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길 5처..... 무명 순교자의 묘
기도하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십자가의 길 6처.... 조 카롤로 순교자 묘
당시 천주교를 탄압하는 박해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풍양조씨이다
그런 상황에서 천주교를 믿었으니 그는 문중으로 부터
박해를 받고 쫓겨나 충청도 지역을 전전하다가
칠곡 한티에 정착하여 공소 회장으로
열심한 신앙생활을 하였다가
교우들과 함께 순교
하였다...
십자가의 길 7처.... 무명순교의 묘
기도하며... 눈물이 한 없이 나왔다
십자가의 길 8처... 무명순교자의 묘
기도하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십자가의 길 9처... 무명순교자의 묘
기도하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십자가의 길 10처... 무명순교자의 묘
기도하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십자가의 길 11처... 무명순교자의 묘
기도하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십자가의 길 12처... 순교자 서태순 베드로 묘
서익순 요한과 서태순 베드로 형제는 증조부 서광수로부터
하느님을 믿어온 집안에서 태어나 박해를 피해
서태순을 문경한실로 형 서익순 가족과
서상돈 가족은 한티로
피난을 왔다.
서태순이 1866년 12월 18일에 34세로 옥에서
순교하자 그의 시신을 형 서익순이 한티에 안장하였다.
십자가의 길 13처... 무명 순교자의 묘
기도하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무명순교자의 묘...
기도하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소서..
이산에서 저산으로 무명순교자의 묘를 찾아서...
기도하며..
다시 영성관 뒷산에 묻히신 무명순교자 묘를 찾아서...
한분한분 모두 37기의 무명순교자의 묘를 찾아 순교자들의
시복시성 영예를 허락하여 주시기를 기도하며
저희 또한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도록
성령의 은총으로 도와주소서
아멘
한티 성지에서 -->
신나무골 성지로 이동
(사정상 대중교통으로 이동)
신나무골 성지 표지석...
성지 안내판
신나무골 성지 전경....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 묘
한티 첫 순교자 이선이 엘리사벳과 아들 16세의 스테파노는
"죽어도 성교를 믿겠다" 면서 끝까지 믿음을
지키며 순교했다.
신나무 골 성지...
포졸들은 어찌 이다지도 포악했던가..
모자는 학춤형벌로 혀가 빠졌으며 그들은
두사람의 목을 잘랐다.
온 마음을 다해 순교자를 지향하며 묵주 기도 5단을 봉헌하다
남편 배정모는 배교하였으며 이들의 시신을 거두어 한티에
매장하였다가 훗날 부인의 유골만을 칠곡의 선산
으로 이장하였는데 1984년 성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의 주선으로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신나무골 성지... 십자가의 길 14처 기도하다...
신나무골 성지가 저만치 보이고... 뒤에 영성피정의 집도
어렴풋이 보인다.
신나무골 성지 뒤에 있는 ... 대구 교회 첫 본당 터
안내판
대구 교회 첫 본당 터... 사제관
대구교회 첫 본당터 전경... 김보록 신부
신나무골 교우촌 안내도
집 주인이며 1883년 신나무골 학당 설립.. 이주연 야고보
여기에서 3년간 대구 본당 첫 사제인 김보록사제를
3년간 모셨음
관덕정 순교 기념관에서 ... 안주교와 임시 주교관
초대 교구장 안주교가 교우집을 빌려 사용하던 주교관
셋째날 5월 13일(일)
신나무골 성지에서 -->
복자성당으로 새볔미사 참례차 이동 (새볔 5시)
(복자성당 인근에서 하룻밤 묵고 새볔미사 참례)
복자성당 정문... 새볔미사 참례 (5시)
복자성당 순교자 3위의 묘에서 ...
온마음을 다하여 묵죽기도 5단을 봉헌하다
복자성당에는 1868년 울산 동천 강변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 허인백 야고보 , 김종륜 루카, 이양등 베드로
3위의 하느님의 종 유해가 모셔져 있다.
복자성당.. 성모님 상
복자성당은 병인 박해 100주년을 기념하여 순교자들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기 위해서 대구대 교구가 건립한 순교자 현양기념 성당이다.
복자성당 새볔 미사 6시 ... 신부님 강론중
복자성당 새볔미사 ... 영성체
복자성당 전경... 김대건 신부님 동상
복자성당... 3위 하느님의 종
대구교구 하느님의 순교자 20위
복자성당 전경...
