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들 훌륭한 장난감, 호박꽃과 ‘호박벌’
<추억의 놀이 1> 호박벌을 찾아서
김규환 기자 kgh17@hitel.net
|
|
▲ 호박벌이 2마리나 들어가 있습니다.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서서히
접근하겠습니다. 2마리 다 잡을 수 있을까요? |
|
ⓒ 김규환 |
|
호박은 꽤 나와 친한 농작물이다. 호박씨 까먹기는 것은 ‘귀신 씨나락 까먹기’만큼이나 입과 손톱이 즐겁다. 이 뿐인가? 호박은 무, 감자
다음으로 쓰임새가 많다.
애호박으로 호박전을 만들어 먹어도 그만이요, 찌개거리로도 최곤데
갈치조림엔 역시 호박이다. 호박볶음도 좋고 어머니가 해주시던 호박
나물(밥 할 때 쪄서 간장과 고춧가루만 넣고 버무리면 그 맛이 끝내준다)은 여름만 되면 꼭 서너 번은 해먹어야 직성이 풀린다.
여기에 약간 쇤 듯한 호박을 초가을 민물 새우 토하(土蝦)를 넣고 되직하게 지져놓으면 설컹설컹한 느낌과 적당히 물컹한 맛이 어울려 술안주로 최고니 호박은 국물을 선호하는 한식주의자(韓食主義者)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리감이다.
서리가 언제 내릴지 모르는 늦가을. 호박을 온전하게 건지려면 두메
산골 밭으로 달음질을 해야 한다. 그래도 사람 머리통 세 배가 넘는 호박 따는 것은 즐겁다. “톡” 하며 꼭지가 부러지는 소리는 잘 익은 수박을 두드렸을 때보다 더 경쾌하다.
어린 내가 그 큰 호박 대여섯 덩이를 지고 내려오는 것은 힘겨웠다. 하지만 노랗게 잘 익은 늙은 호박을 가득 바지게에 얹어 뒤뚱뒤뚱 산길
내려오는 노동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었다.
비 들이치지 않는 처마에 짚으로 엮어서 말려 뒀다가 팥 알맹이 넣고
찹쌀 반죽해서 호박죽 쒀 먹는 즐거움과 가장 아끼는 소에게 죽죽 잘라 쇠죽을 쒀주면 잘 먹은 이유에서다. 솔직히 그 호박쪼가리를 뺏어
먹고 싶을 지경이었다. 달콤한 호박엿도 빼 놓을 수 없다.
호박 종류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전문가가 아닌 내가 아는 것은 대강
이렇다. 전통의 둥근 조선호박, 애호박이라 불리는 잘록한 연두빛 호박. 넝쿨이기 보다 마디마디 위로 올라가면서 꽃이 피어 호박을 아래로 향해 매달고 있는 마디애호박은 보통 애호박 보다 더 짙은 녹색을
띤 서양호박일 것이다. 약호박, 단호박, 몇 해 전 먹어보기 시작한 국수호박 등 여러 가지다.
|
|
▲ 국수호박은 가평에 가면 많이 있는데 이 호박을 찌면 국수가락이 나옵니다. 쫄깃한 맛이 일품인데 대중화엔 실패한 것
같습니다. 색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답니다. |
|
ⓒ 김규환 |
|
요모조모 맛난 음식을 만들어 줘 입맛을 돋궈주니 싫어할 까닭이 없는
이 농작물을 심을 때도 꽤나 힘이 들었다. 호박구덩이를 만들 때는 반드시 퇴비를 한 짐 씩 지고 나서야 한다. 아직 늦서리(첫서리는 가을에
내리므로 늦서리는 이른봄에 내립니다)가 끝나지 않은 이른 봄. 응달진 밭은 채 눈이 녹지 않을 때도 있고 서릿발이 성성하다.
겨우내 아랫목에 잘 말려 보관해뒀던 호박씨를 한 봉지 챙겨서 밭가
언덕으로 간다. 주변을 정리하여 흙을 골라 작은 구덩이를 만들어 퇴비를 한 삽 더 되게 듬뿍 넣으면 일단 준비는 마친 상태다.
