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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마가복음 11 : 1 - 6
제목: “주가 쓰시겠다”할 때 “즉시 보내라” 왜냐하면...
일시: 2020. 9. 6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주님은 평강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을 계획하셨다. 그 입성을 위해 특별한 이벤트를 마련하셨는데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퍼레이드를 펼치는 것이었다. 오늘 말씀은 승리의 왕을 위한 나귀를 구하는 스토리이다. 어디 가서 나귀를 구할 수 있을까? 주님께서는 제자 둘을 부르셔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맞은 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이 얼마나 난감한가? 엄연히 그 나귀 주인이 있을텐데 말이다. 당연히 누군가 나와서 “왜 이렇게 하느냐”라고 묻지 않겠는가! 주님은 그때에 대답할 말도 주신다. “누가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그러면서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다 알려주신다.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그 나귀주인은 어떠한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가 주가 쓰시겠다는 말에 머뭇거리지 않고 즉각적으로 보낸 것은 현명한 일이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II. “주가 쓰시겠다”고 하실 때 “즉시 보내라.” 진짜 주인이 요청하기 때문이다.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그 요청은 “황당”한 요청이 아니라 주인으로서의 “당연”한 요청임을 알라. 제가 예수님의 심부름을 받은 제자라면 난감해 하면서 머뭇거릴 것 같다. 엄연히 나귀임자가 있을 것인데 무슨 권한으로 무턱대고 가져올 수 있겠는가! 당황스럽다. 설명도 꽤 한참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설득을 하지라는 생각이 든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나귀임자는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너네 주인이 누구인데 내 나귀를 달라 말라 하냐”고 말할 것 같다. 그러나 진정한 소유권자는 누구인가? 만유의 주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러기에 주님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의식”을 나귀 임자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때 즉시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예)오래 전 할레교회를 개척하여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하던 독일교회가 있었다. 그 독일교회 목사님이 여자 싱글목사님이었다. 아이들이 주일날 오후 시끄럽게 했는지 막 나무라신다. 물론 미탁스파우제 시간에 아이들이 떠들어서 미안하기는 했지만 그것 이해 못하나 싶었다. 저도 화가 많이 나서 “결혼 안한 싱글 여자 목사님이라서 그런가”하는 편파적인 생각도 하면서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집이고 주님도 아이들을 받으시는데 그렇게 나무라면 되느냐”고 했더니 뭐라고 말씀을 하신다. 잘 못 알아 들어서 마음이 편했다. 그러나 화가 난 것은 분명했고 얼마 후 우리는 그 교회를 나와야 했다. 이미 마음속에 쫓겨날 각오를 하고 다른 교회를 미리 알아보고 다녔다. 그 독일목사님은 나의 주장에 황당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이 교회의 주인이고 그래서 우리도 권리가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으니까. 그것은 내가 할 생각이 아니고 그 목사님이 하셔야 할 생각 아닌가! 내게 있는 나귀새끼가 내 것이 아니라 원주인이 바로 주님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이 생각할 것이 아니라 나귀임자가 가져야 할 생각이다.
나귀임자는 제자들의 황당해 보이는 요청에 순종한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막11:6). 새끼 나귀는 스스로 주권이 없다. 옆에 있던 어미 나귀도 새끼에 대한 주권이 없다. 그렇다고 그 나귀들의 임자라고 하는 사람에게도 주권이 없다. 진정한 주권자는 나귀를 만드시고 나귀를 맡기신 하나님이시다. 나귀임자는 황당한 제자들의 요청에도 즉시 보내드리고 있다. 주인을 알아본 것이다. 주인을 알아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개도 주인을 알아본다”라고 하지 않는가!
예)서연이가 열쇠를 넣고 돌려도 문이 안 열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열쇠를 뽑을 수도 돌릴 수도 없다나? 내가 가서 약간 힘을 주어보았다. 그랬더니 열린다. 뒤에서 슬쩍 혼잣말하는 것을 들었다. “열쇠가 주인을 알아보네.” 나보고 주인이라고 하는 것이다. 제가 주인이라면 저의 주인은 누구인가? 바로 주님이시다.
우리는 주인을 알아봐야 한다. 개도 주인을 알아본다고 하고 열쇠도 주인을 알아본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우리 주인을 못 알아보면 주인 되신 하나님이 얼마나 난감하시겠는가? 우리 인생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는 잠시 맡아 있을 뿐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임차인일 뿐이다. 원래 하나님께로부터 왔고 하나님으로부터 잠시 빌려쓰는 것이다. “무슨 말이에요? 하나님 그것은 제 것입니다”라고 소유권을 주장할 때 하나님은 얼마나 어려운 말을 해야 하는가? 우리가 황당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황당해 하실 것이다.
