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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8일 온고을교회 주일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예수는 나의 힘이요
요 16:25~33
<책 읽는 노동>
요즘 저는 ‘책 읽는 노동’을 ‘죽기살기’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책 읽기 노동을 하는 저에게 아내가 물었습니다.
“누가 당신에게 이 책을 읽으라고 해서 읽게 된 겁니까?”
전주비전대학교 한 교수님은 저와 만날 때마다 자기가 읽고 있는 책을 소개합니다.
책을 보여주시면서 책의 내용을 잠시 언급합니다.
“이 책을 보니 조로아스터교가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네요?”
제목이 '히스토리아 노바'입니다. 지은이는 주경철입니다.
책 표지를 핸드폰으로 찍어왔습니다. 그리고 전주시립도서관에서 대출받았습니다.
이 책은 조로아스터교가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뿐 아니라,
‘축의 시대’를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축의 시대라니, 그게 뭐지?”
메리 보이스 '조로아스터교의 역사'와 카렌 암스트롱 '축의 시대' 두 권을 대출받았습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역사는 587쪽, 축의 시대는 738쪽입니다.
두꺼운 것이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내용이 문제입니다.
한쪽 한쪽을 읽어 나가는데, 그야말로 머리에 쥐가 났습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도전해서 쓰러뜨려야 했습니다.
마침 제가 침례교인 교양지 격월간 '뱁티스트'에 글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주제가 ‘진정한 기독교’입니다. 지금까지 5회에 걸쳐 A-4 50쪽 이상이 나갔습니다.
앞으로 계속 이어가야 하는데, 때마침 이 책들을 만났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진정한 기독교’를 주제로 글을 쓰려면 이 책은 꼭 읽어야 한다!”
저도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그리고 읽습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너무나 재밌습니다.
그러나 제가 힘이 달립니다. 두세 시간 읽고 나면, 온몸에 힘이 쭉 빠집니다.
책 읽는 것도 노동입니다. 상노동입니다. 힘이 있어야 읽습니다. 에너지가 있어야 합니다.
☞ 제가 어떻게, 무엇으로 힘을 내야 하겠습니까?
<힘을 얻는 방법>
힘이 팽길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휴식입니다. 쉬어야 합니다.
휴식으로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급합니다.
책은 두껍고, 얼른 읽어내고 싶습니다. 책이 나를 땡깁니다. 충분히 휴식할 수 없습니다.
이런 때 찾는 것이 간식거리입니다.
저는 달달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밀가루 것을 좋아합니다.
사택에 들어가서 서랍을 뒤져 찾아냅니다.
지금 생각하니 저의 비만 원인이 여기에 있었습니다.
“힘내기 위해서는 주전부리가 최고다!” 이것이 제가 힘내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짬짬이 주전부리를 하면서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역사를 독파했습니다. 이어서 축의 시대 거의 읽었습니다.
<축의 시대 인류의 각성>
축의 시대라는 용어를 처음 구사한 사람은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입니다.
1949년에 야스퍼스가 역사의 기원과 목표라는 책에서 ‘축의 시대’를 언급합니다.
사실 현재 인류 역사의 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점으로 주전, 주후로 나누는 연대(年代)의 축이 이미 세워져 있습니다.
이 축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한 축입니다.
야스퍼스는 인류 역사의 ‘신화적 시기’가 끝나고 철학과 종교가 시작되는 축을 거론합니다.
주전 900년경부터 주전 200년 어간, 대략 700년,
그리스, 인도, 중국, 이스라엘에서 “의미 있는 각성”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 때 철학과 종교가 모양을 갖추었다는 것입니다.
지구의 네 지역에서 시간적으로 크게 어긋나지 않는 시점에서 철학과 종교가 싹틉니다.
그리스에서는 소쿠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철학이,
인도에서는 석가모니의 불교, 힌두교가 발아합니다.
중국에서는 공자, 묵자, 노자가 활동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엘리야, 예레미야, 이사야가 활동합니다.
이렇게 하여 인류 역사에서 철학과 종교가 시작됩니다.
야스퍼스가 처음 주장한 축의 시대를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이 이어받습니다.
야스퍼스는 축의 시대를 처음 주장하면서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수준입니다.
역사를 보니 이러한 특징이 발견되었다.
“이는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의미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는데, 후학들의 연구를 기대한다.”
이를 이어받아 영국의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이 축의 시대를 2009년에 출판했습니다.
