진보, 더구나 과학과 경제상의 진보의 이름으로 말이오......"
"평범한 설이군요!"
"천만에, 평범하다니요! 예를 들면 오늘까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해왔지만, 만약 내가 덮어 놓고 남을 사랑했다면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루쥔은 필요 이상으로 서두르며 말을 이었다. "그 결과는, 내가 외투를 두 개로 찢어 이웃 사람과 나누어 입음으로써 결국은 두 사람 다 반씩 벌거벗게 되는 겁니다. 즉 러시아 속담에 있듯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자는 한 마리의 토끼도 얻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과학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선 자기 하나만을 사랑하라,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개인적 이익에 기촐르 두고 있으니까. 자기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면 충분히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있고, 그 외투도 무사히 남으리라는 겁니다. 더구나 경제상의 진리는 이에 덧붙여서 이 세상에 정돈된 개인 사업, 즉 완전한 외투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욱 견고한 사회적 기초가 구축되고, 동시에 일반의 복지도 더욱더 정비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기 한 사람을 위해 이익을 취득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그것으로 만인을 위해 이익을 획득해주게 되는 것이고, 또 이웃 사람도 찢어진 외투보다는 다소나마 더 나은 것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단순한 개인적 자선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진보에 의한 것이니까요. 이 사상은 지극히 단순하지만, 불행히도 일시의 감격성과 공상벽에 방해되어 너무도 오랫동안 우리를 찾아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에는 뭐 그다지 큰 기지가 필요하지도 않을 듯합니다만......"
"실례지만 나도 역시 그다지 기지가 풍부한 편은 못 되니까요." 날카롭게 라주미힌이 가로 챘다. "이젠 그만두기로 합시다. 사실 나는 목적이 있어 말을 꺼냈지만, 그런 자기 위안의 지루하고 진부한 얘기, 판에 박은 듯이 똑같은 말만 지껄여대는 그런 얘기는 벌써 3년 동안 신물이 나도록 들어왔으니까요. 이젠 내 입으로 말하는 건 고사하고, 내가 있는 데서 남이 말하더라도 얼굴이 뜨거워질 지경입니다. 당신은 물론 한시바삐 자기의 지식을 피력하고 싶으셨을 텐데, 그건 나도 이해가 가서 당신을 나무라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나는 지금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좀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왜냐하면, 아시겠습니까, 요즈음은 갖가지 사업가들이 그 사회사업이라는 것에 얽혀들어 손에 닿는 대로 모조리 자기 이득을 위해 상처를 입히는 바람에 죄다 파괴되고 말았단 말이오. 자, 이젠 그만해두십시오!"
"그렇다면"하고 매우 위엄 있게 몸을 뒤로 젖히면서 루쥔은 말하려고 했다. "당신의 그 무례한 말투로 보아 나도....그런 족속이라고 말하고 싶으신 거군요."
"아니, 천만의 말씀을, 내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겠어요!....아무튼 그만두십시다!" 라주미힌은 딱 잘라 이렇게 말하고는 아까 하던 얘기를 계속하려고 조시모프에게로 홱 몸을 돌렸다.
루쥔도 이 변명을 곧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총명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도 2분 후에는 돌아가려고 결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초대면의 인사를 나눴습니다만"하고 그는 라스콜니코프에게 말을 건넸다. "완쾌하신 후에는, 아시다시피 우리는 보통 관계가 아니므로 더욱더 깊이 사귀게 되기를 기대하겠습니다....각별히 몸조심하시기를 빌겠습니다."
라스콜니코프는 얼굴도 돌리지 않았다. 루쥔은 의자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전당 잡히러 갔던 놈이 죽인게 틀림없어!"
자신있게 조시모프가 말했다.
"그게 틀림없어!"하고 라주미힌도 맞장구를 쳤다. "포르피리는 아직 자기 생각을 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당 잡힌 사람들을 조사하고 있어......"
"전당 잡힌 사람을 조사한다고?" 라스콜니코프가 큰 소리로 물었다.
