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라(2)(벧전 5:5-11)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마귀의 유혹과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도 있기 때문에 영적인 상태가 매우 중요합니다. 영혼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우리의 마음이 무겁고 힘이 듭니다. 마귀는 우리 영혼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온갖 방법을 동원합니다.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공격하고 유혹해서 우리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병들게 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지 않으면 분별조차 못하고 마귀의 시험에 나를 빼앗깁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책망하실 때 뭐라고 했습니까?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사단은 베드로에게 인본주의적인 생각을 하도록 역사했습니다. 말은 베드로가 하였지만 실제로는 베드로안에서 사단이 하도록 한 것입니다. 또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마귀가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고 했습니다(요 13:2). 그리고 얼마 후에 사단이 가룟유다속에 들어갔다고 하였습니다.
생각을 빼앗긴 가룟유다는 결국 사탄의 노예가 되어서 죄를 범하고 그 일을 회개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결국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누가 그를 이 지경까지 끌고 갔습니까? 사탄에게 속고 사탄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잔인한 범죄를 보면 인간의 양심으로는 도저히 행할 수 없는 흉악범죄를 저지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처럼 사탄은 그 사람을 지옥까지 끌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마귀의 생각을 분별하고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그리스도안에 거해야 합니다. 내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그러면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싸우시는 것입니다. 빛이 강하게 비치면 어둠은 도망가게 되어 있습니다. 역사의 주관자가 내 하나님 아버지인데 누가 하나님의 이름을 대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 배후에 역사하는 마귀를 밝히 알고 인간과 싸우지 말고 그 배후 세력인 마귀와 영적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항상 성령안에서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시고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능력을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영적 전쟁을 치루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앞에 어떤 자세를 가져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수 있는지를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를 배우므로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는 거룩한 하나님의 군대로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5,6절)
5절,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여기에서 젊은 자들은 영적인 모든 성도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역시 장로는 교회 지도자들인 목사와 장로들을 의미합니다. 교회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영적 권위자가 있습니다. 이는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 하나님이 세워주신 질서입니다.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 허리를 동이는 자세는 겸손히 섬기는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에 수건을 허리에 동이셨습니다. 이처럼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서로 섬기는 종으로서 살아야 함을 말해 줍니다. 겸손이란 장로들에 대한 순종으로 나타납니다. 순종은 영적으로 성장하는 가장 좋은 학교라 할 수 있습니다. 순종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믿음의 비밀들을 배우게 됩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집의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돌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워 넣고, 맹물을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는 말씀에 순종했을 때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연회장은 그 포도주가 어디서 낫는지 몰랐지만 하인들은 알더라고 했습니다(요2:9). 순종을 통해서 놀라운 믿음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순종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은 성숙하여지는 것입니다.
또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고 했습니다. 겸손은 우리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마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마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성경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가 한결같이 그 누구도 내 위에 존재할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선택하는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할수 있다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많은 과정을 통해서 나의 한계를 발견하고 하나님앞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주인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범사에 인정하는 것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서로 겸손해야 합니다. 서로 겸손하다는 것은 서로 섬김의 자세로 상대방을 대한다는 말입니다. 섬김이 사랑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겸손한 자가 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쳐주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저 내가 최고라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서 제자들가운데 어린아이 하나를 세우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18:1-4)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2]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니라”
예수님은 이 겸손을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주인이시지만 종의 자리에게까지 내려와 종의 삶을 사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물으셨고 그 뜻대로 말씀하셨고 그 뜻대로 순종하면서 사셨습니다. 결정적인 순종은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겸손을 예수님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에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 씻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셨습니다. 겸손의 반대는 교만입니다. 교만은 모든 죄의 뿌리입니다. 교만은 마귀가 심어놓은 원초적인 죄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교만은 모든 죄악의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가 처음으로 범죄하게 된 것은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에 한 순간에 하나님과 같이 되고 싶은 착각이 든 것입니다. 결국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죄를 범하게 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될 수는 없습니다. 피조물은 그냥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교만해지면 하나님의 자리에까지 앉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누구나 하나님의 대적이 되면 망할수 밖에 없습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넘어짐의 앞잡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고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푸십니다. 구약 열왕기에 나오는 왕들의 공통점은 젊어서는 겸손히 하나님을 경외하며 믿음으로 살며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부강하여지고 은, 금이 풍부해지면 교만하여져서 하나님의 버림을 받습니다. 솔로몬이 그랬고, 여호사밧, 요아스,아마샤,웃시야가 그랬습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성공하려는 것은 모두의 소망입니다.