카렌 암스트롱은 기원전 1,600년부터 기원전 100년까지 1500년간의 세계 역사를 더툽니다.
그 속에서 B.C. 900년에서 B.C. 200년, 축의 시대 700년을 집중조명합니다.
☞ 축의 시대 700년 동안 인류가 지향한 것은 무엇인지에 포커스를 맞춥니다.
인류가 처한 상황은 고난이라고 전제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은 평온하지 못합니다.
가족 공동체, 부족 공동체, 국가 공동체,
이 공동체는 먹고사는 문제, 이웃과의 갈등에, 자연재해까지, 참으로 고난이 큽니다.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 인류는 신을 만들어 냈지만 고난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축의 시대”를 엽니다.
☞ 축의 시대에 일어난 인류의 각성은 무엇일까요?
<축의 시대 키워드 ‘힘’>
카렌 암스트롱은 인도, 중국, 그리스, 이스라엘을 번갈아 가면서 서술합니다.
매우 탁월하게 파고 들어갑니다.
지구상 네 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에 때로는 현미경을, 때로는 망원경을 들이댑니다.
그때 인류가 천착한 것을 날카롭게 집어내면서 ‘역사의 의미’를 발굴해냅니다.
참 대단합니다. 카렌 암스트롱은 여류 학자로서 1944년생으로 아직 생존해 있습니다.
책에서 제 눈에 친근하게 다가온 것은 중국의 축의 시대입니다.
중국의 축의 시대는 춘추전국시대가 역사의 배경입니다.
주전 770년부터 221년까지입니다.
중국은 드넓은 대지 위에서 수많은 나라와 제후국들이 출몰합니다.
끊임없이 전쟁이 이어집니다.
☞ 그런데, 전쟁에도 트랜드가 있습니다. 유행이 있습니다.
전쟁이라고 해서 무지막지하게 싸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생애 중에 전쟁 한두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수없는 전쟁을 수행합니다.
지난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좋을 것도 없습니다. 언제 전쟁이 또 터져서 패망할지 모릅니다.
한번의 전쟁에서 지나치게 잔혹하게 적군을 무찌르면 반드시 보복이 옵니다.
내 칼에 죽은 장수의 아들, 손자가 와신상담한 끝에 다시 쳐들어옵니다. 당해낼 수 없습니다.
점차 전쟁에서의 예절과 법도가 발생합니다. 전쟁규범을 만들어서 공히 적용합니다.
춘추시대 중국 내의 전쟁은 매우 신사적입니다.
어느 전쟁에서 한 장수가 상대 장수를 향해 화살을 날렸습니다. 그런데 빗나갔습니다.
그러자 재빨리 다시 화살을 겨눕니다. 그때 상대 장수가 외칩니다.
“치사하다. 이번에는 내가 쏠 차례 아닌가?”
그러자 두 번째 화살을 쏘려던 장수가 체념합니다. 죽음을 기다립니다.
☞ 이렇게 예절 바른 전쟁을 했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중국은 왕과 제후가 있는 봉건제도가 적용됩니다.
왕은 영토를 확장하면 형제와 친척에게 땅과 백성을 떼어서 나눠줍니다.
이때 땅과 백성을 받은 이들을 제후라고 합니다.
왕 한 사람 아래 수많은 제후들이 있습니다.
왕과 제후 사이에 지켜야 할 법도가 발달합니다.
이 법도를 안 지키면 중국 대륙에서 치사한 인물로 낙인찍힙니다.
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이 될 때는 “하늘이 나에게 이 나라를 하사했다!”
이것을 입증해야 합니다. 무조건 힘이 있다고 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중국의 ‘천자 사상’입니다.
백성들은 자기네 왕이 하늘의 점지를 받은 왕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순종합니다.
☞ 중국의 왕, 황제는 어떤 인물입니까?
황제가 되면, 많은 제약을 감수해야 합니다.
옷 입는 것, 걸음 걷는 것에도 법도가 있습니다. 음식도 아무거나 먹지 않습니다.
왕이나 황제라고 해서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황제는 신하를 힘으로 제압하지 않습니다. 두어 마디 말과 품격으로 다스립니다.
신하들과 격렬한 토론은 금물입니다. 신하들이 주청하면 “그렇게 하시오!” 두 마디 합니다.
그러면 즉시 효력이 발생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황제가 ‘말(馬)’을 생각하면 말은 벌써 성문 밖으로 힘차게 내달립니다.”
놀라운 황실의 법도입니다.