"그래, 그건 왜 묻나?"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어디서 그 사람들을 알아냈지?" 조시모프가 물었다.
"코흐가 가르쳐준 것도 있고, 물건 싼 종이에 이름이 적힌 것도 있고, 소문을 듣고 제 발로 찾아온 자도 있어....."
"아무튼 교활하기 짝이 없는, 노련한 악당임에 틀림없어. 대답해, 정말 대담한 짓이야!"
"그런데 그게 그렇지가 않거든!"라주미힌이 가로막았다. "바로 그 점이 모든 사람을 어리둥절하게 한단 말이야. 내가 보기엔...교묘하지도 않고, 상습적인 것도 아니고, 분명히 처음 한 짓이야! 빈틈없이 계획된 범행, 교활한 악당의 짓이라기엔 어딘지 애매한 점이 있거든. 그러나 처음 하는 놈의 짓이라고 생각한다면, 단지 우연이란 것이 놈을 불행해서 구해냈다고 볼 수 있지. 우연이란 무슨 짓인들 못하겠나? 생각배보게, 놈은 어떤 방해가 있으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거든! 더구나 그 솜씨를 보란 말이야. 겨우 10루블이나 20루블쯤 밖에 안 되는 물건을 꺼내어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노파의 트렁크에서 누더기를 뒤졌을 뿐이야. 그런데 옷장 윗서랍의 상자 속에는 증권 같은 것을 빼고도 현금만 1천 500루블이나 있었단 말이야! 그러니까 제대로 훔치지도 못하고 그저 사람들만 죽인 거야! 처음 한 짓이야, 처음 한 짓이 틀림없어! 그래서 정신이 나갔던 거지! 계획적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라, 우연 때문에 도망칠 수 있었던 거야!"
"듣자 하니 요새 일어난, 관리 미망인인 노파 살해 사건 얘기 같군요." 루쥔은 조시모프를 보면서 말했다. 이미 모자와 장갑을 들고 서 있었으나, 돌아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그럴듯한 말을 한마디 남기고 가고 싶었던 것이다. 보기에 그는 남에게 유리한 인상을 주려고 애쓰는 바람에 허영이 이성을 압도한 모양이었다.
"그렇습니다. 당신도 들으셨습니까?"
"그야 물론, 가까운 이웃에서 일어난 일이니까요....."
"자세한 것을 아세요?"
"자세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는 다른 사정, 즉 커다란 문제 하나가 내 흥미를 끌고 있습니다. 최근 5년간 하류사회에 범죄가 증가했다는 것이며, 또한 도처에서 일어나는 강도 사건이나 방화 사건에 대해서도 지금 새삼스레 말할 것도 없겠습니다만, 내가 무엇보다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상류 사회에서도 그와 평행적으로 범죄가 증가해간다는 사실입니다. 한쪽에서는 전직 대학생이 큰 길에서 우편 마차를 습격했다는 소문이 있는가 하면, 또 한쪽에서는 사회적 지위로 보아도 1급에 속하는 사람들이 위조지폐를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는 최근에 발행된 복권부 채권을 위조한 일당이 검거되었는데, 그 주모자 가운데 세계사 강사가 한 사람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금전상의 수상한 이유로 외국 주재의 서기관이 살해되었습니다....따라서 만약 이 고리대금업자 노파가 어떤 상류사회 출신의 인간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면, 농민은 귀금속 같은 걸 전당 잡히지 않으니 말이죠, 우리 사회 문화적 계급의 이러한 부패와 타락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겠습니까?"
"경제상의 변화가 많기 때문일 테죠...."하고 조시모프가 대꾸했다.
"어떻게 설명해야 좋겠느냐고요?" 하고 라주미힌이 물고 늘어졌다. "그건 바로 너무나 뿌리 깊은 비실제적 생활 태도 때문이라고 하면 설명이되겠지요."
"그건 또 무슨 뜻입니까?"