예)필리핀에 갈 때 축구공 좋은 것을 하나 가지고 Deril 이라는 교수님 아들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내가 그것을 사용했다. 분명히 그에게 선물로 주었지만 주로 내가 사용하고 내 집에 있었는데 어느 날 내게 와서 이렇게 말한다. "Pastor Kwon, Can I borrow my ball." 얼마나 귀엽고 불합리한 표현이던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쓰시겠다고 할 때 당신이 주인이면서도 Can I borrow my money?(my talent? my time?)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즉시 보내드려라. 원래 그분 것이다. 내가 황당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황당하게 만들지 말라.
III.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즉시 보내라. 그것은 선심 쓸 일이 아니요 특권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쓰시는 것을 허락하기에 무척 선심 쓰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주님이 Please Bitte 하면서 달라고 하는 것 같아 큰 유세를 떨면서 드릴 수 있을 것 같다. 주님이 필요하시고 우리는 그에 응하는 것 같아 우리가 갑의 입장에 있어 보인다. 그러나 주님이 사용하신다는 것은 피조물들에게 있어 최선의 존재이유가 된다. 창조하신 후에 사용해 주시니 이 얼마나 감사할 일인가! “주가 쓰시겠다” 요청하실 때 억지로 하거나 선심을 쓰듯이 “그러지요 빌려드리지요”라고 할 일이 아니다. 마지못해 허락하거나 큰맘 먹고 해야 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특권으로 알아 놓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예)축구나 야구나 농구 등등... 운동선수들이 국가대표로 부름을 받을 때 차출되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선발되었다고 생각하는가? 국대로 부름을 받으면 다들 얼마나 열심히 뛰는지 모른다. 땀을 흘리고 극한 훈련도 감수한다. 큰 운동장에서 10분만 뛰어도 힘든데 저 어려운 것을 왜 하는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면 차출된 것이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귀하게 생각하고 인정하여 뽑힌 사람으로 안다면 선발이 된 것이다. 나라를 위해 국가의 대표로 나설 수 있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라는 것이다. 잘 사용된다는 것이 말이다.
새끼나귀는 이제 예수님을 등에 태우고 예루살렘에서 퍼레이드를 펼칠 것이다. 그 퍼레이드는 주님이 갈보리 십자가 승리를 앞두고 예루살렘의 왕으로 입성하시는 역사적인 이벤트이다. 여기에 새끼나귀는 선발이 된 것이다. 당신이 통치하실 하늘나라의 국가대표가 되어 사용된다면 귀한 일 아닌가! 그것은 의무가 아니다. 마지못해 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즉시 하시라고 드려서 놓치지 말아야 할 기회인 것이다.
우리는 의무와 특권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은 특권이다. 긴장해야 하고 연습해야 하고 많은 땀과 수고가 들어가지만 그것은 의무로 하는 것이 아니라 특권인 것이다. 등록금을 내는 것이 특권이냐 의무이냐? 배우는 값을 낸다고 해도 학생이 되어 배움의 기회를 얻는 특권인 것이다. 교회청소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교회가 건물이 있다면 특권이다. 청소하고 싶은데 교회가 없다. 부모님이 계셔서 잔소리를 들어야 하니 얼마나 피곤한가? 하지만 상의할 수 있고 잔소리를 들을 수 있는 부모님이 있다는 것은 특권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가 쓰시겠다”라고 하면 저는 언제나 Yes 할 준비를 하고 있다. 번거로운 일이 아니고 찾아서 해야 할 일이다. 불평하고 힘들어할 일이 아니고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일이다. 어떻게든 빠질 일이 아니고 어떻게든지 끼워달라고 해야 할 일이다.
일할 수 있다는 것은 특권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좀 쓸까?”라고 하실 때 손익계산을 하지 말라.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라고 해야 한다. 저울에 달아 무게를 재지 말라. 하나님 앞에 값을 흥정하지 말라.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할 때 이미 엄청난 흑자임을 알아야 하다. 하나님께서 시키실 때에 내게 무슨 복이 많아서 이 일을 하게 되는가라고 생각하라.
예)아버님은 강의를 하고 오시든 집회를 하고 오시든 집에 들어와서 흔하게 말씀하셨다. 오늘도 하나님 앞에 잘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영적으로 말씀하시고 우아한 표현을 하시는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그 말뜻을 이해한다. 내 생각과 계획대로 인생을 사용하느라 허비하지 말라.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곳에 나를 보내라!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에 바로 멜덴하여 “나를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소서”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의무가 아니요 특권이기 때문이다.
IV. 주가 쓰시겠다고 할 때 즉시 보내라. 헐값이 아니고 금값으로 쳐 주기 때문이다.
주님이 나귀를 타고 오실 때 꽤 불편하지 않는가 싶다. 저 같으면 “내려서 갈께”라고 할 것 같다. 그러나 주님이 나귀를 타신 것은 고난 받는 왕으로서 겸손의 의식이었다. 어미나귀와 새끼나귀가 있는데 새끼나귀를 타셨다. 백마를 타고 오신 것이 아니라 겸손하여 새끼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 나귀는 작은 동물이고 귀한 동물이 아니다. 그러나 주님이 사용하실 때 그 나귀는 헐값이 아니라 금값과 같은 가치를 지니게 된다. 주님이 타치하셔서 사용하시면 가치가 변하게 된다. 귀한 것이 된다. 값이 올라가게 되어 있다.
