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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유심시조아카데미 원문보기 글쓴이: 홍성란
제15회 유심작품상 시조부문 수상자 김제현 작품론 충담·법담, 선지식의 노래 홍성란 한 시인의 시인론을 쓴다거나 작품론을 쓴다는 일은 그 시인에게 감염되는 일이다. 박재삼 시인 타계 직후 곧바로 박재삼을 탐독하며 그에 감염되어버린 기억이 생생하다. 지병이 악화되어 죽음에 직면한 시인이 묘사하던 죽음이미지의 변모는 유원(幽遠)한 박재삼 시세계가 던지는 충격 이상의 충격이었다. 그 충격과 한없는 연민으로 글을 쓰며 지적 충일을 넘어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야 했다. 이 글쓰기도 그렇다. ‘삶의 질곡을 걸어오면서 겪은 참담한 경험들(<책머리에>, 《김제현 시조전집》, 2003)’로 묘사한 시인의 전기적 사실이, 그 질곡과 참담을 헤쳐 나아가는 마음의 일과 몸의 일을 반추하게 하고 연민과 동경의 정으로 침잠하게 하는 것이다. 침잠하되 결국 그 질곡과 참담을 딛고 일어선 대방가의 활연(豁然)한 시적 경계(境界)와 기품에 합장 돈수(頓首)하는 것이다. 글은 감발 감심에서 나온다. 글은 손이 쓰는 게 아니라, 마음이 쓴다. 그 합장 돈수하는 마음으로 글을 쓴다. 생활과 시 시인은 이미 ‘삶과 유리된 시는 기만이거나 유희일 텐데 그것은 용납할 수 없다(박기수, 〈청동의 속 깊은 울림〉 《김제현시조전집》)고 선언한 바 있다. 여기서 그의 전기적 사실을 열람하기로 하자. 박기수의 글에 따르면 어린 제현은 농사짓기 싫어했던 선친을 따라 장흥에서 여수로 이주한다. 행상으로 시작하여 주물공장, 모기약공장 등을 운영하던 여수 생활은 비교적 풍족했으나 ‘여순 반란 사건’이 터지고 공장을 화마에 앗긴 뒤, 재기를 시도하지만 또 ‘6·25전쟁’ 발발로 공장은 잿더미가 된다. 남은 건 어머니와 어린 6남매. 제현은 초등학교 5학년. 궁핍한 가운데 장학금을 받고 진학했으나 소년 가장은 산에서 나무를 해다 팔아 어린 동생들을 거두며 자퇴와 복학을 반복한다. 가정교사도 하고 ‘세상에 빚’을 지며 학업을 잇던 제현의 궁핍은 장학금을 주는 홍익대학교 신문학과에 진학하게 한다. 이때 국문과 교수 박목월을 만나 사제의 연을 맺는다. 시조를 쓰겠다는 학생에게 목월은 왜 시조를 쓰느냐 물었다. 제현은 ‘시조가 쳐져 있는 것 같아 이를 새롭게 써보고 싶다’고 했다. 목월은 ‘가람의 언어가 감각적이고 정신이 높으니 잘 배워서 새롭게 혁신시켜 보라’고 했다. 엄격하고 혹독한 지도를 받으며 ‘너는 뭐를 해도 되겠다’는 목월의 말씀에 196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도전, 〈高地〉로 입선(이은상 심사)한다. 제대하고 돌아와 보니 홍익대학교가 중앙대학교 신문학과와 통합되는 바람에 등록금 면제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생활고로 교사자격증이라도 받아 취직해야겠다는 생각에 경기대학에 진학하지만 취업은 되지 않았다. 사정을 들은 조병화 선생이 시를 열심히 쓰라는 조건으로 경희대학교 국문과 3학년에 장학생으로 편입시켜 준다. 이때부터 학업도 시업도 순조롭게 풀리기 시작했다. 당시 경희대학교에는 조태일, 조해일, 조세희, 이성부, 박이도, 김용성, 전상국 등이 있었고 이들과 교우를 맺게 된다. 졸업을 앞두고 서정범 선생의 주선으로 광운공업고등학교 교사로 취직한다. 경제적 안정으로 경희대 대학원에 지원하고 합격인사차 목월을 찾았을 때 ‘자네는 나랑 같이 공부했으면 했’다는 말씀에 한양대 대학원 시험을 쳐 합격한다. 이 일로 시인을 많이 아끼셨던 경희대 은사 조병화 선생이 몹시 서운해 했다. 1979년 황순원 선생의 추천으로 장안전문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1990년 경기대학교 교수가 된다. 이렇게 건조하게 전기적 사실을 돌아보았지만, 나의 뜻과는 상관없는 ‘궁핍’으로 ‘세상에 빚’을 지며 살아온 그 ‘질곡과 참담’의 행간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첫시조집 《凍土》(1966)에 보이는 박재삼의 발문과 같이 김제현은 ‘과묵한 편’이요, ‘보다 조심스런 편’으로 ‘행동양식은 은인자중’하였고 ‘사고방식은 온건한 중용’의 도를 지녔다.