"다름 아니라 당신이 말한 그 모스크바의 강사인가 뭔가 하는 사람이 한 말입니다. 왜 채권을 위조했느냐는 신문에 대해 '모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부자들이 됐으니까, 나도 손쉽게 돈을 벌고 싶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더군요. 정확한 말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요는 돈이나 힘을 들이지 않고 빨리 벌고 싶단 말이죠! 모두 남이 마련해준 것으로 살고, 남의 도움을 기대하며 남이 씹어놓은 것을 먹는 게 습관이 돼버렸거든. 그런데 지금 위대한 종이 울려 퍼지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그 정체를 드러내버렸단 말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도덕이란 게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이른바 계율이란 것도......."
"대체 당신은 뭘 그러헥 근심하고 있습니까?" 뜻밖에도 라스콜니코프가 끼어들었다.
"당신의 이론대로 되어버렸는데!"
"무엇이 내 이론대로 되었단 말이오?"
"당신이 아까 주장한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사람을 죽여도 좋다는 결론이 나오거든요......"
"당치도 않소!"하고 루쥔은 외쳤다.
"아니야, 그건 그렇지가 않아!"하고 조시모프도 한마디 했다.
라스콜니코프는 윗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창백한 얼굴로 드러누운 채 괴로운 듯이 숨을 쉬고 있었다.
"무슨 일에나 한도라는 게 있는 법입니다." 루쥔은 거만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경제상의 의견이 살인의 권유는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만약에....."
"그건 그렇고, 그 말은 사실이오?" 갑자기 라스콜니코프는 분노에 떠는 목소리로 상대방을 가로막았다. 그 목소리에는 어떤 모욕의 기쁨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당신이 당신의 약혼녀에게...더구나 그녀에게서 승낙의 대답을 받은 바로 그때....그 애가 가난한 것이...무엇보다도 기쁘다고 말한 것은 사실입니까....가난뱅이의 딸을 아내로 삼는 게 낫다. 결혼 후에도 권위를 세우기 편리하고....자기 은혜를 내세워 꼼작 못하게 할 수 있다고 한 것은?"
"무슨 말을 하시는 거요!" 루쥔은 화가 난 나머지 적잖이 당황하면서 악의를 품은 초조한 목소리로 외쳤다. "당신이 그렇게까지 곡해를 하시다니! 실례지만 나도 말을 좀 해야겠습니다. 당신 귀에 들어온, 아니 어쩌면 억지로 들려주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지만, 그 소문은 티끌만큼도 확실한 근거가 없습니다....나는....누구의 짓인지....한마디로 말해서.....그 화살은, 요컨대 당신의 어머니께서...그러지 않아도 그분은, 물론 더없이 훌륭한 기질을 갖추고 계시긴 하지만 사고방식이 다소 흥분하기 쉬운, 로멘틱한 음영을 지니신....분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분이 그런 왜곡된 공상으로 이 일을 해석하시거나 생각하실 줄은 천만뜻밖입니다...그렇다면....결국....결국...."
"알겠소?" 베개 위에 몸을 일으키고 찌르는 듯 번쩍이는 눈으로 상대방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라스콜니코프는 이렇게 외쳤다. "알겠나냐 말이오!"
"뭘요?" 루쥔은 말을 끊고 모욕당한 듯한, 도전하는 듯한 얼굴로 기다렸다. 몇 초 동안 침묵이 흘렀다.
"만일에 다시 한 번...단 한마디라도 ....우리 어머니 얘길 입 밖에 내면....나는 당신을 층계 밑으로 거꾸로 내동댕이치겠단 말이오!"
"아니, 자네 왜 그래!" 라주미힌이 외쳤다.
'아아, 그러시군요!" 루쥔은 파랗게 질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은 말입니다." 그는 열심히 자신을 억제하면서 천천히 사이를 두고 말했으나, 그래도 숨은 헐떡였다. "나는 벌써 아까부터, 이 방에 발을 들여놓는 그 순간부터 당신이 내게 적의를 품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어요.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어서 일부러 이렇게 앉아 있었던 겁니다. 환자이기도 하고 친척이기도 하니까 웬만한 것은 참으려고 했지만...이렇게 된 이상....당신에 대해서는....절대로....절대로...."