문제는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도 성공한 뒤에 교만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고전 10:12)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국 그 사람이 진짜 겸손한 사람인지 아닌지 알려면 성공한 뒤에 봐야 합니다. 잠언 15:25절에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집을 허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교만해지면 절대로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받았던 은혜도 다 잃어버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절대로 이런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은 받은 은혜도 다 잃어버리므로 점점 심령이 메마르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속에 교만이 가득 차면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습니다. 그 마음은 사막과 같이 메마르고 성질이 사나워지고 악해지며 하나님을 멀리하고 모든 죄를 다 범하게 되고 모든 축복이 다 떠나며 결국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교만해지니까 하나님이 떠나고 악신이 대신 찾아와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은 사막과 같아졌고 심한 괴로움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비파를 치고 찬양하면 마음이 좋아졌는데 나중에는 찬양하는 그에게 창을 던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교만해지면 이렇게 비참해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항상 겸손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6)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면 높여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끝까지 겸손할 수 있길 축원합니다.
2. 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7절)
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우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염려"라는 말은 '갈라지다'는 말과 '마음'이란 말의 합성어입니다. 즉 마음이 갈라지는 것이 염려입니다. 염려를 하면 마음이 분산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집중할 수가 없습니다. 염려에 시달리면 우리의 성품도 불안정해집니다. 심하면 인격이 분열되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모든 염려와 근심은 우리의 소망을 앗아 갑니다. 에드워드 폴도스키가 쓴 『걱정을 멈추라 그러면 회복된다』는 책에 보면 마음의 고민, 고혈압, 천식, 류머티스, 감기, 갑상선, 기능장애, 관절염, 편두통, 시력장애, 심장병, 위장병 같은 병 등은 염려하는 것과 직결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더구나 정신과 의사들의 말에 의하면 염려는 어떤 전염병보다도 더 전염성이 강하다고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염려하는 사람과 늘 만나고 같이 지내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염려라는 병이 전염이 된다고 합니다. 염려는 염려하는 사람을 파멸시킬 뿐만 아니라 사회에도 막대한 손해를 끼치게 된다고 합니다.
염려는 엄격히 말해서 죄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담대함입니다.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입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과 연합된 마음입니다. 이 모든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데 무엇이 염려되겠습니까? 무엇이 나를 두렵게 하겠습니까? 거대한 9척 장신인 골리앗 앞에서 다윗이 왜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나아가 싸웁니까?
다윗은 이렇게 골리앗앞에서 선포합니다.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지만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가노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에 다윗의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자와 곰의 발톱에서 건져주셨고 오히려 그들의 입에서 양들을 구해냈다고 선포합니다. 무엇이 믿음의 사람을 두렵게 합니까?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이 두려움과 염려를 가져온 것입니다. 오늘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7절,“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했습니다.
염려하는 마음속에는 온갖 부정적인 것들로 가득 채워지게 됩니다. 그래서 모든 불길한 것들을 연상하게 되므로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염려하는 사람은 영적인 무기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에 시달립니다. 이것은 마치 밭에 자라는 가라지와 같습니다. 시간이 흐르면 밭에 곡식이 자라는 것이 아니라 잡초가 자라 나듯이 우리 마음은 그냥 놔두면 온갖 원하지 않는 염려의 잡초가 자라납니다. 왜냐하면 바로 사단이 염려라는 가라지를 뿌리기 때문입니다.(마13:2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마음속에 독버섯처럼 일어나는 염려와 불안 그리고 근심을 해소할 수 있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도바울을 말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빌 4:6,7)을 다시 마음에 새깁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한마디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응답을 믿기 때문에 감사합니다. 기도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감사함으로 그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께서도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하고 그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다고 하셨습니다.(마 6:34).