〈도라지꽃〉에서 〈산사행〉까지 삶의 의미를 찾아 실로 먼 길을 비척거리며 걸어왔다. 삶의 의미를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 하나 둘… 의문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본다. 물음이 대답이었고 대답이 물음이었던 존재들, 모두가 고맙고 소중하고 아름답다. 좀 더 열심히 써야겠다. 2013년 발간한 한국대표명시선100 《풍경》에서 한 ‘시인의 말’이다. 찾았으되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 알 수 없다는 경계. 물음이 대답이었고 대답이 물음이었다는 경계. 우리는 가끔 하늘도 무심하다는 말을 한다. 그렇다. 하늘은 무심하다. 물어도 대답하지 않는다. 천지불인(天地不仁), 하늘은 사람의 일을 건드리지 않는다. 사람의 기분에 따라 하늘이 감동했다느니, 하늘도 무심하다느니 하는 것이다. 구하되 구할 것이 없다는 것을 몸으로 증득한 이치다. 그러나. 물음은 청법(請法)이요, 대답은 청법(聽法)이 될 것이니 시인은 끝없는 구법여행을 가는 수행자요, 견자이다. 삶의 의미를 찾아 실로 먼 길을 비척거리며 살아온 여정은 구법의 여정이다. 그 가운데 의문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보는 욕심 없고 담담하여 평화로운 시인의 예술혼은 충담(沖淡)의 풍격에 가깝다. 시인의 풍격으로서 《이십사시품》이 말하는 충담은 ‘세속에 물들지 않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고상한 취미를 지닌 사람을 평하는 말’이었다가 ‘인격미를 표현하는 미학용어’가 되었다(이하 시품은 안대회의 《궁극의 시학》 참조). 충담은 비어있다는 충(沖)과 담담하다는 담(淡)의 조합이다. 충담의 예술혼을 가진 시인은 ‘소박하게 생활하고 묵묵히 침묵’을 지킨다. 그런 생활 가운데 천기(天機) 즉, ‘자연과 사물의 미묘한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여 예리하게 포착’한다. 포착하되 묵묵히 침묵을 지키듯 꾸미지 않고 투박하게 드러낸다. ‘삶과 유리된 시는 기만이거나 유희’로 보는 만큼 제현의 풍격은 생활 가운데 묘파한 천기, 충담 그 자체다. 뿔 여린 사슴의 무리 神話같이 살아온 산. 서그럭 흔들리는 몸을 다시 가눈 곳에 이 고장 마음 색 띠고 도라지꽃 피는가. 신음과 기도 위로 선지피 뚝뚝 듣던 산. 이대로 이울고 말 立像인가 말이 없이 먼 하늘 머리에 이고 도라지꽃 피었다. -〈도라지꽃〉《현대문학》(1963년 등단작) 시인이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도라지는 기품, 성실을 꽃말로 가지고 있다.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이 외려 발길을 끄는 도라지꽃은 지금보다 더 자주 삶의 언저리에서 마주치는 꽃이었을 것이다. 전란의 고통 속에서도 이 나라 “이 고장”이 지녀야 할 당위를 노래한 〈도라지꽃〉. 이 고장은 본시 “뿔 여린 사슴의 무리”가 “神話같이 살아온” 아름다운 고장이었으니 마땅히 “먼 하늘 머리에 이고/도라지꽃 피”는 평화로운 정경이 도래해야 한다는 염원을 담담히 드러낸다.
충담, 상(相) 너머 상(相) 박재삼의 수사대로 김제현의 ‘세상을 살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늘 과묵하고 조심스럽다. 은인자중, 하고 싶은 말을 마음속에 두고 견디면서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는 삶의 태도를 보이는가 하면 온건 중용, 사리에 맞고 건실하여 치우치지 아니하니 떳떳함을 보인다. 어떠한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치우치지 않으려는 삶은 보행을 어렵게 한다. 나의 오랜 보행은 허공에 한 발. 지상에 한 발. 생애의 體積은 바람에 날리고 무시로 바닥이 닳는 발은 허공에 떠 있다. 뒤뚱 발이 기울면 따라 기우는 세상 맥이 다 풀린 발은 무릎을 꿇는 비굴이 된다. 이윽고 발이 확인한 지상엔 딛고 설 하루가 없다. -〈步行〉《山番地》(1979) “생애의 體積”이 “바람에 날리”다니! 60여 년 동안 삶의 질곡을 걸어오면서 겪은 참담한 경험들이 “뒤뚱 발이 기울”게 했으리. 기울면 기우는 대로 “맥이 다 풀린 발은/무릎을 꿇는 비굴”이 된다. 타협하지 않는 자존이 홀로 마음의 무릎을 꿇게 했으리. “비굴”이라 했으나, 꼭 용기나 줏대가 없어서 굽히는 것은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을 마음속에 두고 견디면서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는 ‘방편’이겠다. “이윽고/발이 확인한 지상엔/딛고 설/하루가 없다”는 경계. 딛고 설, 없는 하루를 굳이 구하려 하지 않는 경계. 