잘고 고르게 만든 흙에 호박씨를 “하나! 둘! 셋!” 세어가며 가늘고 날렵한 부분을 아래쪽으로 향하게 땅에 꽂아 준다. 그 다음 주변의 자잘한 몽근 흙과 퇴비를 뿌려주고 비닐이나 거적 덮개, 또는 나뭇잎으로
덮어주면 끝이다.
그 전에 대나무 쪼갠 것이나 산죽을 휘어지게 오므려 다시 꽂아 열십자(+) 모양으로 귀여운 터널을 만들어 주는 일을 해야 했다. 싹을 틔우면 구멍 하나 “뽕” 하고 뚫어주면 그 다음부터 자라는 것은 자기들
몫이다. 이렇게 퇴비 한 짐 지고 가면 스무 구덩이 정도 만들었다.
무럭무럭 자라 땅에 닿는 부분 줄기 마디마다 길쭉하고 하얀 뿌리가
나와 흙을 헤집고 들어간다. 그 때부터는 비 한 번 왔다하면 새 줄기가
나오고 급속하게 퍼져나간다. 위로만 자랄 것 같던 호박 줄기는 주위의 수분과 양분을 양껏 들이키고 옆으로 눕더니 50cm, 1m, 2m, 5m, 10m가 넘게 쭉쭉 뻗어 제멋대로 퍼져 나가니 방향을 잡아주지 않으면 고추밭 오이 밭을 가리지 않고 차지한다. 나무를 칭칭 감고 올라가고 풀숲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왕성한 생장 능력이라고는 하지만 호박꽃은 6월 말 장마 시작 무렵이나 가을철에 가장 많은 꽃을 피운다. 손에 한 웅큼 잡히는 제법 큰
호박꽃을 맘 붙이고 한 번 들여다보자.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 보면 화려한 맛은 없어도 어여쁘기 나무랄 데 없다. 있을 건 다 있고 꽃가루도
제법 많다. 벌도 부지기수로 찾아든다. 그 크고 까만 호박벌이 찾아오는 건 손쉽게 꽃가루를 몽땅 딸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
|
▲ 살며시 오므려 닫아 주십시오. 입으로도 소리를 내지만 곧 날개쭉지를 팔랑거려 꽤 요란한 소리가 들립니다. |
|
|
|
‘글쎄 호박꽃?’ 호박꽃을 가지고 왜 그리 여성들을 놀려댈까? 내 보기엔 호박꽃 같이 정겹고 예쁜 꽃이 없다. 호박꽃만큼만 예쁘면 더 바랄 게 없겠는데 왜 그리 천대를 하는지 알 수 없다. 왜 그럴까?
만화방창(萬化方暢) 봄꽃과의 유희를 마치고 나면 벌 입장에서는 힘겨운 생활고에 시달려야 한다. 그래도 아카시, 밤꽃 따러 다닐 때까지는
호시절이다. 이제는 싸리꽃이나 필망정 꽃이 무리 지어 흐드러지게 피지 않는다.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비까지 퍼부어 대는 장마철을 맞이하면 난감하다.
이 때면 재래식 화장실에서 소변을 빨아 정교한 육각형의 벌집 짓는데
유용하게 써보지만 식솔들 거느리는 입장에선 먹을거리가 부족하다.
뭔가 사생결단으로 대안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 마땅한 것이 호박꽃이다.
호박꽃은 물을 가득 머금은 장마철에 주로 핀다. 풍매화(風媒花)와 달리 직접 곤충들이 옮겨다니며 가루받이 수분(受粉)을 해줘야 한다. 일벌의 필요와 꽃의 요구가 맞아떨어지는 공생의 원리가 여기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벌들은 비를 맞으며 이동을 자유로이 할 수 없다.