신하들은 황제 앞에서 힘차게 걸음을 걷습니다.
두 팔 팔꿈치를 양쪽으로 벌리고 걷습니다.
신하와 제후들의 이 힘이 어디서 나올까요?
☞ 오늘 설교 제목을 보십시오, “예수는 나의 힘이요”
축의 시대 중국 황실의 신하들, 어디에서 힘을 얻을까요?
황제를 알현함으로써 힘을 얻습니다. 황제를 보기만 하면 힘이 펄펄납니다.
그래서 중국의 공신들은 황제 세우기에 심혈을 기울입니다.
‘신하에게 힘을 솟구치게 하는 황제’를 옹립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면 중국의 어떤 황제는 허수아비만도 못합니다.
그러나 황제 치하의 공신과 백성들은 절체절명의 문제입니다.
황제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것은 흔한 일입니다.
☞ 중국의 축의 시대 문명이 고려와 조선에 그대로 영향을 미칩니다.
사육신, 왜 목숨을 내놓습니까?
‘단종임금 외에는 다른 임금 없다. 수양대군, 그가 왕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죽습니다.
만일 수양대군이 왕이 되면, 힘이 안 납니다. 곤룡포 앞에 가면 힘이 펄펄나야 합니다
그러나 ‘단종을 몰아내고 수양대군이 왕이 되면 죽느니만 못하다’ 그래서 기꺼이 죽습니다.
☞ 인류는 신화의 시대를 밀어내고 축의 시대를 이루어냅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 사람은 힘이 있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는 민중에게 힘을 주는 원천이 무엇인가를 질문합니다.
☞ 언제 어디서나 중요한 것은 누가 나에게 힘을 주느냐입니다.
민초들은 힘을 주는 지도자를 원합니다. 이것이 역사의 원리입니다.
<힘을 주는 사람>
축의 시대 700년 동안 그리스, 인도, 중국, 이스라엘이 찾아 헤맨 것이 무엇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힘을 주느냐?” 바로 이것입니다.
힘이 있어야 오늘 하루를 살아갑니다.
힘이 있어야 책도 읽을 수 있습니다.
힘을 낸다고 입에 맛있는 음식만 골라먹으면 비만이 되고 맙니다.
오늘날 현대인의 비만의 원인은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리 봐도 주변에 자기에게 힘을 주는 이가 없습니다.
오로지 먹어서 힘을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비만은 필연입니다.
저도 책 읽는다고 달달한 것만 찾으면 비만에서 헤어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축의 시대 중국은 황제의 법통을 바로 세워 힘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리스는 철학을 꽃 피워서 인류가 힘을 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인도의 현자들은 고행을 통해서 도에 이르면 중생에게 힘을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은요? ~~~ “유일신 하나님을 바르게 섬김으로 우리가 힘을 얻을 수 있다”
☞ 축의 시대 후 200년 지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왔습니다.
(27~28절)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또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줄 믿었으므로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를 사랑하심이라 28 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하시니”
우리가 어디서, 누구에게서 힘을 얻어야 합니까? “예수는 나의 힘이요!”
주님은 우리가 살아가는 중에 다양한 곳에서 힘을 얻게 하십니다.
손자손녀는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힘을 줍니다. 부모님은 자녀에게 힘을 줍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힘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웃에게 힘을 주는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대통령은 국민에게 힘을 주어야 합니다. 대통령 이름만 들어도 힘이 나야 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대통령은 국민에게 실망을 줍니다.
왕도 황제도 신하와 백성에게 오래오래 힘을 주지 못합니다. 끝내 실망을 줍니다.
부모도, 배우자도 자녀도 나에게 힘을 줄 때보다는 힘 빠지게 할 때가 더 많습니다.
나 자신도 이웃에게 힘을 주기보다는 힘 빠지게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어디서 누구에게 힘을 얻어야 합니까?
우리가 이렇게 예배함으로써 힘을 얻게 됩니다.
한 주간 살아갈 힘을 얻어서 돌아갑니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인류에게 힘을 주시는 이, 오직 주님 뿐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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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제 말씀중에 부모는 자녀에게 자녀는 부모에게
서로 배우자에게 힘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 은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힘이 되려면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 참좋았어요.
어제 오랜만에 전주에 방문한 작은딸과 한카페에
갔는데 거기에도 당신의 발걸음이 힘이 된다는
문구가 있어서 딸에게 오늘 설교 제목과 같네
예수는 나의 힘이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