비가 온다 오기로니 바람이 분다 불기로니 지상은 비바람에 젖는 날이 많지만 언젠간 개이리란다 그러나 개이느니 -〈無爲〉《무상의 별빛》(1990) 비는 왜 오고 바람은 왜 부는지. 그것을 다만 원인과 조건이라는 인과관계로 묻지 말 것. 무위(無爲)는 ‘현상을 떠난 절대적인 것’으로, ‘생멸의 변화를 넘은 상주절대(常住絶代)의 진실’이다. 그저 비가 오면 오는 것이고, 바람이 불면 부는 것이다. 세속의 삶이 아무리 “비바람에/젖는 날이 많”다 해도 “언젠간 개이리”라 본다. 개다가는 또 젖을 것이고 그렇게 젖는 날이 많아 일평생 젖어 살 것 같지만 “그러나 개이느니”라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무상(無常)의 진리 또한 상주절대의 진실이라고 어떠한 치장도 없이 설하고 있지 않은가. 비가 오고 바람이 분다. 그것은 오늘의 날씨. 신발을 적시며 지나가는 사람 몇…… 내일은 개인다지만 그 또한, 지상의 날씨. 때를 묻히면서 세상을 알게 되고 눈이 흐려지면서 밝아오는 이치의 적당히 흐린 눈으로 밖을 보는 우일. -〈雨日〉《무상의 별빛》(1990)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은 건드릴 수 없는 자연(自然)이다. “개인다”는 것 또한 인위(人爲)로는 가릴 수 없는 자연이다. “그것은 오늘의 날씨”일 뿐 인간의 한계는 그를 건드릴 수 없다. 마땅히, 이 지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살고자 하는 생명욕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유한한 생명도 자연이요, 살고자 하는 생명욕도 자연 현상이다. 이 한계는 생자필멸(生者必滅)로 대변되지 않는가. 이 생자필멸이 두려움을 낳는다. 죽지 않고 살아야겠다는 욕망. 이 살아야겠다는 생존욕이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하고 더 잘 사는 길을 도모하게 한다. 그 길 위에서 우리는 “때를 묻히”게 되고 그렇게 때를 묻히는 부끄러움과 뉘우침 속에서 “세상을 알”아 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때를 묻히며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눈이 흐려지”는 것이다. 이는 생물학적 퇴영이기도 하지만 그 가운데 “밝아오는 이치의//적당히 흐린 눈”을 가지게 하기도 한다. 적당히 흐린 눈은 어쩌면 분별심을 없애는 회광반조(廻光返照)의 지혜 아닐까. 회광반조. 지혜의 빛을 발하여 자기를 반성하고 진실한 자신을 발견하려는 견자의 노회(老獪)한 시선이라면 어떨까.
바람은 처음부터 세상에 뜻이 없어 이날토록 빈 하늘만 떠돌아다니지만 눈 속의 매화 한 송이 바람 먹고 벙근다. 매이지 말라 매이지 말라 무시로 깨워주던 포장집 소주 맛 같은 아, 한국의 겨울바람. 조금은 안 됐다는 듯 꽃잎 하나 떨구고 간다. -〈바람〉《무상의 별빛》(1990) “떠돌아다니”며 어디에도 “매이지 말라”는 바람의 존재성으로 보면, 집착하지 말라는 은유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겠다는 결기. 집착을 떨쳐버렸다는 건 얼마나 독하고 쓸쓸한 이야기인가. 그러나 “이날토록 빈 하늘만/떠돌아다니”는 바람이지만 그 “바람 먹고” “눈 속의 매화”는 “벙근다.” 이처럼 충담의 풍격은 쓸쓸하나 따뜻함을 잃지 않는다. “조금은 안 됐다는 듯/꽃잎 하나 떨구고” 가는 것이다.
뎅그렁 바람 따라 풍경이 웁니다. 그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합니다. 卍燈이 꺼진 산에 풍경이 웁니다.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無上의 별빛. 아, 쇠도 혼자서 우는 아픔이 있나 봅니다. -〈風磬〉《무상의 별빛》(1990) “비어서 오히려 넘치는 無上의 별빛”은 무얼까. “卍燈이 꺼진 산에/풍경”은 “뎅그렁”, 울고 빈 하늘에 한 떨기 별빛은 더할 수 없이 영롱하게 빛나고 뎅그렁, 소리는 다만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소리 너머의 소리는 무얼까.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뎅그렁, 이 육근으로 그려낼 수 있는 ‘상(相) 너머 상’은 무얼까.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적막을 알지 못”하리. 오직 모를 뿐. 오직 모를 뿐이어서 아프다. “아, 쇠도 혼자서 우는/아픔이 있나” 보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경계. 여기 상 너머 상이 있다. 뎅그렁, 우는 풍경의 소리는 다만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소리일 뿐. 견자는 아무도 그 마음 속 깊은 적막을 알지 못하는 상 너머 상을 육안을 넘어선 심안으로 조견(照見)하여 우리의 무명(無明)을 밝히는 건 아닐까.