"나는 환자가 아니야!"라스콜니코프는 외쳤다.
"그렇다면 더욱.......
"꺼지지 못해!"
그러나 벌써 루쥔은 하던 말도 다 못한 채 탁자와 의자 사이의 좁은 틈을 빠져 밖으로 나가는 중이었다. 라주미힌도 이번엔 길을 비키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라주미힌도 이번엔 길을 비키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쥔은 아무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아까부터 환자를 가만 놔두라고 눈짓을 하던 조시모프에게조차 인사도 없이 조심스레 어깨까지 모자를 추겨들면서 밖으로 나가버렸다. 문을 나갈 때는 약간 허리를 구혔는데, 그 허리를 굽히는 모습까지도 무서운 모욕을 짊어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수 있나, 그럴 수 있어?” 라주미힌은 고개를 저으면서 얼빠진듯이 말했다.
“내버려둬, 모두 나를 내버려두란 말이야!”
라스콜니코프는 미친 듯이 소리쳤다. “정말 언제까지 나를 못살게 굴 작정들이야? 이 악당들같으니! 나는 너희 같은 건 무서지 않아! 어서 나가줘! 난 혼자 있고 싶단 말이야, 혼자, 혼자, 혼자 있고 싶어!”
“가세!” 조시모프가 라주미힌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니, 이렇게 내버려두고 간단 말인가?”
“가자니까!” 조시모프는 완고히 되풀이하고는 얼른 나가버렸다. 라주미힌은 조금 생각해보고 곧 그 뒤를 쫓아 달려 나갔다.
“환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더 나빠질지도 모른단 말이야.” 층계로 나오자 조시모프는 이렇게 말했다. “흥분시키면 안 돼…..”
“그놈, 도대체 어떻게 된 걸까?”
“어떤 그럴싸한 자극만 있어도 대번에 저러니 말이야! 조금 전만 해도 꽤 기운이 있더니만….그래, 그 친구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나봐! 뭔가 가슴에 맺힌 괴로움이라도. 그게 근심이야, 틀림없어!”
“어쩌면 그 친구 루쥔 씨 때문이 아닐까! 얘기로 보아 그 친구는 그의 누이동생과 결혼할 모양이고, 그 문제에 대해 로쟈도 ㅕㅇ이 나기 전에 편지를 받은 모양이니 말이야…….”
“그래, 나쁠 때 왔어. 그자가 모든 걸 망쳐놓았는지도 모르지. 그런데 자넨 눈치챘나? 라스콜니코프는 다른 일에는 전혀 무관심하고 말이 없지만, 단 한 가지 흥분하는 일이 있거든. 바로 그 살인 사건 말이야…..”
“그래그래!” 하고 라주미힌이 맞장구를 쳤다. “눈치채고말고! 흥미를 느끼면서도 떨고 있어. 병이 나던 날 경찰 서장실에서 놀라가지고 졸도까지 했거든.”
“여보게, 그 얘기를 저녁때 좀 더 자세히 들려주게. 그다음에 나도 얘기할 게 있네. 나도 이 환자에게 몹시 흥미가 있어! 30분쯤 후에 다시 들르겠네…그러나 염증 같은 것은 생기지 않을거야.”
“고맙네! 그럼 나는 그사이에 파셴카네 방에서 기다리면서 이따금 나스타시야를 보내 알아보도록 하지…..”
라스콜니코프는 혼자 남자, 초조한 듯이 괴로운 눈으로 나스타시야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나스타시야는 아직도 나가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지금 차 좀 드시겠어요?” 하고 그녀는 물었다.
“나중에! 난 자고 싶어! 날 내버려둬!”
그는 발작적으로 몸을 떨며 벽 쪽으로 돌아누웠다. 나스타시야는 방에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