복자성당에서--->
성모당으로 이동
대구 가톨릭대 교정 앞을 지나며... 성 유스티노 신학교
대구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가 사제 양성을 위해
1914년 개교한 대구의 첫 신학교다.1944년 12월 23일
서품식을 끝으로 이듬해 3월 19일
폐교되었다.
성모당에 도착하다... 루르드의 성모동굴 모형
이미 많은 교우들이 성모님께 기도를 간절히 바치고 있었다
성모당에 모신 성모님상..
대구교구 창설시 성모님에 대한 감사의 증거로 만든 동굴이다.
성모님의 도움에 힘입어 교구에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 성당 증축등을 이룰수 있다면
성모당에서 간절히 기도하는 자매님들...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님께 봉헌해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동굴 모형대로 성모당을 세워서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이다.
성모당 전경..
동굴 윗면에 있는 1911의 의미는 대구교구가 설립된 연도이며
EX VOTO I MMACULATAE CONCEPTIONI 에는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
란 뜻이다.
1918의 의미는 드망즈 주교가 교구를 위하여 하느님께
청한 세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리킨다.
성모당에서 --->
성직자 묘소로 이동
대구대교구 성직자 묘소 전경...
대구대 교구 성직자 묘소 전경.. 기도하다
한분도 빠짐없이 한분, 한분 사제의 묘 앞에서
묵주를 도구로 간절히 기도하다
성직자 묘소 전경....기도하다
성직자 묘소 전경... 기도하다
성직자 묘소에서-->
관덕정 순교 성지로 이동
관덕정 순교성지 전경...
아미산 줄기에 위치한 이곳 관덕정은 본래 대구 읍성인 남문 밖으로
조선후기에는 군관과 별무사를 선발하던 넓은 연병장이 있었고
그 한쪽은 이전부터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이동 되었다.
관덕정 순교성지.. 이윤일 요한 성인 동상
성인은 경상도 문경 여우목에서 회장으로 활동하다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밖 관덕방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관덕정 순교기념관에서... 조선시대 5대형벌
관덕정 순교 기념과에서... 조선시대 5대 형벌
관덕정 순교 기념관... 지하 성당에서 기도하시는 형제님
관덕정 순교 기념관 전경
관덕정 순교 기념관에서 --->
대구 경상 감영으로 이동
경상감영의 종각... 징청각이 보인다...처소로 사용된 곳
김윤덕 아가다 막달레나가 배교하였다가 다시 신앙을 증거하고
장사한 곳이며 많은 교우들이 혹형속에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한 곳이다.
징청각... 경상감사 처소
김윤덕 아가다 막달레나 (?~1815) 는 경상도 상주의 은재에서
태어나 장성한뒤 고향 인근에 전파된 복음을 전해듣고
입고하였다. 노래산 교우촌으로 이주하여
그곳 교우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경상감영의 종각... 분수가 시원스레 내뿜고 있다.
1815년 2월 22일경 교우들과 함께 부활 대축일을 지내던 중에
체포되어 경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고 대구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다시 혹독한
형벌을 받던 중에 마음이 약해져
신앙을 포기하고 배교
하기에 이르렀다.
경상감영의 징청각과 선화당 (관찰사가 공무를 보던 곳)
그녀는 막 감영의 문을 나가려던 차에 안동에서 이송되어 온
김종한 안드레아를 만나게 되었다. 이때
안드레아는한숨을 내쉬면서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
힘써 권면 하였다.
다시 감영으로 들어간 그녀는 포졸들을 밀치고는 서슴없이
관장 앞으로 나아가 소리질러 배교를 뉘우쳤다.
관장은 화가나서 심하게 매질을 하도록
하였다...김윤덕이 매를 맞아
장사한곳이 경상감영
마당이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번 순례 여정에서 크신 은총 허락하심에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느성지에서나 하느님의 현존하심을 체험하며
무명순교자의 묘소를 따라 발길을 멈추고
또 멈추면서 저는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순교자들을 생각할때 마다 우리는 수없이 묻고
또 물어야 한다고
'너도 그렇게 버릴 수 있느냐고..
너의 모든것을 하느님을 위해
이렇게 다 바칠수 있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