늙은 어부 혼자 앉아 그물을 깁고 있다. 매양 끌어 올리는 것은 파도소리며 달빛뿐이지만
내일의 투망을 위해 그물코를 깁고 있다. 알 수 없는 水深을 자맥질해 온 어부의 젖은 생애가 가을볕에 타고 있다. 자갈밭 널린 그물에 흰 구름이 걸린다. -〈그물〉《무상의 별빛》(1990) 모르고 모를 뿐. 인생의 도(道)는 “알 수 없는 水深”과 같아서 모르고 모를 뿐인 우리의 생활은 끝없는 “자맥질”이다. 우리는 너나없이 “혼자 앉아” “내일의 투망을 위해/그물코를 깁”는 “늙은 어부”다. “매양 끌어올리는 것은/파도소리며 달빛뿐”이라는 구절과 “자갈밭 널린 그물에/흰 구름이 걸린다”는 구절을 두고 우리는 시적 표현이라 한다. 그물로 끌어 올릴 수 없는 것들을 끌어올리고, 그물에 걸릴 수 없는 흰 구름이 걸린다는 언어를 초월한 경계는 고착된 상을 해체하고 새로운 상을 창조하는 견자의 노래다.
변조, 싱싱한 자유 박목월은 《凍土》의 서문에서 ‘그의 첫 작품은 가람의 섬세하고 정밀한 언어 조탁에 비하면 거칠기는 하여도 싱싱하고 노산의 나긋한 감상과 재치 있는 솜씨에 비하면 무척 건조하고도 직선적이기는 하지만 언어구사가 대담하고 자유스러우며 골격이 든든한 작품’으로 평가했다. 이어서 ‘그가 염원하고 지향한 대로 시조의 현대적인 혁신을 위하여 매진하’였고 가람처럼 ‘蘭草 따위의 고루한 취미나 자연’을 다루기보다는 그를 ‘의식적으로 회피하며 보다 예리한 현대적 의식으로써 생활에 밀착된 면에서 시조의 새로운 영역의 개척에 노력’한 공로를 인정했다. 아울러 제현의 이러한 노력과 염원은 ‘시조로서 여러 가지 문제성을 안고 있’다고 보면서도 ‘그의 이러한 노력과 추구가 시조시단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은 사실만은 누구나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우리는 제현의 예술혼을 충담의 풍격으로 논의했다. 제현의 충담은 목월의 이 서문에서도 드러난다. 거칠기는 하여도 싱싱하고, 무척 건조하고도 직선적이지만 언어구사가 대담하고 자유스러우며 골격이 든든한 시경. 예리한 현대적 의식으로써 생활에 밀착된 면을 구사하는 시풍. 이 같은 목월의 술회는 화려와 번잡이 없고 조탁한 느낌이 없는 투박함과 무욕 무작위의 시적 태도로서 충담의 풍격을 지시한다. 충담의 풍격은 ‘세속의 공리적인 속박에 찌들지 않고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멋’에 있다. 제현의 이 매이지 않는 정신의 자유가 거칠고 싱싱하고 대담한 혁신적 시조를 창작하게 했을 것이다. 제현은 시조의 대중성은 시조의 운율에서 비롯되며, 시조의 운율은 생태의 리듬과 일치하기에 자연스럽고 친근하다고 했다(박기하, 앞의 글).
나는 불이었다. 그리움이었다. 구름에 싸여 어둠을 떠돌다가 바람을 만나 예까지 와 한 조각 돌이 되었다. 천둥 비바람에 깨지고 부서지면서도 아얏,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견뎌야 할 목숨이 남아 있음에서라. 사람들이 와 ‘절망을 말하면 절망’이 되고 ‘소망을 말하면 또 소망’이 되지만 억 년을 엎드려도 깨칠 수 없는 하늘 소리. 땅의 소리. -〈돌·1〉《무상의 별빛》(1990) 이 작품은 장 단위, 4음4보격 16음절(16모라: mora는 음절, 장음(―), 정음(∨)을 수렴하는 개념으로 1모라는 1음절 정도의 음량을 갖는다)의 음량을 가지는 평시조이다. 파격인가, 자유시인가. 논란을 부를 사람은 논란을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조 율격 위에서 제현의 자유롭고 자연스러워 다채로운 리듬 의식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를 편의상 장 단위 발화로 재편하여 율격 마디를 분할해 본다.