기도는 염려라는 잡초를 뽑아내는 영적 김매기 작업과 같습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우리는 기도를 통하여 나를 항상 돌보시는 주님께 우리의 염려는 맡겨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함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염려를 뿌리고 가는 사단과 영적으로 싸워 열매 맺는 승리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살 길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안식, 빛으로 인도하니. 앞이 캄캄할 때, 기도 잊지 마세요." 여러분, 기도는 우리의 영혼을 무장시킵니다. 기도가 우리의 믿음을 강화시킵니다. 기도하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우리들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길 축원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 전쟁에서 승맇게 하실 줄 믿습니다.
3. 마귀를 대적하라(8-11절)
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근신하라’는 말은 마귀의 공격을 염두에 두고 "자기 관리를 잘하라!"는 말입니다. 마귀는 틈만 보이면 공격을 감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공격을 안 당하려고 하면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마귀에게 틈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마귀는 귀신이니까 귀신같이 빈틈을 찾아서 공격해 옵니다. 우리가 마귀에게 자주 보이는 틈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다 보면 속상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분을 내 버리면 마귀에게 틈을 보인 것입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짖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라"(엡4:26,27) 불평, 원망, 우울한 마음, 침체, 낙심, 좌절, 이런 것들이 다 마귀에게서 온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허용했기 때문에 찾아온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깨어라"라고 하십니다. 자지 말고 보초 경계를 잘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단 마귀에 대해서는 이런 자세를 취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처음 믿는 사람이면 몰라도 신앙생활을 좀 한 사람은 조금만 정신을 차리면 "야 마귀가 또 나를 건드리는 구나! 또 수작을 부리고 있구나!"하고 분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마귀에게 기회를 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굶주린 사자와 같습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해도 마귀는 우리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마귀는 교활합니다. 마귀는 영악합니다. 마귀는 노련합니다. 마귀는 능숙합니다. 싸움에 지칠 줄을 모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사람을 경멸합니다. 지금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도 마귀는 삼킬 만한 자를 찾아 다니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는 시간에도 마귀는 끊임없이 공격해서 우리로 하여금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잡 생각을 심습니다. 말씀을 의심하는 생각을 심습니다. 회개해야 할 때 회개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이라도 마귀에 대해서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마귀는 우리를 삼키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마귀의 공격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마귀를 대적해야 됩니다. 마귀는 결코 대화해서는 안됩니다. 하와는 마귀와 대화하다가 마귀의 대화술에 말려들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의심하고 결국 교만하여져서 불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마귀는 아주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면서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마음에 불신이 들게 하고, 교만한 마음을 심고 염려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역사를 분별하고 말씀으로 대적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도 같은 말을 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마귀는 두려움을 심고 위협하지만 믿음에 굳게 서서 대적하면 마귀는 안개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갑니다. 에베소서 6장 10~11절에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11]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은 영적 싸움입니다.
마귀는 시시각각 공격해 옵니다. 마귀는 항상 간계를 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진리로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장해야 됩니다. 그리고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마지막 시대를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들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을 방해하는 수많은 역경과 시련, 그리고 마귀의 시험이 있습니다.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염려하게 하고 넘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겸손함으로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고 믿음 위에 굳게 서서 근신하고 깨어 있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염려가 다가옵니까? 전능하신 하나님께 다 감사함으로 맡기십시오. 내 생명도, 내 자녀들도, 내 사명도, 내 사업도, 내 미래도 다 하나님께 맡기고 무엇보다 기도함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여 최후에 웃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