예)사회에서 특별한 바자회 때 연예인이나 스포츠선수들, 혹은 사회유력인사들이 자신들이 쓰던 옷이나 용품들을 기부하여 내어 놓는다. 그러한 것들은 그 물품 자체보다 누가 터치 했다는 것에 그 가치가 확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 유명한 사람의 흔적이 있으면 더욱 가치가 있을 것이다. 축구선수들이 경기 후 경기장에서 종종 입고 뛰었던 유니폼을 바꾸어 입는다. 가령 메시선수의 옷을 받았다고 치자. 그것을 바자회에 내어 놓는다. 그러면 깨끗이 빨아서 내어 놓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그 경기에서 입었던 땀냄새 훌쩍나는 그대로 내어 놓는 것이 좋겠는가? 내 운동복과 운동조끼들은 한번 빨고 또 빤다. 그리고 가족들은 자기 옷과 함께 빨지 않는다. 냄새가 너무 세게 나기 때문이다. 이해가 된다. 그러나 유명한 선수가 입던 옷은 냄새가 향기가 될 것이다. 바자회 때도 빨지 않고 그대로 파는 것이 낫겠지. 그냥 썩은 냄새나는 버릴 옷이 아니라 값이 나가겠지. 역사적인 부가가치가 있는 것이다.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 뛰던 옷...
우리는 새끼나귀와 같이 형편없는 존재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 귀한 것으로 변화된다. “주가 쓰시겠다”고 하면 거룩해진다. 썩지 않고 영원한 것이된다. 사라없어질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새끼나귀가 될 것이다. 성경의 인물들도 보라. 형편없는 사람들이다. 아브라함? 자기의 생명을 잃을까봐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이라고 말했던 비겁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용하시니 약속받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야곱? 형을 속이고 삼촌을 속인 사기꾼 아닌가! 그러나 하나님은 에서를 미워하시고 야곱을 인정하셨을 때 약속을 이어받는 자가 되었다. 모세? 말더듬이에 애굽사람을 죽인 살인자이다. 그러나 출애굽의 영웅으로 사용하셨다. 다윗? 우리야를 살인한 살인자요 밧세바를 취한 간음자로서 사형을 받아 마땅한 범죄자였다. 그러나 다윗은 이스라엘 최고의 왕으로 높임을 받았다. 바울? 자신을 복음의 훼방자 염병자 죄인중의 괴수라고 한다. 그러나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베드로는 배운 것 없는 어부였다. 그러나 주님의 수제자가 되었고 천국의 열쇠를 갖은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쓰시겠다고 하여 사용하니 부족한 그들이 금값으로 사용되는 것 아닌가!
우리는 완전해져야 주님이 사용하실 것이라는 기대를 버려라. 완전해야 주님이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사용해야 완전해지는 것이다. 나귀를 백마로 만드신 다음에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귀를 사용하시어서 왕의 탈것이 되게 하신다. 우리에게 시간이 많을 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다. 없는 내 시간을 금값으로 쳐 주실 것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을 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니다. 내게 있는 것이 과부의 두렙돈과 같이 작은 것이라도 주님이 그것을 금값으로 쳐주실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이 형편없다고 생각되는가? 배운 것도 없고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내놓을 것도 없는가? 주님은 헐값인 우리를 사용하셔서 금값이 되게 하신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할 때 가장 귀히 사용되는 것이다. 내가 계획하고 작정한 것에 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용하실 때 가장 의미있게 사용하는 것이다. cf)그 나귀와 나귀주인은 사실 가장 귀한 곳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후에 짐을 나르고 사람을 태우고 할 수 있어도 그 나귀의 평생에 가장 귀한 일은 바로 왕되신 메시야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일일 것이다. 그 나귀는 역사적인 나귀가 되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말씀하실 때 즉시 쓰시라고 하라. 헐값의 인생을 금값으로 만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V. 주가 쓰시겠다고 말씀하실 때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고 스탠바이해 있어라. 매여 있는 내 나귀새끼를 뒤편 외양간에 숨기지 말라. 내 나귀를 풀게 하라. 아니 풀게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풀어드리라.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라.
“당신의 나귀가 여기 있습니다” 주인을 알아보는 것이다!
“사용될 수 있는 선발의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특권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벌레만도 못한 저를 이렇게 값을 높이 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가가치를 올리는 것이다.
2020-21년도를 앞두고 그런 교회 일꾼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또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썩고 사라질 나의 삶을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은혜와 축복이 우리 모든 교우들의 삶에 풍성하기를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