나는―∨ | 불이었다. ∥ 그리움― |이었다.∨ 구름에― | 싸여―∨ ∥ 어둠을― |떠돌다가 바람을 |만나 예까지 와 ∥한 조각 돌이 |되었다.∨ 천둥―∨ | 비바람에 ∥ 깨지고― |부서지면서도 아얏,―∨| 소리 한번 ∥ 지르지― |못하는 것은 아직도 |견뎌야 할 목숨이∥ 남아 있음 |에서라.∨ 사람들이 와| ‘절망을― ∥ 말하면― |절망’이 되고 ‘소망을―∨| 말하면― ∥ 또 소망’이 | 되지만∨ 억 년을|엎드려도 깨칠 수 없는∥하늘 소리.|땅의 소리. 〈돌·1〉은 심오한 인연(因緣)을 노래하고 있다. 불교적 관점에서, 모든 존재는 인과 연의 결합으로 형성되는 연기적 흐름 가운데 있다. 이 중중무진(重重無盡)의 연기(緣起)로서 “나”라는 존재는 ‘불→그리움→구름→어둠→바람→돌’로 윤회하고 있으니 그것은 일체 일원상(一圓相)을 그리는 바. 언제 다시 깨지고 부서져 무엇이 될지 모를 뿐이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와 절망을 말하면” 들어주고 “소망을 말하면” 들어주며 절망이 되었다가, 소망이 되었다가 다만 “견”디고 견디는 “돌”이다. 중중무진의 연기는 “억년을 엎드려도 깨칠 수 없”으니 모르고 모를 뿐. 모르고 모를 뿐이다. 앞서 살핀, 율격 마디의 분할기준은 첫째로 등가성을 기준으로 하는 율격적 단위로 나눈다. 둘째로 의미내용의 응집력을 가지는 의미적 단위로 나눈다. 셋째로 문법적 의미를 가지는 통사적 단위를 기준으로 나눈다. 이러한 기준으로 위와 같이 율격 마디는 분할된다. 우리 시가는 4모라를 기준으로 하는 율격 마디를 가지는데 한번 호흡으로 가능한 기식의 단위, 곧 호기군은 5모라까지 가능하다(성기옥). 고시조에서도 이러한 양상은 흔히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부서지면서도”라는 둘째 수 초장의 4번째 마디다. 이 경우 기준음량보다 2모라 정도의 음량을 넘어선 파격을 보이지만 이러한 경우는, 촉급하게 불러 무리가 없었다는 것을 고시조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기울계 | 대니거니 나 ∥ 죡박귀 |업거니 니 -《청진》 松江 062 초장 酒客이 | 淸濁을 희랴 ∥ 나 나 |마고 걸러 -《청진》 三數大葉 421 초장 山 절로절로|水 절로절로∥ 山水間에 |나도 절로절로 -《청진》 樂時調 462 중장 인용한 고시조는 김천택의 《진본 청구영언》(1728)에서 옮겼다. 술 좋아하는 송강의 작품은 하고 싶은 대로 말한 일상담화를 자연스럽게 노래에 얹었다. 이것이 시조이고 시조의 율격인 것이다. 삼삭대엽에 오른 421번 역시 술 좋아하는 이의 노래다. 청탁을 가리지 않고 다 마시겠다는 노래이고 보니 더 가릴 것 없이 말하는 대로 노래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시조다. 462번의 경우도 자연 속에 자연으로 살겠다는 마음을 아주 자연스럽게 노래하고 보니 가릴 게 없다. 5음절도 좋고 6음절도 좋아, 사설시조는 아니어도 살짝 파격을 한 여유가 낭창거리는 노래를 만들었다. 제현의 말대로 시조 선현들은 시조를 ‘자연스럽고 친근’한 우리 일상의 말을 그대로 써서 ‘생태의 리듬과 일치’하게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조의 대중성’을 불러올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이치인 것이다. 과문한 견해일 수 있으나, 당시에 이 핵심을 파악하고 시조를 쓰는 시인은 거의 없다고 본다. 따라서 당대의 목월은 ‘시조로서 여러 가지 문제성을 안고 있’으면서도 제현의 ‘이러한 노력과 추구가 시조시단에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은 사실만은 누구나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눈이 내린다. 구봉산 한산사*가 눈에 덮인다.
한빛의 하늘과 땅, 너무 넓어서 너무 멀어서 갈 곳을 잃은 즘생[衆生]들 눈밭에 뒤척인다. 어찌 산공부 떠나야만 보살이 되랴 도사가 되랴. 한세상 살아가는 일 그 또한 卍行인 것을 땅속엔 풍뎅이 보살, 하늘엔 솔개 보살. -〈山寺行〉《김제현 시조전집》(2003) 한산사는 여수시 구봉산에 있는 절이다. 《풍경》에서 한 ‘시인의 말’대로 삶의 의미를 찾아 실로 먼 길을 비척거리며 살아온 시인의 여정이 보인다. 아니 구법행이 보인다. 삶의 의미를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 하나 둘, 의문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본다는 시인. 물음이 대답이었고 대답이 물음이었던 모든 존재들. 내 앞의 모든 이들이 고맙고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인식. 그러면서 좀 더 열심히 시를 써야겠다는 발심. 청법(請法)이고, 청법(聽法)이다. 〈山寺行〉은 자유로운 정신의 기개와 시조 운용의 맛과 멋을 아무렇지도 않게, 허리 구부려 줍듯 건져 올리고 있다.
눈이 내린다.| 구봉산― ∥ 한산사가 |눈에 덮인다.
통사단위를 포함한 의미의 응집력으로 볼 때, “구봉산 한산사가”는 한 단위로 읽힌다. 그러나 가장 우선시되는 율격 마디의 분할 조건은 등가성이므로 위와 같이 율격 마디를 표시할 수 있다. 그러니 멋스럽다. 도식적 율격 운용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나 있기에 아름답다. 눈이 내린다. 구봉산 한산사가 눈에 덮인다.
