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이야기
글/송악
사진은 추억이다.
사람마다 이견이 있겠지만 어언 중년에 들어선 나는 ‘사진’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추억이다.
빛바랜 흑백사진들을 들여다볼 때면 시간을 거슬러 사진을 찍던 당시의 추억속으로 아련히 빠져들게 된다.
발달한 과학기술로 DSLR이니 디지털카메라니 온갖 촬영 기기들로 무궁한 사진술을 다양하게 표현하는 세상이다. 핸드폰까지 해상도 높은 카메라 기능이 장치되어서 시도 때도 없이 사진을 찍을 수 있고, 필름도 없이 맘대로 찍었다가 맘대로 지웠다가, 열람하고 편집하고 보정까지 할 수 있으니 누구나 어렵지 않게 훌륭한 사진을 만들 수 있다.
세상이 덜 발달했던 60,70년대에 사진 찍기는 흔치않는 일이었다.
특별한 의전 행사에나 사진을 찍었으니, 한 장 한 장의 사진이 소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찍은 가족들의 사진은 '사진곽꾸'라 부르던 액자에 곱게 넣어서 대청마루 위나 안방 벽에 걸어 두곤 했다.
행사다운 행사가 없었던 우리 집은 그런 액자조차도 걸려 있지 않았다.
형편이 좀 나은 집안에서는 큰 맘 먹고 자라는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주기도 했지만, 가난한 집안 아이들은 소풍날이나 운동회 때에도 기념사진 한 장 찍기가 쉽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초등학교졸업 때에는 학교 전경을 배경으로 선생님을 중앙으로 모시고 모두가 함께 단체사진을 찍었는데, 그 사진이야말로 졸업을 증명하는 최고의 기념품이 되었다.
우리 몇 해 위 선배들의 졸업사진에는 치마저고리를 입은 누나들의 모습과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은 형님들도 볼 수 있고, 어쩌다 사정으로 결석했던 사람은 나중에라도 친구들의 단체사진 옆에 원형으로 모자이크된 얼굴을 덧붙이기도 했는데, 아마도 이때의 사진은 난생 처음으로 찍었을 사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차츰 경제적 형편이 좋아지고 발전하는 후배기수들로 내려가면, 한 명 한 명 개인 얼굴을 찍고 수업장면과 소풍장면, 운동회모습 수학여행, 등을 엮어서 제법 두툼한 앨범으로도 꾸며졌다.
일생 일대, 최고의 예식이었던 결혼식에서도 사진 촬영은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사모관대 복장의 신랑과 족두리 쓴 신부의 전통식 결혼은 집안 마당에서 행하느라 사진을 미처 찍지 못했던 부부는 나중에라도 사진관을 찾아 사진을 찍기도 했고, 어찌하다 식을 생략하고 부부가 되었던 사람들도 늦게나마 사진관을 찾아서 드레스와 예복을 빌려 입고 사진 한 장 찍으면, 그것으로 결혼식에 갈음하기도 했다.
휴대용 사진기 카메라는 쉽게 소유할 수 없는 꿈의 물건이었다.
그 비싼 꿈의 물건 카메라가 가난한 우리 집에도 생겼다.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귀국한 큰형님이 군용물품을 비롯한 여러가지 신기한 외제 물건들을 잔뜩 짊어지고 왔는데, 그 중에서 제일 값나가고 귀한 물건이 카메라 두 대였던 것이다. 기종이 일제인 ‘아사히팬탁스’와 ‘캐논’ 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당시 논마지기 값은 될 그 물건을 보신 아버지는 영 못마땅해 하셨다. 그렇지만 이국 만 리 전쟁터 사지에서 돌아온 아들을 보고 뭐라 할 수도 없지 않는가.
두꺼운 사각 볼록렌즈와 오목렌즈, 인화지, 현상에 필요한 약품과 함께 가져온 각종 부속기기들은 어린 내 눈에 모두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암실이 없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사진을 출력해내는 형님은 마술사와 같았다.
그러나 그 마술사의 사진기는 친구들과 친척들의 사진을 찍어 주면서 인기는 있을망정 서로 아는 처지에 사진 값을 일일이 받지 못하는 것이 다반사였으니 필름과 재료값만 축을 내는 애물단지였다. 주는 입장에서는 한 두 푼에 불과한 돈이지만, 여러사람들 몫이 쌓이는 형님 입장에서는 부담이 되었다. 결국, 그 애물단지는 읍내 사진관에 중고품으로 팔리고 말았다.
북상소재지에도 위천의 천일사진관 분점이 생길정도로 사진을 찍는 일이 보편화되었다.
친구들끼리 기념사진을 찍고서 변치 않을 우정을 약속하는 글귀를 새겨 넣기가 유행처럼 행해지고 있을 때, 두꺼비란 별명을 들을 만큼 복스럽게 잘 생긴 친구와 둘이서 잔뜩 폼을 잡고 사진을 한 판 찍었다.
워낙 잘 생긴 (?) 모델 탓이겠지만 확대가 된 두 꽃미남 청년의 사진은 오랫동안 천일사진관 입구에 광고용으로 전시가 되었었다.
초상권 침해라고 항의를 하면서 모델료라도 두둑이 받았어야 했는데.......
생활의 발달로 레저문화도 발달하며 휴대용 사진기 카메라의 보급도 빠르게 늘어났으며 어느사이 흑백사진에서 칼라사진으로 바뀌었다.
코닥, 후지, 아그파란 상호를 가진 필름들도 시중 어느곳에서나 싸고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유원지에서, 공원에서, 고궁에서, 산이나 강에서, 여행지에서, 돈을 주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했지만 카메라를 휴대한 사람들은 그 자체가 폼이 났다.
