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거지
① 화순군 청품면 어리
② 화순군 이양면
③ 고흥군 두원면
④ 장흥군 장평면 우산리
⑤ 강원도 서원면 오계리
청양현감공파는 위씨의 큰집인 능주파(綾州派)다. 16세 4형제 중 맏이인 자온(自溫)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자온은 아들 형제를 두었으나 장남 종원(宗元)은 21세에서 절손됐다. 차남 종형(宗亨)은 18세 석중(碩重), 19세 공필(公弼), 20세 인걸(仁傑)을 거쳐 21세 천우(天佑․1536~?)는 청양현감파로, 동생 천보(天保)는 유사공파(儒士公派)로 갈리게 된다.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박사(弘文博士)를 역임하고 사헌부 장령(掌令), 청양현감으로 재임 중 임란(壬亂)을 맞아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장군과 창의하여 함양, 개령전투에 참전했다. 노량진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은 "위씨는 홍면비장군 위대기만 있는 줄 알았는데 백면비장 위천우가 있구나"하며 격려했다.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녹훈됐다.
그런데 능주파는 18세부터 그곳에서 살았다. 현감공의 증조 석중(碩重), 조부 공필(公弼)의 유택도 이양에 있다. 그러나 자신과 후손의 유택은 청풍(淸風)에 있다. 이는 청풍이 능주현의 관할이기 때문일 것이다. 공의 큰아들 홍원(弘源)은 26세 치린(致麟) 때부터 고흥 두원(斗院)에서 살다가 29세 만조(萬祚)는 보성 회천에서, 30세 희환(晞桓) 이후는 청풍과 장평 내동에서 산다.
차남 장원(長源)계열은 27세 도윤(道允) 대까지 청풍에서 거주한다. 그러다 28세 영모(榮謨)는 장흥 유치, 29세 문환(文桓)은 장평에서 살았다. 또 후손 중 일부는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옥계리,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상리, 보성군 벌교읍 남상동, 화순군 이양면 매정리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아마도 고향에서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외지로 떠난 것으로 보인다.
능주파가 고향을 등진 이후 위씨의 대종가는 사실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도문회는 물론 대종회 차원에서도 이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다행스럽게 2015년 대종회의 주선으로 청양공파와 유사공파의 후손이 해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대종가가 있는지 없는지 잊으면서 지파들 끼리 5현조 제사를 모시고 있다. 과연 방치할 일인지 의아스럽다.
2) 유사공천보파(儒士公天保派)
장흥위문 기묘대동보을 포함한 모든 족보와 요람 등 각종 기록물에는 청양현감공(휘 천우)의 생년은 1556년, 졸년은 미상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본향을 중심으로 여러 21세조 중, 최고 연장자는 괴봉공(휘 대용, 1530~
1610) 입니다..
청양현감공은 21세 종손에 해당되어 수록된 생년에 대해 늘 의문을 갖고 있었는데 公은 1582년 46세 비교적 늦은 나이에 과거시험에 합격함이 역사기록에서 확인되어 생년은 1536년이 맞습니다.(1582-46=1536)
족보 면주에 수록된 1556년과 본 게재 1573년은 오기(誤記)입니다..
차후 기록에서는 생년을 1536년으로 정정(訂正)함이 타당합니다.~~
유사공(휘 천보)에 대한 면주 기록은 생년과 졸년이 미상입니다..형님되신 청양현감공을 기준으로 하여 생년을 1540년 정도로 추정해봅니다.~~
위문중 조상님들의 옛발자취와 족보에 대해 공부하고 갑니다.
栢江위성록/장흥위문사랑 수정하였습니다. 송강 정철과 동갑이라고 합니다.
우리 문중 종가네요
능주파는 청양현감공파와 유사공파로 분리데네요
栢江위성록/장흥위문사랑 님
자세한 설명에 잘 알게되었습니다. 오류를 바로 잡아나가다 보면 정확한 문중역사가 잡히리라 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젊은이들의 몫이라 사로됩니다. 늘 문중역사를 바로 세우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