낭송을 한다면, 이와 같이 행이 바뀌듯 시간의 흐름을 여백처럼 두고 눈에 덮여가는 구봉산 한산사의 풍경을 떠올리게 천천히 읽을 것이다. 아름답다. “구봉산 한산사”로 가는 산길은 눈에 덮여 “한빛”이다. 눈 덮인 길 위에서 길 “잃은” 것이 짐승뿐일까. 그러니 “즘생[衆生]들”이다. 눈 덮인 산길, 길 없는 길을 가며 출가수행자만이 수행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예토에 살며, 때를 묻히며 부끄러워 뉘우치며 후회하며, 고쳐 살아야겠다는 청정심을 내며 산다는 일 또한 만행이라는 깨달음. 만유가 나를 깨우쳐주는 선지식이고 보살임을 안다. “땅속엔 풍뎅이 보살, 하늘엔 솔개 보살.”! 진정한 시인으로 산다는 일은 만유에게 청하고 듣는 ‘구법여행’임을 알겠다.
늙을 줄 안다는 일 시조를 쓰겠다는 학생에게 목월은 왜 시조를 쓰느냐고 물었다. 제현은 시조가 쳐져 있는 것 같아 이를 새롭게 써보고 싶다고 했다. 당찬 대답이었다. 목월은 가람의 언어가 감각적이고 정신이 높으니 잘 배워서 새롭게 혁신시켜 보라고 했다. 제자는 스승의 말씀을 잘 받들었다. 제현은 쳐져 있는 시조를 일으켜 세워 시어를 일신하고 율격을 변주하며 혁신적 시조로 현대시조의 새로운 기풍을 진작시켰다. 목월은 시도 나이가 들면 늙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제현은 나이 들면서 여유롭고 품이 넉넉하여 완숙한 시를 쓰라는 의미로 받들었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시조에서도 긴장을 풀고 싶다. 예민한 감성, 고도의 지성, 치열한 시정신, 깊은 통찰력과 새로운 율격이 요구되는 것이 현대시조인데 시에서 이러한 긴장감을 빼버리면 무엇이 되겠는가. 아마도 시 아닌 그저 덤덤하고 무의미한 시조 비슷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여유롭고 쉽고 재미있는 시조를 써 보고 싶다. 하지만 넋두리는 아니게… -‘시인의 말’에서 《우물 안 개구리》(2010) 원로 대방가는 이제 그저 덤덤하고 무의미한 시조를 쓰겠다는 무욕의 경지에 이르렀다. 제현의 예술혼이 바로 충담의 풍격에 닿아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충은 비어있다는 뜻으로 욕심이 없는 평화로운 성질을 가리키고, 담은 담담함이다. 충담은 소리높이지 않아 평화롭고 꾸미지 않아 담백한 풍격을 가리킨다. 대방가의 삶과 인식이 여기에 이르렀다. 암록색 무당개구리 우물 안에서 산다.
바깥세상 나가봐야 패대기쳐져 죽을 목숨 온전히 보존키 위해 우물 안에서 산다. 짝짓고 알 슬기에 깊고 넉넉한 공간 이따금 두레박 소리에 잠을 설치고 별들의 전갈을 기다리며 눈이 붓도록 운다. -〈우물 안 개구리〉《우물 안 개구리》(2010) “바깥세상 나가봐야/패대기쳐져 죽을 목숨”이라는 발화는 세속의 영화 따위는 곁눈질하지 않겠다는 투박한 언어다. 살기 위해 산다는 솔직 담박 투박한 언어. 그러나 “눈이 붓도록” 우는 “무당개구리”는 “이따금” “우물 안”으로 드리워지는 “두레박 소리에/잠을 설치”며 “별들의 전갈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있는 것은 생존욕이 있고 살기 위한 행위를 도모해야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 줄 무언가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와 같이 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는 것이 무당개구리뿐일까. 시인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구법여행에 나선 시인의 기다림은 선지식을 만나 만유의 공성(空性)을 증득하고, 깨달음의 예술혼을 실현하는 것이리.
경운기가 투덜대며 지나가는 길섶 시속 6m의 속력으로 달팽이가 달리고 있다. 천만 년 전에 상륙하여 예까지 온 것이다. 어디로 가는지 가야 하는지 알 수 없는 길을 산달팽이 한 마리 쉬임없이 가고 있다. 조금도 서두름 없이 전속으로 달리고 있다. -〈달팽이〉《風磬》(2013) “달팽이”는 “천만 년 전에 상륙하여” “시속 6m”의 전속력으로 달려 시인 앞에 왔다. 달팽이는 이 선지식을 만나러 천만 년 전부터 오고 있던 건 아닐까. 시인은 달팽이라는 선지식을 찾아 “경운기가 투덜대며/지나가는 길섶”에 다다른 건 아닐까. “조금도 서두름 없이/전속으로 달리고 있다.”니! 이 모순형용은 경조탁사(驚鳥啄蛇), 놀란 새가 뱀을 쪼듯 종장을 감치며 이 시를 부양하는 힘이다. 빠름 빠름을 외치는 이 시대의 속도전에서 우리는 조금도 서두름이 없되 힘껏 마음껏, 전력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대방가의 무설설(無說說)이다.