날씨가 조금만 환해도 일하러 나가는 농부의 모습과 흡사하다. 벌이
제 일하며 수꽃에 있다가 암꽃으로 옮겨가 혼인을 시켜야 하는데 잦은
비-예니레 끊이지 않고 내리는 비는 수분 전에 무수정 호박으로 달린
것이 안타깝게 떨어져 제 목숨을 잃는 광경을 목격하는 것은 가슴 쓰리는 일이다. 이 때 한가하면 붓이라도 갖고 나가서 어린 나라도 칠해줬으면 좋으련만‥.
|
|
▲ 쏘일까 자신 없으면 까만 고무신에 넣어 돌려 주십시오. |
|
ⓒ 김규환 |
|
각설하고 이 때 호박꽃도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호박꽃으로 벌이 몰려드는 건 당연지사다. 이 꽃 저 꽃 옮겨다니며 꿀을 따고 덤으로 수정까지 돕는 벌은 우리 꼬마들에겐 훌륭한 장난감이고 놀이감이었다.
<파브르 관찰기>에 나온다는 얘기도 못 들어 봤지만 호박벌 관찰과 호박벌 잡기가 본격 시작되는 철이다. 벌써 다리 양쪽에는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노란 꽃가루를 붙여두고 있다.
집 근처 고샅 담장을 기어오르는 호박꽃에 접근하여 골똘히 들여다보고 있다가 호박꽃 입구에 까만 고무신을 갖다대고 잽싸게 털어 넣는
게 한가지 방법이다. 고무신에 들어오면 열댓 바퀴 돌려 어질어질하게
한 다음 신발을 땅바닥에 사정없이 내려치면 “지지징 징”하며 빙그르르 돌며 파리 마냥 소리를 내며 땅바닥에 뒹군다. 가끔은 그걸 무시하고 하늘로 날아가기도 했다.
또 한가지는 호박꽃 입구를 살금살금 살피다가 조심조심 닫고 기다란
꼭지를 툭 끊어 손에 잡는 방법이다. 입구를 닫으면 안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굉장히 큰 울림이 나는데 그걸 몇 바퀴 돌리다가 뙈기를 치면
거의 죽음에 이른다. 두 번째 방법은 연한 호박꽃이 물러 터져 내 손을
쏘기도 하였으나 일단 벌을 내 손에 두는 것은 수월하여 더 선호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예닐곱 되는 철부지 어린 우리들에게도 한가지 철칙은 있었다.
그것은 절대 암꽃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암수 한 그루이지만 당장 호박이 열리는 암꽃을 땄다가는 뒷일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
|
▲ 암꽃이 지고 있습니다. 비가 며칠 새 내렸는데도 곯아 떨어지지 않은
걸 보니 수정은 제대로 된 듯 합니다. 호박꽃으로도 요리를 한다고 합니다. |
|
ⓒ 김규환 |
|
암꽃 수꽃 구별은 몇 번만 보면 그리 어렵지 않다. 수꽃은 길게 꽃대가
나와서 꽃이 날렵하게 피지만 암꽃은 아랫부분에 이미 알맹이를 달고
있으며 꽃방이 튼실하고 술이 훨씬 두껍다. 꽃 자체도 화려하다.
“앗야! 벌 쏴부렀어야~”
“어디 어디?”
“아따 침 좀 빼줘야~.”
“알았어. 가만히 있어 봐봐.”
“이 싸가지가 검지 손바닥을 쏴부렀구만~ 똥구멍도 빠졌어야~”
“그래, 조금만 있어봐”
“얼른 빼임마!”
“조금만 있어봐.”
친구녀석은 벌이 없는데도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닌가 보다. 상당히
긴장되어 있다. 어렵게 침을 뽑았다. 탱탱 부어오르기 시작했다. 쏘인
지점엔 쏘가리가 쏜 듯 볼그스름한 점이 하나 생겼다.
“침이 아직 살아있네.”
“야 안되겠다. 얼릉 장 바르러 집으로 가자.”
급히 집에 가는 길바닥에 아까 나를 쏘았던 벌이 떨어져 죽어 있었다.
쏙쏙 거리는 손가락을 입으로 깨물듯이 독을 빼고 집으로 달려갔다.
그날 나는 질그릇 간장 종지에 담긴 조선간장을 절반은 허비했다. 몸에서 간장냄새가 진동을 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우리는 호박벌을 몇 마리나 잡았는지 모른다.
|
|
▲ 어디를 가든 호박넝쿨 주위는 지저분 합니다. 온갖 잡것을 주위에 모아 놓으니 말입니다. 호박 잎 쌈이 먹고 싶어지네요. |
|
ⓒ 김규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