특히 이성 친구를 헌팅 하는 데에는 카메라만한 것이 없었다.
셔터 좀 눌러달라고 접근을 한 다음에 사진을 찍어 주겠다하고, 이름을 묻고 전화번호를 알아내고, 지금은 고전이 되어버린 이 수법을.......... 그러나 필자는 한 번도 써먹어 보지 않았다.
차곡차곡 저장한 사진앨범이 두툼해지는 만큼 추억들도 두툼해지지만, 결혼을 앞두고는 폐기해야 할 추억도 사진도 많았다는데, 나에겐 그런 사진이 한 장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이제 사진은 추억과 기록에만 머물지 않는다.
예술작품으로 또 취미생활의 한 장르가 된지도 오래다.
30여 년 전, 지리산 세석에서 야영을 하고난 이른 아침에, 운 좋게도 촛대봉에서 일출장면을 담고 있는 당시 산사진의 독보적 대가 故김근원선생 일행을 본 일이 있다.
추운 새벽바람을 맞으면서 튼튼한 삼각대를 설치하고 렌즈를 끼우고, 길게 늘어진 리모컨으로 셔터를 누르는 모습들이 흡사 종교의식을 행하듯 진지한 것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엄청난 양의 필름을 소비하며 찍어대는데, 그 중에서 작품다운 사진은 몇 장 못 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산 사진에 관심을 가졌고, 세종문화회관 별관에서 하는 전시회까지 가 본적이 있다.
나의 주변사람 중에도 사진 찍기를 즐기는 사람이 많다. 일찍부터 4촌 형님(32회 칡내음)은 유명한 사진 마니아이고, 고향 읍내 사는 조카도 어릴때 부터 사진취미를 가져서 보유하고 있는 장비만도 굉장하다.
용기 있게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창원으로 이주한 막내 아우는, 근래에 사진바람이 났는지 열심히 출사를 다니는 모양이다.
매우 바람직스런 취미요 보기 좋은 모습이다. 뷰파인더를 통해서 보는 또 다른 세상과 사물들은 여러 가지로 많은 공부가 될 것이요 운동과 건강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형으로서 충고한다면, 꾼으로서만 즐길 것이 아니라 '담배 끊는 쾌남'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야만 두 딸들에게도 환영 받는 '쾌남아빠' 소릴 들을 것이다.
우리 동문회 카페 회원 중에는 사진 솜씨가 프로급 수준의 실력자들도 있다.
원공후배님은 각종 사진전에서 수상작을 내고 있는 솜씨로, 카페에 올리는 한 장면 한 장면의 작품에는 감탄이 절로난다.
넘치는 에너지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사시사철 산과 들을 누비면서 자연과 풍경작품을 열심히 올려주시는 들국화향기님과 산사랑님, 적지 않은 나이에도 여행을 취미삼아 기록사진을 올려주시는 29회 임종만선배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고향모습과 소식을 쉼 없이 띄워주시는 온달후배님, 그리고 각종 취미생활과 각각의 기수별로 치러지는 각종 모임과 행사 장면들을 올려주시는 여러 동문 선- 후배님들의 수고로 인해 풍성하고 알찬 카페가 꾸며지는 것이다.
총동문회를 비롯한 여러가지 크고 작은 행사들도 끝나고 나면 남는것은 역시 사진이 최고다.
때로 사진 한 장은 백마디 말보다 더 큰 감동을 주는 일도 있으며, 한 장면의 사진으로 인해 세상을 바꾸는 일도있다.
우리들이 카페에 꾸민 한 장 한 장의 사진들은 먼 훗날까지 남겨질 소중한 기록이요 역사가 될 것이다.
갤러리방과 이미지방, 그리고 각종 방들에 사진을 올려 주시는 모든 분들께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다.
첫댓글 젊은날 선배님의모습은 지금과 많이 다른데요 아주멋집니다 좋은글 잘읽었고 구구절절 맞는말씀입니다 더 멋진사진 많이 올려야겠다는 생각을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촌*티 팍팍!!
항상 열정으로 올려주시는 사진들에 감사합니다.
진짜 꽃미남이었네요. 저도 중학교때 그 사진관에 사진 걸렸었는데.ㅎㅎ괜히 으쓱해지곤 했었답니다.
ㅎㅎ, 난 친구 덕분에........ 걸그룹 수준이 넘었을 우화님의 당시 모습이 궁금궁금!
ㅋㅋ 제 사진도 걸렸었는데..먼 옛날 이야기들입니다.
선배님 글 상상을 하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원래 사진작가는 인물을 꽤 뚫는 눈을 가졌다고 합니다.
한 미모 하시는 들국화향기님의 그 당시 작품 모습이 궁금궁금!
반가운 글이오. 위 글의 북상천일사진관이 기억나오. 펑하고 터지는 불빛과 연기가 뇌리를 스치오. 33회 윤섭이가 일찍부터 읍에 있는 천일 사진관 형님한테 배워서 나중에 독립을 하게 되었소.지금도 굿굿하게 살아남은 유서깊은 사진관이라오.그대는 기억력이 어찌나 좋은지 부럽소만 경우에다라서는 망각이 더 좋은 일이 될수도 있다는 생각도 한다오.
사진에 얽힌 추억들을 꺼내보았습니다. 저라고 어찌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치부들이 없겠습니까.
그 선배님과의 인연 사실은 나중에야 들었습니다. 천일사진관 두 형제분 어른들을 외삼촌이라 부르는 위천면 우리 여자동기생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