《사투리》, 무작묘용 《사투리》(2016)는 단시조집이다. ‘시인의 말’처럼 시조의 원형적 모습은 단수이고, 시조 정통성과 정체성의 규준이 된다는 점에서 근자에 단시조집 기획이 활발하다. ‘하지만 넋두리는 아니게’, ‘덤덤하고 무의미한 시조’, ‘여유롭고’ ‘좀 더 쉽고 재미있는 시조를 써 보고 싶’다는 시인의 마음이 담긴 《사투리》는 천지의 기미, 인생의 도를 증득한 충담, 자연의 시경으로 충일하다.
단풍이 하도 고와 핸드폰을 엽니다 버튼을 눌러보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습니다 공연히 무안한 마음에 핸드폰을 닫습니다 -〈가을 傳言〉 전문 단풍 고운 어디를 산책하는 것일까. 하도 고운 단풍빛을 누구와 나누고 싶었을까. 누군가를 호출하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다. 부질없이 전화를 했나보다. 무안한 마음에 핸드폰을 닫는다. 허리 구부려 주우니 그게 바로 시(俯拾卽詩)라, 그저 건져 올린 자연이며 기교를 부리지 않으니 담백하다. 충담의 시경에서는 ‘쓸쓸함이 묻어난다.’ 쓸쓸하지만 이면에는 쉽게 내보이지 않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들어 있다. 혼자 밥 먹고 혼자서 놀다 책을 읽다 깜박 졸다. 새소리에 깨어보니 새들은 간 데 없고 가을만 깊을 대로 깊었다. 나무들도 아픈가 보다. -〈가을 일기〉 전문 하기 어려운 말 하나 없는 〈가을 일기〉를 보면 ‘동쪽 울타리 아래서 국화꽃을 따다가(採菊東籬下) 문득 앞산이 눈에 들어왔나니(悠然見南山)’라는 도연명의 〈술을 마시며〉 한 구절이 떠오른다. “새소리에 깨어보니//새들은 간 데 없고//가을만 깊을 대로 깊었다.” 충담 자연. 무작위의 자연으로 얻은 평화롭고 맑은 시경이다. 오는 듯 가버린 것이여 친숙한 낯섦이여 너 곧 아니더면 이 업을 어이 하리 오늘도 멍청한 짓을 또 했구나 너를 믿고. -〈무상〉 전문 말로는 제행무상, 제행무상 하면서도 우리는 무상(無常)을 잊고 변심이니 배신이니 하며 변한 것에 대해 원망하기를 얼마나 했던가. 오늘은 네가 있어 좋고 내일도 네가 있어 좋을 줄 알았는데 너는 “오는 듯 가버”렸으니 “가버린 것”으로 문득 환경은 “낯”설었으리. 그러려니. 그 낯선 환경도 곧 “친숙”해지려니. 우리는 너나없이 업식(業識)을 안고 사는 업아(業我)이니 “오늘도 멍청한 짓”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멍청한 짓도 오는 듯 가버릴 것이니. 무상이어서 다행이다. “너를 믿”는다. 고맙다, 무상.
모르고 모를 뿐
안이비설신의. 이 육근으로 받아들여 구축한 상(相)은 믿을만한 것인가. 《금강경》에서는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 이 아인사상(我人四相)을 버리라 했다. 왜 버려야 할 것인가. 이 상이라는 것은 ‘인간이 생존을 위해 만들어낸 참으로 자기중심적이고 허술한 해석의 일종(정효구, 《붓다와 함께 쓰는 시론》)’이기에 그렇다. 인간은 이 허술한 해석이 빚어낸 상을 가지고 마음을 쓴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면, 마음을 쓴다는 것은 얼마나 위중(威重)한 일인가. 그러니 무심(無心)이라는 말에 주목해보는 것이다. 무심은 마음의 작용이 없는 것, 일체의 사념을 없앤 마음의 상태, 망념을 떨어낸 진심이다(《信心銘》. 한세상 사는 법을 어디 가서 배우랴 망설이다 머뭇거리다 다 놓쳐버린 사랑이여 마음이 보이는 길을 어디 가서 찾으랴 -〈한세상 사는 법을 어디 가서 배우랴〉 전문
무심. 일체의 사념을 없앤 상태. 그렇다면 “망설이다 머뭇거리다”는 이렇다 할 마음을 내지 못해 아직 상이 없다는 건 아닐까. 집착이 없다는 건 아닐까. “마음이 보이는 길”을 “찾”는다는 건 지금 내게 마음 낼 마음이 없다는 것이리. 그러니 나를 깨우쳐줄 선지식을 만나기 위해 끝없는 구법여행을 멈출 수가 없다. 그러니 쓰고 또 쓰는 견자일 밖에. 〈한세상 사는 법을 어디 가서 배우랴〉! 하기 어려운 말이 없는 시. 자연스럽고 담담하고 친근한 이 발화는 그대로 더하고 뺄 것도 없는 ‘생태의 리듬’ 아닌가. 이것이 고시조의 참모습이었고 이것이 제현의 혁신적 시조였고 이것이 오늘의 시조여야 한다.
러닝머신을 타고 달린다 앞만 보고 달린다 뛰고 또 뛰었는데도 한 발짝도 못나가는 走力 한종일 제자리걸음 타박타박 숨이 차다 눈을 뜨고 달렸는가 눈을 감고 달렸는가 한걸음도 못 나가는 나의 走法, 러닝머신 내려와 숨을 고른다 늙은이 허세도 접는다 -〈헬스장에서〉《월간문학》(2016년 7월호) 글러브 낀 손을 내리며 덤비라고 시늉하던 챔피언 홍수환이 떠오른다. 구할 바 없는 무심 무욕의 시인은 두려울 것도 없으리. 덤벼라. “앞만 보고 달”렸는데도 “뛰고 또 뛰었는데도/한 발짝도 못나가는 주력”이고 “한걸음도 못나가는/나의 주법”이다. 구하는 바 없으니 부끄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다. 덤벼라. “러닝머신”을 “내려와 숨을 고른다.” “늙은이 허세도 접는다”니! 무심 담담, 충담이다. 견자 그리고 환희심 만유가 다 우리에게 법을 배울 수 있게 하는 선지식이고 보면 시인은 천지만물 두두물물에서 문득, 무상의 언어를 찾아 떠나는 ‘구법여행자’다. 무상(無上)일까, 무상(無相)일까. 봄비가 촉촉이 밭고랑을 적시고 있다 봄이 와도 싹이 트지 않는 내 안의 들판 무엇을 심을 것인가 이 가뭇없는 삽질 -〈봄비〉 전문 “내 안의 들판”에 “싹이 트”라고 “봄비가” 오는데, “무엇을 심을 것인가”, 싹은 틀 것인가. 시인은 ‘무한 향상’을 위해, 무상의 언어를 만나기 위해 “가뭇없는 삽질” 중이다. 가뭇없는 삽질은 그치지 않는 구법여행. 법을 찾아 진리를 찾아 무상의 언어를 찾아가는 여행은 그치지 않는다. 무엇을 심을 것인가. 무엇을 찾을 것인가.
햇살이 하도 좋아 산책길에 나섰다. 喜壽를 막 지난 듯한 赤松 몇 몇 마른 흙냄새. 좋아라 이승의 한나절 하릴없는 산책길. -〈겨울 산책길〉 전문 “햇살” “좋”은 “겨울 산책길”에 서면 누구나 이유 없는 미소가 어릴법한데, 일흔일곱을 “막 지난 듯한/적송 몇” 그루 눈에 드니 오랜 친구를 만난 것 같다. 아직 우리 살아있다는 이 기쁨! 도리 없이 “마른 흙냄새”도 향기로운 산책길이다. “이승의 한나절”이 선물이듯 우리 그냥 좋다. 살아 있는 이 순간 더불어 고맙다. 환희심! 허리 구부려 주운 무상의 설법이다.
어디로 떨어져야 할지 몰라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 그렇게도 바람에 흔들리더니 포로롱 하늘을 난다 새가 되어 난다 -〈새가 되어 날다〉 전문 바람 부는 차안(此岸)에서 우리는 너나없이 “어디로 떨어져야 할지 몰라” 간댕거리며 달려 있는 나뭇잎 하나. 그렇게도 흔들리다가는 “포로롱 하늘을 난다/새가 되어 난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더 나아갈 바 없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떨어진다. 그렇게도 바람에 흔들리며 “매달려 있던/ 나뭇잎 하나,” 떨어져 내리며 얻은 대자유. 가지를 버리고 날개를 얻었다. 떨어지는 나뭇잎 하나에서 얻은 천기. 하기 어려운 말 하나 없이 소박하고 꾸밈없는 언어. 충담의 예술혼을 본다.
선지식의 노래 원로 대방가는 말한다. 50년이 넘도록 시조를 써오고 있으나 아직도 말을 다루는 솜씨가 무디고 거칠다고. 천부적인 시인은 아닌 성 싶다고. 그럼에도 지금껏 시를 써오고 있다고. 선지식 제현은 말한다. 지금껏 삶의 의미를 찾아 실로 먼 길을 비척거리며 걸어왔다고. 삶의 의미를 찾았는지 못 찾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 모든 것은 생에 대한 물음이었고 대답이었고 대답 또한 물음이었다고. 주위를 둘러보면 그 모두가 고맙고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그리고 좀 더 열심히 써야겠다고. 홍성란 시인.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으로 등단. 《춤》 《바람의 머리카락》 한국대표명시선100 《애인 있어요》 단시조60선 《소풍》 낭송하기좋은시조100선 《세상의 가장 안쪽》 시조감상에세이 《백팔번뇌-하늘의 소리 땅의 소리》 등이 있다. 유심작품상, 중앙시조대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한국시조대상, 조운문학상 등 수상. 방송대∙성균관대 강사, 《유심》 상임편집위원 등 역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